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우자마 실험 – 성자와 도덕국, 그리고 지워진 농민들」

             탄자니아 건국의 아버지 줄리어스 니에레레 연구

박훈 변호사(시인, 고려대, 변호사로 민노총에서 일했으며 지금도 창원에서 거주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변호, 다방면의 연구자로 유명하다. 2012년 “부러진 화살” 영화 주인공, 이 글은 박변호사가 페이스 북에 공개한 것을 허락 받아 공개)   

                                                  * 영화 석궁의 실제 주인공 교수와  박훈 변호사 

제1장. 성자(聖者)는 누가 만드는가

그레나다의 혁명가 모리스 비숍을 연구하다가 그가 모델로 삼았다는 탄자니아의 ‘니에레레주의’를 마주했다. 비숍은 이를 사회주의의 한 전형으로 해석했으나,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현대적 의미의 사회주의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지점이 발견된다.  탄자니아 건국의 아버지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주창한 ‘우자마(Ujamaa, 스와힐리어로 가족애·공동체)’는, 실상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니에레레의 종교적 이상과 아프리카 전통주의가 결합한 망상적 산물에 가깝다. 
 
그것은 과학적 사회주의라기보다 사도행전 4장 32절(“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에 묘사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을 국가 단위에서 강박적으로 구현하려 한 시도였다. 또한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사도행전 5장이 보여주는 살벌한 규율과 통제를 아프리카 부족 질서에 덧씌운 통치 모델이기도 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니에레레는 이 ‘성서적 공동체’를 지상에 건설하려 수천 개의 마을을 강제로 집단 농장화했고, 이는 탄자니아 경제의 파멸적 붕괴를 초래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는 현실 정치의 처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성자’로 추앙받는다. 가톨릭 교회는 그의 청빈한 삶과 도덕적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여, 2005년 교황청으로부터 ‘하느님의 종(Servant of God)’ 칭호를 부여하며 공식적인 시복(Beatification) 절차에 착수했다.
 
하지만 ‘청빈한 독재자’가 1973년부터 1976년 사이 강행한 집단마을화 정책으로 약 1,100만 명에서 1,300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강제 이주당했다는 사실은 성자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다. 국가 폭력에 의해 직접 살해된 이들뿐 아니라, 식량 생산량이 반 토막 나며 발생한 기근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공식 통계조차 잡히지 않을 만큼 부지기수다. 그리고 이 거대한 비극의 배후에는 스웨덴 사민당의 맹목적이고도 방대한 원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 참혹한 내막을 이제 파헤쳐 본다.
 
1-1. 중위계급 지식인 혁명 주도 가설의 시험장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캄바라게 니에레레(Julius Kambarage Nyerere, 1922~1999년)와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Olof Palme, 1927~1986년)를 나란히 세우면, 한쪽에는 가난한 아프리카의 “성자” 지도자, 다른 한쪽에는 풍요로운 복지국가의 “도덕적 귀족”이 선다.  둘 사이를 오가는 언어는 반식민, 평등, 연대, 공동체 같은 아름다운 말들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내가 보려는 것은 그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설계하고 증폭하고 자금을 동원한 중위계급 지식인들의 구조다. 
 
내가 세운 중위계급 지식인 혁명 주도 가설은 간단히 말해 이런 주장이다. 혁명과 국가 재편의 청사진을 설계하는 집단은 대부분 중위계급 지식인이고, 이들이 상위계급 혹은 하위계급 어느 쪽과 동맹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해방인지 국가포획인지 갈린다. 상위계급과 손을 잡으면 “개혁”의 언어를 쓰더라도 결과는 하위계급을 동원·통제하는 국가 포획으로 흘러가고, 상위계급에 의해 배제된 중위계급 지식인이 하위계급과 동맹하면 폭발적인 혁명 동원이 일어나지만, 그 이후 구성된 국가 또한 새로운 포획 구조로 굳어질 위험이 크다.
탄자니아와 스웨덴의 결합은, 이 가설을 국경을 넘어 시험할 수 있는 거의 완벽한 검증장이다. 한쪽에는 식민 교육을 통과한 아프리카 지식인 대통령과 당·관료·전문가 집단이 있고, 다른 쪽에는 유럽 복지국가의 사민당 정치인·경제학자·NGO 활동가·언론인이 있다. 이 둘이 “해방”과 “공동체”를 입에 올리며 손을 잡는 순간, 세계체제의 한 구석에 거대한 사회 실험장이 세워진다.  
 
