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송목사 평전(초고)

                                                 조지송목사 평전(초고)

   
        조지송목사와 송효순(대일화학 노동자 출신, 서울로 가는 길 저자(형성사)

 이 원고의 주인공 조지송목사는 2011년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가 공모한 민주화운동 열사의 전기 부문에 선정되여 그의 일대기로 집필된 원고 초안이다. 조지송목사는 우리나라 산업선교의 선구자이며 우리 교단 총회의 최초 산업전도부 간사를 거쳐서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총무로 사역하신 분이다. 그러나 1980년 이후 지병으로 청주 옥화대로 내려 가셔서 생활을 하시다가 연세가 남아 현재는 분당에 거주하고 계시다. 

기초 자료는 김용복박사의 주관으로 오래전 유승희의원(민주 통합당) 이 몇차례 직접 만나서 녹음을 한 것을 넘겨 받아서 풀었다. 그외 여러번의 직접 면담과 현재와 이전에 영등포에서 활동했던 노동자들과 실무자들 산업선교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의 인터뷰도 첨가되였다.  그리고 그 대표집필은 이 훈련을 받고 경기도 성남에서 사역하고 있는 "일하는 예수회" 회원 서덕석목사( 열린교회) 가 맡았다.                              

제 1 부 막장에서 만난 예수

황주골의 꼬마목사

조지송은 황해도 해주와 평양의 중간에 위치한 황주의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즈막한 산이 앞뒤로 길게 마을을 감싸 돌고 그 가운데 논밭 사이를 가로질러 시냇물이 흘러 동구밖으로 빠져나가는 평화로운 골짜기였다. 황주는 사과 주산지여서 구릉지마다 사과밭이 널려 있고 지송의 집 앞에는 널찍한 목화밭이 있었는데 늦가을이면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사과와 하얀 목화송이가 탐스럽게 머리를 내밀어 고즈넉하게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지송의 아버지는 가진 농지라곤 밭 3천평이 전부였는데 그것만으로 10명이나 되는 대식구의 생계가 해결되지 않아 남의 농지 9,000평을 소작으로 부쳐 농사짓는 전형적인 소작농이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시골이 그러하듯 지송네 마을도 같은 조씨들이 옹기 종기 모여 사는 동네여서 한집 건너 사촌이거나 아저씨뻘 되는 집안이어서 서로 다투거나 언성을 높일 일도 없이 인정이 넘치는 동네였다.

지송의 아버지는 큰 키에 듬직한 체구를 가져 남의 집 품앗이를 하게 되면 두 사람 몫을 거뜬히 해 내는 타고 난 농사꾼이었으며, 어머니는 반대로 몸집이 자그맣고 여린데다 약한 편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지송 위로 형 둘에 누이가 넷인데 지송은 칠 남매 중 막내였다. 장남인 큰 형과는 나이 차가 30살이나 되어 어린 지송이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집에 돌아오면 우물가에서 발가벗겨 놓고 씻어 주곤 했는데 큼지막한 손으로 벅벅 문질러 대는 바람에 큰 형이 목욕시켜주는 것이 제일 싫었다. 어린 지송은 그 시절 아이들이 집안 농사일을 거들며 자랐던 것과 달리 손위 형제가 많아 일손이 넉넉했던 데다 몸집도 유난히 왜소한 늦둥이 막내여서 가족들은 소에게 풀 뜯어 먹이는 것 외엔 지송에게 농사일을 시키지 않았다.

소학교가 끝나 집으로 돌아오면 으레 소를 몰고 나가 시냇가 방죽에다 매어 놓고 여름에는 물고기 잡으면서 물장구치며 놀거나 풀밭에 드러누워 구름을 올려다보며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해지기까지 노는데 정신을 팔다가 소가 충분히 풀을 뜯지 못해 빵빵해야 할 배가 덜 찬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면 꼴망태를 어깨에 걸치고 나가 소꼴을 가득 베어 와야만 했다. 쟁기질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소를 먹이는 일을 하면서 지송은 어린 나이지만 맡은 일을 분명하게 책임지는 습관을 들였다. 지송은 부모에게서 야단맞아 본 기억이 거의 없이 나이 차가 많은 누나들과 형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면서 꾸김살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소학교에서 지송은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특히 일본어 쓰기가 강요되어 작은 성냥갑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조선말을 쓸 때마다 상대편이 성냥개비 하나씩 빼앗기로 하고 성냥개비를 제일 많이 빼앗긴 학생은 벌을 섰는데 지송도 여러 번 벌을 섰다. 지송은 형과 누나들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는데 두 부모님은 교회 문턱에도 안 가 본 분들이지만 자식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싫어하지도 않고 오히려 잘 이해하는 편이어서 헌금을 달라고 손을 내밀면 군말 없이 돈을 내어 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지송의 큰 형은 평양신학교를 다니면서 집안 농사일을 겸하면서 주일이면 면 소재지 교회들을 돌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순회 전도사였던 것이다.

그 당시는 목회자가 드문 시절인지라 시골의 경우 예배를 인도할 목사가 없어 한 사람이 서너 교회를 맡았는데 황해도 지역은 최초의 장로교 신학교가 있었던 평양과 가까워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졌던 곳이어서 한 사람이 되도록 많은 교회를 떠맡아야 했다. 지송의 형은 당시로서는 최고 학부에 속했던 신학교를 다닌 시골에서 보기 드문 엘리트였는데 농사일을 하면서도 옆구리에는 늘 책을 끼고 살아 어린 지송은 형에게서 왕성한 독서열과 탐구욕을 배웠던 것 같다. 특히 큰 형은 노래를 잘 불러 황주 지역의 교회들이 부흥회를 열면 독창자로 불려가곤 했다. .

어느 날 지송이 다니던 교회에 부흥회 강사로 온 목사가 요한 계시록을 강해하면서 2000년에 예수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린 나이임에도 심각하게 들었는지 그 이후부터 지송은 부쩍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열 살밖에 안된 어린 소년이 시간 맞춰서 한 시간씩이나 새벽기도, 저녁기도를 하고 매일 성경을 읽으며 찬송가를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하니 동네 사람들은 지송을 ‘꼬마목사’라고 불렀다. 큰 형이 목사가 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신학교를 다니는데 그 막내까지 목사 흉내를 내니 대견해서 붙여 준 별명인 듯하다.

