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과학, 다시 만나다

                                      종교와 과학, 다시 만나다

신재식 교수 
재식 교수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거쳐 미국 드루(Drew)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호남신학대학교 신학과 조직신학교수이다. ‘과학’ 문화 속에서 ‘한국’ 신학을 고민하면서, ‘종교(기독교)와 과학’의 만남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템플턴 재단의 ‘종교와 과학 교과 프로그램(Religion and Science Coursework Program)’ 수상자(1999)이며, 미국 국무성 초청 풀브라이트 방문교수(2004)를 지냈다. 저서로는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번역서로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 『근대 신학의 이해』, 논문으로 〈아이작 뉴턴의 종교와 과학의 상호관련성 연구〉, 〈다윈 진화론의 자연신학 비판과 다윈 이후 진화론적 유신론 연구〉, 〈‘과학적 문자주의’와 ‘종교적 문자주의’를 넘어서〉 등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종교와 과학의 만남이 ‘다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만남은 관련된 저작들, 이 분야 학술지의 창간과 학회의 결성, 빈번한 학술대회, 전공이나 학과 신설과 교수 임용, 언론 보도나 특집 등을 통해서 활발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던 북미와 유럽에서 이런 만남이 주로 이루어집니다. 이 만남은 때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적대감만 확인하고 썰렁하게 끝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만남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종교와 과학 양쪽의 진영에 속한 사람도 있고, 속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종교적 배경이나 학문 배경에서 굉장히 다양합니다. 여기에서는 참여자의 활동 근거에 따라 크게 셋으로 나눌까 합니다. 종교계와 과학계, 그리고 양쪽에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 출신으로 말입니다.

먼저 종교 쪽 참여자를 볼까요.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의 논의를 보면 참여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절대 다수이고, 무슬림이 아주 일부입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참여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와 과학의 문제가 아직까지는 사실상 그리스도교와 과학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과학혁명이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서구에서 발생한 것을 생각할 때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 그리스도교 참여자의 관심사는 주로 과학과의 대화 속에서 그리스도교 믿음 체계를 새롭게 정립하는데 있습니다. 다분히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변증하려는 동기가 강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과학에 대해 두 가지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한쪽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현대과학의 적극적인 조화를 모색합니다. 가톨릭과 주류 개신교 신학자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와 달리 개신교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일부는 자신들의 신학적 주장을 수호하기 위해 현대과학을 비판하거나 일정한 거리두기를 합니다. ‘창조과학’이 그런 경우이지요.

두 번째 참여 집단은 중립적 입장에 있는 일군의 학자들로 주로 과학사나 과학철학 또는 종교철학 등을 전공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과학과 종교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어떻게 관련되고 상호작용을 하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또한 지식으로서 종교와 과학, 담론으로서의 종교와 과학 등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분석하는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진영은 자연과학자들입니다. 종교에 관한 태도에 따라 이들 과학자들을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의 자율성과 가치를 인정하면서 과학과의 관련성을 모색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자연주의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로 유물론적 성향의 과학자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와 과학의 각 진영에는 상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함께 있네요. 온건파는 상대방과 대화를 모색하고, 강경파는 상대방의 영역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종교와 과학의 강경파들끼리 만났을 때 불협화음이 나오고 갈등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종교와 과학에 대해 갖는 상식적인 이미지인 ‘갈등’이나 ‘전쟁’은 이들의 만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서두에서 종교와 과학이 ‘다시’ 만난다고 했는데, 이번 만남은 일종의 재경기 같습니다. 첫 만남은 과학혁명 때였는데, 그때는 그리스도교가 챔피언이었고 과학이 도전자였습니다. 첫 번째 시합에서 패한 종교는 지난 300여 년 동안 과학이 점점 더 확실하게 군림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습니다. 그러다 과학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최근의 과학철학 논의에 눈을 뜨고, 과학기술로 인한 폐해를 경험하면서, 이제는 종교가 도전자가 되어 다시 경기를 벌이는 겁니다. 과학을 전공하고 사제가 된 과학자-신학자(scientist-theologian)를 중심으로 의욕이 대단합니다. 반대편에 있는 일부 강경파 과학자들은 이 기회에 종교를 아예 은퇴시키려고 기세등등합니다. 종교를 아주 링에서 밀어내고 혼자 독점하려는 것이지요. 과학철학이나 종교철학, 과학사 전공자들은 관전을 넘어서서 이 경기의 심판을 보겠다고 나섭니다. 시합이 어떻게 진행될 지 흥미진진합니다.

