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부활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다!   

                                       대한민국 개신교 문제
윤정구교수(Professor Emeritus of Ewha School of Busines at Ewha Woman’s UniversityUniversity of Iowa, Iowa City)

<Built to Last: 성공하는 기업의 7가지 습관>의 저자 Collins와 Porras는 70년 동안 상장 기업 평균보다 15배 이상 기업가치를 키워온 기업들을 찾아서 이 기업들 성공의 비밀을 밝혔다. 포라스와 콜린스의 영향으로 한 때 우리나라 기업들 사이에서도 비전을 세우는 것이 열풍이 되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를 풍미하던 경기가 물거품으로 꺼져 성장의 동력이 사라지자 비전너리 회사로 등재되었거나 위대한 회사들의 목록에 있었던 많은 회사들이 무너져 내렸다. 신자유주의 거품과 함께 비저너리 회사로 추앙받았던 노키아 모토롤라 등 회사의 대부분이 무너졌다.

이들이 무너진 이유를 분석한 책이 같은 저자 Collins가 쓴 <How the Mighty Fall? 골리앗은 어떻게 무너졌나?>이다.  비저너리 컴퍼니를 발굴하던 같은 저자가 쓴 것이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이 책에는 한 때 세상의 표준이었던 회사, 리더, 기업, 사회가 무너지는 비밀을 잘 파헤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최고의 기업으로 추앙 받았던 기업들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분석하고 있다. 이들이 분석대상으로 삼은 회사는 비저너리 컴퍼니로 추앙받던 회사들이다. 제대로 된 성공을 맛보지 못한 기업은 해당 사항이 아니다.

첫 단계가 가장 중요한 단계다. 모든 몰락은 자만심의 세균에 감염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거둬들인 성공을 자신의 시스템의 우수성이나 종업원들의 뛰어난 협업능력 아니면 운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100% 자신의 우수성 때문이라고 규정하는 자만심(Hubris)에서 몰락이 시작된다.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겸손함을 취하는 것이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자만심은 자신들 성전에 모셨던 목적에 대한 시각을 가리는 먹구름으로 드리운다.

둘째는 자만심으로 목적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면 초심을 잃고 탐욕과 사욕이 살아나 목적의 자리를 채운다. 사욕과 탐욕이 목적을 대체하기 시작하면 큰 것을 위대한 것으로 착각한다. 이 단계에 진입한 회사에 다니는 구성원들은 영혼을 잃어버린 불안을 숨기기 위해 말마다 영혼을 끌어당긴다는 의미의 “영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기 시작한다.

셋째는 조직이 무너지고 있다는 객관적 자료가 여기저기 제시되고 있음에도 자기방어시스템을 가동해서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방호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옳다는 방호기제의 믿음에 갇히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세상을 적으로 규정한다. 자신이 믿음의 감옥에 갇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편견의 원천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넷째 단계는 명백하게 회사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들도 인정하고 큰 한방을 찾는 단계이다. 자신을 구제할 수 있는 카리스마 CEO를 외부로부터 영입하거나 모든 실패를 만회해줄 수 있는 한방으로 구세주를 찾는 단계다. 한 곳에 올인하는 것은 전략이 상실되었음을 자인하는 행위이고 마지막 순간에 구세주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들을 스스로롤 일으켜 세울 효능감을 모두 상실했다는 뜻이다.

마지막 단계는 결국 죽음 직전에 이르러 소생(Redemption)의 기미가 안 보여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단계이다. 다른 모든 대안들은 사라지고 희망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남은 단계다.

이런 원리는 큰 기업들이 무너지는 이유를 설명하지만 똑같이 성장의 피크를 찍었던 국가, 종교, 리더가 무너지는 과정도 설명한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개신교는 어떤 종교보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속에 깊은 위기를 숨기고 있다.

1. 개신교 자만심(Hubris)의 시작: 1973년 여의도 집회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여의도 광장에 무려 110만 명의 성도가 모였다. 이때 통역사가 지금 논란의 중심에 선 김장환 목사다. 이 대규모 전도 집회는 한국 기독교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10만명을 동원한 개신교 위세는 동시에 한국 교회가 자만심(Hubris)에 빠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부흥을 이뤄냈다는 오만함이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잃지 말아야 할 목적에 대한 겸손함을 덮어버린 것이다. 당시의 성공은 교회의 본질인 복음 전파와 사회적 약자 돌봄보다는 ‘숫자’와 ‘규모’의 성공에 매몰되게 만들었다. 《How the Mighty Fall?》에서 언급된, 큰 성공을 자신의 우수성 때문이라고 규정하는 몰락의 서곡이다.

