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배우는 교회사 이야기 1- 황사영과 백서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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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영의 초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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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는 백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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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는 백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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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영이 숨어서 백서를 썼던 동굴 | ||
1800년 정조가 승하한후 정순황후(벽파)가 수렴첨정(垂簾聽政)을 시작했다. 그들 일파는 남인 시파를 박멸할 목적으로 천주교 박해를 지시했다. 이것이 신유박해(1801)이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부활시켜 천주교인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게 했고 사학(邪學)을 뿌리 뽑으라고 교서를 반포했다. 300명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정약용은 19년간 유배를 떠났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조선천주교회는 목자없는 30년의 세월을 박해 가운데 보냈다.
황사영은 천주교를 박멸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자구책을 간구했다. 충청도 제천 배론의 한 석굴에서 62cm×38cm 비단에 13,000자의 편지를 붓으로 써서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다. 그 편지를 가지고 가던 황심이 체포되면서 편지 내용이 알려져 조선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백서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첫째: 조선 천주교 박해의 경위,
둘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의 신앙과 사적
셋째: 폐허가 된 조선 천주교회를 살리는 방도
ⓐ 淸의 황제와 친한 중국인 신자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정치를 감호할 것
ⓑ 淸의 공주를 조선의 왕비로 삼아 천주교를 확산하도록 주선할 것
ⓒ 수 백 척의 서양함대와 5-6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정부가 전교(傳敎)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협박할 것
황사영은 끝 부분에서 “나라가 망해도 성교(聖敎)의 표는 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서는 천주교가 무군무부(無君無夫) 종교, 대역부도(大易不道’)한 사학(邪學)이라는 조선 정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황사영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는 유교국가 안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외국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사영은 당시 교황청이 서구국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했고,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대에 외세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도 시대적인 한계가 있었다.
사실 폐쇄된 조선 사회 안에서 국제 사회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신앙의 문제를 힘으로 풀려고 한 것도 오류가 많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앙의 양심과 국가 권력이 충돌할 때 신앙양심을 지키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지 많은 시사점을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