그런데 이번 시합의 분위기와 상황은 과거와 사뭇 다릅니다. 이제는 과학이 과거 종교가 차지했던 챔피언 자리에 우뚝 서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그리스도교가 했던 역할을 지금은 과학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 시대에 가장 권위 있는 지식이 되고, 과학자는 우리 시대의 사제이고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선뜻 수긍이 되지 않습니까?

몇 년 전에 종교와 과학 수업을 듣는 학부 학생들에게 특정 상황을 설명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 텔레비전에서 과학자와 신학자가 생명에 관한 토론을 합니다. 과학자는 과학적 관점에서 생명을 설명하고, 신학자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생명을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그 설명을 듣고 더 신뢰하는 사람에게 ARS로 응답을 합니다. 과학자는 1번을, 신학자는 2번을 누르게 됩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던지 질문은, “누가 더 많은 표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였지요. 결과는 절대 다수가 1번 과학자였습니다. 다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같은 상황에서 과학자와 신학자가 모두 똑같이 생명에 관한 종교적인 설명을 한다고 합시다. 그 설명을 듣고 ARS를 통해서 더 신뢰하는 사람에게 투표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번에도 과학자가 조금 더 많이 나왔습니다. 똑같은 설명, 그것도 종교적 설명인데도 불구하고 신학자의 설명보다 과학자의 설명을 더 신뢰를 한다고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그 이후 강의를 개설할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결과는 항상 비슷합니다. 신학대학 학부에서 나온 결과가 이렇습니다. 아무튼지 오늘날 종교와 과학을 볼 때 신뢰도의 무게 중심이 과학 쪽으로 쏠려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신학자로서 상당히 자존심 상하지만 이게 오늘날 종교와 과학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입니다.

과학, 종교를 설명하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종교와 과학의 만남에서 상징적 인물은 종교인이라기보다는 과학자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입니다. 그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종교를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유일신 종교전통을 심하게 비판합니다.1) 이 책으로 인해 진화생물학자뿐만 아니라, 신학자와 철학자, 심지어 무종교인까지 논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무신론적 근본주의자’로 불리면서 현대 무신론운동의 상징 인물이 되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도킨스가 이 시대의 문화적 코드인 것은 분명합니다.

30개국 이상에서 번역된 그의 저작은 ‘도킨스의 벼룩(Richard’s Fleas)’이라는 문화현상까지 만들어냈지요. 이 용어는 도킨스를 비판하는 책의 제목에 그의 이름을 포함시키거나 그의 책 이름과 비슷한 이름으로 출판하는 것을 지칭합니다. 예를 들면, Dawkins’ GOD(『도킨스의 신』), The Dawkins Delusion?(『도킨스의 망상?』), God Is No Delusion(『신은 망상이 아니다』), The God Solution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신』), Deluded by Dawkins?(『도킨스로 인해 망상에 빠진다고?』), The God Delusion Revisited(『만들어진 신 다시 검토하기』), 이런 책들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도킨스 신드롬’이 일어났었지요. 『만들어진 신』은 국내에서 10만권 이상 팔렸답니다. 출판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박’이 터진 것이고, 언론이 주목하는 사회 현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대학 입시 논술에서 필독서가 되다시피 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로 지명도가 높은 과학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만들어진 신』에서 다루는 주제와 두툼한 분량을 고려하면 이건 ‘사건’입니다. 일부 신학대학에서는 ‘도킨스 읽기’를 시작하고, 개신교에서는 도킨스 비판을 위해 학자를 초청하고 학술대회를 하는 대응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화제가 된 도킨스는 최근 종교와 과학의 만남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한 흐름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화론적 입장에서 종교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2000년을 전후로 해서 이런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1998), 파스칼 보이어의 Religion Explained: Evolutionary Origins of Religious Thought(『종교를 설명한다』, 2001), 데이비드 윌슨의 『종교는 진화한다』(Darwin’s Cathedral, 2002),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How the Minds Works)》, 스콧 애트란의 In Gods We Trust: The Evolutionary Landscape of Religion(『우리는 신들을 믿는다』, 2002), 다니엘 데닛의 Breaking The Spell: Religion as a Natural Phenomenon(『주술깨기』, 2006) 등이 중요한 책입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2006년에 출판되었으니 상대적으로 최근에 나온 책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책들은 종교를 자연주의적 또는 유물론적 입장에서 설명합니다. 종교 현상은 모두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이런 견해를 따르면, 종교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거나 아주 없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사제나 신학자들은 이들이 종교를 과학으로 환원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일부 열성적인 신앙인들은 오히려 종교는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까지 다루기 때문에, 과학은 종교에 포섭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런 과학이 오류가 있는 거짓 과학이라고 단언하기도 한 사람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거짓이거나 오류라고 생각하는 이런 종교인과 과학자들이 만나면 당연히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본다면, “아, 종교와 과학은 만나면 싸우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와 과학, 다양하게 만나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은 늘 갈등하고 다툰다는 인상이 과연 맞는 사실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종교와 과학은 일상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다양한 모습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도킨스처럼 과학이 종교를 대신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나, ‘창조과학’처럼 현대과학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둘의 관계를 갈등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까요.

