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기독교의 역사
카톨릭 역사
카톨릭의 캄보디아 선교역사 1555년 게스팔 다 크루즈(Gespar da Cruz) 라는 한 포르투갈의 도미니칸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가 소개되었다. 1719년에 프란시스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캄보디아에 왔고, 1770년 니콜라 레바세(Levasseur)가 천주교 교리를 크메르어로 가르쳤다. 그 후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의 천주교는 크메르인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독립 후 현재까지도 대부분의 천주교인이 캄보디아 거주 베트남인이고 실제로 캄보디아인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개신교 역사
1. 기도와 준비 (1900-1922)
1) 미국 CAMA의 R.A. Jaffray 박사가 캄보디아 라는 소책자를 발간한 것을 계기로 미국의 크리스찬들에게 처음으로 미전도 종족으로서의 캄보디아가 소개되었다. 특히 몬타나 주의 목동이었던 Gilbert 는 캄보디아에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23년 동안 기도의 씨앗을 뿌렸다.
2) C&MA (Christian & Missionaries Alliance)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캄보디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2. 시작과 장애 (1923- 1946)
1) 시대적인 특징
가) 선교사를 스파이로 간주
모든 서양의 선교사들은 스파이로 여겨져 어느 곳에서건 감시를 받았으며, 사역이 매우 더디고 열매도 거의 없던 시기였다.
나) 국가종교로서의 불교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있었던 기간에도 영적·정치적 장애가 가로 놓여 있었으며 기독교와 같은 외국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곧 국가를 배신하는 행위로 간주 되었다. 불교도가 되려면 캄보디아인이 되어야 했고, 캄보디아인이 되려면 불교도가 되어야 했다.
다) 제2차 세계대전
일본군에 의해 이 지역이 점령되었으며 선교사들은 붙잡혀 태국이나 필리핀의 감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2) 주요사건들
가) 1923년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인 C&MA의 Arther Hammond 목사가 캄보디아에 도착하였다. 연말에 C&MA 의 David Ellison 이 Battambang에 도착하여 사역을 시작하였다. 최초로 7명(캄보디아인 2명, 베트남인 5명)의 개신교 회심자들이 세례를 받다.
나) 1924년 Arther Hammond선교사가 성경을 크메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다.
다) C&MA 의 Paul Alison 선교사가 최초로 5명의 캄보디아 신자들을 모집하여 Bible School 을 시작하였다. 후에 이 신학교는 Kandal 주로 이전 되었고, Takhma Bible Institute로 교명을 바꾸었다. 캄폿과 다케오 주에도 선교 기지가 마련되었다.
라) 1932년 Sisowath Monivong 왕이 모든 캄보디아인들에게 개종을 권유하지 못하도록 개종 권유 금지칙령을 내렸다.
마) 1933년 Arther Hammond가 크메르어 신약성경 번역을 완성하였다. 최초로 2000권의 크메르어 신약성경이 발간, 배포되었다. 1943년 신약이 번역이 되어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영국과 해외성경협회가 출판하였다
바) 1940년 신구약 성경 전체가 크메르어로 완전히 번역되었지만 발간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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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회와 확장 (1946-1964)
1) 시대적인 특성
가) 캄보디아의 독립
2차 대전이 끝난 후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유의 기회가 왔다. 현지인들과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캄보디아 전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훈련과 함께 기독교인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54년 드디어 프랑스로부터 독립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2) 선교적 중요 사건들
가) 1947년 종교의 자유를 포함하는 새로운 헌법이 탄생하다. 프놈펜에 기독서적을 발간하는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나) 1952년 세레교인이 502명으로 증가하다
다) 1954년 최초의 전체 크메르어 성경이 KJV 으로 번역되어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에 의해 발간되었다. 마침내 자기 언어로 된 신구약 성경을 소유하게 되었다.
라) C&MA 선교방법의 변화 C&MA가 그 동안 현지인 목회자들과 교회에 대한 모든 후원을 중지키로 결정하다.
