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학교(1886-) 와 김마리아

                                             정신학원과 주님의 교회 

정신학교는 개신교 여성 미션스쿨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노회가 법인이다.  1886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가 서울 중구 정동에 정동여학당을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 교사는 현재의 덕수궁 중명전 자리였으나 1895년 종로구 연지동(연동교회 인근)으로 이사와  연동 여학당으로 교명을 바꿔 1907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역대 이사장으로는 새문안교회 강신명목사로 부터 현 이사장은 권위영 목사(서울 숲교회) 이며 최근 이사장을 역임한 분들로는 이성희 목사와 이군식 목사, 조건희 목사가 있다.

 

정신학교는 여학원임에도 일제강점기에는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1911년에 학제 개정으로 중등교육기관이 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될 때, 일제 학무국이 정신여학교를 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해 주지 않고 탄압했다. 그 와중에 1919년 고종황제의 국상 때 복상(服喪, 상복을 입다)을  일제에 항거했다고 하여 학교 문을 닫았지만 이후 동문(同門) 들의 구명으로 1928년 다시 개교된다. 

정신학교는 당시 지하조직을 통하여 3.1 운동을 전개하였던 애국부인회 회장에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인 김마리아가 선출되고, 그 본부가 정신여학교에 설치되기도 했다. 1939년 국어 말살정책과 신사참배에 대한 거부로 1945년 3월 또 폐교됐다.  1947년 졸업생인 김필례가 14대 교장이 되어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1951년 한국전쟁 때는 부산에 피난 학교도 임시로 세웠으며. 1978년 현재의 위치인 송파구 잠실동으로 이사왔다.

 

교훈: 굳건한 믿음, 고결한 인격, 희생적 봉사로 학생 837명, 교직원 77명으로 잠실로 이사올 때만 해도 개발이 덜 되었다. 그후 인구가 늘고 도시가 발전하면서 강남3구라는 학군의 덕을 톡톡히 본다. 특히 인근의 대치동에 학원들이 있어 2018년도에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최상위권 학교에만 45명이 합격했고, 200명 가까이 서울 중위권 대학 이상에 합격해 강남의 타 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입시실적을 기록했다.

미션스쿨답게 정신에는 “정신노래선교단” 국내외적으로 유명하다.  교목들을 중심으로 단장을 두워 농어촌교회와 군대 기관등에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 학교에는 ‘주님의 교회’ 라는 개신교회 주일 예배처가 있는 데 정신학교가 이주한 후 대강당이 없었는 데 이 교회가 건축해 기증하고 예배처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님의 교회는 설립시 부터 기성교회 처럼 성장과 확장이라는 교세보다는 개혁적 비전을 설계한다.  통합측 장로교회의 큰 원리는 따르지만 도시에서 대형교회가 예배당을 소유하지 않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 다. 또  헌금의 50%을 선교비로 지출하고 목사와 장로등은 모두  10년 시무년한제를 적용한 것이 큰 특징이다. 재신임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장로는 65세이상 부부는 될 수 없다는 조항도 있다. 그럼에도 교인들이 적지 않은 데 지식인들과 개혁적 신앙이 있는 분들이 모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신  학교와 사용 계약은 일단 계약은 50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처음 교회를 세운 것은  분은 이재철목사로 10년간 시무후 사임한 후 오스트리아오 유학겸선교사로 나간다. 그리고 후임으로 영락교회 계시던 임영수 목사 시무했고 이후 박원호 선교사가 부임한다.  현재 담임목사는 김화수 목사다. 그러나  학교와 교회의 동거는 간단치 만은 않다. 주일에도 그렇치만 평일에도 교인들이 오고가니 주차문제등이 있다.  교인들의 말에 의하면 교회의 헌금 중 30% 정도는 학교에 기부한다고 하는 데 대부문은 난방비로 쓰인다고 한다.

 

* 정신여자고등학교 노래선교단 |  The 33rdSacred ChoirConcert – YouTube

 

동문들중에는 배우와 아나운서들이 많고  정치인도  있다.  고아라(배우) 권재희(배우) 김경(정치인) 김말봉(소설가) 김민자(성우) 김소영(법조인) 김서연(너의 연애 출연자) 김옥선(정치인) 김은혜(정치인) 김필례(정치인) 김현아(정치인) 김현정(가수) 남예지(가수) 민현주(정치인) 박소영(아나운서) 유명희(외교관) 임성민(배우) 수영(소녀시대) 하유미(배우) 한명숙(정치인)  그 중 CBS 김현정의 뉴스 쇼로 유명한 김현정 아나운서가 있다.

 

감리회의 이화학당보다 1년 늦게 세워져 여중과 여고는 있는지만 정신여대는 없다. 교실마다 김마리아의 사진이 있으며 본관 1층 중앙 계단 옆에도 김마리아의 초상화가 걸려있다고 한다. 여성 독립운동단체인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만들어졌는데, 정신여고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정신여고 출신이 아닌 사람은 이화학당 출신 황애덕 한 명뿐) 초대회장은 오현주였으나, 김마리아가 감옥에서 나온 후, 그녀를 중심으로 단체가 재구성되고 김마리아가 회장을 맡아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단체가 된다.

                                김마리아(1892-1944)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는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로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선언서를 국내로 가져와 3·1운동의 확산에 힘을 보탰으며, 이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미국에서의 여성 독립운동까지 이어갔다. 그는 1892년 6월 18일 초기 기독교회가 처음 세워진 황해도 소래서 부친 김윤방과 모친 김몽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일찍부터 기독교와 신교육을 받아들인 개화된 가문으로 부친은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교육과 계몽운동에 힘썼다고 한다.

 

김마리아는 소래학교에서 공부한 뒤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진학해 신교육을 받았다. 이후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교육에도 힘썼다. 특히 2·8독립선언과 3·1운동 1918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던 한국인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할 때 김마리아 역시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이 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선언문을 여러 장 옷 속에 숨겨 국내로 가져왔다. 부산에 도착한 뒤 국내의 종교·교육계 인사들을 만나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고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이러한 활동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김마리아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출옥한 뒤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1919년에는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활동을 이끌었으며 회장으로 선임되어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조직했다. 또 중국과 미국에서 이어진 독립운동에도 참가해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또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면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28년에는 미국에서 유학 중인 한국 여성들을 중심으로 근화회를 조직해 여성 독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32년 귀국한 뒤에는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오랜 투옥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마리아의 삶은 독립운동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활동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데 교육자에서 독립운동가로, 국내에서 중국과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가며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배우고 가르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행동했던 여성.” 특히 기독인으로 여성으로 정신학교가 신앙과 정신적으로 기억해야 모습으로 우상시 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실마다 김마리아 사진을 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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