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송 목사 평전을 시작하면서

                         조지송 목사 평전을 시작하면서

 집필/ 서덕석 목사(시인 열린교회)

   
 

  나의 20대 초반은 시상을 쫓아 밤새우며 고민과 방황을 거듭하던 열정의 시기였다. 그때 읽은 책들 중 시골 청년이 구독하기엔 좀 부담스러운 가격의 잡지 <뿌리깊은 나무>가 있었는데 문장도 새롭거니와 매달 실리는 평범한 촌부들의 삶을 구어체로 그대로 옮겨 놓은 인생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그걸 통해서 보통 사람들의 삶도 기록하기에 따라서는 위인전 못지않게 큰 의미와 교훈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어찌 어찌해서 노동하는 목사가 되어 스무 해를 넘게 교회 밥을 먹고 있는데, 몇 년 전, 김수환추기경과 법정스님이 연이어 선종(열반)하면서 추모 열기로 뜨거운 와중에 한 지인이 기독교에서는 그 같은 인물이 왜 없느냐는 질문을 해 왔다. 나는 종교인의 믿음의 깊이와 크기가 반드시 그가 세속적으로 유명하거나 널리 추모를 받는 것으로 평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해 준 적이 있다. 개신교에 그런 경지에 오른 분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성자와 성인을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의 전통이 존경을 넘어선 숭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문화적인 차이를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한줄기 아쉬움이 스치고 지나갔는데, 한국 개신교 역사 상 수많은 선각자와 영적 거성들이 한반도에 전래된 이국적인 기독교를 민중의 종교로 뿌리내리게 하고 일제 때는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해방 이후엔 민주화운동과 인권, 통일운동에 헌신해 왔는데 그 결과들이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착잡한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일반 기독교는 고사하고서라도 내가 몸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민중선교 진영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라도 남겨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0년 영등포산업선교회관이 지난 7~80년대부터 산업선교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 온 점이 인정되어 예장 총회로부터 <기독교역사 유적지 8호>로 지정되는 것과 함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로부터 <민주화운동 사적지>로도 선정되어 조그마한 기념탑을 회관 마당에 건립하게 되었다. 기념탑 건립을 자문하면서 영등포산업선교회 관련자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건물과 사건 뿐 만 아니라 산업선교에 헌신한 관련자들의 인물기록도 복원해 내어 제대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음을 공감한 바 있다. 마침 그 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민주화운동 관련자 전기발간 사업을 공모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영등포산업선교회 초대총무로써 산업선교의 선구자인 조지송목사의 기록을 먼저 남겨야 한다는데 의견이 모였다.

그러나 문제는 당사자인 조지송목사가 자신의 기록을 남기는 것을 일체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신학자와 소장 사회학자들의 산업선교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서 출판하자는 제안마저 매번 뿌리쳐 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당시의 산업선교가 자신을 비롯한 실무자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헌신으로 이룩된 운동이니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쓰라는 것이었고, 둘째로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산업선교에 대한 글이 왜곡과 과장으로 본래 모습을 제대로 증언해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굳이 쓰고 싶다면 자신이 죽은 후에나 쓰라고 하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인터뷰만 허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등포 산업선교에 관한 체계적이고 공식적인 기록물은 <영등포산선교회 40년사>와 예장 총회가 발간한 <교회와 도시산업선교>, <한국교회 산업선교 50주년 기념자료집>에 일부 소개된 것이 거의 전부였다. 이들 출판물 외에 민중신학자 김용복박사가 20여 년에 걸쳐 체계적으로 조목사와의 인터뷰를 하여 테이프 30여개 분량의 기록을 남겼고 그 밖에 소장 신학자들이 논문 자료 수집 차 개별적인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또 200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만주화운동 관련자 구술사료 수집’ 사업으로 진행한 조지송목사의 구술면담은 5개 분량의 테이프와 녹취록으로 구성된 소중한 자료이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측은 조 목사의 허락은 차후에 받더라도 일단 평전 집필작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응모 계획서를 내었고 그것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수차례에 걸쳐 산업선교 선배 실무자들과 함께 조지송 목사를 찾아가 간곡히 설득한 끝에 어렵게 평전 집필에 대한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쓰기는 하되 전체 선업선교의 흐름의 맥락 가운데서 기록하고 과장되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기록물을 내 놓는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서 였다.

자신의 회고록이나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책 따위를 일체 쓰지 않겠다고 고집하던 사람이그 정도라도 허용한 것은 사실 큰 진전이다. 다행스럽게도 조목사는 산선에 몸담고 있을 당시의 일들을 오랜 시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상당히 정확한 구술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어 평전에 필요한 자료 수집 작업은 수월한 편이었다. 특히 김용복 박사가 직접 인터뷰하여 남김 방대한 자료를 기꺼이 제공해 주고 이용하도록 배려해 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돌이켜 보니 내가 조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겨울 노동목회 훈련(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부와 예장 노동목회자연합이 공동 실시) 과정에서 핵심적인 공장노동 9개월을 끝내고 현장탐방을 하던 중 청주 근방 옥화리에 “하나의 집” 이라는 곳에서 계신 조목사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조목사는 은퇴 후 2~3년이 지났을 무렵인데 은퇴 당시보다 건강을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나는 7~80년대 군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 유명한 산업선교 지도자라면 강인한 투사다운 풍모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작 눈앞에 보이는 조목사는 작은 키와 몸집에 여리고 조용하신 분이어서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분이 산업선교 선배들이 그렇게 존경하고 무서워(?)하던 산업선교의 선구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두번째 만남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94년 12월 초에 내가 소속된 예장노동목회자연합이 계룡산에서 겨울 수련회로 모였을 때 조목사가 민중선교 실무자의 자세에 대해 강의하셨는데 그때 나는 이미 사회과학과 실증적인 민중선교론을 체득한 이후여서인지 특별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없었으나 강의를 진지하게 하시고 참석자들이 열정적으로 듣고 공감하며 민중선교 현장에서의 목회자가 가져야 할 품성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질문하고 답변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20여년이 지난 지금, 산업선교의 이면사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대하면서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조지송목사가 점점 커져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작은 몸집에 온화한 미소를 띤 사람을 여성노동자들의 아버지로 불려지도록 노동운동의 현장으로 이끌어 내었으며 군부독재의 정권의 모진 탄압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게 하였을까? 의문이 거듭 될수록 당시의 산업선교와 조지송목사의 경이로운 활동들은 나에게 강력한 도전이 되었고 산업선교 역사를 기어코 내 손으로 기록해 보려는 마음을 굳혀 주었다.

(조지송 목사 평전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전기 부분으로 선정되여 서덕석 목사에 의하여 집필되였으며 앞으로 단행본으로  출판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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