탄자니아 안에서는 가톨릭 교사 출신의 지식인 대통령과 도시 엘리트, 당·관료 중간층이 우자마(Ujamaa)라는 “가족애 사회주의”를 설계했다. 그 위에 서유럽의 중위계급 지식인과 사민당 엘리트가 “도덕적 강대국” 스웨덴이라는 국가 자원을 얹어 주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과 묘를 떠나 강제 이주당한 수천만 농민이 있었다. 말하고 설계한 사람과, 집이 불타고 마을이 옮겨진 사람은 전혀 다른 계급이었다. 이 글은 이 비대칭을 따라가 보려는 시도다.
 
1-2. “도덕국–성자–농민” 삼각구조의 개요
이 글에서 내가 붙잡을 틀은 “도덕국–성자–농민” 삼각구조다. 도덕국은 전쟁·식민의 주범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깨끗한 백인”으로 상상하는 복지국가 스웨덴이다. 여기서 도덕국이란 군사력·경제력보다 “도덕성”을 외교 자본으로 내세우고, 스스로를 인권·평화·연대의 대변자로 상정하는 국가를 뜻한다. 성자는 가톨릭 신앙과 청렴함, 소박한 생활로 서구 지식인들의 양심을 달래 주는 니에레레다. 그는 개인적으로 부패하지 않았고, 퇴임 후에도 호화로운 망명이나 사치 생활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 점이 서구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정서적 방패막이가 되었고, 경제정책의 결과를 냉정하게 보는 시선을 가렸다. 
 
농민은 이들의 언어에서는 “공동체”, “민중”, “아프리카의 마을” 정도로 뭉뚱그려지지만, 실제로는 강제 이주와 기아, 영유아 사망률 폭증을 떠안은 하위계급이다. 행정 구역과 원조 보고서에서는 “우자마 마을 주민” 혹은 “농촌 인구” 정도로 집계되지만, 각 마을·각 가구 단위에서 보면 조상 묘를 버리고 낯선 땅으로 옮겨간 농민, 식량 원조 배급줄에 서야 했던 아이와 여성, 병이 나도 약을 구할 수 없었던 노인들로 구성된 구체적인 삶의 집합이다.

이 삼각형은 단순한 도덕극이 아니다. 스웨덴 사민당과 정책 엘리트는 국내에서는 임금노동자 기금(Meidner 플랜) 같은 제도를 통해 상위계급의 자본을 파고들려 했고, 대외적으로는 비엣남전 반전 운동과 제3세계 연대를 통해 “도덕적 강대국”이라는 외교적 자본을 쌓았다. 탄자니아는 이 도덕 자본을 시현하는 쇼윈도이자, 북유럽 모델을 수출해 보는 실험장이었다. 반대로 니에레레와 탄자니아 지식인 집단은, 스웨덴의 자금과 도덕적 승인 덕분에 우자마 사회주의를 훨씬 오래 끌고 갈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성자 대통령”이 있기에 인내해야 한다는 도덕적 압박이, 국제적으로는 “아프리카의 모범 실험”이라는 이미지가 실패 인정을 늦추는 쪽으로 작동했다. 
 
이 구조 속에서 농민은 말 그대로 실험 대상이었다. 1960년대 후반, 탄자니아는 곡물과 가축을 주변국에 수출하던 농업국이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는 외부 식량 원조가 없으면 버티기 어려운 국가로 전락했다. 일부 통계에서는 1961. 12. 영국에서 독립 직후 1인당 곡물 생산이 동부 아프리카 평균을 상회했으나, 집단마을화(Villagization) 이후에는 순식간에 식량 순수입국·원조 의존국으로 떨어졌음을 보여 준다. 니에레레 개인의 청렴함과 스웨덴의 선의는, 이 구조를 설명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누가 설계했고, 누가 자금을 대었고, 누가 집단마을로 끌려갔는가 하는 정치·경제 구조다.
 
