- 13일의 지킴이 떡 나눔 시작

동대문 인근 청계천은 한국의 대표적인 의류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다. 그 곳은 일제하 부터 기동차(도시철도)의 출발지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상가는 1층은 매장이고 윗 쪽 반은 선반을 만들어 미싱사들이 제품을 만들었다. 지금과 달리진 것은 당시만 해도 공장을 따로 운영하기 여려운 영세상인들은 직접 옷을 만들어 팔고 지방으로도 보냈다. 이 층 작업장은 천장이 낮아 허리를 숙여야 했고 몇 명의 어린 여공들이 직접 미싱으로 제품을 만들고 숙식도 하는 형태로 많은 여공들이 이런 식으로 근무했다.
조금 규모가 있다고 해도 가내 수공업으로 재단사와 미싱사 몇 명을 고용한 형태다. 48년 정부 수립후 헌법에 노동관계법도 그렇고 근로기준법은 있었으나 지켜지지도 알지도 못했다. 시골서 이농한 청소년들이 손귑게 취업과 이동이 용이한 곳이 청계천의 봉제공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여기서 전태일(1948-1970, 당시 22세)은 열악한 작업장 실태를 조사하고 ‘바보회’ 라는 친목단체도 해보고 노동조건 개선을 하려고 하지만 막막하였다. 할 수 있는 게 창신동에서 사는 도봉산까지 가는 버스비를 아껴 풀빵을 사서 배고픈 여공들에게 주는 것이 다였다.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혼자 공부하면서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사회에 알려야 겠다는 마음으로 지켜지지 않는 법을 부태태워버려야 한다는 마음을 먹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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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근로기준법을 가슴에 안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린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소리를 지르며 분신을 시도한 것이다. 1971년 11월 13일이었고 그 때 나이가 22세다. 이런 사실은 언론에도 나지 않았지만 당시 인근 종로 5가에 사무실이 있던 기독학생들과 서울대 법대생들이 와서 장례식을 치뤘고 이를 사회에 알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개선되지 아니하였으나 당시 지성 대학생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닳게 되어 시대를 깨우는 파수꾼으로 의식화되기 시작한다. 이후 서울법대 학생 박계동의 소개로 조영래(이후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학생이 전태일이 쓴 일기와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전태일 평전을 기록하고 출판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전태일은 한 시대의 청년에서 한국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꺼지지 않는 활화산이 된다.

전태일 정신 누가 있고 있나?
그후 청계천 공장들 인근에서 함께 노동운동 활동을 하던 동지들은 청계피복노조를 만든다. 아들의 충격적이고 고귀한 죽엄을 목도한 어머니 고 이소석 여사와 전태일의 젓동생 전태삼과 민종덕등이 전태일의 정신을 잇는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쫒겨나고 핍박받는 가운데서도 노조를 이끌어 간다. 이 때 전태일과 함께한 바보회라는 친목회도 만들어 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은 흘러 이명박 정부 시절 분신의 장소였던 인근 청계천에 다리가 생기고 전태일 동상도 세워지고 사회적으로는 그 의미들이 평가받기 시작한다. 그 다리 바닥에는 전국의 노동자 시민 사회 종교단체와 개인들이 이름과 그 의미들을 새긴 동판들로 가득한다. 그리고 박근혜정부들어서는 직접 청계천을 방문했고 이후 고 박원순 시장 시절에는 수표교 인근에 전태일 회관도 건립된다.

* 기독청년 전태일 | 특집 다큐멘터리 FULL | 2021 방송콘텐츠 대상 – YouTube
전태일 동상 철거 논란에 대한 사과요구
그러나 전태일 재단이 국가 지원을 받게 되면서 거기서 일하는 이들의 직장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과거 고생하며 꾸려온 살림살이가 풍족해지면서 기구화되고 비즈니스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을 하는 젖동생 전태일과 과거 동지들은 재단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는 데 노조 부위원장을 지낸 민종덕이 대표적으로 비판이다. 그리고 몇 년전 전태일 동상을 만든 임옥상이 미투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동상 철거 논쟁이 난다.
