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넘어 결단으로
김승범목사(2009년부터 2024년까지 남아공과 에스와티니에서 PCK 선교사로 사역했다. 프리토리아 대학교에서 기독교 윤리와 교리 전공으로 Th.M과 Ph.D를 취득했다. 연구 분야는 흑인해방신학, 선교신학, 에큐메니즘, 그리고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신학 등이다. 현재 세계선교협의회(Council for World Mission) Partner in Mission으로 필리핀 유니온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 Philippines)에서 경제·생태신학과 기독교 사회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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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표된 「카이로스 선언」(Kairos Document)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선 교회의 공적 신학 고백이었다. 선언은 ‘지금-여기’의 때(kairos)를 분별하라 촉구하며, 억압을 ‘법과 질서’로 정당화하는 국가신학과 추상적 사랑·중립 담론으로 구조적 악을 흐리는 교회신학을 비판했다. 대신 억압받는 이들의 관점에서 성서를 읽고 행동하는 예언자적 신학을 제시했다. 이후 ‘카이로스’ 정신은 국경을 넘어 확장되었다. 팔레스타인 「카이로스」(2009, 베들레헴, A Moment of Truth: A Word of Faith, Hope and Love from the Heart of Palestinian Suffering)는 “진리의 순간(A Moment of Truth)”을 선포하며 점령 종식을 호소했고, 이에 화답해 미국의 Kairos USA(2011/2012) Call to Action, 영국의 Kairos UK(2013) Time for Action, 네덜란드(2011), 캐나다 연합교회·그리스도제자교회의 목회적 응답(2010), 브라질 Kairos Palestina Brasil(2012) 등 각국의 성명과 로드맵이 뒤따랐다. 이러한 흐름은 Global Kairos 네트워크로 묶여 연대 문서·학습 자료·캠페인이 꾸준히 생산·공유되고 있다. 2025년, 발표 40주년을 맞아 우리는 이 선언이 오늘 한국 교회에 던지는 물음—기억을 어떻게 결단과 제도로 바꿀 것인가—을 다시 묻는다.
198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표된 카이로스 선언은 다수의 흑인과 유색 인종을 억압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체제 아래서 교회가 어떤 신학과 실천을 택해야 하는지 날카롭게 물었다. 이 선언은 권력 질서를 신성화하는 국가신학(state theology), 구조적 악을 흐릿하게 만드는 교회신학(church theology)을 비판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관점에서 성서를 읽고 역사에 개입하는 예언자적 신학을 촉구했다. 40년이 지난 2025년, 한국 교회 역시 “진리의 순간(a moment of truth)” 앞에 서 있다. 기후 재난이 일상이 되고, 불평등과 혐오 정치가 일상 언어로 굳어지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탄압이 극심하던 시기, 1984–1985년 타운십 민중봉기가 거세지자 백인 정부는 1985년 7월 20일 부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규모 검거·언론 통제·집회 금지로 저항을 짓눌렀다. 교회와 성직자들까지 감시·구금 대상이 되었고, “질서와 안보” 담론은 억압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언어를 동원했다. 이때 현장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이 순간을 신학적으로 분별해야 한다’며 모였고, 요하네스버그의 상황신학연구소(Institute for Contextual Theology, ICT)가 조사·토론·초안 작업을 뒷받침했다. 같은 해 8월 P. W. 보타 대통령의 이른바 ‘루비콘 연설’ 2) 은 개혁 기대를 꺾고 강경 노선을 공식화하여 국제 제재와 국내 저항을 한층 격화시켰으며, 교회 내부의 갈등도 심화시켰다.
카이로스 선언은 이러한 현실을 ‘진리의 순간’으로 규정하고, 교회가 중립을 가장할 수 없음을 천명했다. 선언은 먼저 때의 분별(kairos)에서 출발한다. 지금-여기의 역사적 위기에서 신학은 추상적 일반론이 아니라 결단을 요구받으며, 신앙은 고통받는 이들과의 실제적 연대 속에서만 진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음은 “무엇을 더 말할까?”에서 “무엇을 언제·어떻게 바꿀 것인가”로 전환된다.