지송은 새벽기도를 빠뜨려 먹거나 스스로 정해 놓은 신앙규율을 어기면 마치 하나님과의 큰 약속을 어긴 것이란 생각이 들어 죄스러워 할 정도로 신앙생활에 몰입하였다. 어린 나이로 걸어서 가기에는 예배당이 너무 멀어 매일 새벽과 저녁에 오가는 것이 힘들어 뒷산에다 소나무를 잘라 기둥을 세우고 짚으로 가려서 기도움막을 지어 그곳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하루에 성경을 20장씩 읽겠다고 결심하고 신약을 11번이나 읽었으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교회 오르간을 혼자서 배워 어설프게나마 찬송가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송네 교회의 오르간은 평양에 사는 부자였던 사촌 형이 고향교회에 기념으로 사 준 야마하 제품으로 예배 때 반주할 사람이 없어 그냥 장식품처럼 놓여 져 있었다. 잠자고 있던 교회 오르간이 소리를 낼 때마다 들여다보면 지송이가 건반을 누르고 있었으니 시골 사람들의 눈에는 어린 지송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꼬마목사’라고 불러 주는데다 스스로 신앙적 규범을 만들어 그것을 실천해 나갈 정도였으니 지송의 어린 시절의 꿈이 목사였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송의 유년 시절은 본인 스스로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입 밖에 잘 내지 않으려고 하는데다 함께 월남한 손 위 형과 누나가 남한에서의 유일한 혈육이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사람들이 가끔 유도 질문을 하면 마지못해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한두 개 꺼내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알게 된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훓어 보면, 1933년생인데 출생신고를 잘못하는 바람에 1929년생으로 호적에 기록되었으며 10살 때에야 소학교(일본학교)에 입학하고 3학년인 13살 때 해방을 맞았다.

해방공간의 혼란과 목숨을 건 월남

해방과 함께 황주지역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 세력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소작농이었던 지송네가 공산당의 토지개혁의 수혜자가 되어 모든 토지는 직접 경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소유로 한다는 지침에 따라 소작하던 9,000평을 합해 12,000평의 농지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변화는 지송의 마을에도 인민학교가 새로 생겨서 다녔는데 해방직후부터 조회 때 애국가를 부르다가 갑자기 인민해방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인민학교 3학년생이었던 지송은 여태 불러오던 ‘ 하느님이 보유하사 우리나라만세 ’를 버리고 ‘ 인민들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바뀐 것에 어린 생각에도 반발심이 생겨 친구들 20여명과 함께 조회를 거부한 채 산속으로 들어 간 적이 있었다.

산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내려갔는데 마침 한 동네에 살던 담임선생이 찾아와서“ 이놈의 자식이 감히 반항질을 해? ” 하면서 지송의 귀싸대기를 올려 쳤다. 지송의 어머니는 담임선생이 막내 아들의 뺨을 때리는 걸 두 눈으로 보시고는 큰일 났다며 걱정이 이민 저만 아니었다. 그 사건 때문인지 지송은 인민학교 졸업할 때 품행사상 점수가 5점 만점에 3점밖에 되지 않았다. 인민학교 3년을 마친 또래 친구들은 모두 중학교로 진학을 했지만 지송이만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진학을 못하고 한해를 쉬었는데 큰 형님은 동네 유지로 행세하는데 막내인 지송은 중학교도 못 들어가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 일이 생겼지만 지송은 개의치 않고 목사가 될 결심을 굳히고 더욱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매일 교회로 등교하다시피 가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혼자서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 읽고 기도했다. 지송은 농사일밖에 모르고 자식과 대화도 없었던 아버지보다는 큰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보수적인 신앙에 반공 사상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당시 황해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인 목사는 10명 중 한두 명만 남고 모두 처형되는 판이니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이라면 반공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큰 형은 반공주의자이면서도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볼쉐비키 혁명사>같은 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읽었던 합리적인 지식인의 풍모를 가졌다.

1950년 6.25가 일어난 해 겨울, 황주지역에 유엔군이 진주하면서 지송의 큰 형은 유엔군 당국으로부터 치안대장으로 임명되어 지급받은 권총을 차고 다녔다. 그러면서 동네 사람들이 빨갱이를 잡아들일 때 큰 형이 나서서 죽이는 것만은 못하게 적극 막았다. 빨갱이라지만 서로 같은 집안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가 형이나 누님, 조카, 아저씨 사이였던 것이다. 후퇴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마을 주민 11명이 처형당해 죽었는데 가족이 희생당한 사람들과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형에게 거세게 항의를 하였다.

“ 왜 빨갱이를 감싸고도느냐? 동조하지 말라” 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큰 형은 골치를 썩였다. 복수심에 미쳐 날뛰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가운데서 애를 먹었던 것이다. 두만강까지 올라갔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려 내려 올 때 너도 나도 피난을 가는데 지송의 큰 형은 뒷수습을 하느랴 피난을 못가고 말았다.

유엔군이 후퇴해 내려오는데 북진할 때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 이번에는 반공주의자들이 빨갱이들이 몰려온다면서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지송의 또래들도 집안이 반공이면 학생으로 등록은 돼 있지만 학교에 나가지는 못하고 산속으로 도망 다녀야 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반동으로 간주되어 처형되었다. 지송이네 교회 목사도 그 와중에 아들과 같이 비명에 갔다. 가까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낮선 사람이 보이면 잡으러 다니는 사람인지 도망 다니는 사람인지 분간이 안돼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야말로 ‘도망 못 가면 죽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죽고 죽이는 살육의 틈바구니 속에서 지송은 이데올로기에 눈먼 사람들이 가져오는 섬뜩한 행동들을 지켜보면서 사춘기를 보냈다.

지송이 고등학생이던 18살 때 6.25가 일어났는데 그 보다 석달 전인 3월 말 경 지송은 생일이 같은 동창과 함께 인민군 예비역으로 끌려갔다. 전쟁에 투입하려고 어린 학생들을 모조리 징집해서 짚으로 지은 임시 막사에 수용해 놓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 지송은 징집 돼 잡혀 갈 때부터 도망갈 요량으로 학생복을 입고 그 위에다 솜바지 저고리를 덧입고 들어갔다. 훈련소에서 군복을 나눠주고 입고 간 옷을 거두어갈 때 지송은 솜바지 저고리만 갖다 바치고 학생복은 숨겨 두었다. 훈련을 받던 중 같은 동네에서 징집된 생일이 같은 그 친구랑 함께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새벽 3시 경 군복을 벗고 숨겨두었던 학생복을 걸치고 훈련소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빈 창고에서 숨었다가 휘파람소리를 신호로 만나기로 했는데 지송이 휘파람을 불어도 친구가 나타나질 않는 거였다. 어쩔 수 없이 지송 혼자 해주 부근의 평양으로 가는 기차역이 있는 하성이라는 곳까지 걸어 가 여관에 들어갔다.

