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주지 일원 스님과의 대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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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목사 종교간의 대화
* 아래의 일원 스님과의 인터뷰 내용은 신대원 재학시절 수강하였던 선교학 공부 차원에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담당 교수님은 이웃종교를 이해하고자 할 때 해당종교의 사상(교리) 연구를 통해 파악하는 것은 많은 한계가 있다고 하셨다. 그보다는 현재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대화해보는 것이야말로 그 종교의 참 모습을 이해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라는 이야기였다. 다른 것들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데, 그 말씀은 크게 공감을 해서 그런지 아직껏 기억에 남는다.
그 교수님의 과제물 가운데 하나가 이웃종교인을 인터뷰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는 거였다. 나는 멀리 갈 필요 없이 장신대 뒷쪽 아차산 밑에 가까이 놓여 있는 영화사를 찾아 그곳 스님을 만나기로 했다. 벌써 빛이 바래서 보여드리기 부끄럽기도 하지만 모쪼록 이웃종교인 불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되시기를…
대담 : 영화사 주지스님,
정병진 (솔샘교회 담임 목사) 이상훈
장소 : 광장동 아차산 밑 영화사
일시 : 1998년 9월 21일(월)부터 매주 월요일
첫번째 인터뷰 (9월 21일)
우리는 일원 스님과 지난 금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9시에 영화사의 사무실에 찾아갔다. 스님은 밀집 모자를 쓰고 우리를 기다리시며 TV를 시청하시고 계셨었다. 우리는 스님의 안내를 받아 큰 방이있는 건물의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곧 이어서 거기에 근무하는 분이 차를 가져와서 우리의 담소 분위기를 더하게 되었다.
자기 소개와 함께 인터뷰의 목적을 설명하고 인터뷰에 응해 주심에 대해 감사를 했다. 첫번째 만남에서 영화사 주지스님의 법명이 일원(속세의 이름은 묻지 않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어 묻지 않았다.)으로 소개를 하셨고, 불가에 귀의한지 약 20여년이 되었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특히 할머님의 영향으로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가 불가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병진: 지난 번에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이렇게 찾게된 것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해서 누가 그것을 묻거나 또는 말할 때 선입견이 있고 정확한 이해없이 피상적으로 말해버리기 쉽기 때문에 좀 더 깊이 알고 싶었습니다. 책을 읽어도 되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고 실제로 현장에 와서 스님들과 만나 얘기를 나눠야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선뜻 시간을 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스님께서는 불가에 입문하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일원: 한 20년 돼요.
병진: 굉장히 오래 되셨네요. 그럼 입문 하실 때 무슨 동기가 있으셨습니까?
일원: 그 때는 어렸을 때라 무슨 특별한 생각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내가 승려가 될 생각을 갖게되었는지..(웃음)
병진: 그럼 집안이 불교 집안이셨겠네요.
일원: 그렇죠. 할머니를 따라서 늘 절에 오가며 무슨 행사 같은 것이 열리면 참석하고 그랬으니까요.
상훈: 사찰의 하루의 일과는 어떻게 됩니까?
일원: 우리는 보통 잠을 일찍 잡니다. 거의 9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니까요. 물론 10시 11시에 자는 분들도 있지만 일어나는 시간은 모두 동일해야 합니다. 3시나 4시에는 일어나야 하니까요. 산 속에서는 주로 3시에 일어나지만 영화사같이 도심지에 있는 사찰은 4시나 5시까지 시간이 좀 늦어집니다. 왜냐하면 너무 이른 새벽일 경우 인근의 지역 사람들이 소란스러워 하거든요. 요즘 도시에 있는 사찰에서는 일반 신도들이 참석하는 경향이 많아서 매일 새벽 예불 시간을 5시로 하는 절이 많습니다.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예불을 드리는데 그 때는 경내에 머무는 스님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모두 참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침을 일찍 먹는데 6시면 아침을 먹습니다. 이 시간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모두 같습니다. 그리고 오전 11시에는 전체 예불이 있고 오후 3시에 또 예불이 있습니다.
병진: 예불시간에는 무엇을 주로 합니까?
일원: 염불을 외기도 하고 또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회도 열고 그럽니다.