어떤 사람들은 종교와 과학은 별개의 다른 영역으로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종교는 ‘왜’(why)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삶이라는 의미(meaning)의 세계를 다룬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과학은 ‘어떻게’(how)라는 질문을 다루면서 자연이라는 사실(fact)의 영역을 대상으로 삼는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종교는 ‘삶’과 ‘가치’의 영역을, 과학은 ‘앎’과 ‘사실’의 영역을 다루니, 마치 ‘한국어’나 ‘중국어’처럼 서로 다른 언어 관계와 같아서 부딪칠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종교와 과학은 다른 영토이고, 사제는 종교라는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고, 과학자는 과학이라는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입니다. 남의 땅에 침범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한발 더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와 과학은 외면적으로 보아 서로 구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부분에서 만나는 접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주관적 측면을 중시하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당위성을 지배하는 종교와, 객관적인 측면을 중시하면서 자연의 영토를 지배하는 과학은, 서로를 보완해야 하는 관계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상호보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종교와 과학은 아주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이 경우는 과학 작업에서 종교가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둘을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적 신념이 과학 작업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과학적 결과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 뉴턴의 경우나,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자연신학’이 그런 경우입니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이런 다양한 입장을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의 대표로는 오늘날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초석을 놓은 이언 바버(Ian G. Barbour)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네 가지 범주로 나누었는데, ‘갈등’과 ‘독립’, ‘대화’와 ‘통합’이 그것들입니다.2) 물론 존 호트(John Haught)나 테드 피터스(Ted Peters)와 같은 학자들도 나름대로 분류를 제시하지만, 바버 분류의 변주곡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만큼 대동소이합니다.3)

이렇게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몇 가지 범주로 나누는 것은 둘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을 줍니다. 우선은 종교와 과학의 만남에 대한 개략적인 지형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 사실, 종교와 과학을 갈등이나 전쟁상태로만 이해하는 것이 단지 하나의 입장일 뿐이라는 것도 일깨워 줍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과학을 일반화된 범주를 통해서 파악하면서 이 논의를 출발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범주를 통한 이해가 충분치 못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만남의 현실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위에서 언급한 범주는 그 분류 기준에서 지적이며 인지적 차원이 가장 크게 작용합니다.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지식의 관계를 충돌로 보느냐, 별개로 보느냐, 아니면 통합으로 보느냐가 그 핵심이지요. 하지만 실제 종교와 과학이 만나는 현실에서 지적 요소는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만남에는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개인적 요인과 같은 아주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종교와 과학의 만남에서 두 주체의 다양성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와 과학을 말할 때, 여러 종류의 종교와 여러 분야의 과학이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나 과학 하나로 단일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교만 해도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근대 과학 역시 300년이 넘는 자기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종교 활동에 참여하는 종교인이나, 과학 활동에 참여하는 과학자의 수를 생각할 때, 종교와 과학을 일반화시키고 범주화시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적인 구체적인 사례 가운데는 딱 부러지게 바로 이 범주에 속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범주가 지닌 일반성과 추상성으로 인해 구체적 현실을 구성하는 다른 중요한 요소들이 간과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갈등’부터 ‘통합’까지라는 단순한 범주로 이해하는 것은, 둘의 만남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구체성,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지금의 종교와 과학에 관련된 논의는 ‘그리스도교와 과학’이라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사례의 문제입니다. 종교와 과학에 대한 범주를 통한 일반화는, 이런 특수한 역사적 사례를 꼼꼼히 살펴보고 난 후에 최종적으로 시도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담론이나 과학담론의 특징과 구조를 비교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 역시 종교와 과학이 상호작용하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글은 종교와 과학의 만남의 현실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종교와 과학에 대한 논의를 만남의 현실성을 짧게나마 살펴볼까요.

