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와 종교 상황

                  캄보디아 종교 상황 

유현신 선교사( 캄보디아 종교와 선교적 접근 2009년 6월 19일 캄보디아 깜뽕싸옴의 Garden Hill Resort 의 교단 정기 총회에서 발표한 내용) 

1.정령숭배
고대 크메르인들은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物活說을 믿었다. 그들은 그들이 숨쉬는 자연 속에서 삶에 크게 영향을 주는 강, 나무, 산, 돌들과 그 자연이 만들어 내는 자연현상을 숭배하고 두려워했다.

1) 물, 나가 숭배: 특히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물에 대한 신앙이 컸다. 이 물에 대한 신앙은 물 축제에서 볼 수 있는데 바삭강과 메콩강 주변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큰 축제로 치러지고 있다. 또 캄보디아의 건국 신화와 나라의 이름 캄부쟈, 캄보디아의 절의 지붕 끝에 보이는 용의 형상은 水神 용을 숭배함을 보여 주고 있다.

2)정령숭배(쁘러릉): 캄보디아인들이 손목이나 허리에 빨간 끈을 묶고 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사람의 몸속에 있는 19개의 생령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아프면 생령중의 하나가 나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상신 혹은 토지신인 마을의 정령 네악따는 마을을 지키고 풍요한 결실과 비를 내려준다고 믿어진다. 주민들은 긴 막대 향과 향초 술 바나나 또는 삶은 닭고기, 돼지머리등을 놓고 숭배한다.

3)조상숭배 모든 가정 (사찰까지)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모셔놓은 아렉은 개인의 가정을 보호하는 신이다. 사각형으로 울타리가 있고 지붕에 화려한 장식을 하고 금색 칠을 한 사치스런 신당 안에는 알 수없는 造像이 있고 매일 음식을 공양하는 장소도 있고 막대 향을 꽂을 장소도 있다.

2. 힌두교 (0.3%: 세계기도정보)
캄보디아의 힌두교는 건국설화(인도에서 온 카운디나)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크메르인들이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이루던 시기부터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인종적으로도 상당히 유사한 크메르인들은 일찍이 인도로부터 전해진 힌두교를 믿었다.

다신론, 범신론, 무신론, 유신론 철학까지 다 아우르는 힌두교는 계급과 그 성격을 명시하고, 우주의 본질은 브라만(범아, 대아)이고, 인간의 본질은 아트만(소아 또는 개아)이라고 한다. 전생에 쌓은 모든 업과 윤회로부터 해탈하여 범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즉 존재의 고통으로부터의 개인적인 구원이 종교의 목표이다. 소승불교에 밀려 앙코르 왕국과 함께 역사 속으로 밀려난 힌두교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캄보디아의 문화와 왕실의 儀式속에 보이지 않게 살아 있다. 

캄보디아의 대표적 민속무용은 앙코르 왕국 이후 사라진 압사라 춤인데 전형적인 힌두교의 춤이고 이 춤은 힌두교의 서사시를 주제로 담고 있다. 큰 도시의 로터리에서는 힌두교 신상이 많이 서 있고, 불교사원에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에도 부처의 일생과 더불어 힌두교의 신화들이 그려져 있다.

특별히 왕실에서는 각종 의전행사에서 모두 힌두교식으로 치러지고 있는데 2004년 10월에 있었던 시하모니왕의 즉위식에서 복장이나 즉위식 순서가 힌두교식이어서 캄보디아 왕실이 힌두교의 전통을 잇고 있음을 증명했다.

담 너머에 있어 역시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실버 파고다는 승려가 살지 않으며 절 안에는 여러 불상들만 모셔있다. 그리고 불상이 있는 절 내부와는 반대로 실버파고다의 700m나 되는 담장 안벽에는 1903년에 40여명의 캄보디아 화가들이 그렸다는 라마야나라는 힌두교 신화가 그려져 있다.

국가 기관에는 힌두교의 신상들이 입구에 세워져 있는 경우가 많이 있으며, 일례로 헌병 사령부의 상징이 가루다( 금시조, 나가의 라이벌)이다. 프놈펜 시내에 100개의 절이 있다고 하는데 힌두교의 절이 많다. 부처가 아닌 비쉬누가 서 있는 경우가 많은데 얼굴이 검거나 검푸른 여신 칼리, 팔이 많은 조상들이 이에 해당한다.

캄보디아의 현 왕족의 이름은 모두 힌두교에서 따 온 이름이다. 노로돔, 시소왓, 모니봉, 시하누크, 시하모니, 시하누크왕의 어머니 코사막, 네아리릿, 락스미 소반나 일반인들의 이름에도 많이 쓰이는 시타, 소반나, 락스메이, 보파, 보파데비등 힌두 신화의 인물들의 이름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캄보디아 언어도 여러 모양으로 힌두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목회자를 부르는‘구루꿍위얼’선생을 뜻하는‘넥꾸르’는 인도의 사제‘구루’와 흡사하다. 현재까지 거행되고 있고 공휴일인 캄보디아의 어경절(御耕日)에 왕실에서 키우는 신성한 소에게 여러 가지 곡물을 주어 소가 잘 먹는 곡식이 그 해 풍년이 들 것이라고 발표를 한다

2006년 12월 동남아가 쓰나미로 고통을 받았을 때 캄보디아는 아무 피해가 없이 평온했다. 어느 날 신문에 국왕이 자신이 신으로부터 자연 재해가 일어 날 것을 계시 받고 궁에서 국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제사를 드렸었노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아직도 왕실은 자신들이 나가의 후손이며 국민들의 보호자임을 자청한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캄보디아에서 사회적 계급은 아주 중요하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적절한 예의를 갖추어야하며 계급수준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여야 한다. 수많은 신들 중 자신들의 조상과 가정의 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부락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힌두교도의 의무에 속한다.