제2장. 탄자니아 우자마 실험의 실제 구조
2-1. 니에레레의 정치적·지적 형성(가톨릭, 페이비언, 간디)
탄자니아는 역사적으로 중앙집권화된 단일 국가를 형성한 적 없이, 120여 개의 부족 추장국(Chiefdoms)이 각 지역을 독자적으로 통치하던 구조였다. 그러다 1885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 제국의 고압적인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에는 영국의 관할로 넘어갔다. 이후 1961년 12월 9일 독립할 때까지 약 40여 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  2026년 2월 기준, 탄자니아는 면적 약 945,087㎢로 한반도의 4.3배에 달하는 영토와 약 7,20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경제 측면에서는 2025년 기준 명목 GDP 874억 달러, 1인당 GDP 1,300달러 정도다. 주요 수출품은 금, 커피, 면화이며, 농업 분야에서는 옥수수, 쌀, 밀, 카사바, 바나나, 콩류가 주요 재배 작물로 꼽힌다. 또한 축산업 역시 국가의 주요 산업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세렝게티, 킬리만자로, 잔지바르를 중심으로 한 관광업은 연간 4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창출하며 탄자니아의 핵심 산업 역할을 하고 있다.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 1922~1999)는 이 영국 식민지 지배 초기인 1922년 탄자니아 북부 빅토리아 호수 인근 무소마 지역의 작은 마을인 부티아마(Butiama)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나키(Zanaki) 부족의 26개 가문 중 하나를 이끌던 추장 부리토 니에레레(Burito Nyerere)의 아들로, 부족 사회의 전통적 질서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2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영국 식민 정부가 세운 학교에 진학한 그는 탁월한 총명함을 보이며 영어와 가톨릭 교리를 급속도로 흡수했다. 특히 청소년기에 접한 가톨릭 신앙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을 넘어 평생 그가 추구한 청빈함과 평등주의적 가치관의 뿌리가 되었으며, 훗날 그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중심축이 되었다.

1961. 12. 독립 후 그에게 붙은 별칭 “음왈리무(Mwalimu)”는 스와힐리어로 스승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그는 우간다의 마케레레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뒤 가톨릭 학교 교사로 일했다.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고 토론하던 경험은, 나중에 그가 국가와 사회를 “교육하고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각과 맞물린다.  1949년 그는 장학금을 받아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역사와 경제학을 공부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그가 접한 것은 소련식 공산주의라기보다, 영국 노동당과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점진적 개혁론, 그리고 인도 독립운동가 간디(Mohandas K. Gandhi, 1869~1948년)의 비폭력 사상이었다.

니에레레는 나중에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전통적 공동체와 기독교 윤리를 결합한 사회주의자”라고 설명했다. 계급투쟁과 무신론을 전제로 삼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식민 이전의 아프리카 마을 공동체를 평등하고 조화로운 공간으로 이상화하는 지식인 노선이었다.
니에레레는 1968년, 자신의 정치 철학을 집대성한 저서 『우자마: 사회주의에 관한 에세이』(Ujamaa: Essays on Socialism)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론 대신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대가족주의’를 근간으로 한 독창적인 사회주의 모델을 제시했다. 이는 1967년 선포된 아루샤 선언(Arusha Declaration)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으며, 이후 그레나다의 비숍을 비롯한 제3세계 혁명가들에게 ‘서구 자본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으로 읽히며 깊은 영감을 주었다.
니에레레는 농민을 “형제자매”와 “가족”이라 부르며, 계급투쟁 대신 도덕적 설득을 통한 공동체 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 서술은 식민지 시기와 전근대 동아프리카 농촌에 엄연히 실재했던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예속, 고리대금업의 착취, 그리고 부족 내부의 고착화된 위계와 폭력을 상당 부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은 그가 선택한 정치적 도구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1954년 그가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연맹(TANU, Tanganyika African National Union)은 엄밀한 의미의 레닌주의 공산당이라기보다 포괄적인 민족주의 정당에 가까웠다. 니에레레는 도시 노동자 계급과 전위 혁명당을 중심에 세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노선 대신, “민족”과 “농민”이라는 광범위한 범주를 엮어 농민, 도시 중간층, 지식인을 모두 아우르는 “큰 그릇”의 대중정당을 지향했다. 이는 독립을 위한 동원에는 효과적이었으나, 훗날 구체적인 경제 구조의 모순을 해결하기보다는 도덕적 구호에 치우치게 되는 내재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가 집권 후에도 다당제 경쟁을 허용하지 않고 일당제를 택한 것은, 이념 때문이라기보다 “부족 갈등을 억제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운 정치적 선택이었다. 다수 부족과 소수 부족, 종교·지역 갈등이 내전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로, 경쟁 정당을 허용하지 않고 TANU를 유일 합법정당으로 유지했다. 이렇게 보면 니에레레는 처음부터 혁명가라기보다, 자신의 도덕적 자질과 교육자적 권위를 믿고 “도덕적 국가 건설”을 추진한 중위계급 지식인 대통령이었다.