당시 서울시나 정부로써는 단골 시위장소였던 전태일 동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이지만 차마 말은 못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전태일 정신을 잇는 다는 전태일 재단이 앞장서 동상 철거 혹은 이전을 전제로 숙의위원회(위원장:박승열목사)을 만들고 그들은 철거를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위원 구성 자체가 공의롭지 못했고 많은 이들이 동상철거 반대운동을 했고 시민들이 반발로 인한 여론이 나빠지자 내용도 비공개로 한체 현재에 이른다.
그러나 한때 동상 철거를 남도 아닌 전태일 재단(당시 이사장 변호사)와 사무총장의 주도로 된 것을 비판해온 이들로는 그 때 철거 시도라는 잘못된 논의를 하고 실제 철거 결정을 한 재단에 대하여 그냥지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숙의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분이 진보 기독교의 상징 NCCK 총무가 작년에 되었다. 이에 재단에 대해서는 잘못된 동상철거 논의를 공식 철회하고 숙의위원장은 사과하라는 주장이다(현재 전태일 재단 관장은 전순옥씨로 전 민주당 비례의원이고 전태일의 여동생이다)
이에 전태일 정신과 어긋난다고 하는 이들은 몇 년전부터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매월 13일에 동상 앞에 모여 전태일 정신을 회상하고 함께 하는 시민단체와 개인들과 함께 13을 지킴가 주관하는 떡 나눔을 하는 중이다. 금년들어 2월 13일(금) 에도 모였는 데 이들이 함께 주창하는 우키시마호사건 진상규명촉구 에 대한 보고회도 갔었다. 이들은 지난 1월 22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회견문을 대통령실에 전달했다

우끼시마호 진상 요구 이어간다.
그리고 전태삼과 함께 활동해온 고 이해찬총리 서울대병원 장례식 문상장에 온 의원들에게도 전달했다. 그리고 인천시장을 준비중인 박찬대의원출판기념회장에 함께한 우원식 국회의장등에게도 우키시마호사건진상규명 촉구와 당부했다고 한다. 일제 강제동원 귀국선이 의문에 폭파된 것에 대한 진상조사를 원하는 당시 피해자 유족회들와 함께 한 행사였다. 이어 오는 3.1절 107주년행사에서 다시 회집한다는 소식이다.
이날 행사에는 각계 시민단체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근을 지나는 패션 디자인 봉제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과 시민들에게 전태일을 알리는 봉투에 떡을 담아 나누는 시간을 갖었다. 지금 까지 떡을 공급하는 데는 많은 분들이 지원이 있는 는 데 대표적으로는 김희헌목사가 담임시절 향린교회에서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우끼시마호 기자회견문
우리는, 해방직후 1945년 8월 24일 발생한, 일제 강제동원 귀국선 우키시마호폭침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제정 범국민서명운동을 지난 5년여 서울 시청대로에서 시민들과 더불어 전개하며 쉬지않고 달려왔다.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일본 땅에서 강제노역을 당하다가 일본해군수송선에 승선해 귀국하려했던 최대12000여명의 승선객과 최대 50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생존자들이 한결같이 증언해온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은 한일양국정부에 의해 79년동안 철저히 외면당해왔었다.
1992년 일본법정에서 원고단 85명이 우키시마호사건 소송을 제기하여 2003년 끝내 패소하고 말았을 때 가장 큰 원인중 하나는 승선명부가 없다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일본정부가 그동안 자신들이 존재자체를 부정해오던 우키시마호명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공식발표하고 그중 19종을 기시다 전 총리가 한국 국빈방문시 한국정부에 전달하면서 총75종이 3차에 걸쳐 한국정부에 전달되는 놀라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2024년 9월에 19종, 10월23일 34종, 2025년 3월21일 22종을 건네받았고, 행안부 산하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2025년 12월 29일, 일본이 건네준 75종에 대한 우키시마호 명부분석 3차 경과보고회에서 승선인원 3542명 사망자 528명으로 공식발표하였다. 일본이 기존에 발표한 승선자3735명(1950년) 사망자524명(1945년발표)이라는 숫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분석결과요 일본입장을 거의 그대로 발표하는 수준이었다.