카이로스 선언은 이러한 현실을 ‘진리의 순간’으로 규정하고, 교회가 중립을 가장할 수 없음을 천명했다. 선언은 먼저 때의 분별(kairos)에서 출발한다. 지금-여기의 역사적 위기에서 신학은 추상적 일반론이 아니라 결단을 요구받으며, 신앙은 고통받는 이들과의 실제적 연대 속에서만 진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음은 “무엇을 더 말할까?”에서 “무엇을 언제·어떻게 바꿀 것인가”로 전환된다.
2) P. W. 보타의 ‘루비콘 연설’은 1985년 8월 15일 더반에서 열린 국민당 나탈 대회 개회사로 발표되었다. 국제사회가 아파르트헤이트의 중대 개혁(특히 넬슨 만델라 석방과 다수결 원칙 수용)을 기대했으나, 보타는 다수지배를 거부하고 만델라 석방도 부정하며 강경노선을 재확인했다. 연설은 곧바로 랜드화 급락과 대외신용 경색, 제재 압박 심화 등 경제·외교 위기를 촉발했다.
선언은 억압을 신성화하는 국가신학을 해체한다. ‘법과 질서, 치안, 반공’ 같은 언어가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할 때,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우상숭배다. 동시에 선언은 선의와 사랑의 추상으로 구조적 악을 흐리거나 ‘양측 모두 잘못’ 식의 균형 담론으로 책임을 희석하는 교회신학을 비판한다. 중립은 미덕이 아니라 현 상태의 편에 서는 선택이며, 정의 이전의 화해는 거짓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비판을 넘어 선언은 예언자적 신학을 제시한다. 성서는 억압받는 이들의 관점에서 읽혀야 하며(피억압자 중심 성서 읽기), 해석은 사회·경제·정치 구조 분석과 결합되어 행동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누가복음 4장의 해방 선언과 아모스 5장의 정의 요청은 현재형 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선언은 비폭력적 시민불복종, 국제 제재 지지, 불의한 법과 정책에 대한 공개적 저항, 고통의 현장과 동행하는 교회의 공적 실천을 촉구한다. 예배·교육·목회·선교는 이 동일한 방향—해방과 회복—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카이로스 선언은 문서 이상의 교회적 사건이었다. 신학자만이 아니라 현장 목회자·수도자·평신도가 함께 참여해 작성되었고, 다양한 전통의 교회가 공동 토론으로 다듬었다. 이 참여적 형식은 내용 자체의 일부였다. 곧, 해석의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일방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체험과 증언이 신학의 기준이 되는 공교회의 과정이다. 그 결과 선언은 기억을 넘어 언약과 질서로 이어지는 실천의 안배—저항과 화해의 올바른 순서, 정의를 통한 평화—를 교회의 생활 규범으로 제시했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기후·생태 위기와 불평등, 전쟁의 그늘 속에서 우리 신앙의 자리를 다시 묻게 한다. 카이로스 40년은 기념이 아니라 결단의 시간이다. “누구의 안전이, 누구의 눈물 위에 세워졌는가.” 예배·예산·교육·대외 실천을 하나로 엮는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의 앞에서 침묵을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해가 되지 않는다’는 자기위안, 곧 ‘무해한 신앙’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물음은 자연스레 실천으로 향한다. 카이로스를 기억한다는 말이 무엇을 바꾸고, 언제 시작하며, 누구와 책임을 나눌 지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언어는 다시 안전한 추억에 머무를 뿐이다. 이제 남아공의 외침을 한국 교회의 운영 원칙과 생활 규범으로 번역할 때다.