2-2. 아루샤 선언과 우자마 공동체주의 노선 정립
1967년 2월 5일 발표된 아루샤 선언은 탄자니아 공동체주의 노선을 공식화한 문서였다. 여기서 니에레레와 TANU는 세 가지를 동시에 선언한다. 첫째, 이 나라는 사회주의와 자립(self-reliance)을 목표로 한다. 둘째, 주요 생산 수단과 은행·무역은 국유화한다. 셋째, 지도층은 사적 축재를 포기한다는 지도자 윤리 강령(Leadership Code)을 받아들인다.  아루샤 선언은 겉으로 보면 소련식 사회주의와 비슷한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실제로 1967년 이후 탄자니아는 은행·보험·수입무역·대형 산업을 잇따라 국유화했고, 국영 마케팅 보드가 농산물 유통을 장악했다. 외형만 보면 “과학적 사회주의”의 전형적인 수단들이다. 그러나 국유화와 사회주의 관련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것은 인류가 고대로부터 가져온 공동체 소유 의식의 다른 변형일 뿐이다. 국유화 자체는 사회주의와 동일어가 될 수 없다. 
 
니에레레는 이 모든 것을 우자마라는 이름의 아프리카식 사회주의로 포장했다. 우자마는 스와힐리어로 가족·공동체를 뜻한다. 그는 아프리카 전통 마을 공동체에는 원래 계급이 없었고, 공동 노동과 상호부조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선언이 농촌을 바라보는 도시 지식인의 시선이라는 점이다. 아루샤 선언과 이후 연설에서 니에레레는 지주·소작 관계나 내부 착취 구조를 해부하기보다, “농민과 노동자는 하나의 인민”이라고 포괄하면서도 농민을 “지도하고 조직해야 할 대상”으로 그린다. 문제는 이 “하나의 인민” 언어가 농민 내부의 계층 차이, 지역 차이, 식민지기 강제 작물 재배와 세금 제도의 유산을 흐려 버린다는 데 있다. 
 
니에레레는 농민을 하나의 계급으로 보기보다, 원래 평등했으나 식민주의와 도시 자본주의 때문에 왜곡된 전통 공동체로 상상했다. 그래서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지주·소작 관계나 고리대 구조가 아니라, “비효율적인 소농 생산”과 “분산된 농촌 정착”이었다. 아루샤 선언은 농민을 정치적 주체라기보다 국가가 재조직해야 할 객체로 설정했다. 이것이 뒤의 집단마을 정책으로 이어진다. “전통 공동체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실제 전통 마을과 토지 이용 방식은 해체되고, 행정이 설계한 새로운 공동체가 위에서 덮어씌워지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2-3. 강제 집단마을화 (Villagization) – 이동작전(Operation Sogeza)와 행정·군사 메커니즘
아루샤 선언 직후 우자마 마을은 실험적으로 시작되었다. 남부 루부마 지역의 리토와(Litowa) 같은 마을에서는 일부 농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공동 경작과 공동 창고를 운영했고, 니에레레는 이 사례를 이상적 모델로 선전했다.  초기 우자마 마을에 대한 정부·연구 보고서를 보면, “자발적 참여”, “민주적 회의”, “생산과 분배의 공정성” 같은 표현이 반복된다. 그러나 몇몇 성공 사례만으로 전국 농촌 구조를 바꾸기는 어려웠다. 1970년대 초까지 우자마 마을로 옮겨온 농민은 전체의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농민은 조상 묘와 전통적인 경작지를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1973년 이후 정부는 강제 집단마을화 정책, 이른바 Villagization에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일부 문서에서는 이를 Operation Sogeza 같은 작전명으로 부르며, 일정 기간 안에 몇 개 행정구역의 주민을 전면 재배치하는 계획을 세웠다.  니에레레 자신이 밝힌 것처럼 1973년 9월부터 1975년 6월까지 700만 명이 넘는 농민이 새 마을로 옮겨졌고, 1975년 하반기부터 1976년 말까지 추가로 400만 명이 이동했다.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1973~1976년 사이 1,100만~1,300만 명이 강제 혹은 반강제 방식으로 이주했다는 추정이 나온다. 당시 탄자니아 전체 인구를 고려하면, 성인·아동을 포함한 농촌 인구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 
 
행정·군사 메커니즘은 단순했다. 농민이 자발적으로 등록하도록 유도한다는 명분 아래, 마을 지도자와 탄원회를 통해 “등록하지 않으면 이후 정부 서비스에서 배제된다”는 압박을 가했다. 버티는 마을에는 군과 경찰이 들어가 집을 태우고 가축을 몰수하거나 우물을 메웠다.  기존의 마을 구조와 물길·토양·기후에 맞춰 발전해 온 전통 농업 지식은 행정지도 위의 점과 선으로 대체되었다. 관료들은 도로에서 접근하기 쉬운 곳, 학교와 보건소를 세우기 편한 곳에 “이상적인 마을”을 그려 놓고, 농민을 거기로 몰았다.  
 
