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산업선교회 위원장
![]() |
||
시흥교회서 정년 은퇴를 하시고도 21년간 원로로 계셨던 차관영목사가 2013년 소천하셨다. 차목사님은 1959년에 시흥교회에 부임하시여 35년간 시무한다. 당시 수도권 변두리 시흥의 소하리 도심에 진입하지 못한 이농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작은 교회에 부임했지만 오직 목양일념으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다.
그러나 이 어른이 다른 분들과 많이 다른 것은 교회부흥만 이루고 자기교회만 크게 짓고 누린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돌아보고 무엇보다 산업화로 인해 태동한 노동선교 초기에 참여하신 것이다. 당시 총회가 세운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위원으로 위원장으로 참여하신 몇 안되는 귀한 분인데 평가가 안된 것이 매우 아쉬워 앞으로 이정학목사도 그렇고 늦었지만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시흥교회는 1904년 시흥리 탑골에 전도인 도정섭 윤상덕의 전도로 임희서, 이성문 배정자등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된다(1928년 朝鮮 예수敎 長老會 史記-朝鮮예수敎長老會總會) 이후 우리교단의 걸출한 지도자인 차재명. 전성천, 오병수목사가 시무한다. 이후 차목사님이 시무하고 교회안정과 부흥을 이루고 은퇴후 부임한 두분의 목사님으로 인하여 교회는 큰 분란을 겪는 다. 현재 김형일목사는 2016년 부임하였다.
![]() |
||
차목사님이 산선에 관여하신 시기는 시기적으로 어렵고 힘든 때지만 무엇보다 국가와 경찰 노동부 기업으로 부터 도산을 불온시 당할 때다. 그 결과 영산의 실무자들이 구속된다. 총회서 조차 산업선교를 전도로 하자는 헌의가 올라오고 폐지논의도 없지 않았지만 이를 지켜낸 것이 위원회다. 이렇게 위원회가 흔들림없이 산선을 지켜주었기에 오늘의 영등포산선이 한국산업선교로는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차목사님의 이런 신앙관과 소명의식은 일찌기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전신)출신으로 교회와 목회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기반에 기인힌다. 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교회성장의 열매를 그 교회와 지도자들이 향유한 것이 아니라 공교회 사역을 위하여 그 열매와 결과를 나눈 것이다. 지금도 교회성장을 이룬 목회자는 많치만 그 성장의 결과물을 함께 공유한 분들은 흔치 않다.
당시 총회는 산업화로 인하여 영등포일대에 증가하는 공장으로 인해 농촌에서 이주한 노동자들이 늘어난다. 미국장로교 화이트목사와 미국철강노조위원장 렘지 장로가 방문해 한국도 산업화시대를 준비하라고 권유해 총회는 1958년 4월 19일 영등포산업전도위원회(위원장:계효언, 부위원장:방지일)을 조직한다. 그리고 첫 실무자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가 강경구 전도사를 파송한다.
![]() |
||
당시 영등포, 양남동 일대에 훗날 영은교회, 문래동교회, 당산동교회의 전신은 모두 공장 내 예배처소였다. 그후 한영방직 내에 있던 한영교회가 독립했고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동아염직과 대한모직및 대동모방에서 직접 예배인도를 하셨다. 그리고 산선의 실무자 급여를 영락교회는 적어도 1980년 중반까지 지급했는 데 한 때 기업가 장로들중에 끊어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영락교회를 바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이후 김운성목사 부임후 영등포산선의 고 조지송목사 추모행사에 그 때를 기억하고 지원을 했는 데 당시 우리교단의 학교, 선교단체, 방송국까지 영락교회가 돕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람들은 한경직목사를 서북청년단과 관련지어 비난하지만 당시 월남한 서북계 청년들이 교회는 나왔으나 그런 지시나 지원을 한 증거는 없다. 한목사가 신사참배를 하고 80년 국가조찬기도회를 주관한 것에 대해서는 이후 종교의 노벨상이라는 탬플턴상 수상식에서 자신의 죄인이라는 고백적 말씀을 하신 바 있다.
훗날 영등포의 공장내 3개 예베처소 모아져 영은교회가 되고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박조준목사가 부임한다. 또 영등포산업전도회 전임 목사로 조지송를 안수하여 파송해 공장내 예배와 성경공부를 한다. 나아가 시흥지역의 시흥교회(차관영 목사), 양평동교회(이정학 목사), 도림교회(유병관 목사)등도 산업부 혹은 야학을 운영하게 된다.