상훈: 신도님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일원: 대부분 절을 찾는 신도들은 여러가지 문제들이나 고민꺼리를 갖고 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108배, 500배, 1000배의 절을 시키기도 하고 또 교리를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법회를 열어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본래 초하룻날, 24일날……..열는 데 요즘은 일주일 단위로 생활이 되다보니 일요일에 법회를 열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불을 하고나서 법회를 열어서 불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요즘은 금강경을 공부합니다. 많이는 못하고 몇구절씩 하고 있어요. 교육에 있어서는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는 승려와 일반 신도와는 구별이 있습니다. 수행을하는 승려들은 불교에서 운영하는 승가원(우리의 교단 신학교와 같은 곳이다.)에서 교육을 하고, 동국대학교에서 학문적인 교육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름과 겨울에 산 중(암자)에서 약 3개월간 참선을 합니다. 일반 신도의 경우에는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경전을 읽고 강해를 듣는 프로그램이 각 사찰의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영화사의 경우에는 좀 전에 말했듯이 일요일에 설법시간을 통해서 금강경을 공부하고 있고, 그외는 신도들의 질문과 문의하에서 교육을 합니다.
남자 신도들의 모임과 여자 신도들의 모임이 있고 그 모임에서 불경과 생활에 대한 교육이 있고, 청년,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임의 시간은 주로 일요일에 편중되어 있고, 학생들의 경우는 토요일에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상훈: 법회에서 불경을 그럼 그냥 읽어나가는 겁니까? 아니면 누가 해설을 해주나요?
일원: 물론 해설을 하지요. 그냥 읽으면 어려워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훈: 불교의 용어 가운데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데 그 말은 어떤 뜻을 갖고 있습니까? 한자표기로는 ‘나무’할 때 남녘 남자를 쓰던데 특별한 뜻이 담겨있습니까?
일원: 불경이 원래 범어로 쓰여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중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한자로 번역되면서 별 뜻없이 말만 그대로 오늘 경우가 있습니다. 나무라는 것도 그런 것인데 범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지요. 그 뜻은 아미타불님께 귀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훈: 불경가운데 금강경, 화엄경, 법구경…..많은 불경이 있는데 그 지칭하는 명칭에는 어떤 뜻이 있는지요? 아니면 그냥 가차어로 말만 빌어온 것입니까?
일원: 불경의 이름은 일정한 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진: 스님께 불경 가운데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던 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일원: 화엄경을 한 3년동안 공부해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워요. 그 뜻이 깊어서 좀처럼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
상훈: 요즘에는 ‘요가’ 같은 수행방법들이 많이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수행하면서 하는 무슨 참선방법들이 있는지요?
일원: 요가가 인도에서 오랫동안 수행방법으로 알려졌다고 해도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그것을 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천년에 걸쳐서 전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사람들이 그런 요가를 별로 자기들에게는 앉맞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은 함께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병진: 우리나라의 불교의 종단은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제가 알기는 조계종과 천태종 밖에 모르겠는데 그 구분은 어떻게 하는지요?
일원: 우리나라에 불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왔습니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통해서 들어왔지만 백제의 불교는 인도에서 직접 들어왔지요. 그래서 백제에서는 인도까지 스님들이 오가며 배우고 그랬습니다. 고려 때만해도 여러 종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불교가 굉장히 융성했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게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대결에서 정도전이 기선을 제압하게 되니 유학이 정권을 장악하고 사찰을 훼파하면서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도첩이라고 해서 그전만 하더라도 승려에게 국가에서 승려증 같은 걸 줘서 인정해 주었는데 그게 사라져 버렸어요. 그게 없으니 도성에도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박해를 많이 받았지요.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이 터지고 승려들이 성쌓는데 동원이 되고 공물을 바치고 뭐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의병도 만들고 해서 조금씩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사람이 사명대사 같은 사람입니다.
그뒤에 왜정 때가 되어서 불교가 조금 숨통이 터지게 되었는 데 그것은 일본 불교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근데 일본의 불교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본의 불교는 스님들이 결혼을 하는게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님들에게도 결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결혼을 한 사람을 총독부에서 주지나 스님으로 임명을 하였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일본에 유학보내어 배우게도 하였지요. 그것이 종단으로 말하면 오늘의 태고종입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 서면서 결혼한 승려들이 무슨 스님이냐 왜 그런 사람들이 절을 차지하고 있느냐고 해서 그때 불교 정화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수행하며 고생하시던 스님들이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여파가 아직까지 미치고 있는데 얼마전에 일어났던 몇몇의 분란들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있는 종단은 크게 태고종과 조계종이 있고 조계종은 승려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태고종은 결혼을 하는 승려들입니다. 그외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가장 쉽게 차이를 구별하면 그렇습니다.
