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교회의 오대식 목사를 대변한다.

정의교회의 오대식 목사를 대변한다.

시간을 갖고 기다려 주는 것이 예의다 

수 많은 목사들 그리고 많은 교단과 교회들 중 도대체 어떤 교회가 가장 성경적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몫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특정인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처럼 교회의 위상과 평가가 대단히 추락한 현실을 아파하며 몸부림치는 목회자들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도전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 차원에서 시대를 고민하고 한국교회를 고민하는 목회자 치고 예배에 대한 갱신과 헌금에 대한 문제를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최근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가 아닌가 한다. 그가 높은 뜻 정의교회서 1차 안식년을 끝내고 복귀하며 행한 설교로 인하여 말들이 많다.  칼럼으로 SNS로 주일설교로 뜨거운 논쟁 중이다. 그러나 의미가 있으려면 이것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는 식으로 보지 말고 우리에게 어떤 것을 생각하게 하느냐는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 한다.  

오 목사가 설교한 1월 17일 주보에 보고된 정의교회의 지난 주일 헌금 총액은 약 5천 5백만 원이다.  그런데 이번에 제기한 방식으로 사회 환원을 하게 되면 앞으로 매달 5천만 원 정도, 연간 약 6억의 재정이 교회 경상수입에서 빠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 자체로 이미 획기적인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 목사는 모자라면 생활비를 줄이고 교회 경상비를 절감할 것이라는 각오도 밝혔다. 지 교회헌금에서 간과되는 구제비와 재정보고의 부실로 불만이 많은 평신도들이 관심 갖을 대목이며 이동도 예상된다.    

나도 이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는 가볍게 듣고 긴가민가했다.  주일 낮 예배 설교 초장 부터 한 것은 지금도 그렇치만 부적절하다고 본다.  그래서 분당의 이찬수 목사처럼 10년 후 교인들을 흩어내겠다는 식의 이벤트성 발언이 아닌가하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그러나 자세히 듣고 살펴보면 오 목사가 주일 설교에 그런 내용을 담은 것은 부적절했는지 몰라도 그것만으로 간과하기에는 어마어마한 사건이라는 것을 자신도 아마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론은 이런 일은 젊은 목회자가 자기 목회의 현장에서 한 번 쯤 던져보고 할 수 있는 개혁적이고 참신한 일이라고 본다. 다만 주일 설교는 설교대로 하고 후반부에 그런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고민과 배경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간단히 말하면 헌금에 대한 공적 책임에 대하여 고민해 보고 자신의 교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인데 그게 무슨 문제인가? 내부적으로 당회와 제직회에서 논의를 하였다고 하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는 데 그런 논의를 거쳤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 알려지기와는 다르게 헌금이 없는 주일이 아니라 그날의 헌금을  ‘정의헌금’이라 하고 하나님께 봉헌의 의미는 갖게 한후  개별적으로 선교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한다는 의미다.

헌금수집과 용처에 대한 것은 장로교 법으로도 해 당회에 결정 권한이 있다. 이는 교회를 위임받은 목회자의 재량권에 속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소위 일천번제라는 헌금을 하기도 하고 사순절에 한끼를 금식해서 모으기도 하고 구역헌금을 교회로 내기도 하고 구역에서 쓰기도 하는 등 목회자의 목회철학과 방향에 따라서 자율적으로 하는 것으로 당회와 제직회의 합의만 있다면 문제는 없다고 본다. 헌금에 대한 더 큰 문제는 정확한 사용처의 보고 누락과 당회장의 독점적 사용과 같은 폐쇄적인 구조다. 

사실 오 목사의 이런 시도는 낼 의무만 있고 알 권리가 봉쇄된 일부 상류층 지식인 평신도들의 극에 달한 불만을 달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 부흥의 산물을 독점하고 향유하는 독점주의적 목회자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려운 생존형 목회를 하는 분들에게도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같이 그렇게 하자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한 번 해 본다는 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일부에서는 성경적 근거와 논리들을 들고 나오면서까지 논쟁을 유발하고 비난들을 하는 데 오 목사의 말을 빌리면 단순하게 보자는 것이다. 교회와 제도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지 유일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제직회와 당회의 결의라는 방식이 선이고 의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당회장 재량권이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평신도들이 객체에서 주체로 세워가는 과정으로 좀 기다려 보면서 그 공과를 논해도 전혀 늦지 않을 것으로 본다. 