![]() |
||
당시 서울역에는 용산교회(유호준 목사)가 청계천이 가까운 연동교회(김형태 목사)와 왕십리의 무학교회(홍성현 목사)도 인근의 노동자들을 위한 검정고시 야학과 이들을 배려하여 산업전도부를 만든다. 무학교회 홍성현목사는 전도사로 장신대 현신 출신 이대성, 정종훈, 진방주목사등이 여기를 거쳐갔다.
차목사님은 기본적으로 보수 신앙인이었지만 그 시대 누구보다도 시대적 징조를 아시고 이를 목회적으로 감당하는 데 애를 쓰신 분이다. 당시 영등포산업선교회 위원을 함께 하신 양평동교회 이정학목사님과 같이 한신을 나온 것이 장신 출신과 다른 소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영등포산업선교회 고 조지송목사나 인명진 목사는 여러자리에서 후진들에게 증언하기를 당시 자신들이 흔들림없이 산업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위원회 지지 때문이었다고 하신 바 있다. 남노회 상도교회 고 이순경목사는 신학생 때 인목사가 전도사를 지낸 인연으로 총회서 산선폐지론이 나왔을 때 병중에 택시를 불러 직접 출두해 변호하셨다고도 한다.
![]() |
||
이외에도 당시 청담교회 조남기 목사나 남현교회 이정규도 위원 활동들을 하셨다. 특히 차관영목사의 특별한 점은 일반 목회자와 달리 은퇴하신 후에도 민중교회을 돕는 ’작은자교회 목회연구원‘ 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지원을 한다. 이렇게 목회일선에선 물러나셨지만 변화죈 형태의 산업선교를 잇는 후진들을 도운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일은 차목사님의 신앙과 인격에 대한 시흥교회 당회와 교우들의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은퇴 목사가 자기 살길만 추구해도 누가 뭐라고 하겠는 가? 그러나 차목사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온교회가 믿고 따른 것은 정말 흔치 않는 일이다. 또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부목사로 계셨던 선배 노신복, 임천규, 고 이필로, 한종희, 전양식, 신정, 황인돈, 박흥신목사가 차목사님의 뜻과 유지를 잘 섬겼기 떄문이라고 본다.
광명 소하리에 기아자동차 공장이 들어오고 인구가 늘고 장로였던 이신행이 기아자동차 사장이 되고 국회의원도 지낸다. 이런 인연으로 현 도림역 인근의 기산건설부지에 당시 호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구로동에 갈릴리교회를 개척한 것을 그곳으로 확장 건축해오는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 이렇게 시흥교회는 산업선교 뿐만 아니라 노회와 총회의 사회선교 분야에 적극참여 한다.
구미 동녁교회를 개척해 사역하다가 황홍열박사가 봉천동에 세운 친구교회로 부임한 이동규목사도 시흥교회를 거쳤고 현재 마을목회와 시민사회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민건동목사도 시흥교회 출신이다. 그러나 차목사님이 직접 관여한 후임으로 인한 교회적 혼란으로 크게 실망하시고 힘들어 하셨고 들었다. 또 예배중 봉헌함을 돌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교인들을 생각해 폐지했으며 NCCK서 인권위원장과 평화 통일위원장을 맡기도 한다.
교회 자체적으로도 탁아소와 어린이 집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도 운영했다. 사후 의학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시신도 사후 기증하기도 하였다. 자녀는 2남 1녀로 장남 성진은 한겨례신문 기자를 지냈고 차남 성수는 고려대 출신 사회학 박사로 동아대 교수가 된다. 이후 노무현을 도와 대통령이 되자 청와대 시민사회 수석비서관을 지낸다 이후 차성수는 금천구 민선 5,6기 구청장 지내고 노무현재단 이사로 있다가 2025년 3월에 7대 이사장이 된다.
![]() |
||
일화중 하나는 인명진목사가 장신대 졸업후 산업선교 훈련의 일환으로 청주에서 넝마주이를 할 때인 1975년 아들 성수가 고대에 입학한다. 이에 세상훈련을 하라고 인명진목사를 따라 참여케 한 것이 오늘날 자신을 있게 한 것이라고 차성수이사장은 후술한 바 있다. 구청장을 지내며 역사적으로 성장과 아픔을 간직한 공단의 새로운 컨셉과 금천구의 지식산업센타등 현대와 되고 변화하는 공장모델 정착을 위해 애썼다는 평이다.
[GoodTV News 20151124] 차관영 시흥교회 원로목사 1주기 – YouTube
![]() |
||
| * 1975년 청주서의 넝마주이 체험중인 차성수 맨우측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