병진: 스님은 어렸을 때에 불가에 입문하셔서 큰 번뇌나 그런 것은 없으실 것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 불가에 입문하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가지고 계시는 번뇌나 그런 것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일원: 번뇌라는 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더욱 번뇌가 많다 적다 그렇게 말하기 어렵지요. 물론 나에게도 번뇌는 많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독이 있고 또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면 욕망이 떠오르고 그렇지요.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마는 참선을 하면서 떠오르는 망상은 큰 괴로움입니다.
상훈: 스님은 수행을 어떻게 하십니까? 일정기간 동안 홀로 암자 같은 데에 들어가서 수련하신다거나 그런 것은 하지 않습니까?
일원: 여기에 내가 지난 2월달에 왔습니다. 오기전에는 오대산에 5년 동안 있었지요. 그 전에는 혼자서 2년 정도 있기도 했습니다.
병진: 스님과 대화를 하다보니 우리와는 달리 목소리가 차분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좀 다른 면이 있는 것같습니다. 그런 것이 오랜 수행생활에서 나온 것같은 데 그것과 관련이 있다고 봐도 될지 모르겠네요.
일원: 그렇지 않아도 법회 때 설법을 하면 사람들이 불평을 합니다. 목소리가 작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요. 말을 많이 하는 것도 공허한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르치지만 그 가르침이 내 속에서 나오지 않고 남의 것들을 가져다가 내 것처럼 말할 때가 많으니까요. 그래서 돌아서면 공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같은 사람들은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산속에 틀어박혀서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 수행정진 하는 스님들에 비하면 말입니다. 오랜 수행생활을 통해서 체득된 것들을 말해야지 그렇지 못하니까 별로 감화력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가 알고있는 작은 것 이라도 이런데서 신도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부족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면서도 이렇게 여기에서 일하고 있는거지요. 하지만 이렇게 우리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종단이 유지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병진: 스님에게는 마음에 두고 계시거나 또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분이 계신지요?
일원: 글쎄요. 큰 이상을 품고 있어야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욕심이 없으니 떠오르는 사람이 없네요.
상훈: 불교에서 자주 쓰이는 숫자들이 가진 뜻은 무엇입니까? 예를들면 108 같은 것 말입니다.
일원: 불교에서 자주 쓰이는 숫자들이 있습니다. 팔성제, 사성제 같은 것도 그런 이지요. 아미타불에 이르기 위해서 죽기 전에 나무아미타불을 열번을 외라고 합니다. 남의 힘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말입니다. 그러면 아미타불에 이를 수 있다고 하지요. 또 사천왕이 있는데 그것은 지상의 하늘을 네개로 나눈 것입니다. 그 사천에 각각 왕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위에 32개의 하늘이 있고 그 위에…..가 있습니다.
병진: 불교에서도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까?
일원: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러한 개념과는 사뭇 다릅니다. 천상계에는 4단계의 차원이 있고, 각 단계의 천상계에는 다시 6, 8, 12층의 하늘이 있고, 관장하는 신적 존재와 그 속에 속한 신적존재들이 있습니다. 각 단계의 천상 존재들은 그 단계에 묶여 있으나 상위단계로 수행에 의해서 갈 수 있고, 천상의 존재라 하더라도 수행이 되지 못하거나, 욕망과 집착에 의해서 그릇될 경우 지옥에로 갈 수 있습니다. 흔히 옥황상제라 불리는 존재는 불교적인 개념이 아닌 도교에서 말하는 천상의 존재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염라대왕이라는 존재는 불교에 있는 존재로 지옥에 7개의 신들 가운데 5차에 해당하는 신적 존재입니다. 천국와 지옥에 가게 되는 경우는 이승에서 어떠한 행위를 하였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행위를 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살려고 한 사람은 천국(극락)에서 살게 되지만 그 쌓은 덕이나 업이 다 멸하게 되면 다시 이승으로 환생하거나 다른 내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승에서 바르지 못한 생활과 생각에 붙잡여 살았던 자는 지옥에서 혹독한 시련을 거친 후에 다시 다음 내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천상의 존재로 태어나는 것 다음으로 좋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윤회라 합니다. 이 윤회를 벗어 나게 되는 것이 절대적인 존재인 붓다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수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1998. 10. 12일 9시 제 2 차 인터뷰
-영화사에서 행사가 있었고, 추석절기로 인해 두차례 연기되었다가 만나게 됨.