마침 끌려갈 때 아버지가 쥐어 준 800원을 꼬불쳐 두었는데 그걸로 여관비와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지송의 차림새는 학생복을 입고 신발은 군화를 신었는데 여관 주인아줌마가 눈치를 주면서 “ 신발은 방안에다 들여놓게 ” 라고 말해 지송은 신발을 방안에 넣고 낮 동안 꼼짝 않고 있다가 저녁에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아무 생각 없이 학생복에다 군화를 신고 책보자기에 인민군 모자와 군사훈련 하면서 필기한 공책과 연필 따위를 싸들고 있었는데 기차가 출발해 한참을 가는데 인민경찰과 정치보위부가 수색을 하면서 다가왔다. 지송은 순간 ‘ 아이고 큰일 났구나 ’ 하는 생각에 손발이 덜덜 떨렸다. 점검을 받는 도중 떨면서 보자기를 풀다 안에 들은 것을 죄다 바닥에다 쏟아버렸는데 다행히 기차 안이 어두컴컴해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지 “ 학생이구만….” 하더니 그대로 지나갔다. 황주역에 내려 근처에 살던 누님 댁에 갔더니 마침 어머니가 와 계셨는데 어머니는 도망 나온 지송을 보더니 걱정을 하시며 “ 이놈아, 왜 도망 나왔냐 거기 있지 ” 하셨다. 도망다니다가 잡혀서 더 험한 꼴을 당하거나 다시 끌려가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던 것이다. 탈영 사건이 있고 바로 6.25가 터졌는데 지송은 그 후로도 숨어 지내거나 도망 다니기를 되풀이 하였다.

신의주까지 밀고 올라갔던 유엔군이 후퇴를 하면서 밀려 내려 와 평양쪽에서 대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젊은 사람들은 빨리 도망가라고 난리였다. 그때 마침 큰 누나가 해산을 하려고 친정에 와 있었다. 가족들이 의논하여 황주서 50리 남쪽인 사리원까지라도 가서 사흘정도 버티면 유엔군이 다시 밀고 올라 갈테니 그때 올라오면 되겠다 싶어 어머니와 만삭의 누나와 같이 집을 나서는데 눈은 쌓였고 엄청 추워서 어머니와 만삭의 큰 누나는 피난을 포기한 채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지송과 바로 위 형과 둘째 누나, 누나의 8살짜리 아들 그 밖의 먼 친척 이렇게 8명이 사리원까지 가서 거기서 신의주를 출발해 평양을 거쳐 내려 온 마지막 피난 열차를 겨우 얻어 탈 수 있었다. 그 날이 1950년 12월 5일 아침이었다. 잠깐 피해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나선 길이 영영 못 돌아 갈 길이 되고 말았다.

객차 칸은 이미 피난민들로 이미 발디딜 틈도 없어 들어차서 열차 지붕위에 비집고 앉아 꼬박 하루 종일 걸려 한밤중에 수색역에 도착했다. 하룻밤 지낸 후 마포 용강국민학교에 마련된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지송네 일가족 8명에게 군용 모포 한 장이 배정되어 그걸 덮고 교실 마룻장 바닥에서 자는데 추워서 모포를 서로 잡아당기면 팽팽하게 되곤 했다. 내려오면서 북한 돈을 좀 갖고 왔으나 무용지물이어서 끼니를 해결할 길이 없었다. 마침 6촌 형님이 발이 넓어 교계에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형님의 주선으로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영락교회에서 월남 후 처음으로 보리밥에 된장국을 얻어먹었는데 그 맛이 꿀맛 같았다.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눈물겹게 살아남아 영락교회에서 성탄예배 메시야 연주를 들었던 그 때의 감격을 지송은 평생 잊지 못한다.

어린 나이에 목사가 되기로 뜻을 세우고 매진한 것이나 애국가를 바꿔 부를 수 없다면서 산속으로 들어 간 일, 공산주의에 반발해 인민군 훈련소를 탈출하여 월남한 것 등을 통해 볼 때 지송은 어린 나이에 뚜렷한 주관을 갖고 옳다고 생각한 신념을 일관되게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한 것은 7~80년대 산업선교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용공으로 매도당할 때 조목사의 월남 전력이 용공시비를 일정부분 무력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군부대 잡역부에서 장학생으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될 위기가 닥쳐 한강 다리가 폭파되자 지송네 가족은 한강 얼음 위를 걸어서 건너 시흥까지 갔다. 거기서 그들 일가족은 “ 난 더 이상 피난 안 가, 고향으로 돌아 갈 꺼야 ” 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파죽지세로 막 밀고 내려오는데 어쩔 수 없이 시흥을 떠나 평택으로 내려가려는데 평택은 이미 인민군이 들어 와 있는 상태였다. 유엔군은 피난민들 사이에 중공군이 끼어 있어 더 이상 내려오면 발포하겠다고 삐라를 뿌려 대니 할 수 없이 발안으로 빠져나가 지송의 누나가 군인들에게서 밥을 얻어 와 그걸로 죽을 쑤어먹고 버텼다. 나중엔 밀을 사다가 빻아 밀떡을 만들어 발안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렸다.

중공군이 밀려 올라가고 전선이 다시 안정되자 지송과 형은 미군부대 일용 노무원으로 취직해 수원역에서 열차로 실려 온 군수품을 내려 군용트럭에 옮겨다 싣는 일을 했다. 몸이 약한 지송은 힘센 장정이라야 들 수 있었던 포탄 2발짜리 상자를 쩔쩔매며 옮기느랴 얻어맞기까지 하면서 일했다. 대포탄, 휘발류 드럼, 탄약통 등 군수품이 도착하는 대로 재빨리 옮겨 실어 전선으로 실어 보내야 했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 보리쌀 한 되를 품삯으로 받아 식량으로 삼았다. 지송의 형은 미군부대가 38선 부근의 일선으로 이동할 때 따라 올라가고 지송은 누나와 조카와 함께 수원역에 남았다.