종교와 과학, 이웃사촌입니다

먼저 종교와 과학이 우리 삶에서 만나는 현실을 잠깐 짚어보도록 하지요. 종교와 과학의 문제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될 만큼 오래된 것입니다. 서구 전통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주제인지라, 어떤 사람들은 “그거 다 지나간 문제 아냐?” 이렇게 냉소적으로 말하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과학이 여전히 이야기되는 까닭은, 이 둘이 개인이나 사회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구체적으로 함께 체현되는 현실적인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와 과학은 개인의 삶과 무관하게 분리된 실재가 아니라, 한 개인 안에서 함께 엮여 있는 현실적인 실재입니다. 좀더 세게 말한다면, 종교와 과학은 한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실체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주류 종교인 미국에서는 과학자들이나 과학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이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자 현미경이나 입자 가속기를 통해 원자와 기본 입자의 세계를 보고, 전파 망원경과 거대한 우주 망원경을 통해 거대한 우주를 들여다보고, 수학을 사용해서 미시세계부터 대우주까지를 설명하는 과학자가 종교를 갖는 것이 낯설지 않습니다. 24시간 실험실을 지켜야 하는 과학자가 잠시 짬을 내어 예배나 예불에 참여하고 다시 실험실로 급하게 향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주를 창조한 신의 흔적을 찾겠다고 열심히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과 더불어, 종교를 가지지 않는 과학자들도 있고, 현대 과학을 거부하거나 무관심한 종교인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교도인 생물학자도 있고, 이슬람교도인 화학자가 있고, 천체 물리학자인 신부도 있고,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목사가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도킨스를 비롯해서 진화론자들이 쓴 최근의 종교나 종교와 과학에 대한 저작마저도 종교를 바라보는 입장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사회적 활동인 종교와 과학은 과학 지식과 종교 신념의 충돌이라는 지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차원적 현상이지요. 그래서 이 둘에 대한 논의의 양상은 항상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과학이나 과학 기술이 적용되는 문제를 다룰 때, 자연 과학자나 공학자뿐만 아니라, 종교나 윤리 관련 연구자나 이해 당사자들을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종교와 과학이 맺고 있는 현실적인 관계를 단순하게 범주화시킬 수 없음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이년 전 배낭여행 중에 잠시 들렀던 남미 볼리비아의 코차밤바가 생각납니다. 머무르는 동안 날마다 도시 중앙에 있는 광장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남미의 고산도시에서 유럽식 광장을 만나니 신기했습니다. 광장은 서구 문명의 상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럽이나 북미의 거의 모든 땅에는 광장이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광장에는 서구 문명에서 주인 역할을 한 그리스도교가 떡 하니 버티고 있지요. 한때 유럽의 식민지였던 남미도 예외는 아니었던 겁니다. 코차밤바의 중앙 광장에도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고, 주변에도 몇 개의 성당이 흩어져 있습니다.

광장 주변에는 성당도 있지만, 은행과 관공서, 식당과 기념품 가게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가게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곳이 광장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성당 주위에 빼곡하게 들어선 인터넷 PC방들이었습니다. 거의 한 집 건너 하나가 인터넷 PC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동전화 같은 통신 관련 사회 기반시설이 뒤쳐진 나라일수록 인터넷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PC방이 많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인터넷 전화를 하고 컴퓨터 게임을 하더군요. 성당과 인터넷 PC방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성당의 종탑과 회랑을 비추는 불빛과, 인터넷 PC방의 네온사인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이 둘은 마치 이웃사촌처럼 보입니다.