병진: 들어오다 보니 여신도들이 정문 앞에서 사방으로 두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이 있습니까?
일원: 일체유심조라고 했습니다. 불교는 곧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하는 거지요. 마음이라는 게 넓게 쓰면 온 우주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드넓은 것이지만 좁게 쓰면 바늘하나 들어가기 힘들 만큼 좁아지는 게 마음입니다. 그래서 능소능대라 했습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유명한 원효 대사가 의상대사와 중국의 유학길에 올랐다가 아마도 충청도 부근으로 알고 있는데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하룻 저녁 묵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자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더듬거려 보니 물바가지가 있는거예요. 그래서 아주 달게 물을 잘 마시고 잤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바가지 안에 물이 고여있었던걸 먹었더란는 말이죠. 그걸 보고는 원효대사는 크게 깨달게 되었습니다. 엇저녁에는 분명히 맛있는 물바가지여서 달게 잘 마셨는데 아침에 보니 몸서리치는 해골바가지라는 것 이 모든 게 마음의 작용에 의해 변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원효는 나는 유학공부할 것 여기서 다했다고 하여 의상 자네나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거예요.
이 마음을 바르게 품기 위해서 ‘일주문’이라고 합니다. 일주문에 들어서서 신도들이 합장하고 그러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 들어있는 거지요.
이번에는 내가 한 번 물어 봅시다. 하나님의 본질이 뭐라고 합니까?
병진: 본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야웨"라고 불립니다. 이 명칭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그 분의 이름을 물으니 들려주신 말씀에서 나온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확한 이름을 모르는 게 우리 기독교입니다. 왜냐하면 "야웨"라는 말뜻은 "스스로 있는자"라는 말인데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다"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거든요. 그래서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상대적인 인간이 쓰는 언어로 이름 붙여질 수 없었던 거지요.
일원: 그 말이 옳은 것 같아요. 불교에서는 그 것을 도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세계에는 현상계와 절대계가 있는데 현상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입니다. 모든 게 변하고 그러지요. 그런데 절대의 영역은 인간의 현상계에서의 접근이 단절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이르도록 불자들이 수행을 하고 그러는 거지요.
상훈: 불교에서는 연기설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연기설이라는 건 "내가 있으니 네가 있다. 내가 없으면 네가 없다." 뭐 그런 뜻으로 대충 이해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어떤 뜻입니까?
일원: 연기설은 좀 어려운데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입니다. 내가 있으니 네가 있고 남자가 있으니 여자가 있고 하늘이 있으니 땅이 있고 선이 있으니 악이 있고 뭐 그런 식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홀로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절대라는 것. 그자리 그 것만이 절대입니다. 따라서 연기설은 모든 인간현상을 상대적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보면됩니다.
그러나 내가 없다고 네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인과응보, 인과설과는 다릅니다. 인식하는 것 속에는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비가 있고, 너와 나가 나뉘어지고 분별하게 되고 나를 중히 여기고, 중심이 되기 때문에 이기심과 집착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상대적 세계를 벗어나서 그걸 모두 떠난 절대경지인 진리에 들어가기 위한 게 수행자의 과제입니다.
병진: 기독교에서는 교회사의 초기부터 어찌보면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괴롭히는 게 ‘이원론’입니다. 이를테면 헬라철학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입은 사상이라고 볼 수 있는 ‘영지주의’같은 경우는 그 대표적인 이단운동이었지요. 불교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런 이원론적인 부분들이 불교 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들어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고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악하고..뭐 이런 등식말입니다.