   
 

3. 테라바다 불교 (小乘佛敎)( 83% 세계기도정보)
테라바다 불교의 정의 :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 시작된 불교는 無, 空, 中道로 설명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무신론적이었다. 석가 입멸 후 500명의 제자들이 왕사성에 모여서 불경 3장 중 경장과 율장이 제자들의 암송으로 확립되었다. 부처 입적 후 100년경에 2차 집결이 있었는데 대천이라는 비구가 교의를 신설하여 분열을 겪었다. 음식물과 금전에 관한 규율을 좀 완화한 내용인데 이를 찬성하는 진보파 대중부는 대승불교, 반대하는 보수파는 상좌부 소승불교라 불린다.

대승불교는 한국, 중국불교처럼 대중구제에 관심을 가지고 부처를 초자연적인 존재의 화신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신들을 큰 바퀴 대승불교라 칭하고 개인 중심인 상좌부 불교를 작은 바퀴, 소승불교라 불렀다.  스리랑카에 전해진 불교와 팔리어 경전은 소승불교, 테라바다 불교로 미얀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캄보디아인들이 믿고 있는 소승불교는 석가모니와 같이 부정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불교 용어는 명상하고 도를 닦는 승려들만 이해할 수 있어서 평신도들은 감히 열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오직 더 나은 환생을 소망하고 힌두교도가 하듯 불상 앞에 꽃과 촛불을 바치며, 위대한 스승인 부처와 유골을 숭배하고 불탑까지 숭배하였다.

그러나 테라바다 사원들은 사원이나 수도원이 다 급성장을 하였고 승려들은 일반 민중이나 어린이들에게 도덕과 문화 교육을 실시하여 근대에 까지 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들의 사원은 아주 간단하였고 부다의 이미지 하나만 사원에 있었다고 한다. 테라바다 불승은 물고기나 육류를 먹지만, 술은 마시지 않으며 절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고 공양에 의해서만 식사를 한다.

사원에서의 교육 방법은 나이 든 승려에게서 어린 승려들이 모여 앉아 교육을 받는다.

1914년 프놈펜에 승려들을 위한 팔리어(인도에서 불교 경전이 쓰여진 언어) 학교가 개설되고 점점 수도원 성격의 학교로 발전하고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에는 불교대학이 되었다. 어린이들은 사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고, 승려들이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1979년 7명의승려가 베트남에서 돌아와 승려서품을 받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인 텝봉 승려가 2 년 후 캄보디아 승가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1989년 이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자 불교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불교는 모하니까이파(전통적 불교, 90%의 신자)와 토마유트파(왕실의 후광을 받는 전통불교 개혁파, 10%의 신자) 로 나뉘었다.

시하누크 왕은 귀국하여 두 승단을 아우르는 담마라자( 도덕적 왕)으로 등극했고 두 승단 종정으로 두 승단을 후원했다. 두 승단은 국왕을 위해 충성하고 그의 공덕을 치하하며 백성들에게 국왕의 은덕을 전했다. 시하누크 국왕은 불교의 덕분에 다시 캄보디아의 神王으로서 아들 라나리드 왕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정당 FUNCINPEC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불교는 시하누크왕과 돈독한 관계 가운데 한 동안(1996년대 중반) 불교중립당의 간판을 달고 정치세력(손 산)과 연합하려고 애썼으나 사원에 폭발물이 터지는 불상사를 겪고 표면적으로 정치와 결별을 하게 되었다. 훈센수상은 기독교 선교를 허용하며 국왕과 밀착한 불교를 어느 정도 견제하는 효과를 얻었다. 많은 실정에 폴폿과도 가까왔던 시하누크 국왕이 계속적인 국민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소승 불교적인 業意識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들은 왕의 행동에 분개하기 보다는 그가 전생에 좋은 업을 쌓았기 때문에 왕이 되었다고 받아들인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에 대하여도 “숲에 살려면 호랑이에게 내 몸의 일부를 주어 먹게 해야한다”라고 생각하고 참고 자기들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들의 업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만물 무상과 인간 무상의 불교적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가치를 부정하므로 자살을 낳는다. 최근 한국을 뒤흔든 노 전 대통령의 자살, 베트남 공산화 이전의 중들의 분신 자살소동, 매사에 잘 참는 듯 하지만 일단 터지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폭발해 버리는 캄보디아인들의 분노도 불교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캄보디아인들이 매사에 개인적이고 무책임한 성격과 가족제도는 소승불교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캄보디아의 평화운동은 마하 고사난다 승려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는 캄보디아에 종교의 바탕을 둔 평화운동을 실천하였다. 그는 해마다 45일간 650km를 걷고 분쟁의 당사자나 농민들을 상대로 화해와 평화, 사랑을 가르친다. 모든 과정에서 기도와 명상을 수행하므로 평화의 다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현재 캄보디아 불교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5년 남짓한데 7명의 승려는 약 55,000- 80,000명으로 늘어났고 5000개의 사원이 건축되었다. 그리고 현재 대중을 근간으로 하는 모하니카이파는 훈센수상의 캄보디아 인민당의 조직과 관계되어 있고, 토마유트파는 왕족들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FUNCINPEC 정당과 함께하고 있다. 

캄보디아 불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곳으로는 캄보디아 불교 연구소와 시하누크 불교대학이 있어 고문서들을 발굴하고 캄보디아의 전통 문화와 종교에 대하여 연구하거나 불교 지도자를 양성하고 있다. 캄보디아에는 평화를 실현시키려 노력한 비폭력과 평화를 위한 실천 운동가로 승려 마하 고산 난다 같은 이가 있다. 노벨상 후보로 세 번이나 거론된 인물이다.

어려울때나 안정된 시대나 불교가 교육을 맡아 온 덕택에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 불교 사원이기 때문에 아들을 낳으면 부모는 승려로 보내려고 한다. 그들이 일정기간을 승려로 보내고 돌아오면 그는 공덕도 쌓았고 지식도 쌓았기 때문에 존경받을 만하고 취직이 잘 된다고 생각했다.