여기서 다시 중위계급 지식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수도 다르에스살람의 관료·전문가·정치 지도자, 외국 원조를 관리하는 기술관료, 당 간부들은 모두 우자마 마을 설계자이자 감독자였다. 그들은 문서와 회의에서 “인간 중심 개발”과 “공동체 복원”을 이야기했지만, 실제 현장에서 농민을 끌고 간 것은 행정 명령과 군대였다. 몇몇 지역 연구에서는 지방 행정관들이 보다 온건한 방식으로 조정하려 했던 사례도 발견되지만, 국가 정책의 큰 방향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4. 생산량·무역구조·재정·외채의 변화(“잃어버린 20년”을 수치로)
집단마을화(Villagization)가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탄자니아 농업 생산은 눈에 띄게 흔들린다. 여러 연구에서 1970년대 중반 곡물 생산이 평년의 20~30퍼센트 수준까지 떨어졌다는 추정이 나온다. 일부 통계는 1973~1975년 사이 몇몇 주곡 작물의 생산량이 1960년대 후반 평균에 비해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고 지적한다.

이 시기에 실제로 어느 정도 규모의 집단화가 진행됐는지 보면, 그림이 훨씬 또렷해진다. 탄자니아 정부와 세계은행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들을 보면, 1973~1976년 사이 집단마을화(Villagization) 과정에서 1,100만~1,300만 명이 기존 촌락에서 새 마을로 옮겨졌고, 프로그램 종료 시점에는 전체 인구의 약 80퍼센트, 대략 1,300만 명이 “새 마을”에 살고 있었다는 추정이 많다.  
 
일본 JICA가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1976년 3월 기준 등록된 마을·우자마 마을이 7,684개였고, 여기에 거주하는 인구가 약 1,306만 명으로 잡혀 있다. 이 숫자를 단순히 나누면, 마을 하나당 평균 1,700명 안팎의 인구를 집어넣은 셈이다. 독립 직후와 비교하면, 원래 500명 안팎 소규모 촌락과 산재 취락으로   “새 마을”의 입지와 농지 조건이었다. 행정은 도로 접근성, 학교·보건소 건설 편의, 지도 위에서 보기 좋은 배치를 기준으로 마을 위치를 정했다. 많은 경우 기존에 농민들이 수백 년 동안 터를 잡았던 비옥한 토양과 수자원, 미세한 기후 차이는 고려되지 않았다.  
 
여러 연구자가 지적하듯, 강제 이주로 조성된 마을 상당수는 강수량이 턱없이 부족하거나 토양이 얕아 침식이 심한 곳, 혹은 원래는 농사에 부적합한 방목지나 잡목림이던 황무지에 들어섰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척박한 새 마을 주변의 생소한 땅을 새로 개간하거나, 매일 왕복 몇 시간씩 걸어 옛 경작지와 새 거주지를 오가야 하는 가혹한 처지에 놓였다. 결국 집단화 이후 “마을은 국가의 계획대로 새로 생겼지만, 정작 삶을 지탱하는 논밭과 초지는 낡은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기괴하고 모순된 공간 구조가 탄자니아 농촌 전역에 고착되었다.
 
작물 구성도 보면 피해가 더 분명하다. 독립 직후 탄자니아의 전통적인 수출 작물은 시잘(sisal), 커피, 면화, 캐슈너트, 차, 담배 같은 6개가 중심이었고, 곡물은 옥수수·수수·조·쌀이 주식이었다. 1960년대 시잘 생산은 연간 20만 톤을 넘는 수준이었지만, 1982년에는 6만1,000톤으로 떨어졌다. 캐슈너트 역시 19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붕괴했다. 수출 작물 위기에는 가격 정책과 마케팅 보드의 착취도 작용했지만, 집단마을화(Villagization)으로 노동력과 토지 이용 패턴이 뒤틀리면서 기존의 고도(高度)·토양에 맞춰 형성된 작물 벨트가 크게 흔들렸다.
 
식량 측면에서 보면, 1974~1977년 사이 곡물 부족분이 누계 100만 톤을 넘었다는 추정이 있다. 우자마의 목표는 “식량 자급”이었지만, 실제로는 곡물 수확이 줄고 수입 의존이 늘어나면서, 독립 직후 이웃 나라에 곡물과 가축을 팔던 농업국이 몇 년 사이 외국 식량 원조 없이는 버티기 힘든 나라로 바뀌었다. 아프리카 동부에서 곡물과 가축을 이웃나라에 팔던 농업국이, 몇 년 사이 외국 곡물 원조 없이는 버티기 힘든 나라가 되었다. 여기에 1970년대 유가 급등과 1978~1979년 우간다 이디 아민(Idi Amin, 1925~2003년) 정권과의 전쟁 비용이 겹치면서, 국고와 외환은 동시에 비어 갔다. 
 