성당과 인터넷 PC방은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습니다. 형형색색의 전통 복장을 한 그 땅의 주인들이나, 오래전에 정복자로 들어온 유럽 백인들의 후손들이 성당을 지나다가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인터넷 PC방에 들러 전화를 하거나 게임을 합니다. 성당에서는 기도를 하면서 신과 대화하고, 인터넷 PC방에서는 인터넷 전화나 게임을 통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들에게 성당과 인터넷 PC방은 그냥 대화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장소입니다. 전통 종교의 상징인 성당과 현대 과학 기술의 상징인 인터넷이 도시 한가운데서 나란히 이웃하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성당으로 들어가지만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마 잠깐 기도를 드리고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PC방으로 들어간 사람은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터넷 전화를 해도 컴퓨터 게임을 해도 금방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성당과 인터넷 PC방 모두 거의가 다 거쳐 가는 곳이지만, 머무르는 시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다른 흥미 있는 모습이 눈에 뜨입니다. 성당은 오래된 건축물입니다. 이곳저곳 훼손된 곳이 많고, 또 퇴락한 채 거의 방치되고 있는 성당도 눈에 자주 들어옵니다. 아마 성당을 수리하거나 새로 짓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PC방의 수는 나날이 늘어납니다. 물론 새로 짓고 단장한 곳이라 깔끔합니다. 쇠락한 성당과 새로 단장한 인터넷 PC방의 대조는, 그리고 사람들이 어느 곳에 오래 머무르는가는, 퇴락한 종교와 욱일승천하는 과학이라는 오늘날 둘의 현실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종교와 과학, 중세적 통섭에서 타자가 되다

이렇게 쇠락하는 종교와 욱일승천하는 과학은 과거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과학혁명 이전을 보면 종교와 과학의 위상은 지금과 사뭇 다릅니다. 그리스도교 담론은 출발부터 중세 스콜라주의까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을 중요시 했습니다. 이런 탓인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신앙과 이성, 신학과 과학은 뚜렷이 나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종교는 주연을 과학은 조연을 담당했지요. 오늘날 종교와 과학의 만남에서 그리스도가 유난을 떤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인 까닭은 이런 인식론적인 내적 동인과 역사적인 경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적 경험은 다음에 몇 번에 걸쳐 말씀드리고, 그리스도교 담론 체계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지요.

그리스도교 안에는 그 담론 체계가 본래부터 합리적이고 통일적이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늘 잠재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담론을 신(theos)에 관한 합리적 학문(logos)인 신학(theologia)으로 규정합니다.4) 당시 경쟁하던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드러내고자, 그 출발부터 ‘미토스’(mythos) 즉 ‘신화’를 부정하고, ‘로고스’(logos) 즉 ‘이성’을 택하면서 스스로를 합리적 정신에다 자리매김합니다. 미토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허구 이야기를 말하는 것으로 비유적이고 직관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와 달리 로고스는 이성적이고 사변적인 논의를 담고 있지요. 이 결과 ‘신화에 근거한 이방 종교’ vs ‘이성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이런 도식이 깔끔하게 성립합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담론에서 종교로서의 실천적이고 실존적 차원이 제거되거나 무시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 교회가 로마 제국의 사제가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체계화와 통일화는 급속도로 진행됩니다. 이런 궤적의 정점에 스콜라주의가 자리 잡고 있지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완성되는 중세 스콜라주의는 신학 담론을 ‘자연의 영역’과 ‘은총(계시)의 영역’ 모두 포괄하는 장대한 체계로 구상합니다. 요새 유행하는 ‘통섭’이라는 용어를 쓴다면, 아마 ‘중세적 통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통섭을 이끈 당사자는 당대의 지식인인 그리스도교 사제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종교적 지식은 물론 철학, 수학, 수사학, 공학 등 그야말로 ‘모든’ 지식을 담당했습니다. 서구 사회에서 지식 담당자인 이들의 활동 영역에는 ‘신에 관한 탐구’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탐구’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자연 과학(science)에 해당하는 자연에 대한 탐구는 당시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죠. 이렇게 중세 지성인들에게 자연 탐구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 지식 체계는 종교적 진리(종교적 사유)에 기반을 둔 통일 체계에 포괄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종교와 과학은 신의 진리와 영광을 드러내는 상보적 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과학은 종교에 대등한 위상이 아닌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부차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고요. 이런 도식이 거의 1천년 이상 지속된 것입니다. 이 비대칭적 위상 체계에 균열이 생긴 것은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였습니다. 과학 혁명 이후 현대에 이르면서 종교와 과학은 상보적 관계에서 경쟁하는 길항적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는 이제는 경쟁적 관계가 된 과학을 다시 통일적 또는 적어도 상보적 위상으로 편입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종교와 과학을 다시 한 묶음으로 통합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오늘날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가 주류 과학의 과학 정의나 정당성을 문제 삼는 것은 이런 흐름에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가 과학의 종속변수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 다시 독립변수로 복귀하고자 하는 근본주의 그리스도교의 줄기찬 시도로 말입니다.