테라바다교에는 불상이 없었는데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을 갖추게 되었고 전 수도였던 우돔에 있는 사원에는 3000개의 크고 작은 불상들이 있다. 승려들에게는 아주 엄격한 계율이 적용되었으며 식사는 걸식으로 하루 한 끼만 해야 하나 신도들이 수도원을 찾아서 음식을 보시하기도 한다. 

일반 신도들에게도 五戒와 다른 신행의 규범이 있는데 승려에게 힘 닿는 대로 보시를 해야 모두 공덕이 되어 다음 생에 좋은 업으로 태어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는 많은 사람들이 열반에 이르기 보다는 내세에는 더 높은 사람, 부자로 살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일반 신도들은 오계를 지키는 일보다 공덕 쌓기에만 열을 올린다. 오랫동안 힘겹고 어려운 삶을 살아온 캄보디아인들에게 그들의 불교가 기본적으로 현세를 부정하고 내세를 추구하기 때문에 현재의 행복한 삶을 위해 주술과 힌두교의 신에게 까지 의존하고 있다.

4. 캄보디아의 무슬림 ( 4% 세계기도정보)
캄보디아 잠족의 뿌리는 현재 중부 베트남 지역에서 힌두 불교에 뿌리를 두고 참파 왕국을 이루며 살던 참파(Champa)족이다. 11세기 이후부터 아랍, 말레이, 페르시안 해상 무역업자들이 캄보디아를 방문하면서 이들을 모슬렘으로 개종시켰는데, 특히 잠족의 상류층부터 시작하여 종족 전체가 이슬람교로 집단개종하게 되었다.

폴폿 정권 말기에는 극심한 박해로 20만에서 25만 사이 밖에 안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잠족의 인구는 1999년 5월 당시 캄보디아 종교부 집계에 의하면 413,780 명까지 성장하였고 잠족의 60%는 무슬림신자로 알려져 있다. 메콩강과 뚠레이삽 강 주변의 잠족은 논농사와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도시의 잠족은 도살업,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최근에는 이슬람권에서 상당한 오일머니를 캄보디아 모슬렘들을 위해 지원하고 있으며 이 재정은 사업자금으로 유입되어 모슬렘 종족인 잠족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잠족들은 ‘교육은 기독교에서 받고 사업은 모슬렘과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결정적인 이슬람의 선교전략에 말려들고 있다. 수도인 프놈펜 주변(쯔바엄뻐으, 5번국도)에도 잠족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깜뽕잠, 깜뽕 츠낭, 깜뽓 지방 등에도 분포되어 있다.

잠족은 인구 숫자에 비해 다른 소수민족들 보다 중앙 정치에 많이 진출해 있는 편이다. 라나리드 국회의장 아내는 별도로 하더라도 부수상 1명, 각료1명 그리고 12명의 국회의원이 있다. 캄보디아 잠족의 모슬렘은 부분적으로 불교와 혼합된 요소가 있었으나 나름대로 전통적인 모슬렘을 유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최근 모슬렘 국가들이 보낸 이슬람 선교사들에 의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결속과 자신들의 고유한 이슬람 전통이 아랍과 쿠웨이트 출신 선교사들에 의해 변형될까 하는 염려의 목소리가 만만하지 않다.

종교부 잠족 담당 국장인 자카리아 아담씨는 외부 세력과의 접촉에 따라 현재 캄보디아 잠족 모슬렘을 네 가지로 나눈다.
a) 잠족 모슬렘의 70%는 말레이의 영향권 안에 있는 샤피파 (Sunna파에 속한 4개 학파 중에 하나)이다.
b) 20%는 사우디와 쿠웨이트 근본주의자들의 영향권에 있는 와하비주의 (Wahabism-코란 교의 엄수주의자)다.
c) 7%는 전통적인 콤 이맘산 (Kom Imam-San)에 속하며,
d) 나머지 3%는 인도네시아의 카디아니(Kadiani) 이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와하비는 물량공세로 세력을 확장시켜 가고 있는데 10-15%까지 증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국의 자국 모슬렘파의 종용은 잠족 이라는 종족 공동체의 분열로 이어지면서 전통적으로 종족 유지의 큰 틀을 제공 해주던 잠족 전통 모슬렘이 또 다른 시련을 겪고 있다. 모슬렘권 선교사들은 주로 구제와 고아, 교육 사업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

최근 모슬렘 선교의 지원에 힘입어 모슬렘 교육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동과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은 매년 약 200만 달러이상의 자금을 캄보디아의 모슬렘들을 위해서 쏟아 붇고 있다. 또한 매년 200명 이상의 종교지도자를 쿠웨이트와 중동, 말레이시아 등지로 종교 유학을 보내고 있다. 한 잠족 지도자는 "After 20 years, Cambodia will have no choice"라고 이야기 하며 앞으로 3년 뒤에 돌아올 5,000여명의 잠족 이슬람 지도자들이 캄보디아의 지도자가 되어 이슬람 선교를 감당할 것이라고 단언적으로 말한다.

5.샤머니즘
길거리, 왓프놈 옆의 작은 상가와 절간 등에는 일반적 행운, 재액을 물어보는 사람들과 결혼을 앞 둔 젊은이들의 궁합을 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캄보디아의 민속 종교에 대한 선교적 접근
1.선교사의 인격은 최고의 전략이다. 헤셀 그레이브는 불교권에서는 선교사는 친절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특히 험난한 근대사로 상처받은 캄보디아인들에게는 친절함이 필요하다.
불교는 물질을 부정하고 캄보디아 승려들이 素食과 절제의 본을 보여준 것을 고려하면 선교사의 검소함과 절제는 존경을 불러 올 수 있다.

