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1913년] 총회장 왕길지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2회[1913년] 총회장 왕길지

   
 

1868년 10월 10일, 독일의 로덴아커(Rottenscker)에서 출생하다. 왕길지는 1868년 10월 10일, 교사였던 다니엘 엥겔(Daniel Frederich Engel, 1837~1872)과 어머니 케더리나(Gatherian, nee Henzlar, 1843~1911)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독일 서남부 슈바벤에 있었던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도나우강 상류의 작은 마을 로텐아커(Rottenscker)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1806년 이후 뷔르템베르크 왕국이었는데, 1871년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왕길지의 아버지는 1837년 튀빙겐 남쪽의 슈바비안 알프(Swabian Alb) 지역인 에빙겐(Ebingen)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20세 생일을 맞기 3개월 전인 1857년 네카르하우젠 출신의 케더리나와 결혼했다. 그 동안 교사로 일했으나 결혼 얼마 후에는 가이스링겐(Geislingen) 근처의 오베뵈링겐(Oberböhringen)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곳은 로텐아커로부터 60km 떨어진 곳이었다.

왕길지의 어머니는 네 아이를 출산했는데, 장남이 고트로프(Gottlob), 곧 왕길지였고, 엘리자벳(Elise, 1869), 파울린(Pauline, 1871), 프레드리히(Fredrich, 1872)가 차례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케더리나는 자상하고 인정 많은 여성으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친절하고 덕성을 지닌 여성이었다. 왕길지의 본래 이름은 고트로프(Gottlob)였으나 결혼 후 겔손(Gelson)으로 개명했다. 

1872년 5월 18일, 왕길지의 아버지 35세로 사망하다. 왕길지가 4살 때인 1872년 5월 18일, 아버지는 장티푸스로 인해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막내 동생 프리드리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전인 1872년 4월 10일 출생하였으나 그도 약 50일 후인 1872년 6월 1일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29세의 나이로 과부가 된 어머니와 어린 세 자녀는 매우 어려운 시절을 보내게 된다. 

1872년, 네카르하우젠(Neckarhausen)으로 이사하다. 왕길지는 4살 때 네카르하우젠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4년간의 초등학교 교육을 받고, 그 후 인접한 뉘르팅엔(Nürtingen)의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다. 오늘의 김나지움(Gymansium)에 해당하는 이 학교에서 고전어, 곧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배웠고, 또 음악과 문화 일반에 대해 공부했다. 이때의 고전어 공부가 후일 그의 사역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1883년, 뉘르팅엔(Nürtingen)의 교육대학에 입학하다. 아버지처럼 교사가 되고자 했던 왕길지는 1883년 뉘르팅엔에 있는 교육대학(Lehrer Seminar)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 입학시험에서는 150명 중 29등이었을 만큼 우수한 학생이었다. 이 학교에 4년간 재학했던 그는 1887년 졸업했다.

왕길지는 이 학교에서 필립 스페너(1635~1705)에 의해 시작된 루터파 내의 새로운 신앙운동인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경건주의 운동은 1694년에 설립된 작센 안할트주의 할레대학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이 대학에서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교육을 받았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부터 할레의 경건주의는 점차 활력을 잃고 경건주의의 영향력은 점차 타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성경신학자인 벵겔(Johann Albrecht Bengel, 1697~1752)의 지도력 하에 뷔르템베르크는 후기 경건주의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왕길지는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경건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의 아들 프랑크 엥겔의 증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호주 출신 선교사들은 미국 출신의 선교사들에 비해 다소 개방적이고 진보적 신학을 견지했다고 평가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는 청교도적 신앙과 경건주의적 경향이 짙었던 것으로 회상했다. 프랑크는 동료인 미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녀들은 주일에 소풍을 가거나 오락을 즐겨했으나 자신은 그런 일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점을 일예로 들었다.

호주연합교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변조은(John Brown)은, 왕길지는 위대한 선교사 “하겐아우어(F. A. Hagenaur)나 헤이그(Haig)와 마찬가지로 모라비안 배경의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미국 선교사들보다 더 복음주의적이었다”고 지적한다.