수원역 근처에서 지송은 젊은이를 징발해 군대로 보내던 헌병대에 붙들렸는데 거기서도 도망쳐 나왔다. 전쟁 와중이라 먹고 살 길이 막막해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형도 없는데다 그 혼란 통에 누나와 조카를 두고 혼자 군대에 들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지송은 고향쪽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올라가고 싶어 김포 비행장 근처로 옮겨 역시 미군 군용기에서 물품을 하역하는데 취직을 했다. 수원역에서는 쇠로 된 무기류를 운반했는데 김포비행장은 동경에서 공수해 온 닭고기, 바나나, 사과, 아이스크림 등과 씨레이션이라는 미군 식품상자를 주로 운반하였다. 시중엔 먹을 것이 거의 없었지만 그곳에는 먹을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마치 천국과 같았다. 전쟁통이라 물량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막 실어 보내는 형편이어서 배고프면 집어 먹거나 빼 돌려도 알지 못했다.

직장을 공항 수비를 위해 김포 근처 오쇠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포병부대로 옮겨 이번에는 군목실에 취직했다. 고향에서의 교회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되살아나 군목실에서 일하면 신앙생활은 확실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사무실을 청소하고 옷 벗어 놓은 것 세탁실에 가져다 맡기는 등 미군 하우스보이 일을 하면서 군목실에서 맡아 하던 대민 구호사업을 도왔다. 군부대에서 나오는 우유가루, 계란가루, 옷가지 등 구호물품을 실어다 고아원, 양로원 등에 전달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쏟아져 나오는 잉여 군수품을 트럭에 잔뜩 싣고 다니다가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차를 세워 놓고 나누어 주었다.

오쇠리에 살면서 김포 비행장의 교회까지 너무 멀어 지송은 고향 황주서 뒷산에 움막교회를 세웠듯이 작은 교회를 하나 세웠다. 흙으로 쌓은 벽체에다 미군부대서 나오는 폐 양철판을 덧대고 지붕은 역시 군수품 운반용 상자인 ‘보로박스’를 펴서 덮은 허름한 교회였다. 낮 예배는 오정리 본 교회서 드리고 저녁 예배만 가까운 오쇠리에서 드릴 목적으로 세웠는데 피난민이 자꾸 늘어나는 통에 감리교 전도사님을 한분 모시고 독자적인 교회로 발전했다. 고향집 뒷산에다 지은 기도처 이후 두번째로 세운 교회인 셈이다. 지송은 교회 옆에다 움막집도 하나 지어 누나와 조카와 함께 세 식구가 살았다.

오쇠리에 정착한 지 얼마되지 않은 55년 5월 7일에 지송은 오쇠리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였던 박길순과 결혼했다. 박길순은 생일이 지송보다 사흘 늦은 동갑나기였는데 조용하고 유순한 성품이 북쪽에 두고 온 어머니를 꼭 빼 닮아 지송은 그녀에게 유난히 마음이 끌렸다. 밤이면 가끔씩 북쪽에서 미그기가 날아 와 김포 비행장에 포탄을 떨어뜨렸는데 포탄이 터지면서 피워 올리는 불꽃을 함께 바라보면서 둘은 사랑을 키워 갔다. 오쇠리의 골판지 집에 사는 동안 첫 딸 향숙을 낳았다.

중부 전선에서 밀고 당기면서 공방을 거듭하던 지리한 전투가 끝나고 휴전이 이루어져 미군부대가 철수하면서 지송도 직장을 잃게 되었다. 부대가 없어지니까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지송은 보자기에 책 4권과 삶은 계란 두개 싸 들고 무작정 고향쪽으로 올라가 보기로 하고 오쇠리에서 한강을 건너 일산까지 가 기차로 금촌에 이르렀다. 거기까지가 북행 한계였는지 기차는 더 이상 못 나가고 지송은 기차에서 내려 무작정 걸어서 산을 넘어 문산까지 갔다. 흙집 벽 처마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미군부대를 찾아가 정문 위병소에서 군목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동안 미군 부대서 일하면서 익힌 영어가 톡톡히 제 구실을 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어 영어 하나만 할 줄 알면 얼마든지 미군부대에 끈을 대고 먹고 살만한 일거리가 널려 있을 때였다.

군목실에 연결되어 면담을 하는데 전에 미 포병부대서 일한 경력과 신학교 입학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며칠 뒤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 부대는 미군 제6전차 부대였다. 장교식당에서 웨이터로 잠깐 있다가 곧 군목실로 옮겼다. 거기서도 대민사업을 전담하는 곳이 군목실인데 그 일을 도울 한국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곳 장교 식당서 팬 케이크를 맛있게 굽는 법을 배워 후에 산업선교할 때 여성 노동자들에게 써비스하곤 했는데 그때 조목사로부터 얻어 먹어 본 팬 케이크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여성노동자들이 많다.

미군 제6전차 부대 군목실에 있는 동안 지송은 다른 한국인 근무자들처럼 미군 물자를 빼내거나 훔쳐 팔아먹는 일을 하는데 일체 가담하지 않고 원칙대로 성실하게 근무하였다. 미군은 보급품이 넘쳐나서 근무인원이 10명이라면 보급품은 20~30인분 사용할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오니까 한국인 근무자들이 남는 것들을 훔치거나 빼 돌려 팔아먹는 일을 예사로 할 때였다. 일을 마치고 부대를 나올 때 마다 커피나 버터 따위 부피가 적은 것들을 몰래 가지고 나와 서울에 내다 팔면 수입이 짭짤해서 한 몫 잡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지송은 집에서는 누나와 조카, 아내와 어린 딸이 굶고 있었지만 훔쳐 내다 파는 것을 따라 하지 못했다. 동료들이 자기들끼리 이익 챙기는 게 미안했던지 빼낸 물건을 판돈에서 좀 떼어줘도 지송을 그것조차 받아 챙기지 못했다. 받아 넣고 싶은 생각이야 굴뚝같았지만 겁이 나서 도저히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남 다른 처신을 하는 지송을 눈 여겨 보고 있던 미군 부대원이 있었다. 지송이 대견했던지 누군가가 미군 영내신문인 <Star & Stripes>에 제보하여 미담기사가 나갔다. 어느 날 군목실에서 불러서 갔더니 “ 미스터 조, 당신 최고야 ”하면서 지송에 관한 이야기가 실린 신문을 보여 주었다. 내용인 즉 ‘ 미군부대서 일하는 한국인 종업원들이 대부분 도둑질에다 문란한 여자관계에 술 마시고 퇴폐적으로 노는데 그런 것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조지송같은 성실한 한국인이 있어서 이 나라를 위해 싸우는 보람을 느끼게 한다……… 조지송이 이북에서 공산당이 싫어 누나 가족과 함께 서울로 피난 내려왔으며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형편이 어려워 미군부대서 일하지만 언젠가는 신학공부를 끝내고 목사가 되고 싶어 한다 ’
는 긍정적인 내용의 기사였다.