2.캄보디아를 배우려는 열심을 가져야 한다. 크메르어와 불교에 관해 배우고 이해하려는 열정과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적당한 경어를 구사하고 성경의 용어와 불교 용어를 읽을 수 있을 정도까지 배워야 한다. 힌두교와 불교사회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담을 수 있는 용어가 만들어져야 한다. 일본에서 카톨릭 교회 선교사들이 성경을 번역할 때 불교용어 그대로 사용하여 성경의 하나님이 전해지지 못했던 일은 특히 캄보디아에서 타산지석으로 여겨야 한다.

3.캄보디아의 역사와 교훈, 문화를 잘 배워 예수님의 교훈을 가르치는데 인용한다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서구에서 사용해오던 논리적이고 교리적인 예화는 흥미를 유발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4.캄보디아인들은 가족 간의 유대가 강하다. 캄보디아 불교는 캄보디아 국민의 아이덴티티를 제공하기 때문에 한 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소외되고 만다는 큰 희생이 따른다. 어린이 사역은 단기간에 효과가 나타나고 미래지향적으로 보이지만 가족이 함께 개종하지 않는다면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 부모와 가족의 축복 속에서 자라야할 어린이를 위해 어른들을 교회로 이끌어 올 수 있도록 노인 장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개발, 실행해야겠다.

전통적인 캄보디아사회에서 노인들은 문화의 상속을 맡은 자로써 중요한 위치에 있고 지혜를 가진 분들로 존중된다. 다소 변화가 느리더라도 노인들을 섬겨주고 교회안에서 리더쉽을 발휘토록 장로교의 장점를 활용한다.

5.캄보디아 현지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또한 캄보디아 사회의 부분으로써 동질화 되면서도 변화를 이끌어 내야하는 사명을 받았다. 한국인으로써 선교사는 수시로 자신의 가르침에서 한국문화를 분리해 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외국인 선교사들과도 교제를 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겠다. 캄보디아 사역자들이 지도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동역자로 대하고 성도들 앞에서 존중해주어야 토착교회, 나아가서는 생명 있는 교회가 된다.

6. 능력 전도가 필요하다. 캄보디아의 전통 종교인 불교, 힌두교는 제사와 의식이 귀신을 쫒고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어 각종 의식, 굿, 부적등을 선호하는데 선교를 위해서 귀신을 쫒고 병을 치유하는 신유의 능력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질병의 치유자 이심을 성경이 가르치고 계심을 전하고 합심하여 기도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7. 잠족들의 경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태도로 다가가 그들이 요구하는 봉사를 해 줄때 접촉점을 찾을 수 있다. 교육, 의료, 구제, 개발 등을 통해 간접선교로 문을 열 수 있고 신중하고 지혜롭게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움직여야한다.

참고자료
아시아 종교와 기독교 이동주 기독교 문서선교회
세계의 종교 채필근
아시아 기독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호진
앙코르 Info cambodia
캄보디아 문화와 종교 이시영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헨드릭 크레머 기독교 문서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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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선교현황과 방향성   문찬식 선교사

1. 캄보디아 최초의 기독교와의 접촉
캄보디아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기원후 100년 경 중국 관리가 기록해 놓은 것으로 당시 지금의 캄보디아 땅은 “후난(Funan)” 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영토의 일부였다고 한다. 15세기 이후 불교왕국이었던 캄보디아에 카톨릭이 전해진 것은 16세기 말경인데, 당시 포르투칼의 상인이었던 도미니크 교단의 Gaspar da Cruz 가 1555년 캄보디아에 입국한 이래로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기독교를 전하였다.

2. 캄보디아에서의 복음 전파의 시작
캄보디아 내에서 개신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3년 미국의 C&MA 선교사 두 가정이 불란서의 식민통치 당국자들에 의해 입국이 허용되면서부터이다. 캄보디아인 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시도는 이미 1921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과거 캄보디아 영토이었던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라고 불리웠던 깜뿌찌어 끄라옴에서 이미 C&MA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여 얼마간의 개종자들이 얻었고, 그들에 의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번역되었다. 따라서 캄보디아 내에서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베트남 남부에 살고 있던 캄보디아인들이 먼저 주님께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초기 캄보디아 교회의 목회자와 전도자로 큰 공헌을 하였다.

캄보디아의 최초의 크메르어 성경은 1925년에 Arthur Hammond 부부가 번역하기 시작하여 1953년에 마쳤으며, 성경번역이 완성된 해인 1953년에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90년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1954년 시아누크 왕은 새로 번역된 크메르어 성경을 증정받는 자리에서 기독교 교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캄보디아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였다.

이와같은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캄보디아 교회는 약 10년간 더디지만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갔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주의 종으로서의 소명을 받고 정규 신학교육을 받았으며, 캄보디아 여러지역에서 교회는 뿌리를 내려갔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과 전쟁을 치루던 1965년에 시아누크 왕은 북베트남과 연맹을 맺고 베트공이 캄보디아 영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아 활동을 하도록 허락을 하였다. 미국은 이런 시하누크 왕의 행동에 제재를 가하고자 캄보디아 영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같은 행동에 대해 캄보디아도 보복으로 맞섰는데, 미국인 선교사들을 미국 CIA의 앞잡이로 몰아 추방하였고, 기독교회를 핍박하였으며, 캄보디아인 목사들을 투옥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론놀 장군이 1970년에 시아누크 공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론놀이 정권을 잡은 약 5년 동안 다시 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을 하였다. 이 기간에 선교사들은 주로 구호와 지역개발 사역에 주력하였는데, 선교사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그래서 1972-75년은 캄보디아 역사상 기독교 교회가 가장 급성장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가 뽈뽓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는데, 프놈펜 함락을 앞두고 모든 선교사들이 캄보디아를 떠나야 했고, 크메르루즈 공산주의자들은 크리스천과 캄보디아 목회자들을 잔인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학살하였다.

3. 캄보디아에서 신학교육의 시작
1923년 C&MA 선교사가 두 가정이 캄보디아에 입국하였는데, David Ellison 부부와 Arthur Hammond 부부이다. David Ellison 부부는 프놈펜에서 북쪽으로 200 Km 이상 떨어진 캄보디아의 서북부에 위치한 제 2도시인 바탐방에 베이스를 두고 1925년에 성경학교를 시작하였으며, Arthur Hammond 부부는 프놈펜에 정착하여 캄보디아 성경을 번역하였다.