2. 눈먼 골리앗의 등장: 탐욕과 사욕이 목적을 대체하다

자만심에 눈이 멀자, 한국 교회는 원래의 목적이었던 ‘신앙’ 대신 ‘탐욕’과 ‘사욕’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온 신자유주의 이념의 순풍을 달고 대형 교회는 더 큰 건물을 짓고,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며, 교세 확장에만 집중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라지고 크고 화려한 것이 위대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화려한 교회에 파묻혀 하나님과 예수님이 장사 지내지는 과정에서 대형 목사들이 거대한 교회를 소유한 영적 리더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이들의 신자유주의적 기복신앙 속에서 성도들은 불안을 감추기 위해 영혼을 끌어모으는(영끌) 듯한 공허한 신앙 생활에 매달렸다. 이들은 ‘숫자’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세우며 스스로의 불안을 잠재우려 했지만, 이는 결국 본질을 잃어버린 신도를 모두 ‘눈먼 골리앗’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3. 자기방어의 감옥: 문제 인정을 거부하다
교회가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다는 객관적인 지표(예: 신자 수 감소, 청년층 이탈, 사회적 비판)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방어 기제를 가동하며 ‘세속의 공격’이라 규정하고, 스스로를 ‘믿음의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들만이 옳다는 확신에 갇혀 외부의 비판을 적의 공격으로 돌렸고, 결국 내로남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동성애자와 소수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세를 결집하는 노력도 자신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자기방호다. 여의도와 광화문으로 나눠 진행되던 집회를 통해 마치 실패의 징후를 보면서도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방어하는 몰락의 세 번째 단계를 넘었다.

4. 마지막 한 방을 꿈꾸다: 기괴한 지도자의 출현

실패가 명백해지자, 한국 기독교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자처하는 고통받는 인물로 무신론자이자 무속주의자인 윤석열 김건희을 세웠다. 이들은 다시 스스로 왕이 되기를 소망했던 무신론자 윤석열에게 마지막 한방을 기대하며 윤어게인을 외치는데 참여했다. 숨어서 윤에게인 운동에 교인들을 동원한 세력들이 이만희, 한학자 같은 이단 교주들은 물론, 김장환, 이영훈, 전현보, 전광훈과 같은 일부 기성 교회 목회자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은 자신의 신도에게 카리스마를 드러내며 윤어게인을 통해 마지막 한방을 노렸다. 이들 대부분은 평소 자신을 부활 예수로 치켜세운 배교자들이다. 이들은 윤석열이라는 무신론자를 앞세워 ‘마지막 한 방’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지만, 이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개신교의 파멸로 이어지는 올인을 행사했다.

5. 죽음 직전, 희망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다.

이제 한국 개신교는 몰락 직전의 마지막 단계에 놓여 있다. 기괴한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지도자들의 행태와 사회적 비판은 신실한 교인과 상식을 추구하는 지지자의 마음을 떠나게 했다. 한국의 개신교는 더 이상 소생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죽음 직전에 놓인 기업처럼, 다른 모든 대안은 사라지고 ‘희망’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았다.

인간이 위대한 점은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는 불사조라는 점이다. 처칠이 전쟁의 위기 속에서 희망을 놓지 않았고, MS가 겸손함을 되찾고 근본적인 혁신을 통해 부활했듯이, 한국 기독교도 자신들의 몰락을 인정하고 자신의 아픔을 숨기기 위해 덮어놓은 거적을 들어내고 구더기가 생긴 상처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찾아야 한다. 상처를 그대로 직시하는 용기가 희망의 불씨다.

개신교는 규모의 성장에 대한 허영을 버리고, 복음의 본질(Know Why)로 돌아가한다. 자기방어의 감옥에서 나와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긍휼의 초심을 되찾아야 한다. 이는 크고 화려한 외형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외형 속에 숨겨진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창조적인 부활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청년들을 믿음의 다윗으로 세우고 이들을 통해 무너진 믿음의 성전을 복원하고 미래의 횃불을 살려내야 한다. 우리는 이번 내란 사건의 차거운 눈 내리는 밤을 통해 청년 여성들이 다윗으로 세워질 가능성을 목격했다. 이들을 통해 청년 남성들을 목적을 다시 찾는 협업의 공동주체로 세울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남성 여성의 이원론을 넘어 이들이 신앙의 청년으로 다시 일어선다면 지금의 기독교에도 다시 희망의 봉화가 세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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