우리는 행안부와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발표한 승선자와 사망자 숫자가 피해희생자 유족들이 증언진술해온 내용과도 전혀 다르고, 과거 정부의 우키시마진상보고서에서 발표한 숫자와도 현저히 차이가 있으므로, 유족들은 이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밝힌다.
먼저, 그동안 승선명부 자체를 부정해오던 일본정부가 어떤 이유로 우키시마명부 존재를 인정하고 한국에 전달했는지, 혹은 윤석열정부가 일본정부와 어떤 거래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은 자신들의 기존 허위주장을 입증할 자료만을 선별해서 한국에 전달했을 가능성에 대해 한국정부는 철저히 진상조사하고, 일본에 추가 명부자료를 요구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우리는 지난 5년여 전태일다리에서 매월13일 성명서를 발표해왔고, 용산대통령실과 시청대로 및 광화문광장, 남산 위안부기념의 터 등에서 우키시마호폭침사건 진상규명과 특별법제정을 촉구해왔다. 그 결과, 우키시마호진상규명 국회결의안이 발의되어 2025년 12월3일 새벽 결의안이 통과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원안이 아니라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한다는 항목을 삭제시킨 수정안이었고, 사전에 이 수정안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었으며, 유족들 및 관련단체와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도 전혀 없는 일방적인 수정안이었다는데 우리는 경악한다. 이와같은 구태들은 빛의 혁명으로 출범한 국민주권정부에서 발생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회가 우키시마진상규명 국회결의안 원안대로 가결시키지 않고,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수정안을 가결시킨 이유를 설명해줄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우키시마호사건결의안 통과와 진상규명을 위해 국회의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민주당국회의원들이 “명부75종 외에도 일본에서 재단으로 계속 명부와 자료가 오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행위는 일본을 자극하는 것이라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의원들에게 직접 전해들었다.
이용선의원과 한정애의원은 이 부분에 대해 답변주시길 공개적으로 촉구한다.
누구로부터 그런 허위사실들을 전해듣고 국회결의안과 같은 중차대한 문제의 내용을 수정시키면서까지 일본의 사죄를 요구해야하는 부분을 누락시킨 것인지 공개적으로 유족과 국민 앞에 밝힐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2025년 12월 29일 우키시마명부 3차경과보고회에서도 언론사들과 우키시마 및 강제동원 유족, 외교부와 행안부 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의원들과 의원실이 발언한 이 내용의 사실관계를 공개적으로 확인요청했으며, 재단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공개해명하면서, 쪽지나 그 어떤 형태의 질문서 같은 것조차도 일본측과 전혀 소통한 적조차 전혀 없다고 공개적으로 확인해주었다. 또, 외교부에서도 일본정부가 그 어떤 자료나 심지어 쪽지일지라도 ‘재단’에 무엇인가를 직접보내는 일이나, 재단이 일본측에 아무리 작은 쪽지라 할지라로도 주고받는 것 자체가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확인해주었다.
그동안 국회결의안이 발의된 이래, 내란종식 사회대개혁을 위한 국민들의 열망이 불꽃처럼 타올랐으나, 한일간의 과거사문제 해결과 역사정의수립의 문제는 실용외교라는 프레임에 갇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2025년 11월에 있은 한일의원연맹총회에서나 2026년 1월13~14일 한일정상회담의 의제에서 양국의 중대한 현안중의 하나임에 분명한 우키시마호사건은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일본총리가 자신들이 79년동안 부정해오던 명부를 직접들고 국빈방문하여 한국정부에 전달한 사건이야말로 한일우호협력을 강화시켜나가고 역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사건이 아니겠는가?