1. 기념이나 추억이 아니라 결단의 이름으로
우리는 종종 ‘기념’을 안전한 기억의 틀로 사용한다. 사진을 전시하고, 문구를 인용하고, 연도를 부른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달력의 “적절한 때”가 아니라, 역사의 균열이 요구하는 결단의 시간이다. 하나님 나라의 때(kairos)는 일상의 시간(chronos)을 멈추고 들어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릴지 선택을 요구한다. 1985년 남아공의 교회들처럼, 2025년 한국 교회도 지금-여기에서 신앙이 실제로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 드러내야 한다. “정치에 휘말리지 말자”, “교회는 사랑만 말하자”는 구호는 중립의 미덕처럼 보이나, 대개는 불편한 사실과 거리를 두는 장치로 작동한다. 남아공의 흑인 신학자 앨런 보삭(Allan Boesak)이 『Farewell to Innocence』 3) 에서 지적했듯, 무구(無垢)함을 자처하는 태도는 현실의 폭력을 보지 않겠다는 선택이 된다. 저임금·야외노동·기후재난의 고통은 평균값 통계 속에 지워지고, “기후는 원래 변한다”는 말이 눈물을 희석한다. 값싼 화해와 예의 바른 중립은 강자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안전핀이 된다—그리고 복음은 그 안전핀을 뽑아내라 요구한다. 로마서 13장은 ‘법과 질서’ 절대화가 아니라 공공선에 복무하지 않는 권력을 비판적으로 분별하라는 초대다. 누가복음 4장의 복음 선포는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의 해방을 ‘오늘’ 여기서 선언한다. 예배당 안의 경건이 예산·입찰·투자·개발·구매의 자리에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 경건은 이미 자기 배반이다.
3) 앨런 보삭은 남아공 개혁교회 목사이자 신학자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이끌며 흑인해방신학을 증언해 온 인물이다. 『Farewell to Innocence』는 교회의 ‘무구함’이 억압을 가려 왔음을 비판하고, 흑인신학과 블랙 파워를 남아공 현실 속에서 결합해 해방 윤리를 제시하는 책이다. 신학·예배·정치를 나누지 말고 역사적 책임을 자각하여, 예언자적 저항과 실천적 연대로 나아가자고 초대하는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기념은 결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예배의 언어는 예산의 숫자로 이어지고, 교회의 성명서는 공간 제공·법률비 지원·연대기금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교육은 교실을 넘어 현장 학습과 FPIC(자유·사전·충분 고지·동의) 절차를 포함해야 한다. 의사결정은 처음부터 당사자가 말하고 결정하는 구조로 바꾸고, 교회 자산은 화석연료·무기·고금리 금융 배제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카이로스적 신앙의 최소치다.
카이로스 40년은 단호히 묻는다. “당신의 침묵은 누구의 눈물을 밟고 서 있는가?”당신의 대답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한 쪽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기념의 꽃다발을 내려두고 결단의 체크리스트를 집어 드는 순간에 우리는 카이로스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다.
2. 한국 사회가 우리에게 들이대는 거울
한국 사회는 한국 교회에 앞에 자신을 살피라는 거울을 들이밀고 있다. 분단과 전쟁경제, 성평등의 역행, 이주민과 난민들 배제하고, 장애인의 이동권과 교육권이 쟁점화되고, 돌봄 노동이 불완전하며, 빠르게 심화되는 기후·생태 위기 등의 모든 것은 우리의 신앙이 실제로 어디에 서 있는지 묻는다. 재난은 중립적이지 않다. 태풍·폭염·산사태·침수·단수·정전은 가장 약한 이들에게 더 깊은 상흔을 남긴다. “발전”이라는 명목의 광산·매립·대형 개발 앞에서 하천과 논밭을 지키는 주민들이 치르는 시간, 비용과 명예의 대가는 언제나 지나치다.
우리가 손볼 것은 어휘가 아니라 질서이다. 말로만 하는 기도는 행동으로, 문서로 나오는 선언은 예산의 반영으로 나타나야 하며, 의지는 제도로, 그리고 공간 제공, 법률 지원, 긴급 연대기금으로 답해야 한다. 교회가 관여하는 모든 사업에는 FPIC를 도입해 당사자들이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권리까지 보장해야 한다. FPIC는 강요 없는 자유(FREE), 사업 확정·착수 이전(PRIOR), 충분하고 이해 가능한 정보에 근거
(INFORMED), 공동체가 스스로 정한 방식의 동의·조건부 동의·거부 및 철회 권리(CONSENT)를 뜻한다. 이를 위해 회의 시간과 장소는 공동체가 정하도록 하고, 통역·점자·수어·무장애 동선을 보장하며, 예산·환경·사회·젠더·장애 영향, 대안, 중단/철회 절차를 담은 정보 패키지를 쉬운 언어와 해당 지역 언어로 제공해야 한다. “동의 없이는 진행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분명할 때, 사랑은 감정을 넘어 거버넌스가 된다.