4. 시련과 검증 (1965 – 1970)
1) 캄보디아 정부의 정치적 결정과 시련
1965년 Nordom Sihanouk 왕자가 캄보디아에 있는 모든 미국인들이 미국 CIA 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비난한 이후, 캄보디아 정부와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 선교사들이 캄보디아로부터 추방되었다. Sihanouk는 기독교는 반애국주의라고 생각하여서 C&MA의 프랑스 선교사 부부 두명을 제외한 모든 개신교 선교사들이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현지 목회자들에게 사역을 위임하였다. 2개월 후 4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6개월 후 모든 교회들의 문을 닫도록 하는 정부의 조치가 이어졌다. 40년간 이루어졌던 개신교 선교사역을 통하여 5-700명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캄보디아 정부가 모든 Angro-Saxon (미국인, 캐나다인, 영국인)을 추방하기로 결정하다. 2개월 후 마지막 선교사가 떠나고 4명의 젊은 교회 리더들이 투옥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이 당시의 기독교인의 수는 약 700여명으로, 7명의 목회자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2)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들
어려운 정치 상황 속에서도 현지인 목회자들이 대담하게 자신의 가정으로 자신들의 교인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감옥 밖의 크리스찬들이 투옥된 크리스찬들이 낙망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지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French Alliance 의 Daniel Bordnel 선교사가 캄보디아에 와서 선교단체의 이름으로 등록을 함으로써, 다시 한번 교회의 법적 대표성을 확인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캄보디아 정부가 불교국가로서 캄보디아 교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C&MA도 20년 동안 이것을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에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Daniel의 비자는 결국 2년반 후에 거부당했고 파리에서 비자를 기다리 고 있던 George 와 Myrtie Fune의 비자도 캄보디아 대사관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Montana의 목동 Gilbert 의 딸 Neilie Gilbert 를 통해 크리스찬이 된 왕비의 자매 Ramsi Norodom공주를 통하여 역사하셨다. Ramsi 공주가 자신과 Neilie를 위하여 파리행 왕복 항공권을 준비하였고 이 Ramsi공주의 영향력으로 파리의 George 와 Myrtie Fune이 비자를 받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외국의 선교사들이 주고 간 재산들을 관리하게 된 현지인 교회의 리더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바꾸셔서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이 그들 사이에 질투와 갈등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만드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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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회개와 부흥 (1970 -1975)
1) 시대적인 특징
1970년에 Lon Nol이 Sihanouk를 대신하여 국가의 수반이 되었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돌아오도록 다시 비자가 주어졌다.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고 침묵하지 않으셨다. 죄 용서함과 치유, 구원, 헌신 그리고 희생의 결실들을 볼 수 있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는 전쟁으로 인한 사회의 부패로 크메르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열림이 보였다. 지배적인 불교문화와 민족주의 사이의 긴밀한 유대감은 약해졌다.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특히 복음에 많은 반응을 보였다. 시골에서 나와 프놈펜에 몰려왔던 1.5백만 피난민들 사이에서 점점 환영을 받기 시작하였다.
가) 새로운 영
이기주의적인 마음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워나가는 마음으로 성장하였다.
나) 새로운 지도력
임명된 것은 아니지만 6명의 젊은 지도자들이 지도력을 떠맡게 되었다.
다) 새로운 마음
누가, 언제, 무엇에 관하여 전하든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믿음의 마음을 갖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
2) 선교적 사건
가) 1970년 친미 성향의 Lon Nol 국방부 장관이 무혈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Sihanouk 왕을 축출하였다. 미군의 폭격과 내란으로 프놈펜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고 외국의 선교사들에 대한 입국이 다시 허용되었다. 이 시기에 개신교도들의 수는 약 300명으로 줄었으나, 새로운 정부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나) 1971- 72년 크메르 루즈군이 부패한 정부군을 무찌르고 프놈펜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 수십만명의 피난민들이 수도 프놈펜으로 몰려왔다. 1972년 4월에 World Vision의 총재인 Stanly Mooneyham 목사가 프놈펜에서 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집회에서 600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리고 11월에 열린 Way of Peace 집회에서 4000명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건이 있었다.