뷔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는 독일어권인 스위스 경건주의와 매우 흡사한 양상을 보여주었고, 특히 19세기 스위스 바젤은 경건주의의 또 다른 중심지가 되었다. 이런 환경이 왕길지로 하여금 후일 바젤선교회에 가담하게 되는 동기가 된다. 1888년과 1889년, 보조교사로 활동하다. 왕길지는 여러 곳(Nellingen, Denkendoff, Balingen 그리고 Magerkingen)에서 보조교사로 활동한다. 

1889년 7월, 에빙겐(Ebingen)에서 개최된 선교대회에 참석하고 선교사 결단 1889년 7월 18일, 뷔르템베르크의 에빙겐에서는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왕길지는 이 모임에 참석했는데, 이 모임에서 두 사람의 선교사 파송식이 거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자신 또한 선교사의 길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이때의 선교사 임직식은 내가 오랫동안 꿈꾸었으나 그동안 잊어버렸던 나의 모든 재능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바치려는 선교사의 꿈을 다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내면에는 다른 목소리, 곧 선교사의 소명과 대조되는 학문의 길에 대한 소명이 있었다. 선교사의 길은 삶의 목표를 너무 낮게 잡은 것이 아닌가? 또 내가 만일 선교지로 간다면 이전에 나를 가르친 스승들과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어떻게 말할까를 생각해 보라는 음성이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영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얼마나 큰 교만과 세상 지식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첫 음성은 이러했다. ‘아니다, 네가 어디든 가려고 한다면 먼저 겸손해야 해. 네가 세상의 영예를 구한다면 먼저 예수님과 바울이 세상의 수치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일을 기억해야 해.’ 이 음성이 결국 이겼다.” 

1889년 8월 29일, 바젤선교회 선교훈련원(Basel Mission Houes) 입학 이때 왕길지의 선교사 지원을 추천해 준 이가 에빙겐의 목사 요하네스 베크(Johannes Beck)였다. 이때 슈츄트가르트의 의사는 왕길지의 건강확인서를 써 주었다. 그는 곧 바젤선교회가 운영하는 바젤선교교육원으로 갔다. 이때가 1889년 8월 29일 목요일, 그의 나이 21세였다. 여기서 약 3년간 체류하며 신학과 선교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바젤선교회에서 선교훈련을 받은 동료들은 40명이었는데, 1890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이들 중 35명이 낫이나 곡괭이 혹은 삽을 들고 있다. 선교사로서 일할 현장이 가나, 카메룬,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등과 같은 나라였으므로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농기구 사용법, 장판, 도배, 타일 작업, 옷짜기 등 생활훈련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바젤복음선교회’(Basel Evangelical Missionarry Society)라고도 불린 ‘바젤선교회’는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루터교 목사 크리스티안 불룸하르트(Christian Gottlieb Blumhardt, 1779~1838)에 의해 1815년 설립되었는데, 불룸하르트는 이때부터 1838년까지 선교회 대표로 일했다. 경건주의적 배경에서 설립된 바젤선교회는 모라비안적 전통을 따르는 자급 선교를 지향했고, 오늘의 전문인 선교라고 할 수 있는 사업체를 통한 선교를 거부하지 않았다. 

1892년 6월 6일, 바젤선교회 인도 푸나 선교사로 임명됨 1889년부터 3년 간 선교훈련을 받은 왕길지는 1892년 6월 6일 뷔르템베르크의 발링겐에서 인도 푸나 지방 선교사로 공식 임명되었다. 푸나는 서부 인도의 해안도시였다. 1892년 7월 이후, 짧은 기간 에딘버러에서 선교 연수 바젤선교회 소속 선교가 된 왕길지는 다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로 가서 짧은 훈련기간을 보냈다. 이 기간이 학교교육제도, 교수법을 공부하고, 또 영어를 배우고 학습하는 기회가 되었다. 