의사결정 구조는 처음부터 당사자(여성·청년·장애·이주·노동·농어민)가 참여하도록 재정비해야 하며, 자산 운용은 탈화석·비무기·반고금리라는 명확한 원칙으로 재배치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정치화’가 아니라 공적 신앙의 기초 체력인 것이다.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주한 얼굴이 곧 우리의 신학이다.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지금 가능한 작은 전환으로 방향을 정해면 된다. 다음 분기 예산에 ‘회복과 배상’ 항목을 신설하고, 매월 현장 증언 예배를 드리며, 모든 사업·구매에 간이 FPIC 체크리스트를 붙여서 작은 전환이 방향을 만들고, 그 방향이 미래의 신뢰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카이로스가 한국 교회에 요구하는 다섯 가지 회심
첫째, 자리 바꾸기—‘당사자의 목소리’에서 시작하도록 하자.여성·청년·장애인·이주민·노동자·농어민·도시 빈민이 정책 초안 단계부터 들어오지 못하면, 일은 곧 “그들에 대한” 프로젝트가 된다. 장로회·제직회·위원회에 최소 30%를 당사자·현장 활동가로 할당하고, 의제 설정권과 거부권을 보장하자. 회의 시간은 생활 리듬에 맞추고, 통역·점자·수어·무장애 동선을 기본으로 준비하자. 자리 배치는 정책의 품질을 좌우하는 구조다.
둘째, 예전의 전환—예배가 삶을 조직하는 캘린더가 되도록 하자.창조절·사순절·성령강림을 ‘생태 회개–정의의 금식–공동 서약’의 리듬으로 묶어 주일의 기도가 주중의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자. 창조절에는 에너지 절약과 생활교통 전환, 사순절에는 불의한 소비 줄이기·채식일 운영·폐기물 감축, 성령강림 시기에는 연간 행동 일정(캠페인·교육·법률 지원)을 채택한다. 매월 현장 증언 예배를 드려 노동·장애·이주·환경 당사자의 목소리가 설교를 대신하게 하자. 성만찬은 공정한 식탁 질서의 리허설이어야 한다.
셋째, 예산의 회개—장부가 신학을 말하게 하자.교회 예산의 10–15%를 ‘회복과 배상(Repair & Reparations)’ 항목으로 고정하고, 태풍·폭우 피해 공동체 지원, 장애 접근성 개선, 이주·난민 법률비용, 여성·청년 안전망 등 회복 과제를 분기마다 집행해야 한다. 자산 운용은 화석연료·무기·고금리 금융 배제(네거티브 스크리닝)와 지역 재생에너지·공동체 돌봄·생태 복원에 대한 적극 투자(포지티브 전략)로 이원화한다. 분기별 “장부의 간증”을 공개해 얼마가 어디로 흘렀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수치와 이야기로 보고하자. 돈의 방향이 교회의 방향을 증언한다.
넷째, 연대의 제도화—선의가 아니라 계약으로 하자. 연대는 선언이 아니라 약속의 형식과 공개 책임으로 유지된다. 지역 단체와의 MOU·데이터 공유·공동 의사결정 체계를 표준화하고, 분기별 성과·책임 보고를 정례화하자. 집행 미이행분은 자동 이월해 누적 책임을 지게 하고, 외부 감사·시민배심·이해관계자 포럼으로 투명성을 높이자. 이렇게 연대는 감정이 아니라 제도가 된다.