일원: 우리 불교에서는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몸은 부처님이 모셔져있는 법당이라고 말하지요. 그러기 때문에 몸을 정화시키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부처님의 비유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음은 말이요, 육은 마차라는 겁니다. 마차가 움직이게 하고자 한다면 마차를 때린다고 마차가 가는 것이 아니라 마차를 이끄는 말을 움직이게 하면 마차는 움직이게 됩니다. 즉 마음에 의해서 육신이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육체는 마음에 따라서 움직일 뿐이지 스스로 아무런 죄를 범치는 않습니다.
마음이 선하냐 악하냐에 따라서 육체가 움직이는 겁니다. 칼이라는 게 주부의 손에 놓이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지만 강도의 손에 놓이면 사람을 살해하잖아요? 이와 같은 거지요. 그래서 육체가 없는 영혼은 제 맘대로입니다. 더이상 고칠 수 가 없어요. 육체와 더불어 있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고쳐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육체는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영혼을 붙잡아서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좋은 것이지요. 우리는 몸뚱아리를 탓하지 말고 영혼을 가꾸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마음에 의해서 육신의 행동이 나타나게 되므로 마음이 보다 중요한 위치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몸이 없는 마음은 수행을 하지 못하게 되므로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훈: 불교의 무아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무아론의 견지에서보면 결국 ‘나’라는 것은 없다는 논리 인데 내가 없다면 고집멸도라던가 생로병사라는 것도 예초부터 없어야 하는 것아닙니까?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간에게 생로병사는 언제나 있다고 말하거든요. 이게 딜레마인 것같은데 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원: 원래 내가 없기 때문에 생로병사니 고집멸도니 하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생로병사 같은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라 모든 자연계의 보편원리입니다. 나면 죽고 또 늙고 병들게 되어있습니다. 현상계에서는 그것은 아주 보편적인 겁니다. 변하지 않는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무아라는 것은 이러한 현상계를 벗어나기 위한 수행의 관문으로서 주어지는 겁니다. 일체 모든 에고이즘을 벗어나서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거지요. 자기라는 게 있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끊임없이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를 버리고 세계와 하나될 때 모든 것을 사랑하고 또는 자비를 베풀게 되는 겁니다.
상훈: 불교에서는 업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런 무아지경에 이르렀을 때 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계속 남아 있는 겁니까 아니면 그 때의 업은 소멸되는 겁니까?
일원: 같이가는 거지요. 업은 선업과 악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런 업에 의해서 "좋은 것 나쁜 것, 슬픈것)이 생겨나는 겁니다. 윤회가 있게 되구요. 이걸 끊으려면 수행을 해서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절대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업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도 뒷따릅니다. 이걸 끊어야지요.
병진: 정신,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 몸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고, 수행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고, 모든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몸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을 비롯한 생명들은 그 행위에 의한 업(業:Karma)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업이란 공덕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선업(善業)조차도 벗어나고, 제하여야 할 대상인 것입니까?
일원: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업 조차도 제거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일반 신도에게 보다는 수행하는 모든 수행승, 수련자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일반신도에게 이렇게 선업조차도 제하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많은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가르침이지만 일반 신도에게는 ‘없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서 선한 행위를 통해서 선업을 쌓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업과 공덕사상과는 다릅니다. 단순히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궁극적인 목표인 절대적인 존재, 신적 존재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업을 멸하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반 신도들은 수행을 통해서 붓다의 자리, 절대의 자리보다 현세에서 보다 많은 복을 받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공덕은 많은 덕을 베풀어서 자기 자신에게 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가 보시,공양을 하는 것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 외우지 못하지만 그 가르침 중에서 한 줄이라도 마음에 외우고, 마음에 심어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큰 공덕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병진: 불교에서는 성차별 요소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교관련 서적을 읽어보니 부처님도 자신의 고모격인 사람이 제자로 받아주라고 사정했을 때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결국 아난단(?)가 하는 제자가 요청해서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승려가 되게 해주었다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나와있었습니다. 여자승이 생기고 나서 부처님은 ‘나의 법이 1000년간 지속될 것이 500여년을 단축되었다고 탄식했다는 걸 보았습니다. 이런 걸 보면 불교에서의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전통적으로 있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최근 불교 내의 여성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일원: 여자들은 구조와 성격적으로 남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자들은 끈끈한 게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이 강하지요. 그런데 이게 도닦는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게 독신주의로서 도를 닦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발심하여 독신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성들이 자꾸 보이면 인간으로서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계속 이어져서 깨달음에 이르게할 불심이 1000년간 될 것이 500년으로 단축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따라서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가 사찰에서 같이 수도생활을 하게 될 경우 아직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기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 것에 대한 말씀이지 여성을 무시하여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색에 대해 약하고 집착도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같은 집단에 들어오게 될 경우 서로에게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많아서 부처님의 법도가 천년간 유지되고 수행해야 할 것을 오백년으로 감해질 가능성에 대해 지적한 말씀으로 보아야 옳습니다.