기사가 나가고 나서 한 미군 장교와 미국 본토의 그의 부모가 장학금을 주겠다고 제안을 해 왔다. 지송은 결혼 전해에 서울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가 결혼하면서 사정이 여의치 않아 휴학한 신학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장학금을 받기로 했다. 학비와 다섯 식구가 사는데 얼마가 드는지 써 내라고 하는데 지송은 25불이면 충분하다고 써서 매달 25불씩 3년간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하게 되었다. 미군 군목실을 사임하고 공부할 수 있을 때 실컷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신학교 복학과 함께 경기대학교 국문학과에도 입학을 했다. 지송은 도시락을 두개 싸들고 다니며 낮에는 신학교에서 밤에는 경기대 국문학과에서 강의를 들었다. 빠듯한 장학금으로 다섯 식구 생활비와 두 대학 학비를 해결 하느랴 여유가 없었지만 지송은 모처럼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며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때 장학금을 보내 준 미군의 아버지는 <데이비드 잉그브레슨>이란 북침례교 목사였다. 70년대 후반 산업선교가 한국의 민주화와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질 무렵 지송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데이비드 가족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기네가 공부시켜 준 사람이 이루어낸 믿음의 투쟁에 대해 무척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워 했다. 지송은 62년 2월 경기대 국문학과와 장로회신학대학원 별과 두 곳의 졸업장을 한꺼번에 받고 국어교사 자격증과 목사후보생 자격을 취득하였다. 두 학교에서 학기당 16과목을 들어야 했는데 졸더라도 수업에는 절대로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부하라고 멀리 미국서 매달 장학금을 보내 주는데 적당하게 노닥거리면서 공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노트 정리를 잘하는 친구의 것을 빌려서 공부한 후 학기말 시험을 보는 식으로 공부하였는데 분명히 낙제를 했을 것 같은 과목도 희안하게도 기본 학점이 나와 무난하게 두 학교 공부를 마쳤다고 지송은 회고하였다. 그렇게 공부해서 신학교를 졸업할 때 바울신학을 주제로 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제목의 로마서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였다.

지송이 미군 부대서 일하면서 익힌 영어회화 구사 능력과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정직하고 투명하게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인정받은 경험, 한창 나이에 두 대학을 한꺼번에 다니면서 왕성하게 지식을 흡수 소화할 수 있었던 탐구심, 그리고 기거하는 곳이 곧 교회가 되게 하는 신앙적 실천력은 나중에 산업선교 실무자로 일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자산이 되어 주었다. 은퇴 후 그때를 회고하면서 지송은 미군장교 가족으로부터 받을 장학금 액수를 정할 때 100불을 써 넣어도 되는데 고지식하게 단돈 25불만 있으면 된다고 써서 부자가 될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선의의 돈이라도 꼭 필요한 만큼만 후원받아야 한다는 분명한 원칙을 세우고 지킨 덕분에 엄혹한 유신시대에 산업선교가 탄압의 표적이 되어 유리알 들여다보듯 감시당할 때도 재정 운영면에서 티끌만큼의 부정이나 전용한 사례가 없어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농촌목회에서 산업전도로 진로를 바꾸다

조지송이 신학교를 마칠 무렵인 62년은 그 전해 5.16 쿠테다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른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련하고 제1차 사업이 시행된 해다. 63년부터는 생활 필수품 자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전의 공단과 달리 외국에서 들여온 개발원조로 수출 주도형 제조업들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되었다.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에서 인구를 도시로 유입시키는 한편, 산업 자본이 노동자를 억압, 착취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을 국가와 공권력이 뒷받침해 주도록 산업사회의 역학 구도가 형성된 것도 이 무렵이다.

군사정권은 집권 하자마자 발표한 포고령 제5호에서 “노임은 5.15일을 기준으로 동결하고 노동 쟁의는 일체 금한다”고 반 노동자적인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한편, 포고령 제6호로 모든 정당 사회단체를 해산시키며 기존 노동조합을 모두 해체하고 노조 간부들은 모두 잡아 들여 구속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쿠데타 이전인 60년까지 노동조합에 가입된 전체 노동자 수가 32만명에 달했으나 61년에 10만명 수준으로 줄어든 이후 노동인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조합원 수는 6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34만명 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

군사정부는 모든 노동조합을 해산 시킨 후 노동조합법을 뜯어 고쳐 직장별 노조에서 산별체제로 전환시키고, 노조 간부들을 교육시켜 기업에 타합하는 어용노조로 만들어 합법적인 쟁의가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산업사회의 불평등 구조 속에서도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수는 급속히 늘어나서 64년에 이르러 16,151개 업체에 33만 여명에 달으며 전체 산업을 통틀어 임금 노동자수는 702만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렇게 산업화와 도시집중화가 진행되면서 기독교의 산업사회와 노동자에 대한 전도열도 더불어 높아져 갔다.