이렇게 인식론적 차원에서 종교 담론과 과학 담론의 균열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오랫동안 통일된 진리 체계를 추구했던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궤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과 체계에 익숙해져서, 그래서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리스도교의 관성이 여전히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종교와 과학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과학이 자기 전통 안에서 발생했다는 역사적 맥락 외에도, 이렇게 관련된 모든 영역을 인식론적으로 통일하고 체계화하려는 정신이 여전히 그리스도교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교의 이런 정신은 로고스 중심주의와 짝을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로고스 중심주의는 서구 정신의 오랜 특징입니다. 이것은 사유 체계를 합리적으로 통일된 정합체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표출된 것입니다. 서구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도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로고스 중심주의는 스스로를 가장 궁극적인 진리라고 주장하고 절대화하는 종교 담론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교에서 더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고스 중심주의와 종교적 절대주의가 함께 섞여 발효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담론 체계의 인식론적 특성입니다. 모든 것을 품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 담론의 꿈인 것이지요.

조화의 그리스도 상(Christo de la concordia)이 꾸는 꿈

저는 이 꿈을 코차밤바에서 보았습니다. 코차밤바를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 위에는 ‘크리스토 데 라 콘코르디아’(Christo de la concordia)라는 세계에서 제일 큰 그리스도 상이 우뚝 서 있습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 상보다 더 큰 40m 높이의 그리스도 상이 두 팔을 벌린 채 도시를,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 상이 두 팔 벌여 도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스도 상을 보던 저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도시를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그리스도 상을 세웠을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혹시 그리스도 상이 도시의 모든 것, 광장의 모든 것, 성당뿐만 아니라 PC방마저 품을 것을 믿거나 기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성당과 PC방을 함께 품는 그리스도, 종교와 과학마저도 내려다보고 함께 품는 그리스도교의 희망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상의 이름을 생각하니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이름에 들어 있는 ‘concordia’는 원래 ‘조화’나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상을 우리말로 하면 ‘평화의 그리스도나 ‘조화의 그리스도’가 됩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그리스도 상은 ‘종교와 과학의 조화’나, ‘종교와 과학의 평화’를 향한 꿈이 투사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상을 통해서 종교와 과학의 평화와 조화라는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듯합니다. 꿈보다 해몽이지요!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종교와 과학은 각각 서로 다른 영토를 지배하는 ‘타자’가 되었습니다. 300년의 이별 과정을 거친 종교와 과학을 한꺼번에 품으려는 시도는 상당히 무모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모하다고 느끼는 이러한 시도, 즉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와 과학을 함께 포용하려는 시도가 바로 서구 그리스도교가 지닌 오랜 전통이었고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일상의 삶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마무리 하는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달걀도 받고 교우들과 식사도 함께 했습니다. 어제 토요일은 정기적으로 공부하는 모임 날이었는데, 생명과 뇌에 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도중에 동영상을 몇 개 보았는데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는 뇌에 있는 신경세포가 죽죽 뻗어나가면서 새로 생성되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세포가 스스로 괴사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세포가 생겨났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활절 예배에서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것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 하루 전 성 금요일에는 지인을 문병하기 위해 서울대 병원에 갔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라는데, 수술 후 나아질 거라고 ‘예상’했던 증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의료진은 그 이유를 ‘찾고 설명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최고 수준의 의료진과 시설을 신뢰해야 하지만, 그것이 간단치 않은 줄 알기에 돌아오는 차에서 더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사순절 마지막 주말도 제 삶은 신앙과 과학으로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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