병진: 그점에서 보아도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자는 유혹하는 존재로 있고 남자가 도닦는데 방해를 하는 존재로 취급당하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 기독교에서는 여성신학이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남성일변도의 신학에 문제제기를 강하게 하고 또 기독교 여성운동이 활발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우리 교단에서는 지금까지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목사안수를 받지 못하는 것을 고쳐서 목사안수를 허락하게까지 되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없습니까?
일원: 불교는 진작에 그랬지요. 그래서 여자가 승려되는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라고 해서 주지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어요. 우리 조계종에서도 비구니들이 모여서 사는 보문동에 있는 보문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곳에가면 여성이 주지일뿐만 아니라 보문종이라고 하여 나름의 종단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또 실력있는 비구니도 많습니다. 종단회의나 승단회의에서 여성이라고하여 그 발언이 무시되거나 약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 신도들의 모임에서 여성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비록 수적으로는 남성이 많지 않지만 어떤 방향을 설정하거나 의견을 내는 자리에서 주도권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 다만 대외적인 큰 행사를 할 때나 뭐 그런 부분에서는 비구니승들은 나오지 않지요.
병진: 그렇다면 주지승들 같은 모임들에서 비구승들도 모두 똑같은 발언권을 갖습니까?
일원: 물론입니다. 그들도 똑같은 한 사람의 주지로서 대우를 받습니다.
상훈: 조계종에서의 수행방법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뭐 여러가지가 있을 줄로 짐작합니다만은 그 중에서 몇가지만이라도 소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일원: 참선이 있잖소? 그것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이야기 합시다.
병진: 제가 얼마전부터 동국대학교에서 나온 [불교성전]을 읽고 있는데 그 중에서 의문난 점이 있어서 한 가지 여쭈어 보겠습니다. p58에 이런 말이 쓰여져있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길을 가리키는 사람’ 이라고 말씀하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지혜롭고 평화롭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은 결코 신앙의 대상이나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이런 구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게 맞는 말이고 또 사실이라면 현재의 불교에서 특히 신도들일 수록 이것과는 달리 부처님을 신앙의 대상화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일원: 방금 읽은 그 구절은 우리 같은 수행자들에게나 적용될 말씀이지요. 우리는 부처님처럼 나도 득도를 하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겠다고 하는 건데 신도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신도들이 절을 찾는 것은 부처님의 법을 배우기 위해서 또는 뭐 해탈에 이르기 위해 도를 닦으러 오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들의 남편과 가정과 자녀들의 복을 빌러 오는 것이죠. 그러니 어떻게 하겠소?
병진: 그러면 현재의 불교는 그게 본래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일반신도들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그렇게 본다는 말씀인가요?
일원: 말씀을 잘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방편이지요. 그들이 어떤 것을 위해서 찾아왔든 부처님께 복을 빌고 그러면서 부처님의 법도를 한번이라도 생각하게 되지 않겠어요? 그럼으로서 깨달을 수 있다면 좋은 거지요. 법당 안의 불상이라는 것도 처음 만들어진 것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부처님이 떠나시고 나자 보고 싶어져서 만든 것입니다. 별다른 뜻이 없었어요. 부처님을 보면서 그 분을 따라서 더욱 열심히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기독교에서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꼭 교회에 가야 구원을 얻는 게 아니다는 게 본래 기독교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게 없으면 일반 신도들 같은 경우 그나마 가르침을 접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게 아닙니까? 뭐 그런 이치와 비슷한 거지요.
상훈: 불교 내에도 샤마니즘적인 곧 무속적인 신앙이 많이 들어와 있지요? 우리 기독교에서도 그러한 요소들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일원: 많이 있지요. 아까 말씀하신 수행방법에 대한 것과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해 봅시다. 제가 시간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이만 해야할 것같습니다.
병진, 상훈 :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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