1892년 말, 교육선교사로 인도 푸나 도착 1892년 말 24세의 나이로 푸나에 도착한 왕길지는 우선 이곳 방언을 공부하며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은 선교의 도구 혹은 수단이자 선교 그 자체였다. 푸나에서의 왕길지의 사역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바젤선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 이유는 바젤선교회의 선교정책이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왕길지는 에딘버러에서 몇 개월 동안 훈련받을 때 젊은 스코틀랜드 여성과 교제하게 되었고 곧 사랑에 빠졌다. 왕길지는 이 여성과 결혼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바젤선교회는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바젤선교회 규정에는 미혼 선교사가 결혼할 경우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끼리 결혼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젤선교회 책임자가 왕길지와 교제하던 여성과 접촉하였는데, 이 일로 그 여성과 그 가족이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왕길지는 격분했다. 이 여성은 왕길지와의 교제를 단절했고, 왕길지는 곧 바젤선교회를 탈퇴하게 된다. 바젤선교회의 규정이 개인의 자유, 특히 마음의 문제까지 과도하게 제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894년, 푸나의 테일러 고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됨 1894년 감리교 선교부(WMMU : Wesleyan Methodist Missionary Society)로 이적하게 된다. 감리교 선교부가 설립한 테일러고등학교(Taylor High School For Boys) 교장으로 그를 초청했기 때문이다. 이 학교 이름은 미국 감리교회의 테일러 감독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왕길지는 이 학교 교장으로 일하는 한편 푸나의 라놀리 감리교회 목사로 일하게 되었다. 감리교 선교부는 1814년 이래로 인도에서 활동해 왔는데, 테일러 고등학교는 인도 상류층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고, 이 학교를 통해 인도인들의 마음을 사고자 한 것이다. 

1894년 12월 19일, 감리교 출신 여선교사 Clara Bath와 결혼 왕길지는 호주 감리교 목사 헨리 바스(Rev Henry Bath)의 딸 클라라 바스(Clara Emily Bat, 1870~1906)와 혼인하게 된다. 헨리 바스는 1839년 콘웰에서 태어나 1940년 부모를 따라 남 호주로 갔는데, 후에 아델라이드에서 목수가 되었다. 후에는 감리교 목사가 되어 남호주에서 5개 교회에서 일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역한 교회가 클라라가 출생한 카푼다였다.

클라라는 1870년 11월 7일, 헨리 바스 목사와 제인 사이의 9남매 중 5번째로 남호주 카푼다에서 출생하였다. 클라라는 성경, 신학, 전도, 위생 및 응급처치법 훈련을 받고 감리교선교회를 통해 인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94년 인도 푸나에 도착했다. 결혼증명서에 클라라를 ‘교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클라라는 테일러 고등학교에서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결혼과 함께 왕길지는 자신의 독일식 이름 Gottlob를 Gelson으로 개명한다. 클라라가 독일식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시작이 되었다. 스위스에서의 독일인이나 바젤선교회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도 없지 않았지만, 독일에서의 프러시아의 대두와 카이저 빌헬름 2세의 군사주의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는 오늘과 같은 여권은 없었고 국민증명서가 있었는데, 그는 1889년 9월부터 5년간 유효한 신분증명서가 있었으나 이를 연장하지 않음으로 1904년 9월 6일자로 독일 국적을 상실했다. 그래서 그는 12년 후 영연방의 여권을 발급받기까지 12년간 무국적자로 살았다. 

1899년 5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단으로 이적, 1900년 5월 정회원이 됨.  왕길지는 호주의 장로교회 곧, 빅토리아주 장로교단(PCV :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으로 이적하였다. 이 교회의 복음주의적 신학이 자신의 입장과 동일했고 지나치게 엄격하지도 않아 장로교회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 빅토리아주의 인구는 120만 정도였고, 빅토리아 장로교회 교인은 19만 명 정도였다. 즉 빅토리아주 인구 중 16%가 빅토리아 장로교회 교인이었다.

왕길지가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정회원이 된 때는 1900년 5월이었다. 그런데 빅토리아 장로교회 목사가 된 왕길지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빅토리아 장로교회에 속한 여전도회연합회는 한국에 파송할 선교사를 찾고 있었다. 20세 전후에 선교사로서의 삶을 결단했던 왕길지에게 있어서 한국에서의 부름은 마케도냐인들의 호소로 인식되었다.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당시 청년연합회 파송의 아담슨 선교사와 여전도회연합회의 여선교사들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전도회연합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왕길지였다.  