다) 1973년 외국선교사들과 현지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프놈펜에서 전도집회를 개최하여 수천명의 회심자들을 얻게 되었다. 지식인들이 비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평신도 사역자들이 인도하는 가정교회들이 프놈펜 전역에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캄보디아 복음교회 (Cambodia Evangelical Church)의 사무총장 Taing Chhirc(크메르 루즈에 의해 순교당함, 현 프놈펜 New Life Church의 Taing Bek Hong 목사의 형)은 새로운 회심자들로 가득찬 캄보디아 교회를 돕도록 사역자들을 보내줄 것을 외국 선교단체에 요청하였다. 크메르 신약성경의 새번역 사역이 시작되었다. 크메르 루즈군이 지방의 거의 전지역을 지배하자 수많은 난민들이 프놈펜으로 계속 모여들었다.
라) 1974년 크메르 루즈군이 프놈펜을 공격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Lon Nol정부는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Takma Bible Institute 의 대표였던 Hay Seng은 FEBC(Far East Broadcasting Company)에서 사역하기 위해 프놈펜에서 필리핀의 메토 마닐라로 옮겼고 크메르어로 사랑의 소리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300% 교회 성장이 이루어졌다.
6. 살육과 공포 (1975 -1979)
1) 시대적인 특성
이 기간은 역사상 전대 미문의 대량 학살의 시대였다. Pol Pot의 크메르루즈는 사회의 모든 악을 정화시키는 철저한 실험을 감행하였다. 모든 도시의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를 당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굶주림, 충격, 고문과 살상으로 죽어 갔다.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이 이 기간에 순교를 하였다.
2) 선교적 사건들
가) 1975년 1월 1일 부터 크메르 루즈군의 프놈펜 함락을 위한 최종 공격이 개시되었지만 처음 3개월간 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World Vision 의 총재인 Stanly Mooneyham목사는 캄보디아 내의 기독교인 수가 약 1만명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고 평가하였다. 그 당시에 프놈펜에만 26 개의 교회가 개척되었다. 그러나 3월과 4월 중 대부분의 외국선교사들은 약 1만명으로 추산되는 개신교도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나) 마침내 4월17일 크메르 루즈군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되었고 3일만에 전 프놈펜 시민들이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크메르 루즈군의 손으로 넘어간 캄보디아에서는 모든 형태의 종교가 조직적으로 말살되었다. 약 90%의 개신교도들이 폴 포트의 추종자들에게 순교당하였고, 종교적인 관습과 가르침이 금지되었다. 프놈펜의 카톨릭 성당과 바탐방의 캄보디아 복음교회도 폐쇄되었고, 수천명의 난민들이 태국국경으로 떠났다.
다) 4월 22일 캄보디아 복음교회(Cambodia Evangelical Church) 의 사무총장 Taing Chhirc을 비롯하여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
라) 베트남인 카톨릭 성당에 대한 박해와 베트남인들의 자국으로의 대탈출로 인하여 약 5,000명의 캄보디아 카톨릭 교인들만이 비극의 땅에 남겨졌다. 새로운 크메르어 신약성경을 만들던 번역인들도 복음서 등 몇장의 번역만을 끝낸 채 모두 피신하고 말았다.