한국교회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이하 예장)가 가장 먼저 산업전도를 시작했다. 1957년 미국 장로교의 후원을 받아 동남아시아 기독교교회협의회 산업전도부 총무로 파견되어 일하던 핸리 존스(Henry D. Jones) 목사가 한국에 방문하여 각 교단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산업전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존스의 권유에 따라 그해 4월 12일 예장이 총회 전도부내에 <예장산업전도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보다 한해 전인 56년 5월에 오철호전도사가 경북 문경 시멘트 공장에 취직해 있으면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해 산업전도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부터 교단 총회 차원에서 조직적인 산업전도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총회는 산업전도부 임원들을 국내 각 공단지역과 일본, 대만에 시찰시켜 연구토록 하고 58년 3월에는 3명의 산업전도사를 뽑아 영등포에 2명 안양에 1명을 보내 일하도록 하였다. 영등포에 배치된 강경구전도사에 의해 4월19일에 <영등포지구 산업전도위원회>가 창립 되었는데 이 조직이 후에 영등포산업선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어서 예장 산업전도위원회는 그 해 6월에 필리핀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 산업전도대회>에 4명의 대표를 보냈으며 9월에 열린 43회 예장 총회는 <산업전도위원회 규칙>을 만들어 “ 공장, 광산, 항만, 교통, 통신 등 산업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고, 2개 이상 기업체가 있는 지구마다 지구위원회를 둔다”고 규정하고 11월에는 오철호 전도사를 산업전도 위원회 간사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60년 9월 제 45회 예장 총회는 산업전도 발전을 위해 세 가지 중요한 결의를 하게 된다. 첫째는 산업전도위원회를 <산업전도국>으로 격상 시키도록 하고 둘째는 3월 10일 직전 주일을 ,노동주일>로 지키고 그 후 한 주간을 <산업전도 주간>으로 삼아 교회의 노동사회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며 세째는 총회신학교에서 산업전도에 관한 과목과 과정을 개설해 신학생들에게 산업전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도록 한 것이다. 이어서 61년에는 산업전도국에 3개월 과정의 <산업전도연구원>을 개설해 신학교 졸업생과 목회자 중에서 산업전도 적임자를 뽑아 1개월간의 공장 노동체험과 1개월은 산업사회에 대한 공부를 마지막 1개월은 산업전도 실습을 시킨 후 현장에 배치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산업전도를 위한 전문인력 양성을 시작한 것이다.

오철호목사와 존스목사는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제1회 산업전도연구원을 과정을 열기로 하고 장신대를 찾아갔다. 조지송은 신학교 마지막 학년인 61년 여름방학을 앞둔 종강 채플에서 동아시아 교회협의회 산업선교 총무 헨리 존스목사로부터 “ 한국은 공업사회로 발전할 것이며 농업도 기계화되어 산업화 될 것이므로 앞으로 산업사회에 복음을 전할 열정적인 일꾼이 필요하다 ” 는 설교를 듣고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덴마크 농촌 계몽 운동가였던 그룬투비 목사처럼 농촌을 부흥시킬 농촌목회를 희망하고 있었던 조지송은 농업까지도 산업화가 될 것이라는데 산업전도라는 게 도대체 뭔지 알아보자고 <산업전도연구원> 과정을 지망하게 된다.

막장에서 새롭게 만난 예수

그 때 조지송은 신학생으로써 신촌 대현교회 중고등부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방학 동안 총회가 실시한 <제1회 산업전도연구원> 훈련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은 두 명이 한 조를 이루어 각각 부산, 대구, 대전, 인천, 강원도의 공업지역이나 탄광지역에 각 각 다른 업종에 배치되어 한 달간 노동함으로써 산업현장의 실상을 체험하는 것을 시작하였다.
조지송은 감리교 신학생이던 최성봉과 같이 삼척의 장성 탄광에 들어갔다. 7,80년대 대학생들의 위장 취업과 다른 점은 사용자나 상급 관리자는 체험자가 교회쪽에서 훈련을 목적으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현장 동료 노동자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함께 똑같은 조건하에서 일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힘든 노동 과정에서 노동의 의미와 산업현장의 문제, 노동자에 대한 전도 등을 고민하고 연구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60년대의 탄광은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난방과 취사 연료로 가장 많이 썼던 국민 에너지인 석탄을 캐내는 광부들의 노동조건과 삶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던 상태였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유서를 써 놓고 일해야 했던 위험도에 비해 받는 임금은 턱 없이 적었다. 조지송 일행을 맞은 현장 책임 장로가 말하기를 “ 20년 광부 생활 중 교회에서 탄광 막장까지 찾아 온 것을 처음 본다 ” 놀라워했다. 그만큼 비참한 곳이라는 뜻이다. 사람 키보다 약간 큰 갱목을 튼튼한 놈으로 하나씩 골라 짊어지고 궤도 탄차를 타고 수백미터 되는 수평갱 속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로 갈아타고 다시 수직으로 수 킬로미터를 내려갔다. 다 내려가서부터는 갱도가 좁아 서서 못가 갱목을 눕혀놓고 밧줄로 묶어 끌면서 기어가야 했다. 갱도 끝까지 기어가 갱목을 양옆으로 세우고 위를 떠 바쳐놓고 곡괭이로 탄을 찍어 내어 운반용 궤도차에 가득 퍼 넣어 주면 모터가 끌어당겨서 올려 보내는 식이었다.

갱도 속은 산소가 희박해 숨이 차고 습하고 뜨거운 지열에 가만히 있어도 작업복이 땀으로 흠뻑 적셔져서 아예 옷을 벗어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 탄가루와 땀이 범벅이 돼서 진흙팩을 한 꼴이야 흰 눈동자만 보이지 ….. 침을 밷어도 탄가루가 섞인 시커면 침이 나왔어 ……점심 때가 되어 도시락을 찾아 먹어야 하는데 탄가루가 내려 앉아 어디가 도시락인지 구분돼야지 …… 손으로 휙휙 쓸어서 찾아 먹어 ” 지송은 눈물과 땀과 탄가루로 범벅이 된 식은 밥을 반찬도 없이 소금을 뿌려 입속에 떠 넣으면서 교회가 이 비참한 삶을 모르고 있다면 결코 한사람의 광부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곡괭이로 힐멧의 불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검은 색 탄맥을 내리 찍을 때마다 예수님이 당한 매질과 피 흘리셨던 그 고통이 떠올랐다.지송에게는 광부들의 고통이 곧 예수님께서 당한 십자가 고난 그 자체였다. 하지만 땅위 교회에서 담임목사는 주일날 깨끗이 씻고 멀쑥한 차림으로 예배에 참석한 광부에게서 그 비참한 현실을 읽어내지 못한 채 그냥 한 사람의 교인으로만 보고 지나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니 산업전도의 소중한 가치가 새록새록 다가왔다.

