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제주 대정(모슬포) 의 추사 유배지 기념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조선국 승문원 검교 등을 지냈다. 화려한 금수저 집안이지만 짧은 생을 살았고 그중 13년은 유배(귀향)을 갔다. 김정희의 호는 완당(阮堂) 이지만 그 외에도 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다수 있다. 2014년까지 확인된 것만 540여 종에 이르고 필명도 160가지를 서구의 볼테르를 능가한다는 평이다. 기네스에 넣는다면 기록감으로 노과(老果)라는 말은 과노(果老)의 오기로 과천사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완당은 자신이 존경했던 청나라의 학자인 완원(阮元)의 이름을 따서 지은 호다. 유홍준이 쓴 김정희 평전의 제목도 ‘완당평전’. 말년에는 노과를 즐겨 썼다. 확인된 것만 총 72개다. 실제는 100개 이상의 호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한국사에서 아호가 가장 많은 사람으로 꼽힌다. 이렇게 아호가 많은 이유는 그림마다 매번 다른 별명을 썼기 때문이다.

1786년(정조 10년) 6월 3일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출생, 최근 연구에 따르면 충남 예산이 아닌, 서울 명동 부근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1856년(철종 7년) 11월 7일(음력 환산시 조선 철종(재위 7년)조, 10월 10일, 향년 70세)경기도 과천현 동면 주암동리 과지초당(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

그의 가계는 화려한 데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과 유준주의 딸 기계 유씨사이에서 맏아들로 그의 조부다.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노영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상경하였고 가문은 멀기는 했으나 왕실의 이중 외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력가였다. 그의 집안은 서인 중진인 김홍욱의 후손이다. 노론의 당원이 된 뒤에는 고조부 김흥경이 영조 때 재상이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딸로 서녀인 화순옹주의 부마로 월성위가 되었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 7세 때 그는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1819년(순조 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권지세자시강원, 예조 참의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로 효명세자를 보필하였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그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사상 형성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朴齊家)의 제자가 되면서 그로부터 북학파 사상을 배우고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副使)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

당시 연경의 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 四庫全書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  당시 청의 학풍은 한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나라, 명나라의 성리학을 관념적이라며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청나라 중기의 경학의 대가였던 완원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비롯한 고증학의 학문적 체계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추사라는 자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과 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다..

예문관검열을 거쳐 삼사의 언관을 두루 역임한 뒤 승문원검교, 1823년 규장각대교,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보덕을 거쳐 필선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해 파면되었다.  1830년 그 아버지 김노경은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로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다. 이때문에 김정희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노리고 있었으나 순조가 죽던 1834년(순조 34년) 순조의 특별 배려로 유배에서 풀려난다.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의정부의 검상(檢詳)으로 되돌아온 뒤 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을 거쳐 다시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유배 생활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씨가 집권하자 이번에는 김정희 자신이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예순세 살인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다. 그의 유배지에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김유근 등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 권돈인(權敦仁)이 의정부영의정으로 김정희를 돌봐 주었는데,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그가 실수를 하게 되었다(→헌종묘천 문제).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실수한 의정부영의정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출가와 집필생활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이 때는 안동김씨의 세도가문이라 서용의 명령은 내려졌으나 현직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경기도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작품 중에는 후일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 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문집으로 완당집, 완당척독 阮堂尺牘, 담연재시고 覃硏齋詩藁 등이 있고 1934년에 간행된 완당선생전집이 있다.

사후 서예가로 명성을 날렸고 사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그의 사상과 학문이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학파 사상에 대한 벽파 및 위정 척사파 계열의 반감으로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검토, 연구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가서 그의 문집과 저서, 시문 등을 모은 완당선생전집이 간행되었다.

예산 추사 김정희 생가 고택이 잘정비 되어있는 데 단아하고 격조 있는 한옥으로, 오래된 기와와 마루, 고즈넉한 담장이 어우러져 세월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이 집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학문, 예술의 한 흐름이 스며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평이다.

김정희의 증조부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어 하사받은 집에서 그는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곳에서 학문과 예술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생가 곳곳에는 그의 글귀가 놓여 있었고, 단순한 문장 하나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어 그가 지닌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김정희는 어릴 적부터 그림과 글씨에서 독창성을 드러냈고, 기억력 또한 남달랐다. 스물넷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그는 청나라 최고의 학자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귀국 후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학문을 더욱 깊이 탐구하며, 시대를 초월한 사유를 이루었다. 그의 제자는 무려 삼천 명에 달했다.

이는 단순한 선비의 숫자가 아니라, 그가 존경받는 진정한 스승이었음과 학문과 지혜를 나누는 데 열의가 어떠했는지를 짐작게 한다. 그의 삶이 언제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55세였던 헌종 때 정쟁에 휘말리며 제주도에 9년간 유배되었다. 고립과 시련 속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독창적 글씨체인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의 글씨는 단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힘과 고요한 집중, 사유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그의 글씨가 알려졌다는 사실은, 그 예술적 경지와 인품이 국경을 넘어 감동을 주었음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가 그의 생가를 찾는 의미는 단순한 역사적 탐방이 아니다. 김정희의 삶은 재능과 학문을 어떻게 사랑하고, 시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산 교육의 장이다.  

평가

김정희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다. 신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민태호, 민규호, 강위 등 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 등을 이끄는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며, 대원군의 정책도 북학에 기초한 실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한편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유명한 인물로는 오경석이 있고, 난초를 배운 이는 이하응이 있다.

그리고 지인에게 난초를 그려 줄 때 별호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한국의 위인 가운데 가장 많은 별호를 가지고 있다. 추사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별호로서 서호(書號)이다. 그러나 다방면에 걸친 업적에 만큼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 역시도 유교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8세기에 싹튼 풍속화와 진경 산수화를 낮게 평가했다. 평소 불교의 교와 선에 깊은 안목과 수증을 바탕으로 지내었으며 말년에 불법에 귀의하고 과천에서 은거하였다.

추사 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한 사람은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역사학자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이다. 그는 최초의 전문적인 추사연구가라 할 수 있다. 보기 드문 “추사매니아”이기도 하다. 추사의 인격과 학문에 매료되었던 후지츠카는 한 · 중 · 일 국경을 넘나들며 추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문집 등 기초자료의 부실을 보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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