7. 베트남의 침공과 공산정권의 다스림 (1979- 1989)
1979년 베트남의 침공은 살육의 공포를 멈추게는 했으나 또 다른 복잡한 정치 적인 문제를 만들게 되었다. 철저한 통제로 인해 3년 반이 지나서야 캄보디아 내에 교회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1) 선교적 사건들
가) 1979년 1월 7일 KPR(Kampuchean People`s Republic)이라고 이름 붙여진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이 베트남의 도움을 받아 폴 포트 정권을 몰아냈다. 크메르 루즈의 학정으로부터 벗어나긴 했지만 종교적 신념이나 표현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많은 신자들이 태국 국경의 난민촌으로 피신하였고 또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난민촌에서 기독교인으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다. 약2백명의 살아 남은 캄보디아 기독교인들이 프놈펜의 옛시장(Old Market)과 칸달주의 Takhmau에서 함께 모였다. 지하교회가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이
교회들은 주로 젊은이들과 훈련받지 못한 사역자들에 의해 이끌어졌다.
WCC의 Jean Clavaud 목사에 의해 캄보디아 성경책과 TEE(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교재들이 밀반입되었고 비밀리에 프놈펜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하여졌다 C&MA와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는 태국국경의 여러 난민촌 내에서 TEE과정을 활발하게 가르쳤다. FEBC의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도 캄보디아 내외의 캄보디아 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나) 1980년 몇 개의 기독교 NGO들이 다시 일하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그들의 활동은 긴급구호와 개발 사역에만 참여하도록 극히 제한되었다.
다) 1982년 6명의 교계 지도자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정부에 건의하였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라) 1980-88 이 당시 기독교는 여전히 불법이었고 교회는 찢겨진 채 다시 모을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비밀리에 모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많은 크리스찬들이 태국으로 빠져나갔다.
마) 베트남군들이 국제 여론에 밀려 캄보디아로부터 철수하였고 몇몇 기독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1990년이 되어 첫 번째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예배가 4월14 일 부활주일 예배로 프놈펜에서 개신교, 카톨릭을 포함하여 1,500명이 모여 에큐메니칼 예배로 드려졌다.
8. 새로운 출발과 또 다른 위협 (1990 – 1998. 현재)
가) 1990년 4월 9일 정부가 기독교회를 인정하였고 크메르루즈 치하에서 비극적인 박해를 받았던 사실도 시인하였다. 4월9일 마침내 정부가 현존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부활절기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나) 1991년 캄보디아의 기독교인들이 은신처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다) 1992년 기독교 NGO들이 쇄도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들이 다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복음전도는 여전히 법적으로 불법이었지만 시도되었다. YWAM (Youth With A Mission) 의 Peter Davi, 그리고 Uno Seila가 태국의 제2난민촌에서 제자훈련과정(Discipleship Training Course)을 시작하였다.
Taing Vek Huong 목사(순교한 탕치륵 목사의 동생, 현 캄보디아 CCC 대표)가 태국의 제2난민촌과
제B난민촌에서 제자훈련센타(Discipleship Training Center)를 시작하였다. Wilfried Losch 와 Barnabas Mam 목사가 난민들을 재정착촌으로 옮기는 사역이 시작되어 난민촌이 폐쇄되기 직전부터 SOW(School of Worker) 의 첫째 과정을 시작하였다
4월에 CMC(Cambodia Ministries for Christ)의 Daniel Lam 과 Aaron Setan Lee가 프놈펜 성경학교를 (Phnom Penh Bible School) 설립하였다. C&MA 의 Bounsoueth Lou가 프놈펜과 지방에서 매주 가르치는 TEE과정을 개설하였다. UN 의 평화유지군(PKO)이 소요지역의 무장해제와 자유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주둔하였다.
라) 1993년 5월의 총선거가 성공적으로 마쳤다. 9월 Nordom Sihanouk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새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국가 종교인 불교에 더하여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주요종교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교단주의가 다시 부활되었고 각종 선교단체와 기독교 NGO들이 쇄도하였다.
KBF(Khmer Baptist Federation)의 Tuon Kakada와 CSI(Cooperative Service International)의 Bruce Carlton이 프놈펜의 루시케오에서 KBF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0월 새번역 크메르어 신약성경번역이 시작한지 20년만에 공식적으로 헌정식을 갖고 탄생하였다.