사건의 규모나 승선자와 사망자 숫자, 해방직후 일본해군수송선이라는 시공간적 배경 및 역사적 중요성에 있어서 조세이탄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사건이었다. 조세이탄광사고도 당연히 해결되어야할 비극적 사건임에 분명하지만, 지금 대통령이 한일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보다 더 참혹하고 거대하고 천인공노할 최대 5000여명의 집단수장학살 사건은 눈감고 외면한 채로, 중요성이 현저히 차이가 있는 183명 사망한 조세이탄광수몰사건으로 한일우호협력의 시대를 앞당길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이재명대통령 주변의 세력들중에 대통령의 눈을 가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미혹시키고 호도하려는 세력들이 이재명정부에 잠입하여 일본을 대변하고 일본의 이익을 실현하고자하는 매국적 행위를 실용외교로 포장하고자하는 세력이 있다고 믿는다. 조세이탄광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만이 아니라 가해국 일본인도 사망했으니 양국 모두 피해자라며 이 사건이 한일우호협력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과대포장되는 것은 넌센스다. 국민들은 이 상황을 공감하기 어렵다.
이번 1월 13~14일 헤비메탈 그룹의 드러머였던 일본총리와 한국의 이재명대통령이 같이 드럼을 치는 장면은 양국우호협력의 상징이 아니라, 낯설고도 슬픈 장면이었다. 강제동원되어 12000여명이 해방후 귀국선을 타고오다가 5000여명이 집단수장되어 사망한 사건은 이야기도 꺼내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일본 기시다 전총리가 가져온 우키시마명부에 대한 아무런 논의조차 없이,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마치 한일양국의 모든 과거사문제가 다 잘 해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홀로 드럼치는 것에 몰두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비애로 가득한 눈으로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행안부와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우키시마명부분석보고회 자리에 몇 안되는 우키시마희생자유족들에겐 연락도 취하지 않아서 명부 3차 보고회에 대해 모르고 계신 분도 계셨다. 만약 행안부와 재단이 우키시마호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국민들의 준열한 꾸지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재명정부는 속히 주변의 친일파세력들을 청산하고 당당하게 일본정부가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의 명부를 은폐했던 사실과 5000여명의 집단수장학살사건에 대해 사죄를 요구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이와더불어 조세이탄광사건과 같은 급조된 기획발굴 사건으로, 강제동원사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중차대한 사건인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덮어버리고자하는 친일파들의 집요한 시도를 과감히 척결할 것을 국민의 이름으로 촉구한다.
우리는 내란세력의 청산과 사회대개혁을 위해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주의수호를 외쳐온 국민들에 의해 국민주권정부로 새로이 탄생한 이재명정부가 빛의 혁명전선에서 국민들의 열망을 받아안고 담대히 전진할 것을 믿는다.
- 통과된 우키시마국회결의안에 대한 후속조치를 속히 발표하라
-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을 은폐 축소시키지마라
- 한일 양국 공동조사단을 즉각 구성하라
- 이재명정부는 우키시마폭침사건에 대해 일본정부에 사죄를 요구하라
- 이재명정부는 우키시마호사건 진상규명 특별법제정하라
- 우키시마명부 추가자료를 일본정부에 요구하라
- 이재명정부에 잠입하여 일본을 대변하며 나라망치는 친일파세력들 당장 청산하라
- 실용외교로 과거사문제를 덮지마라.
2026.1.22.목요일 오후2시 청와대 분수대 앞 우키시마호사건헌법소원청구인대표자회의
[공동대표; 김진국 한영용 김영채 김정호 전태삼 김명신]
우키시마호피해희생자유족회, 우키시마호사건피해자배상추진위원회 (위원장 한영용)
(사)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국민연대 반민특위기념사업회 13일의지킴이 외
※문의 : 김명신 공동대표 (우키시마호사건헌법소원청구인대표자회의) 010-7296-07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