세계은행 자료에 의하면, 탄자니아의 1인당 GDP(현재 미 달러 기준)는 독립 직후인 1960년대 초와 1980년대 초를 비교해도 거의 제자리이거나 약간 낮은 수준에 머문다. 1970년 1인당 GDP는 약 217달러였고, 이후 1980년대 초까지 명목 수치가 조금씩 오르긴 하지만, 물가와 환율을 고려한 실질 수준은 20년 동안 지지부진했다.

같은 시기 동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이 완만하게 성장한 것과 비교하면, 우자마 실험의 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략 감이 잡힌다.  무역 구조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독립 직후 탄자니아는 커피·면화·시잘·캐슈너트·차·담배·가축 등을 수출해 외화를 벌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는 식량과 소비재 수입에 들어가는 돈이 수출 수입을 초과하는 해가 반복되었다. 곡물·설탕·기본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농촌의 자급 능력은 떨어졌다. 1973~1975년에는 동아프리카 가뭄과 집단마을화(Villagization) 충격이 겹치면서 옥수수·조·수수 같은 주곡 생산이 평년 대비 15~30%, 일부 지역에서는 30% 이상 감소했다.
 
이로 인해 므완자(Mwanza), 시냥가(Shinyanga), 마라(Mara) 같은 북서부의 전통적 비(非)기근 지역에서도 수백만 명이 기근 위협에 직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시기 정부는 1974~1975년 사이 최대 27만 명 정도를 수용하는 구호캠프를 운영하며 곡물 원조를 배분했고, 한 보고서는 “식량 위기로 인한 대규모 직접 아사(餓死)는 피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재정과 외채 구조도 변했다. 국영기업과 농산물 마케팅 보드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정부는 공적개발원조에 더 의존했고, 1970년대 후반에는 교육·보건·농업 투자보다 적자 보전에 더 많은 예산이 들어갔다.
 
인구통계 재구성과 지역 연구들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탄자니아 일부 지역에서는 영유아 사망률이 급증하고 기대수명 개선 추세가 정체되거나 오히려 역전된 흔적이 뚜렷하게 관찰된다. 비록 이 시기 가뭄, 식량 위기, 집단마을화(Villagization)가 겹친 몇 년 동안 에티오피아식 대기근처럼 수십만 명이 일시에 굶어 죽었다는 국가 차원의 공식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들은 만성적인 영양실조와 그로 인한 질병 악화로 인해, 농촌의 영유아와 노약자층을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아사 및 초과 사망이 발생했다는 점을 대체로 공유하고 있다.
 
원조와 차관은 국가 예산의 한 축이 되었지만, 동시에 대외채무 상환 부담도 빠르게 불어났다. 1980년대 초에는 외채 상환 부담과 무역수지 적자 때문에 IMF·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편입되는 길로 끌려간다. 니에레레는 1985년 퇴임하면서 “우자마는 경제적으로 실패했다”고 인정했지만, 이미 농촌에서 잃어버린 20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경제적 충격을 우자마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1970년대 국제 유가 급등, 세계 경기 침체, 이웃 나라와의 전쟁, 세계 곡물 가격 변동 등이 겹친 탓도 크다. 이 글의 초점은, 이런 외부 충격이 없었더라도 탄자니아 농업과 재정이 견뎌 냈을지, 우자마와 집단마을화(Villagization)이 구조적 취약성을 어느 정도 키웠는지를 보는 데 있다.

제3장. 스웨덴 사민주의와 국제 도덕주의 형성
3-1. 에를란데르–팔메 체제와 복지국가·도덕국의 결합
스웨덴 내부에서 탄자니아 우자마 실험의 다른 절반이 준비되고 있었다. 1946년 타게 에를란데르(Tage Erlander, 1901~1985년)가 총리에 오른 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SAP)은 1969년까지 23년 동안 집권을 이어 갔다.  이 기간 스웨덴은 고세율·강력한 노조·노사 타협을 축으로 하는 복지국가 모델을 만들었다. 의료·교육·연금·실업보험을 국가가 책임지는 대신, 국민 전체가 높은 세금을 부담하는 구조였다. 
 