David Ellison 부부는 바탐방 시내 중심에 위치한 시장근처에서 전도와 말씀 가르치는 사역을 아주 열정적으로 펼쳤다. 장차 나타날 교회를 위해 첫 2년 안에 경건한 목회자와 전도자들 양성하기 위해 제자삼는 것은 아주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1925년에 선교사의 집에서 작은 성경학교, 즉 신학교가 시작되었다. 이 신학교는 정확히 향후 50년 동안 목회자를 양성하는 터전이 되었는데, 이곳에서 캄보디아 복음교회 교단 (KEC)의 모든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열매를 맺도록 캄보디아의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기 전에 조심스럽게 양육되었다.

1) 정규과정의 목회자 과정: 이 성경학교는 다섯 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베트남 남부에 있는 깜뿌찌어 끄라옴 지역에서 건너온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2층으로 된 선교사 집의 2층에서 생활하면서 학업을 하였다. 처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매일 조직적으로 공부하였으며, 프놈펜에서 일하는 Arthur Hammond 부부의 번역에 힘입어 요한복음을 비롯한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전도지 그리고 찬송가가 공급되었다. 이 첫 학생들은 강해설교와 크메르 성경공부, 그리고 기독교 기본교리를 공부하였으며 배운 진리들을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서 실제 사역에 적용하는 하는 기회를 가졌다

2) 비정규과정: 평신도 리더들은 그들의 농토와 가족으로부터 오랫동안 떨어져 긴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번에 서너 달만 와서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신학교는 농한기에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과정을 실시하였다.

4. 뽈뽓 공산주의와 베트남 군부통치 시대의 상황
79년 베트남 군인들의 침공으로 크메르루즈의 잔인한 학살은 멈춰졌지만 보다 복잡한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베트남 군인들의 철저한 통제로 3년 반이 지난 다음에야 캄보디아 내에 교회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외부 세계에 알려졌다. 1980-88년 기간에 모든 종교활동은 불법으로 간주되어서 기독교인들은 비밀리에 모일 수 밖에 없었다.

뽈뽓이전에 신학교육을 받고 목회자로 활동했던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이 죽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캄보디아와 태국 국경에 있는 난민 캠프를 통해 다른 나라로 떠나게 되어, 91년도부터 교회활동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했을 때에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 가운데 오직 5명의 목회자만이 생존하여 캄보디아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캄보디아에 다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자유는 1991년 10월 23일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지하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던 교회들이 겉으로 모습을 나타내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태국 국경의 난민캠프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돌아온 신자들이 지역교회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교회들의 목회적 필요를 채워 줄 목회자의 공급이 시급한 문제였다. 또한 선교적 자유가 주어지면서 선교사들이 93년부터 많이 입국하기 시작해 교회개척을 위한 사역자 필요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난민 캠프를 통해서 뽈뽓 이전에 그리스도인이었던 젊은이들과 새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젊은 지도자들이 선교사들을 통해 말씀으로 양육되어서 93년에 다시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들이 현재 캄보디아 교회의 중진 지도자들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5. 현재의 상황
93년 총선 이후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많은 기독교 NGO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태국의 국경지대에 있던 난민캠프에서 성경공부를 한 교회 리더들과 크리스천들이 돌아오면서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94년 캄보디아 종교부에서 모든 기독교 단체들이 하나의 대표 단체를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며, 이에 캄보디아 크리스천 리더들이 94년에 CCF (Cambodia Christian Federation)가 결성되었으며, 96년에는 캄보디아 교회의 약 80%가 속해 있는EFC (Evangelical Fellow of Cambodia)를 비롯한 4개의 기독교 단체들이 각각의 독자 Council로 정부에 등록하게 되었다 그 이후 더 많은 교회 Council들이 생겨나 현재는 기독교의 모든 이단을 합쳐 종교성에 등록된 Council만 17개나 된다.

65년 이전에 캄보디아에는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크메르 복음교회(KEC) 라는 단 하나의 교단만 있었으나, 70년이후 다시 기독교 사역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침례교를 비롯한 많은 교단들이 들어와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현재 캄보디아에는 세계의 거의 모든 기독교 교단들이 들어와 사역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기독교 이단들이 거의 제한없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많은 복음적인 교단들이 들어와 경쟁과 협력을 통해 빠르게 복음이 전해지고 많은 교회가 세워진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점도 있지만,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되는 양상을 보여 개신교의 약점과 한계점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

현재 나라별로 볼 때 캄보디아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는 한국이며, 그 다음이 필리핀일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활동중인 한국 선교사는 현재 재캄한인선교사회에 등록된 숫자만 가정수로 230가정을 넘어섰으며, 장단기를 합쳐 600명 이상의 한인 선교사가 캄보디아에서 활동중인 것으로 집계된다. 한국 선교사들의 경우 대다수가 교회개척 사역을 하고 있어서 앞으로 한국 선교사들이 캄보디아 교회개척 사역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선교사의 숫자가 아니라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역을 하는가 이다.

6. 캄보디아 교회의 문제점
1)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캄보디아 교회: 93년 다시 교회의 문이 열리고 사역이 시작되었을 때, 캄보디아의 사회적 상황은 너무나도 열악했다. 교회에 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물질적 필요가 커서 오게 되었으며, 이같은 필요를 외면할 수 없어 선교사들도 쌀과 의복, 약품을 나누어 주었으며, 심지어는 교통비까지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캄보디아 교회와 성도들은 외부의 지원을 받는 것을 당연시 하게 되었고 자신의 것을 드려 헌신하기 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같은 상황은 캄보디아 교회와 성도들을 의존적이 되게 하였다.