다섯째, 교육의 재설계—책상에서 길 위로, 개념에서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교회학교·청년부·장년 교육에 ‘현장 주해(curriculum of context)’를 도입해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숲·하천·공단·항만·논밭·요양원에서 본문을 읽고, 그 자리의 역사·경제·생태 데이터를 함께 본다. 교사 연수에는 장애 인권·젠더 감수성·기후 과학·노동 권리 기본 모듈을, 청년 리더십에는 정책 문해력·예산 읽기·캠페인 설계를 포함하자. 성경은 현장에 있는 민중의 눈과 땅의 신음과 함께 읽힐 때 현재형 복음이 된다.
작게 시작하면 된다. 당사자 30% 규정 시범 도입, 매월 현장 증언 예배, 올해 안 ‘회복과 배상’ 예산 신설, 지역 단체 2곳과의 MOU 및 FPIC 전면 적용, 분기별 현장 주해 1회. 다섯 가지 회심이 맞물릴 때 교회는 중립의 안전지대에서 복음의 책임지대로 이동한다.
4. “정치하지 말라”는 말에 대하여
카이로스 신학은 특정 정당을 돕거나 손해 보게 하자는 말이 아니다. 권력과 돈의 질서가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해치는지를 분별하자는 요청이다. “정치하지 말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를 침묵하게 해 더 큰 정치(자본과 국가 권력)가 조용히 그대로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현 상태 편에 서는 일이다.
교회는 정파 동원을 피하고 공적 양심을 증언해야 한다. 강단은 특정 후보의 연단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최저임금, 안전한 일터, 장애 접근성, 이주·난민 보호, 평화, 기후 정의와 같은 의제를 말하는 일은 ‘정치 개입’이 아니라 공적 제자도이다. 예언자 전통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가?” 이 질문을 멈추면 교회는 이미 자신의 소명을 져버린 것이다.
“화해”도 구별이 필요하다. 정의 없는 화해는 값싼 화해이다. 구조적 불의를 고치지 않은 채 손만 잡으면,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하고 가해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카이로스적 화해는 사과와 진술, 제도 개선, 배상, 재발 방지 약속이 함께 가야 한다.교회가 두려워할 것은 “정치적”이라는 비난이 아니라, 고통 앞에서의 침묵이다.
5. 기억을 넘어 약속으로
40년 전, 남아공의 백인우월주의 정권 앞에서 운동가와 평신도, 신학자들은 한 마음으로 카이로스를 선언했다. 그 회개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분별의 때를 요구한다. 분별은 감상이 아니라 약속의 가능성, 곧 방향과 질서로 나타나야 한다. 오늘 한국 교회가 붙잡아야 할 언어는 추모가 아니라 언약이며, 감동이 아니라 운영 원칙이다. 예배, 경제와 정치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고백은 이제 시간표, 장부, 절차, 자리와 교육이라는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질문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무엇을 더 말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언제, 어떻게 회개하고 돌이킬까?”다. 이 글이 제안한 다섯 가지 회심(자리 바꾸기, 예전의 전환, 예산의 회개, 연대의 제도화, 교육의 재설계)은 거대한 구호가 아니라 교회의 생활 규범이다. 주일에 하는 기도는 주중 일상 속에서 과업으로 이어지고, 강단의 호소는 장부의 지출로 기록되며, 선의는 FPIC와 접근성이라는 이웃사랑의 질서로 구현되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측정 가능성과 공개성이다. 분기마다 ‘장부의 간증’을 통해 얼마가 어디로 흘렀고 무엇이 치유되었는지 수치와 이야기로 보고하고, 모든 협력 사업에 FPIC를 전면 적용하며, 의사결정 구조에는 당사자의 참여와 거부권을 보장해야 한다. 예배력은 창조절–사순절–성령강림의 리듬을 ‘생태 회개–정의의 금식–공동 서약’의 실천과 연결하고, 교육은 교실을 넘어 숲·하천·공단·논밭·요양원으로 나아가는 ‘현장 주해’로 재설계한다.
이렇게 누적될 때, 기억은 언약이 되고, 언약은 질서가 되며, 질서는 교회의 일상적 경건이 된다. 안전한 중립을 떠나 장부가 신학을 말하고, 시간표가 복음을 가리키며, 절차가 사랑을 보증하는 교회—이것이 카이로스 40년 앞에서 우리가 감당할 희년의 증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