복지제도 자체만 놓고 보면 이 시기는 스웨덴 자본주의의 안정기였다. 문제는 이 내부 안정과 성장의 경험이, 에를란데르와 후계자들에게 “우리가 설계한 제도가 보편적 모범”이라는 확신을 심어 줬다는 점이다. 이 확신을 외부 세계, 특히 제3세계에 투사하는 작업을 맡은 인물이 젊은 후계자 올로프 팔메(Olof Palme, 1927~1986년)였다. 팔메의 출발점은 가난이 아니라 상류층이었다. 그는 스톡홀름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대형 보험사 경영진, 외가는 유럽 상류층 네트워크와 연결된 집안이었다. 순수하게 계급 출신만 보면, 그는 보수 우익 정당으로 가야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그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케니언 칼리지(Kenyon College)에서 장학금을 받고 1년간 유학하며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했고, 1948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팔메는 전후 미국 자본주의의 민낯을 가까이서 본다. 고속 성장을 누리는 부유한 계층과, 열악한 주거 환경과 불안정한 일자리에 내몰린 노동자·흑인 집단의 격차, 제도화된 인종차별을 동시에 보면서, 그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혐오와 스웨덴식 복지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동시에 굳혀 나갔다.
 
스웨덴으로 돌아온 팔메는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해 1951년에 학위를 마친 뒤, 1953년에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의 개인 비서로 발탁된다. 여기서 팔메는 단순한 야당 정치 지망생이 아니라, 국가 정책을 설계하고 조정하는 정치·관료 엘리트 지식인으로 성장한다. 에를란데르가 국내 복지·조세·노사 구조를 다듬었다면, 팔메는 그 구조를 세계 정치의 언어로 번역해 보여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스웨덴 복지국가를 “전쟁과 식민지에 물들지 않은 북구의 자본주의”,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회민주주의 모델”로 설명하기 시작했고, 이후 비엣남전 반전과 제3세계 연대, 탄자니아 원조는 이 자기 이미지를 바깥에서 증명하는 무대로 이어졌다. 
 
1969년 에를란데르가 물러나자, 팔메는 42세의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된다. 그는 국내에서는 기존 복지국가를 유지·확장하고, 대외적으로는 “중립이지만 침묵하지 않는 나라”를 내세웠다. 1972년 미국의 하노이·하이퐁 크리스마스 폭격을 비판하는 라디오 연설에서, 그는 이 폭격을 게르니카·카틴 숲·샤프빌 학살과 같은 사건들 옆에 나란히 놓았다.

미국 대통령의 결정을 나치와 소련의 학살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은 것이다. 미국은 즉각 주스웨덴 대사를 소환하고 외교 관계를 사실상 중단했지만, 제3세계에서는 “백인 지도자 가운데 드물게 미국에 맞선 사람”으로 환호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스웨덴 사민당과 정책 엘리트의 자기 이미지는 바뀐다. 이들은 더 이상 “국내 복지국가를 잘 운영하는 정당”에 머무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설계한 제도를 세계 정치의 도덕적 기준으로 제시하고, 제3세계 해방과 연대를 이끄는 도덕국으로 스스로를 상상하게 된다. 탄자니아와의 관계는 바로 이 자기 이미지 위에서 형성된다. 니에레레의 우자마는 “스웨덴 모델의 농촌·제3세계 버전”처럼 보였고, 팔메에게 탄자니아는 도덕국 스웨덴의 외교 무대를 넘어, 복지국가 이념을 수출해 보는 실험장이었다.
 
3-2. 제3세계 전략 – 비엣남 반전에서 탄자니아 선택까지
스웨덴이 본격적으로 제3세계와 연결되기 시작한 출발점은 비엣남전 반대 운동이었다. 1960년대 후반 스웨덴 대학가와 노동조합, 사민당 청년조직에서는 미국의 비엣남 개입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많은 서유럽 국가에서 이런 비판은 주로 거리와 강단에 머물렀지만, 스웨덴에서는 총리와 정부가 그 언어를 가져다가 공식 외교의 말로 사용했다.

팔메는 교육부 장관과 총리 시절 내내 비엣남전 반대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그는 북비엣남 대표를 스톡홀름 노동절 집회에 초청해 함께 행진했고, 비엣남 임시혁명정부 대표를 사민당 전당대회 연단에 세웠다.
스웨덴은 서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북비엣남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 단계에서 스웨덴은 이미 도덕 자본을 쌓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국이지만, 전쟁과 식민지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는 나라”라는 이미지다.