2) 체계적인 신앙훈련이 부족: 개방이후 갑자기 교회로 몰려온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양육하지 못해 기독교 기관에서 도움을 받거나 일하는 동안에는 교회에 다니지만, 일을 그만두거나 지원이 끊기면 쉽게 신앙을 저버리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난민 캠프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던 크리스천도 다시 본국에 돌아왔을 때 형식적인 크리스천이 되거나 신앙을 떠난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난민촌에서 훈련을 받은 교회 리더들의 경우도 체계적인 신학훈련이 부족하였며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부족하며, 더 보수를 지급하는 다른 NGO로 등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3) 교계의 갈등
지난 2002년 UN의 요청과 시아누크 왕의 명령으로 종교간의 갈등을 피하고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불교, 이슬람, 기독교의 대표들이 2명씩 선정되어 CIC(Cambodia Inter-religion Council)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기독교는 카톨릭 1명, 개신교 (Protestant) 1명이 대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위 CIC의 합의문에 타종교인을 개종시킬 수 없다는 전도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어 EFC의 회장인 꽁 판촌 목사가 서명을 거부하였는데, 찌어심 상원의장이 상원의원인 웅띠 목사를 CIC의 개신교 대표로 추천하여 현재 웅띠 목사는 CCPC(Council of Cambodia Protestant Church)의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EFC를 비롯한 다른 기독교 기관이나 단체들이 웅띠 목사를 개신교의 대표로 인정치 않아 현재 개신교가 하나되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는 EFC와 CCPC 사이의 힘겨루기 양상을 보이고 있다.

4) 이단들의 침투: 93년 캄보디아 정부의 개방정책으로 많은 이단들이 캄보디아에 들어와 활동중이다. 현재 캄보디아의 목회자들 가운데도 신학적으로 이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쉽게 이단에 넘어가거나 이단들과 관계는 갖는 경우가 많다.

현재 캄보디아에 들어와 있는 이단들은 여호와 증인, 몰몬교, 안식교, New Apostolic Church, 구원파, 안상홍 등 많은 이단들이 활동 중이다.

7. 기독교 사역의 현황
캄보디아에서 기독교의 사역은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로 분류할 수 있다. 직접선교는 복음을 직접 제사하고 가르치는 사역이라면, 간접선교는 복음을 밭을 갈기 위해 빵과 물질적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는 사역이라 말할 수 있다.

1) NGO를 통한 구제와 개발사역- 93년부터 전쟁에서 막 벗어난 캄보디아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서 구제와 개발 사역은 그 필요성이 많았다. 가난자들에게 직접 물질적인 혜택을 주는 구제사역, 생활환경을 개선해 주는 개발사역, 교육의 기회를 더해주기 위해 학교를 세우고 기술을 가르쳐 주는 교육사역,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는 의료사역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간접선교는 캄보디아에서 직접선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2) 교회개척 사역- 93년 이전 캄보디아 내에는 약 1,000명 미만의 크리스천들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난민 촌에서 돌아온 크리스천들과 많은 기독교 NGO들의 구제사역 그리고 많은 선교사들과 현지인 목회자들의 교회개척 사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현재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교회들이 2,000개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되며, 신자들의 숫자는 어린 아이들을 포함해 약 200,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성도들 스스로가 많은 경우 헌신하기 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아주 연약한 단계에 있다.

캄보디아 교회는 처음부터 외부에 의존하기 시작하였다. 농촌에 위치한 작은 가정교회들은 목회자나 교회 리더들이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주말에 섬기기 때문에 경제적인 필요가 크지 않아 자립할 수 있었지만, 프놈펜과 같은 도시의 교회들은 재정 자립도가 매우 낮다. 심지어는 농촌지역의 교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서왔었지만, 선교사들이 어떤 지역에 들어가 현지 교회를 자신의 권한아래 두려고 재정적인 지원을 하면서 어렵사리 자립해 가는 교회들을 선교사를 의존하는 의존적인 교회들로 변질시키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프놈펜에 있는 교회들 가운데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교회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며, 영어를 잘 구사할 줄 아는 대부분의 현지인 목회자들은 외국의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의 도움을 받아서 목회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된 교회들은 처음부터 현지인 사역자들을 고용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자신들의 교회라는 인식이 약하고 모든 재정적 필요를 하나님께 직접 구하기 보다는 선교사를 의지하기 때문에 재정적 자립도가 낮다. 건강한 토착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하고 또 교회가 자체적으로 필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자치하며, 재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같은 문화권에서 그리고 타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자전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캄보디아 복음교단 교회의 교회들은 C&MA 선교사들의 부분적인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외부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교회 스스로 자치하고 자립하며 자전하는 교회로 서가고 있다.

8. 선교의 방향성
한국 선교가 숫자적으로 미국을 제외한 서양 선진 선교국들을 넘어 섰지만 반성하고 극복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직 이러한 문제들을 계속 남아 있고, 잘못된 사례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한국 국민의 성격이나 특성과도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선교는 결국 선교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역하는 현지의 교회와 그 성도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선교지의 필요를 잘 살피고 준비해야 한다. 만일 현지인 교회 리더들이 잘 할 수 있는 사역이라면 굳이 선교사들이 들어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 선교사들은 교회 리더들을 세우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선교사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준비와 계획이 필요하다. 선교사가 저들의 리더쉽을 세우는데 쓰임받기 위해서 충분한 경험, 노하우, 영성, 그리고 저들을 훈련하고 저들과 머리를 맞대고 일할 수 있도록 언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또한 선교가 저들에게 영향력을 주기 위해서는 저들의 본이 되고 격려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선교사의 눈으로 보면 현지 사역자들이 많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저들이 자라온 환경과 짧은 신앙연륜을 생각하여 인내로 본을 보이고 참고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2) 현지교회와 잘 협력하고 현지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이어야 한다. 이같은 필요를 잘 알면서도 때로 실행을 하지 못한 경우가 바로 본국 교회의 기대감과 요청을 저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교회개척 사역에 뛰어들고 있는데, 과연 앞으로 5년이 10년 후에도 현재처럼 선교사에 의한 교회개척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교회개척 사역은 가장 종합적이며 가장 힘이들고 어려운 사역인데, 저들의 삶에 변화를 주고 결단시키며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현지인들의 정서, 감정, 문화, 언어적 민감성과 깊이 연관되기 때문에 외국인으로서의 교회개척은 많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외국에서 온 선교사가 직접 교회를 개척하기 보다는 현지인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여 직접 교회사역에 뛰어들도록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교사는 캄보디아 교회의 변화와 방향성을 내다보면서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예측하며 그에 대비해 자신을 준비시켜 가는 것이 필요하다.