지송은 탄광 노동훈련을 한 후 학기를 마저 끝내고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도 산업전도를 더 깊이 배우고 싶어 62년 1월 초 총회 산업전도국이 신학생과 기독 대학생들에게 산업전도 훈련을 실시하는 <기독학생 노동문제연구회>에 계속적으로 참가 했다. 이 과정은 앞의 산업전도 연구원보다 강도가 약한 편이었는데 12~15명의 학생들을 선발해 한 달 동안 낮에는 노동 체험을 하고 밤에는 합숙하며 저명한 학자들의 강의를 듣고 토의, 연구하고 마지막으로 평가를 하는 내용이었다. 조지송은 산업전도 연구회 과정을 마치면서 제출한 보고서에 노동자들이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구조적 원인과 더불어 그들의 불만과 함께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들, 기업주의 신앙 독려활동과 비신자 노동자들의 곤혹스런 위치,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을 교회가 어떻게 대하고 도울 것인가, 초교파적인 산업전도 활동의 모색 등의 과제를 내 놓았다.

조지송이 산업전도연구원 과정을 끝내고도 몇 번씩 계속해서 기독학생 노동문제연구회 과정을 되풀이 하니까 총회 산업전도국은 지송이 산업전도 할만한 사람으로 보였던지 월급 2천원을 주면서 학생들을 인솔하여 훈련업무를 담당하는 일을 시켰다. 산업전도국 인턴 직원이 된 것이다. 지송은 훈련생들을 인솔하면서 시멘트공장, 방직공장, 성냥 등 제조업과 철공장, 탄광 등 다양한 노동현장을 체험함으로써 산업전도 전문가로 단련되어 갔다. 지송은 되도록 힘든 노동 현장으로 학생들을 배치하였다. 성공회 김성수주교도 신학생 때 조지송의 지도하에 양양탄광에서 노동훈련을 받았다.

지송은 연구모임이 없는 동안은 산업전도의 기초 자료로써 필요한 한국의 산업상황의 실태에 대한 조사 작업을 하였다. 경제기획원, 상공회의소, 통계청 같은 기관을 드나들며 경제활동 인구 동향이라든가 고용실태 자료, 제조업 관련 통계를 구해 와서 수없이 그래프나 챠트로 그렸다. 60년대 초반 예장 총회 전도부에서 나온 통계 자료들은 거의 모두 조지송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보아도 된다. 그렇게 만든 자료는 전도부가 전국노회 전도부장 세미나 할 때와 산업전도 연구모임 등에서 중요한 근거 자료로 쓰여 졌다.

총회내 다른 부서들과 달리 산업전도국은 미국에서 보내오는 년 3,000불의 선교비로 운영되어 자금이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다. 기초 자료들을 구하기 위해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조사를 할 수 있었고, 타이프와 카메라 등 최신 기자재를 쓰고 인쇄물도 고급 칼라로 인쇄할 수 있어서 효과적으로 교육과 행정, 홍보를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3월10일 노동주일을 앞두고는 탄광 노동자 그림으로 노동주일 포스터를 고급 칼라로 인쇄하고, 총회 기관지인 기독공보에 전면 노동주일 안내 광고를 실어 증판본을 발간해 전국 교회에 발송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의 목회자, 교인이라도 산업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고 한 교회라도 헌금을 보내오도록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산업전도위원회 위원들도 예장 총회에서 지도력 있고 영향력 있는 목사들로 구성되었으며, 기독교방송에 노동자 드라마를 매달 내 보냈다가 재방송하는 일도 있었으니 초기의 산업전도열은 매우 뜨겁고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옆에서 돕고 또 직접 수행하면서 조지송은 다양한 노동현장을 체험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을 직접 체득할 수 있었고 산업체와 기업의 객관적인 조건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웠다. 또 교회의 참여와 자원을 이끌어내고 지지를 확보하는데 홍보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가 되다

2년 동안의 인턴생활을 끝내고 조지송 전도사는 63년 11월 21일 동신교회에서 경기노회가 파송하는 산업전도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산업전도 목사가 된 것이다. 이 날 총회 산업전도위원회 간사 오철호목사는 최고급 가죽성경의 속표지에다 두 아들 모세와 요한 이름을 써서 안수기념으로 주면서 격려했다. 총회 전도부와 경기노회(노회장 방지일)는 조지송 목사를 영등포지구로 보내기로 하고 생활비를 영락교회(당회장:한경직 목사)에서 담당토록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64년 2월 14일 영등포교회에서 <영등포지구 산업전도위원회> 주관으로 취임예배를 드리고 업무를 시작하였다. 이 취임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예장 총회 전도부장 이권찬 총무, 경기노회장인 방지일목사, 영등포 산업전도위원회 위원장 계효언목사, 도림교회 유병관목사, 영락교회 한경직목사, 총회산업전도위원회 간사 오철호 목사 등이었다.

이들 교계 지도자들은 예장 총회와 경기노회 상층부에서 선교 정책을 결정하는데 영향력을 가진 이들로써 초기 산업전도는 교단의 많은 기대와 관심을 받는 가운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권찬 총무는 조지송목사가 초기에 산업전도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해 나가는 것에 대해 반발하던 일부 목사, 장로들을 무마시키고 조목사를 변호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00세를 넘기면서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방지일 목사는 경기노회(당시)와 영등포노회(현재)의 지도자로써 포용력 있게 산업선교를 지켜주었고, 한경직목사는 15년 동안 영락교회를 통해 조목사의 생활비를 지원함으로써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 주었다. 오철호목사는 문경 시멘트공장 설계에도 참여한 엔지니어면서 그 공장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한 목회를 최초로 시도했으며 초기 산업전도의 이론적 기초와 정책을 입안한 인물이다. 계효언, 유병관 목사는 산업전도에 큰 관심을 갖고 영등포지구 산업전도위원회를 주도하면서 각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내의 평신도 산업전도회를 활발하게 이끌어 간 실천가들이었다.

당시 영등포지역은 64년에 552개 사업체와 40,501명에 달하는 공장 노동자가 있는 수도권 최대의 경공업 단지가 있었다. 당시 산업전도를 활발하게 하였던 도림장로교회 산업전도회는 영등포지역의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기업체의 노동 조건은 극히 불량하다. 대게 기업주는 노동자에게 로마 시대에나 행하던 복종과 맹종만을 강조하고 창의적인 노동력을 발굴하는데 주저하는 현상이다……근로자 역시 급료만 바라는 날품팔이 모양으로 시간이 경과하기만 기다리고 기업주로부터 자신들의 대우가 나아지기를 기대하지 않고 있다. 여가 선용이나 노동력의 효과적인 사용방안은 모색치 않고 무조건 작업 시간 연장과 어떤 전체적 권위로써 기업을 경영하려 하고 있다”  며 전 근대적인 기업경영과 노동 착취가 만연되어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것을 묘사하였다.