길지(엥겔)는 독일과 영국ㆍ인도와 호주를 거치는 동안 유럽의 ‘복음주의’ 신앙전통에 속하였고 그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신학과 목회, 선교 사역을 전개하였다. 이런 ‘복음주의’ 전통은 그가 독일에서 청년 시절 체험했던 ‘내적 확신’에서 비롯된 신앙고백이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확신과 고백은 선교사로서, 신학자로서 그가 전하고 가르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하였다.

그는 인류의 유전적 원죄를 마음 속에 안고 사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죄를 사할 수 없음으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구속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였다. 

엥겔의 신학에서 성령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곁으로 부른 자”란 의미의 보혜사는 상황에 따라 ‘변호사’와 ‘인도자’, ‘지도자’, ‘방조자’, ‘조사’ 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신앙의 완전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돕는 존재인 것이다. 또한 엥겔은 보혜사를 “내 곁에 계시는 스승”으로 설명하였다.

이처럼 엥겔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두고, 이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한 명분을 이루기 위해 ‘보혜사’이신 성령의 능력과 지도하심을 끝까지 따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그가 청년시절 독일 경건주의 신앙운동에 접하면서 체험한 ‘내적 확신’, 그리고 그 이후 전개된 선교와 목회 사역 가운데서 확인된 ‘이끄시는 능력’에 대한 신앙고백이기도 했다.  

역사신학 : 변증과 개혁의 과제
교회사 교수로서 엥겔의 역사신학적 관점은 ‘변증시대’의 초대교회사와 ‘선교시대’의 종교개혁 후 현대교회사에 집중되었다. 엥겔은 1세기를 ‘전도시대’로, 2세기는 ‘변증시대’로 구분하였다. 2세기 ‘변증신학’의 형성 원인이 된 기독교 대적을 유대교와 이방(헬라) 철학으로 구분하였다.

엥겔은 『12사도의 교훈』이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설명한 후 16장 전체를 번역하여 소개하였는데(신학지남 창간호) 한국에서 외경 번역의 효시라 하겠다.

엥겔은 로마교황 역사를 소개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천주교회)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비판적인 입장을 표하지 않고 객관적인 자료만 소개하는 데 주력하였다. 엥겔은 종교개혁 이후 근현대사를 다룬 『갱정후사기』에서도 가톨릭교회에 대한 ‘중립적 입장’을 나타낸다. 엥겔의 역사신학 관련 저술과 논문이 다룬 주제들을 종합해 볼 때, 그가 강조했던 주제는 변증과 개혁, 그리고 선교였음을 알 수 있다. 

선교신학 : 복음과 토착상황
엥겔은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확신없이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형식적인 교인’을 경계하였다. 그는 형식적인 기독교 신앙 뿐 아니라 이교도들의 미신적 행위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분노를 표하였다. 그는 종교와 문화를 구분하여 대응하였다. 토착적 문화 상황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타협과 즉응이 가능하였지만 종교적 요인은 불가능하였다.

전하는 복음이 ‘부드러운’ 것이면 전하는 방법도 ‘부드러운’ 것이어야 한다. 비록 불교의 교리와 제도를 찬성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설득하고 깨우치는 방법이 공격적이고 무례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엥겔의 지론이었다.

엥겔의 눈에 토착종교는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 즉 ‘죽은 것’이라면, 기독교는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었다. 기독교는 토착종교가 추구하는 윤리와 도덕 이상의 것을 추구하였다. 엥겔은 영적인 종교의 힘으로 형식적이고 외적인 문화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개인의 내적인 회개와 마음의 변화에서 출발하여 문화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부드러운’ 혁명인 것이다. 이것이 엥겔이 토착교인들에게 강조했던 복음의 ‘내적인 영적 의미’였다. 그는 종교를 통해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엥겔의 “토착관습에 대한 접근 방법”이란 논문은 1904년 9월 22일 서울에서 개최된 ‘최초 선교사 알렌 내한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것으로 선교사로서 엥겔은 이 논문에서 선교사가 토착 문화와 전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를 논하였다. 그는 우선 문화와 종교를 구분할 것을 요구하며 문화적 측면에서는 선교사가 관용과 융통성을 발휘할 것을 촉구하였다.