3) 보다 분명한 선교 전략이 필요합니다. 캄보디아의 국민적, 사회적 그리고 선교적 상황을 살피고 분석하여 캄보디아에 맞는 선교전략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은 장단기의 선교적 전략이 있어야 하며 계속 그 상황에 맞추어 수정되며, 효율적으로 선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전략과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 온 교단 선교의 문제점은 같은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파송교회가 다르고, 각각의 파송교회가 선교사들을 개별적으로 후원하며, 또 선교지에 처음부터 일관되며 분명한 선교전략이 없이 개별적인 선교목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선교사 각자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사역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전문적인 선교단체처럼 한 리더쉽 밑에 체계적이며 통합적인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파송교회의 기대와 선교사 본인이 생각하는 사역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소속감이 약하고 함께 팀으로 사역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9. 캄보디아 선교의 전략적 접근
1) 고참 선교사와 신임 선교사 간에 서로 돕는 협력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고참 선교사는 자기의 경험과 노하우를 신임 선교사에게 전수하여 신임 선교사가 가능한 한 같은 실수나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 신임 선교사는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가지고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고참 선교사에게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설령 전수해 줄 것이 없고, 배울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함께 고민하며 더 좋은 방안을 모색하고 초기에 겪는 어려움을 반감시킬 수 있을 것이다.

2) 교파주의 극복해야 합니다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는 선교)-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분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장로교회의 경우 분열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분열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교회적 상황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또 신학 수업을 받은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함께 연합하여 사역을 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함께 연합의 길로 가야 한다.

연합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캄보디아의 경우 장로교 선교사들이 함께 뜻을 모아 2003년 7월에 ‘캄보디아 장로교 공의회’ 를 만들어 이 공의회의 이름으로 교회를 등록하고 있다. 또한 2004년 10월에는 캄보디아 장로교 공의회 산하의 연합 신학교인 ‘캄보디아 장로교 신학교’가 세워져 장로교 선교사들이 훈련한 제자들을 한 곳에 모아 선교사들이 함께 강의하고 가르쳐서 신학훈련을 시키며 캄보디아 교회의 지도자로 양성하고 있다.

3) 본국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선교지를 후원할 때 신중하게 선교지의 교단 선교부나 선교기관을 통해 확인한 다음 결정해야 한다- 교단 선교부나 선교기관을 통하지 않고 사역이나 후원을 시작하여 문제가 된 경우가 종종 있으며, 많은 선교재정을 날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지어는 현지의 사업가의 말을 듣고 선교목적으로 건물을 지었다 선교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4) 선교 사역의 다양성을 찾아야 합니다- 한인 선교사들이 사역의 다양성을 찾아야 하고 또 각 교회에서 선교사들의 각자의 독특한 사역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캄보디아도 일부 평신도 선교사들이 농업개발 프로젝트나 농촌 지도자 양성을 위한 대안학교 등 좋은 사역들을 하고 있다. 평신도 선교사들은 원래 전문인으로서 각자의 사회적 경력과 전공을 살려서 사역을 하려고 준비했을 텐데, 현실은 많은 경우 교회개척 사역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 사역은 아무래도 목회자로 훈련을 받은 목사 선교사에게 맡기고 사역의 중복을 피하고 다양성을 위해 아직 다른 선교사들이 관심을 갖지 못한 부분에 준비를 해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준비 단계에서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또원 후원교회도 사역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고 격려해서 평신도로서의 전문적인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보다 효율적으로 필요한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를 병행해서 사역해야 한다. 직접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 못지 않게 캄보디아에서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치료하고, 교육하고, 그 사회를 개발하는 사역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캄보디아 인들이 그 같은 사역들이 크리스천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마음을 열고 교회와 복음에 대해 더 쉽게 접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직접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와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함께 협력하여 사역을 하면 사역의 효과와 열매를 극대화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사 간의 대화와 협력이 많이 필요하다. 

   
 

                         캄보디아 국가 현황     장인혁 선교사 

캄보디아의 인구

컴보디아의 인구는 지난 2월 현재 1천300여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캄보디아 정부는 지난 2월 10년만에 전국적으로 실시한 인구센서스 결과, 전체인구가 1천338만8천910명으로 1998년 이후 10년만에 8.54%인 195만명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캄보디아는 지난 1962년 처음 인구센서스를 실시했을 당시 인구가 570만명이었고 36년만에 실시한 1998년 두번째 센서스에서는 1천143만7천656명으로 집계됐었다.  

또 캄보디아의 지난 10년동안 인구증가율은 연간 1.54%로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전체의 인구증가율 1.3%보다 훨씬 높아졌고 ㎢당 인구밀도 역시 10년 전 64명에서 75명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인구밀도는 아세안국가들의 평균인 126명에 비해서는 아직도 매우 낮은 것으로 분석됐다.

캄보디아는 전체 면적이 18만1천35㎢로 남한의 약 1.8배나 되며 대부분의 땅들이 메콩강의 중·하류에 위치하고 있어 평평하고 비옥하다. 그러나 아직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인구가 적은 편이고 오랜 내전 때문에 수도 프놈펜과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레아프 정도를 빼고는 전혀 개발이 안된 상태여서 무한한 개발 가능성을 안고 있다.