영등포지구 산업전도위원회에는 58년부터 강경구전도사가 배치되어 주로 공장 내 여성 노동자의 기숙사와 식당을 방문하여 함께 예배드리고 심방, 상담하며 성경공부를 하는 공장목회를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이때의 산업전도는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전도활동으로써 산업사회의 특성이라든가 노동자의 현실을 반영하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조지송목사도 영등포에 부임한 후 처음에는 지역 상황을 파악하며 강경구전도사를 도와 그때까지 해 오던 전통적인 공장목회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초기의 산업전도는 말 그대로 공장전도로써 교회의 활동을 고스란히 공장에다 옮겨 놓은데 지나지 않았다. 기업주가 기독교인인 공장에서 사장이하 모든 종업원을 식당이나 강당에 모아 놓고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다.

사장과 초청된 강사 목사가 단상에 앉고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자는 으레 사장이 듣기 좋은 내용으로 설교하기 마련이었다. ‘ 요셉은 정직하게 일하여 하나님께 복 받고 출세했는데 여러분들도 회사 일에 충성을 하면 반드시 보응이 있을 것이다 ’ 라는 식으로 설교하고 기도도 노동자들의 처지를 고려한 기도보다 회사의 안위와 경영자를 위한 기도 일색이었다. 예배드리는 것 외에 성경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그 중 열심 있고 믿음이 강한 기업주는 아예 공장안에다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한영방직 내에 설립된 한영교회도 그와 같은 경우였다. 성결교인인 사장이 보기에 ‘ 천명이나 되는 종업원이 모여 예배드리는데 초라하게 냄새나는 식당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냐? 아예 교회를 하나 짓자 ’ 이렇게 해서 시작된 교회였다. 이런 사업장 내 교회들이 전국적으로 많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종업원을 강제로 예배에 참석시켰다. 대구에서는 공장 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불이익을 주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영등포에서도 동아염직, 대한모직, 대동모방 세 공장이 한달 한번 꼴로 전체 노동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맞교대여서 12시간 근무를 마친 십대 소녀들이 퇴근을 미루고 피곤한 몸으로 억지로 예배를 드리자니 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는 여공들이 보이면 전도사인 기숙사 사감이 다가가서 툭툭 쳐서 깨웠다. 어느 날 초청 설교자인 목사가 마태복음 11장의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란 성경 구절로 설교하는데 남자 노동자 한 사람이 “ 저 새끼 …… 자기는 침대에서 실컷 자빠져 자고 와서는 …..남은 밤 새워 피곤한데 지랄 떠네 ” 하고 욕을 냅다 하는 거였다. 물론 중얼대는 소리여서 강단에서 설교하는 목사 귀에 들릴 리가 없었지만 조지송목사는 노동자들속에 들어가 현장 노동을 자주 했기 때문에 그런 불만을 고스란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노동자들을 위해 전도를 하려는데 목사들과 사장 장로들이 그렇게 좋다고 해서 드리는 예배가 실상 피곤에 절은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저주스러운 짓거리였던 것이다.  나중에 이 세 공장 직원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예배드리려고 사내 교회가 세워졌다. . 어느 날 노동자 한사람이 그 교회를 담임하던 정모 목사에게 “ 목사님, 우리 공장에 오지 마셔요, 영등포에 목사님들 많은데 왜 오셔서 설교 해주시고 욕을 먹으셔요?” 하는 거였다.

“ 찬송을 떠나가게 불러대지만 그게 진짜인 줄 아느냐, 다들 예배 안보면 쫓겨날 판이라 억지로 앉아서 목사님 욕만 해댄다 ”  솔직히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정모목사가 산업전도 실무자인 조지송목사에게 하소연했다.  “ 조목사, 이걸 어쩌면 좋소? ”  조지송목사는 단도직업적으로 “ 당신 딸이 그 공장에서 일한다고 칩시다. 밤 새워 12시간 일하고 나온 딸에게 예배보자고 그러겠소? 피곤하니 잠이나 자라고 하겠소? 도대체 어느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 라고 말해 주었다. 후에 정모 목사는 공장장과 충돌하는 바람에 그 교회를 사임하고 떠났다. 조지송목사도 명색이 산업전도 실무목사여서 자주 사업체들의 초청을 받아 공장 예배에서 설교했는데 공장 예배를 거듭할수록 “ 이게 아닌데…..노동자들을 위한 산업전도가 돼야하는 거 아닌가? ” 이래서는 노동자를 전도하기는 커녕 귀찮다고 따돌림당하기 십상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쯤 조지송목사와 친하게 지내던 노동자들마저 “ 목사님,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고 솔직하게 말해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조목사는 예배보다는 직접 노동자를 만나 접촉하면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성경책을 옆에 끼고 사장이나 중역들의 안내로 단상에 올라가는 근엄한 설교자 목사가 아닌 노동자들의 친구로서 다가가기로 했다. 작업복 차림을 하고 야근하는 노동자를 만나기 위해서 밤 12시나 새벽에도 공장으로 찾아갔다. 노동자를 못 만나면 수위실이나 감시 초소라도 찾아가서 한 두시간씩 얘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 조목사가 접촉했던 사람의 글을 보면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조지송목사님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습니다……그리고는 이 공장, 저 공장을 담임목사님이 교인 심방하시듯 다니며 살피셨고, 공장 책임자들과 종업원들의 대우, 공장의 형편 등을 물으시고 가시곤 했습니다……낮 시간에 길을 가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시던 목사님을 만나면 가시던 길을 멈추고 서서 길가에서 공장 종업원들과 그들의 미래에 관해 한 시간씩 이야기를 하곤 하셨습니다 …….’ (http// moriamount.blogspot.com/2007/10/27)  동자들이 공순이 공돌이로 불리워지며 무시당하고 천대받던 시절에 조지송목사는 자전거를 타고 공단지역을 순회하면서 노동자들의 아픔과 애환을 함께 하며 그들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누가복음 14장21절)임을 믿으며 친구가 되어 노동자들의 삶 속으로 녹아 들어가려고 했다.   

   
             좌로 부터 손은정총무 조지송목사 한상근(다람지회 회장) 송효순집사

– 계속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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