엥겔은 토착민보다 선교사 쪽에서 먼저 벽을 허물고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선교사는 주변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문장이 나온 것이다. 엥겔은 그런 관점에서 한국 토착 관습과 풍속을 관찰하였고 그 과정에서 서양인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뛰어난 삶의 지혜를 발견하고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한국인들의 주거문화와 음식 및 의복 문화에서 그런 지혜를 발견하였다. 엥겔은 서구 문명(문화)와 기독교를 구별하였다. 구별할 뿐 아니라 서구 문명의 사악한 영향력과 폐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민족적 우월감과 인종적 차별의식의 포로가 되어 한국의 고유한 문화 전통과 풍습을 저급하고 미신적인 것으로 평가하여 ‘무조건 파괴’의 대상으로 여겼던 선교사들이 적지 않았는데 엥겔은 한국 민족의 고유 전통의 가치와 의미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 교회가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서구 문화와 문명에 물들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런 점에서 엥겔은 서구 문화와 문명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많지 않은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 선교사
적대국(독일과 영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는 ‘제3의 국가’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선택하였다. 그는 국민이기 전에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궁극적 충성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나라를 기준하여 지상의 두 나라가 범하는 실수와 한계를 극복해 나가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면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그 이상을 실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과 목회, 선교의 목표를 삼았다.

엥겔의 삶의 무대가 다양하였듯 그의 신앙 역정도 변화무쌍하였다. 그는 독일의 루터교회와 경건주의에서 성장하여 영국 스코틀랜드 청교도 전통 안에서 훈련받았고, 인도의 감리교를 거쳐 호주의 장로교 전통에서 선교 사역을 전개하였다. 결국 그는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 전개된 개혁교회의 다양한 신앙전통들을 골고루 체험한 셈이다. 이런 전통들이 전례나 의식, 문자적 의미로서 교리는 서로 다를지라도 회개와 중생, 성화로 이어지는 구원의 기본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신교회가 추구하는 보편적 복음주의 범주 안에서 하나이다. 그래서 엥겔의 신학에는 경건주의가 강조하는 구원의 ‘내적 확신’, 성공회와 감리교회가 강조하는 이성과 체험과 전통의 조화, 장로교회가 강조하는 성경중심적 교리훈련 등의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의 신학과 선교활동의 바탕에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이 흐르고 있음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장로교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교리와 신조가 다른 교파나 교단에 ‘열린’ 자세를 취하였고 그래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호주장로교회 선교부를 대표하여 초교파 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다. 

나그네의 삶, 소명의식
청년 시절 고향에서 경건주의 신앙집회에 참석했다가 ‘내적 확신’을 체험한 후 선교사로 헌신하여 고향을 떠난 후, 이주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에 이끌린 삶이자 사역이었다. 그가 선교사역 40년을 마감하고 한국을 떠날 때도 여지없이 그 소명이 작용하였다.

“하루는 왕목사가 교실에 들어오며 싱글벙글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한국에 온 지 40년 됐지요. 나는 한국에서 죽으려고 했지요. 우리 밋숀회가 나를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지요. 불가불 돌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는 이 말을 하면서 좋아하였다. 학생들은 조용히 이 말을 듣고 있었다. 이때 박창목이라는 학생이 입을 열었다. ‘아니 선생님 본국으로 돌아가시면 어학은 누가 우리에게 가르칩니까?’ 이때 왕길지 목사는 마루를 쾅 하고 구르더니 ‘하나님이 가라는데!’ 하였다.”

“하나님이 가라는데!”(God told me Go!) – 이것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창 12:1) 이주민의 나라 호주를 거쳐 한국에 와서 선교사로, 목사로, 신학자로 헌신한 엥겔의 신앙고백이었다. 

[참고문헌]

이덕주, “엥겔(G. Engel)의 선교사역과 신학사상”, 『한국기독교와 역사』 32(2010) : 83-125.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1985.

이상규. 『왕길지(王吉志)의 한국선교』. 서울: 숭실대학교출판국, 2017.

김수진. 『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한국기독교장로회. 『새역사 40주년 기념문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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