캄보디아 성서공회(Cambodia Bible Society)와 Samoeun Intal의 FEBC(극동방송 : Far East Brodcast Center)사무실과 방송국이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설립되었다. 국내 방송요원들이 채용되었고 라디오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마) 1994년 3월 첫 번째 민족목회자 대회가 WVI(World Vision International)의 후원으로 프놈펜에서 개최되었다. 전국대부분의 지역에서 17 개 교단으로부터 317명의 현지 목회자들이 참석하였다. 1994년 초 ERME( Encouragement Resources Ministry)의 Barnabas Mam목사와 EHC(Every Home for Christ) 의 Paulerk Sar목사가 프놈펜 과 주요지방에서 SPMC(School of Practice Ministries Cambodia)를 시작하였다.
11월 CCC(Campus Crusade for Christ)의 Taing Vek Huong와 Khieu Van Long목사가 CCC 새생명 신학교(CCC New Life Bible School) 를 설립하였다.
그런가 하면 11월에 God Bless Cambodia 주제로 미국인 Mike Evans 가 신유집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3만명이 치유받고자 가산을 처분하여 프놈펜으로 몰려왔으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자 집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내무부는 집회를 중지시키고 Evans를 출국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바) 1995년 KFC (Kampuchea For Christ) 의 Aaron Setan Lee, 그리고 Chhit Paul Arun이 바탐방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AOG(Assemblies of God Cambodia)의 Randy Dorsey목사가 프놈펜에서 캄보디아 신학교 (Cambodia Bible Institute)를 설립하였다. AOC (Asian Outreach Cambodia)의 Eric Fung과 Selwyn Jackson이 프놈펜에서 GCI (Great Commision Institute)를 설립하였다. 4월에는 종교부의 명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5개의 조직이 구성되었다.
1)카톨릭,
2)개신교- Cambodia Christian Federation(CCF), The Evangel- -ical Fellowship of Cambodia(EFC), The Cambodia Christian Evangelical Alliance(CCEA),
3) 안식교 (참고: 위 단체 이외에 여호와 증인, New Apostolic Church, 그리고 몰몬교도 조직되었다.)
그리고 10월에 종교부는 위 5개 단체들로 캄보디아 기독교 협의회를 만들라고 명령하 였다.
사) 1996년 HBL (Home Bible League Internation)의 Rudy Manzono 가 프놈펜에서 교회개척훈련(Church Planters`s Training)을 시작하였다.
아) 1997년 새로운 신구약성서가 발간되었다.
자)2005년 현재는 복음송CD, 성경읽기CD등…..또한 많은 기독교서적들이 크메르어로 번역이 되어 있다.
제자양육교제나 어린이 전도프로그램등…..다양한 교육물들이 번역출판되어 현장에서 쉽게 사용할수 있도록 되어있고 현지사역자들이 문서사역에 눈을뜨고 많은 자료들이 만들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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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개신교 선교 역사 100년 눈앞, 교회 자립은 어떻게?
제2회 온라인 ACTS선교포럼 제2강 진행
“캄보디아 개신교회 미래와 교회 자립의 열쇠는 캄보디아인 개신교회 지도자와 교인이 가지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개신교회는 자치·자립·자전하면서 크메르 민족 복음화에 앞장서야 하며, 캄보디아 주재 외국인 선교사는 종교가 아닌 삶의 영향력으로, 캄보디아 최대의 영적·정신적 표상인 앙코르 와트를 믿음으로 뛰어넘을 제자를 양육해야 합니다.”
1923년 1월 첫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시작된 캄보디아 개신교 역사는 곧 1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캄보디아 복음화율은 약 1%에 불과하며, 전국의 1만4천여 마을 중 82%에 교회가 없는 실정이다.