캄보디아 정치동향

2008년 7월 27일 치러진 캄보디아 총선에서 훈센총리가 이끄는 캄보디아 국민당(Cambodia People󰡑s Party: CPP)이 총 123개의 의석 중 90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둠 제1야당인 삼랑시당이 26석 왕권당인 푼신펙당이 2석 인권당이 3석을 차지함 지난2003년 총선에서 73석을 확보해 푼신펙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CPP는 이번 총선에서 전체의석의 73%를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며 캄보디아 역사상 첫 여당 단독정부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음  

캄보디아 경제동향

오랜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경제적 빈곤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캄보디아는 1997년 훈센총리가 집권한 이후 정치적 안정과 함께 강력한 경제개혁 정책추진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음 캄보디아의 지난해 (2008년) 국민총생산(GDP) 성장률이 6년만의 최저수준인 7%에 머물렀다고 캄보디안데일 리가 보도했다.  

이 신문은 국립통계연구소의 발표를 인용해 󰡒2008년 최종 GDP성장률은 오는 7월에 발표될 예정이지만 잠정 성장률은 7%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지난 2002년 이후 6년만의 최저수준이며 세계은행이 예상한 6.7%와 IMF가 예측한 6.5%에 비해서는 약한 높은 수치라고 밝혔다.  

캄보디아는 지난 2005년 이후 2007년까지 두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2008년 성장률 역시 이전에 비해서는 낮지만 인근 국가들 중에서는 높은 수준으로 꼽히고 있다. 1999년 ASEAN, 2004년 WTO에 가입한 캄보디아는 지리적으로는 ASEAN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경제개방정책을 시행함으로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내고 있으며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인 캄보디아는 자본과 기술도입 고용창출등 사회 경제 전반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외국기업의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음  

캄보디아 사회동향  

킬링필드 단죄위한 국제재판 개시

-200만명에 이르는 동족을 ‘노동자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처단하거나 굶어죽게 한 크메르루주 정권을 단죄하기 위한 국제 재판이 17일(현지시간) 오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국제법정에서 막을 올렸다 현재 재판대상자로 구금되어 있는 5명의 재판 대상자중 첫 재판 대상은 투올슬렝(정식명칭 S-21) 감옥의 교도소장이었던 카잉 구엑 에아브(일명 두치)임

첫 재판은 국제법정의 개정을 알리는 의미로 재판의 절차만 통보한채 끝났고 3월 30일 재개하여 피의자 및 증인 심문등을 할 계획이다. 투올슬렝 교도소장 두치는 전직 교사였으나 교도소장이 된 뒤 1만6000여명의 지식인과 어린이 부녀자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한 혐의를 받고 있다.

더치는 재판에 앞서 “모든 잘못을 인정한다. 용서를 바란다”고 방송을 통해 말했다. 그러나 다른 피의자로 폴포트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체아와 당시 주석 키에우 삼판, 외무장관이었던 렝 사리 부부는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 유엔과 캄보디아에 의해 2006년 7월 소집된 전범재판정은 당초 2009년 7월 재판을 마무리할 계획었으나 예산부족, 재판소 직원들의 뇌물수수설, 캄보디아 정부의 적극성 부족 재판대상자들의 반발 등으로 인해 일정이 지연되어 2011년쯤 재판이 마무리 될 것으로 보임  

– 대부분의 피고들이 이미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고령인 상태여서 성공적인 재판진행에 대해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임  

국제관계

태국과의 국경사원 분쟁

– 2008년 7월 캄보디아-태국 간 오랜 분쟁지역이었던 󰡐쁘레아뷔히어사원󰡑에 대해 캄보디아가 태국 외무장관의 서명을 바탕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프레아뷔히어 사원의 소유권 문제를 놓고 양국의 분쟁이 격화되었음  

– 태국의 야당과 시민들은 내각의 행위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고 이후 태국 헌법재판소에서 태국-캄보디아의 공동성명에 서명한 외무장관의 행위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태국내 반대여론과 시위가 더욱 확대되었음  

– 이후 쁘레아뷔히어 사원에 진입한 태국의 시위대 3명을 캄보디아군이 일시 체포한 것을 계기로 양국은 사원인근에 병력을 배치하면서 국경분쟁사태로 이어졌음  

– 양국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몇 차례의 회담을 가지며 군대 철수를 합의 했으나 실제적인 군대 철수는 실행되지 않았고 액 한달간 대치 상태는 지속되었음 이후 양측의 추가 협의에 의해 2008년 8월 16일 10여명의 병력을 남기고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사태가 다소 진전되었음   

– 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국경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고 양국 야권세력들이 분쟁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어 당분간 긴장 사태가 지속될 것으로 보임 

원조공여국들과의 관계 강화

– 캄보디아는 인권탄압과 부정부패로 인해 UN과 서방 국가들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주요 원조 공여국들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 미국은 대테러전쟁 수행과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있음

– 한편 중국은 캄보디아의 정치체제및 인권탄압에 대한 비판없이 대규모 원조 자금을 제공하고 있음. 이에 대해 캄보디아 역시 대만을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는󰡐One China󰡑정책을 고수하며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도모하고 있음 

국제신인도

1. 외채상환 태도

– 외채의 대부분이 중장기 공적채무로 구성되어 있어 외채 상환부담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임

– 외환보유액은 수출증가 및 외국인 투자유입, 대외원조 증가등으로 인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2008년말에는 44억달러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음  

2. 국제시장평가

주요신용평가기관 평가현황

– OECD는 2008년 4월 국가위험도 평가전문가 회의에서 캄보디아 관광산업의 호조, 외채관련 지표의 개선, 점진적인 경제성장, 석유 생산 가능성증가들을 이유로 캄보디아의 신용등급을 종전의

7등급에서 6등급으로 한 단계 상향조정하였음

– S&P(스탠더드&푸어스) : B+(2007. 4)

– Moody󰡑s(무디스): B2(2007. 5)  

참조: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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