오 목사는 이 모티브를 캘리포니아 ‘코스테스힐 교회’에서 실시한 ‘하늘나라 프로젝트’에서 착안했다고 하는 데 그 교회에서는 100명의 지원자에게 100달러씩 나누어주고 이 돈이 하나님의 돈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오직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만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NBC 방송에 보도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평신도들에게 헌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감격으로 많은 결실이 맺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대로 채용한 것도 아니지만 나름대로 자기 공동체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배열을 한 것이다. 교회라는 구조를 통해서가 아닌 다른 방식을 생각해 본 것이다. 헌금순서 자체를 없앤 것도 아니다.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구를 만든 것이다.

선각자, 개혁자는 비난과 시비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기도하고 옳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하는 것이다. 사실 헌금에 관한 것은 그 전거를 성경에서 찾아야 하지만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거쳐서 변모해 온 것을  한국사회 한국교회라는 조건에서 재해석해야 한다. 원리적으로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그것은 형식이지 내용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 돈을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곳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레위기에 나타난 십일조의 기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제가 언급되어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교회의 연보를 구약의 희생제사처럼 바치는 형식이 아니라 가난한 형제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즉 연보의 목적에 대하여 바울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고후9:11)” 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정신의 실현이 우선이지 방식이 우선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공식적인 헌금이 아닌 구제형 ‘연보’만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는 정기적인 수입이 없었으니 십일조나 건축헌금과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과 선교와 사역을 위하여 물질의 필요가 부각되고 그 용처를 감당하기 위한 방식과 내용이 신설되거나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그러니 성경적인 근거를 들어서 비판하기는 실상 옹색한 것이다. 다만 한국교회의 정서나 현실을 들어서 “혼자 잘난 척 하는 것 아니냐?" 는 비판에는 겸허히 귀를 기우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고 오 목사가 현재 이 문제가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논쟁이 된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오 목사의 이 선언에 반대와 비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왕성한 필력으로 교회개혁을 주창하는 존경하는 신성남 집사는 “한국교회사에 길이 빛날 ‘명품’ 선언”으로 추켜 세웠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오 목사에게는 큰 부담이다. 그냥 한 교회의 신년 목회 지침 정도로 보는 것이 돕는 것이다. 나도 여러 생각이 있지만 두고 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잡는 식의 여론몰이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오 목사가 이 문제로 많은 생각을 하였겠지만 사실 이런 선언은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하다. 충격여파를 완화하기 위하여 먼저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의미를 가르치고 그 대안으로 이런 시도를 하게 되었다고 겸손히 설득하는 길로 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태도는 겸손했는 데 그 내용은 가히 메가톤급이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런 배경은 자신이 오랫동안 섬겼던 높은 뜻 숭의교회의 정신적 유산으로 보인다. 다소 파격적인 언행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해야 할 말을 하는 김동호 목사 흉내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제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목회 영역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오 목사는 이미 10년 전 가장 힘들고 어렵다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100년이 넘는 동경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큰 부흥을 이루어 출석교인 1천 명을 넘긴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전설이다. 일본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직접 곁에서 본 결과이다.

그리고는 높은 뜻 숭의교회 부목사로 이임하여 다시 분가한 정의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성공적으로 임기 1기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김동호 목사의 뒤를 이어 받아 “높은 뜻 선교회”의 이사장도 맡고 있는 비중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제 높은 뜻 공동체들은 지역교회와 목회자들로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제는 “높은 뜻 연합선교회” 라는 서클에서 오는 이미지를 벗어나야 한다.

이런 것들은 교단과 공교회의 약화를 가져온다. 처음 분가시킬 때부터 그런 비판이 있었는 데 지역교회들을 평북노회에 두기보다 각 지역노회로 가게 해서 지역 공동체에 복무하는 교회가 되도록 했었야 한다는 주장이다. 앞으로 그런 고민들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공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자세라고 본다.

이제는 교회 시스템을 통한 구제도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성도들이 현장에서 직접 몸과 마음과 물질로 봉사하고 선교하는 것도 병행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제도 교회 자체로부터의 갱신은 불가하다. 이런 작은 시도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제도 교회의 안주와 아성에 도전하고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어져야 한다. 재래시장이 언제나 신흥시장과 대결하고 상호경쟁하며 발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 일은 오대식 목사가 교단의 지도자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시련이지만 유익한 것으로 본다. 부디 주눅 들지 말고 한번 실험을 해보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간증들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그가 대주주로 있는 “높은 뜻 공동체”에 소속한 공동체들도 이제는 지역에 밀착하여 봉사하고 모범적인 사례들을 만들어 가는 것도 기대해 본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높은 뜻 정신을 만들고 일구어 온 김동호 목사의 꿈일 것인데 후진들의 발전적 계승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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