‘선교지 교회의 자신학화와 자립’을 주제로 최근 줌으로 열린 제2회 온라인 ACTS선교포럼의 발표자인 주 보디아한인선교사회(KMAC) 회장 장완익 선교사는 “진정한 교회의 자립은 경제력의 자립이나 지도력의 자치보다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자전”이라며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자립 방안에 대해 열정적으로 발표했다.
장 선교사는 1993년부터 2006년까지 베트남에서 13년간 사역하고, 2006년부터 지금까지 15년간 캄보디아에서 사역한 현장 전문가인 동시에 선교학자로서 꾸준히 활동해 왔다. 현재 캄보디아 주재 한국인 장로교 목사 선교사와 소수 캄보디아인 장로에 의해 세워진 캄보디아장로교 독노회(APCC, 전 캄보디아장로교 공의회)에서 부노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인세계선교사회(KWMF) 사무차장, 아시아기독교사학회(HSAC) 이사, 캄보디아교회사연구원(ICCHI) 원장, CRRC(Cambodia Research & Resource Center) 이사,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날 장 선교사가 발표한 내용은 지난 4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조지아센트럴대학교에서 통과된 박사 논문 ‘캄보디아 개신교회사에 나타난 자립정책 연구 -캄보디아 장로교회를 배경으로’를 요약한 내용이다.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자립정책과 캄보디아인의 세계관
장 선교사는 캄보디아 개신교회 역사를 크게 세 시대로 구분하여 소개했다. 1923년 첫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한 후 1970년 론 놀(Lon Nol)의 크메르 공화국 수립 이전까지는 미국에 본부를 둔 C&MA가 거의 전담하여 캄보디아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들 선교사들에 의해 1948년에는 캄보디아 민족 교단인 크메르복음교회(KEC)가 설립됐다. C&MA와 크메르복음교회는 외국의 원조를 끊고 스스로 교회 사역을 시도하는 자립정책을 약 50년 동안 두 차례 실시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교회 사역자들이 급여가 나오지 않자 사역을 그만두는 일들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크메르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캄보디아 국내 교회는 모두 문을 닫고, 캄보디아 교회 역사를 해외 난민캠프의 캄보디아 교회가 이어받게 되었다. 당시는 교회 자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후 1993년, 지금의 캄보디아 왕국이 수립되면서 특이한 점은 많은 한국인 선교사가 캄보디아 선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장 선교사는 “현재 캄보디아 선교의 주력 세력은 캄보디아 개신교인과 1923년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비한국인 선교사 그룹, 그리고 1993년부터 참여한 외국인 선교사의 국적 기준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 선교사 그룹”이라고 말했다. 장 선교사에 따르면 현재 캄보디아 교회는 20~30명이 출석하는 가정교회들을 포함하여 대략 3천 개 정도로 파악되며, 이중 절반은 어느 교단이나 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된 교회다. 또한 캄보디아에는 약 3천 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활동하는데, 이중 약 절반은 공식, 또는 비공식 경로로 파송된 한국인 선교사로 추정하고 있다.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자립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장 선교사는 캄보디아인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사를 간략히 소개했다. 장 선교사는 “캄보디아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크메르 민족은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한 크메르 제국을 건설했고, 영토는 지금의 태국, 라오스, 베트남 중남부와 말레이시아 북부 등에 이르렀다”며 “그러나 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력은 날로 약해지고, 1000년 동안 프랑스, 베트남, 태국 등의 침공을 계속 받으면서 힘 있는 사람 밑에서 목숨을 유지하고자 하는 생존본능이 양심과 세계관과 본능으로 다가서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자립을 방해하는 요소는?
장 선교사는 캄보디아인 장로교인 103명, 캄보디아 주재 한국인 장로교 선교사 103명 등 총 206명을 대상으로 1년에 걸쳐 설문조사를 한 결과, 4가지 기초 변수를 파악했다고 말했다. 첫째, 캄보디아인 장로교인 대다수는 교회 자립에 어느 정도 관심과 의식이 있고, 상당수는 교회에 자립정책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캄보디아 주재 한국인 장로교 선교사의 상당수도 교회 자립에 매우 관심과 의식이 있었고, 자립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둘째, 캄보디아인 장로교인의 상당수는 ‘대체로 자립을 못한다’고 응답했고, 한국인 장로교 선교사의 상당수는 ‘거의 자립하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캄보디아 장로교인 일부는 자립하고 있다는 응답한 것과 달리, 한국인 장로교 선교사는 그러한 응답이 거의 없었다.
셋째, 캄보디아 개신교회 자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가진 이를 묻자, 캄보디아인 장로교인 상당수는 캄보디아 개신교회와 캄보디아인 교인이라고 응답하고, 일부는 캄보디아 주재 한국인 선교사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한국인 장로교 선교사의 절대다수는 같은 질문에 캄보디아 개신교회와 캄보디아인 교인이라고 응답했고, 소수가 한국인 선교사라고 응답했다.
넷째,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자립을 방해하는 요소를 묻자, 캄보디아인 장로교인의 반 정도는 ‘캄보디아 교인의 의존성’이라고 대답했고, 한국인 선교사들의 다수는 ‘외국인 선교사의 물량주의 사역’과 ‘캄보디아인 교인의 의존성’ 등 두 가지를 응답했다.
장 선교사는 또한 캄보디아인 2명,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 2명, 한국인 선교사 2명의 인터뷰를 통해 “캄보디아인 개신교인은 재정적인 자립보다 지도력의 바른 정립을 더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캄보디아 주재 한국인 선교사가 캄보디아 개신교회 자립에 기여할 수 있는지 묻자, 캄보디아인 장로교인 대다수는 ‘교회 개척과 건축’, ‘목회 사역 및 지도자 훈련’, ‘신학교육 사역’이라고 응답했지만, ‘어느 분야에도 기여하기 어렵다’는 응답도 일부 있었다. 한국인 장로교 선교사들도 대다수 ‘지도자 훈련’과 ‘신학교육 사역’ 및 ‘교회 개척과 건축’, ‘목회 사역’이라고 응답하고, 소수는 어느 분야에도 기여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고 장 선교사는 설명했다.
제2회 온라인 ACTS선교포럼 제2강
장완익 선교사는 캄보디아 개신교회 자립정책과 관련해 우선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여기에 속한 모든 교회 지도자와 선교사가 정기적인 교류와 국내외적 협력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장 선교사는 “2023년 1월 27~28일은 캄보디아 개신교 100주년 기념일인데, 그전까지 각종 자료 취합과 통계, 분석이 이뤄지면 그 의미는 훨씬 더할 것”이라고 말했다.
둘째, 장 선교사는 “캄보디아 개신교회가 따를 자립교회의 모델은 현재 지상에 존재하는 제도적 교회나 국가가 지도하는 교회, 건물이 앞장서는 교회가 아니라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초대교회와 같은 가정교회”라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상 주후 300년경까지 존재한 이때의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갖춰지지 않았으나 온전히 자립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지상명령을 따르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셋째, 그는 “캄보디아에서의 바람직한 교회 개척자는 캄보디아 주재 외국인 선교사보다 캄보디아인 교회 지도자나 사역자가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장 선교사는 “캄보디아 주재 외국인 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한 후 캄보디아인 교회 지도자가 그 지도력을 이어받아 자립을 이룬 경우는 많지 않다”며 “이는 캄보디아 주재 외국인 선교사와 캄보디아인 교회 지도자와의 논리적, 경험적 사고와 재정적 역량이 다르기 때문이며, 성경적 자립 원리와 캄보디아인의 세계관을 근거로 했을 때도 그러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한국교회와 한국인 선교사 가운데 교회당을 먼저 건축하고, 캄보디아인 교회 지도자나 사역자에게 재정을 정기적으로 지원하여 교회를 유지하는 사례에 대해 “이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사역 형태이며, 향후 지도력 이양과 자립에 적합하지 않은 모델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 개신교회는 캄보디아인이 지도력을 갖는 민족 교회에 해당돼야 하며, 토착적이고 자립하는 교회가 마땅하다”며 “캄보디아에 첫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한 지 98년인데도, 일부 교단과 교파의 지도력을 외국인 선교사가 갖는 것은 경제적 자립 이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그는 캄보디아 개신교회 자립을 위해 △일찍이 힌두교와 소승불교를 받아들였고, 2천 년간 왕을 중심으로 한 캄보디아인의 전통적 세계관이 성경적 세계관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선교사들은 심성과 정신, 영적인 면이 변화되는 사역에 힘써야 하며 △1975년 이후 해외에 진출한 캄보디아인들 가운데 미국에 정착한 캄보디아인 개신교인 디아스포라 교회를 활용하며 △4만여 명의 한국 체류 캄보디아인을 전도하면, 이들이 귀국 후 캄보디아 개신교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또한 △캄보디아 주재 외국인 선교사는 캄보디아인 교회 지도자나 사역자와 정신적, 문화적 눈높이를 최대한 비슷하게 갖고, 그들이 온정주의나 물량주의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한국인 선교사는 캄보디아인을 대상으로 개인적 차원의 교회사역보다 선교사가 속한 교단이나 선교단체를 통한 연합 차원의 교회사역을 지향하고, 주 캄보디아한인선교사회를 통해 캄보디아 개신교회 및 캄보디아 주재 비한국인 선교사 그룹과 소통을 노력하고 연구개발 사역을 하여 캄보디아 개신교회 자립정책에 협력할 것을 제안했다. 이와 함께 △캄보디아 교회 지도자 및 사역자에 교회 지도자를 이양하고 이들에게 정기적 재정 지원을 중단하며, 더 많은 대화를 통한 공동 관심사 개발과 상호 이해의 폭 확장, 교회사역의 중장기 계획을 함께 세워 교회 자립의 공동책무와 동역의 의미가 깊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종교가 아닌 삶으로 영향력을 미쳐야
장완익 선교사는 결론적으로 “한국인 선교사를 포함한, 캄보디아 주재 외국인 선교사는 캄보디아의 역사 문화적인 면, 영적인 면, 정신적인 면에 이르는 모든 분야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하며, 캄보디아인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견지해야 한다”며 캄보디아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캄보디아인 교인과 사역자, 이웃을 구제하고 지원하는 일은 대부분 열매 맺지 못하고, 거꾸로 면역성만 키우고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많이 보았다”며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물량적으로 구제하고 지원하는 온정주의는 결국은 교회 자립을 어렵게 만든다”며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장 선교사는 “캄보디아 최대의 영적, 정신적 표상인 앙코르 와트를 믿음으로 뛰어넘을 제자를 세우느냐에 캄보디아 개신교회의 진정한 자립의 결과가 달려 있을 것”이라며 “캄보디아 주재 외국인 선교사는 종교가 아닌 삶의 영향력으로 제자를 양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크메르복음교회와 C&MA, 캄보디아장로교 독노회 등이 한자리에서 교회 자립에 대한 주제로 실무적 대화를 나누며 캄보디아에 적합한 모델을 만들고 △주 캄보디아한인선교사회의 연구개발 사역을 시작하고 △144개 지교회가 소속된 캄보디아장로교 독노회(APCC) 차원의 자립정책을 수립 및 시행하며 △캄보디아교회사연구원(ICCHI)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한편, 이날 사회를 맡은 김한성 ACTS 교수(네팔선교연구원 연구교수)는 “한국교회와 선교사님들에게 선교 지식적 도움을 주기 위해 1학기에 이어 두 번째 선교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다”며 “이러한 귀한 연구 내용이 공유되고, 함께 의논하다 보면 한국교회와 선교사님들이 좀 더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