그러나 비엣남은 스웨덴이 아무리 도덕적 지지를 보내더라도, 이미 자신들의 혁명 이론과 조직, 군사력을 갖춘 나라였다. 스웨덴이 직접 정책을 설계하거나 제도를 이식할 여지는 제한적이었다. 비엣남은 스웨덴에게 “미국에 맞서는 도덕국”이라는 상징을 부여했지만, 복지국가 모델을 제3세계에 심어 본다는 의미에서의 실험장은 되기 어려웠다. 탄자니아는 이 점에서 훨씬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첫째, 스웨덴은 탄자니아를 식민 지배한 적이 없다. 탄자니아 영토는 19세기 후반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독일령 동아프리카였고, 이후 영국이 탕가니카 위임통치령으로 관리했다. 스웨덴 엘리트에게 탄자니아는 “과거 죄책감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아프리카 국가”였다. 자신들은 “나쁜 백인”이 아니라 “도와주는 착한 백인”으로 등장할 수 있다.
 
둘째,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소련식 무신론 공산주의자와 달랐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에든버러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보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와 영국식 복지국가,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우자마 공동체 사회주의는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대신, 공동체와 가족, 도덕을 강조하는 언어를 사용했다. 스웨덴 루터교와 가톨릭, 기독교 NGO들은 니에레레 속에서 “성경과 사회정의를 결합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보았다.

셋째, 우자마(Ujamaa)는 농촌 공동체와 국가 계획을 결합한 실험이었다. 마을 단위의 집단 농장, 공동 창고, 교육·보건 시설로 농촌을 재편한다는 구상은 도시 중심의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을 농촌 및 제3세계 버전으로 확장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팔메와 사민당 엘리트들은 우자마를 “스웨덴 복지국가의 농촌 사회주의판”으로 이해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스웨덴 사민당이 도시 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했다면, 니에레레의 우자마는 농민을 주체로 하여 자급자족과 공동체 복지를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농촌판 복지국가’라는 비유는 학계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관점이다. 
 
이 지점에서 종교 및 시민사회 네트워크가 결합한다. 스웨덴 교회와 선교 단체, 기독교 NGO들은 니에레레를 “가난한 자의 편에 선 청렴한 지도자”로 묘사하며, 탄자니아에 대한 원조를 하나의 신앙적 실천으로 승화시켰다.  대학과 연구 기관 역시 우자마(Ujamaa) 마을을 “참여적 발전”과 “농민 중심 개발”의 혁신적 모델로 분석하는 논문과 보고서를 쏟아냈다. 이로써 스웨덴 내부에서 탄자니아는 비엣남 전쟁 반대 운동을 통해 얻은 도덕적 자본을 장기적인 정책 실험으로 전환하여 투쟁하는 핵심 무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서 한 가지 질문이 일관되게 결여되어 있었다. 우자마 마을로 강제 이주당한 농민들이 무엇을 상실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전통적인 생산 구조와 생존 전략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에 대한 집요한 물음이다.
 
스톡홀름의 강단과 교회, 사민당의 회의실에서 탄자니아는 오직 “모범적인 실험실”로만 묘사되었을 뿐, 그 실험의 가혹한 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실제 농민들의 삶은 그 그림 속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당시 스웨덴을 비롯한 서구의 지지자들은 니에레레의 ‘이념’과 ‘비전’에는 열광했으나, 현장에서 벌어진 강제 이주와 가옥 파괴, 생태적 적응 실패 등의 구체적인 고통에는 눈을 감거나 이를 ‘과도기적 진통’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다.

3-3. 원조 규모·구조 – 우자마 골조를 떠받친 스웨덴 자금
스웨덴 국제개발협력청(Sida)과 원조 평가보고서들을 종합하면, 탄자니아는 1960년대 독립 이후 수십 년간 스웨덴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었다. 1970년대 중반 스웨덴의 대(對)탄자니아 지원액은 연간 약 5,000만 달러에서 1억 달러 수준까지 치솟았는데, 이는 당시 탄자니아 국가 경제 규모에 비추어 볼 때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1970년대 탄자니아의 전체 공적개발원조(ODA) 중 스웨덴의 기여분은 약 15%에 달했으며, 노르딕 국가 전체로 넓히면 그 비중은 30%를 상회했다. 특히 이 시기 탄자니아 정부 개발 예산의 상당 부분(일부 지표상 30~50% 내외)이 외부 원조로 충당되었음을 고려할 때, 스웨덴은 사실상 탄자니아 국정 운영의 재정적 생명줄 역할을 했던 셈이다. 
 
부문별로 보면, 1960~1980년대 스웨덴 원조는 성인교육·문해 교육·초등교육·교사 양성·직업훈련 같은 인적 자본 분야와, 농촌 식수·보건·마을 인프라 같은 소규모 개발 사업에 집중되었다. 사업명만 나열해도 “농촌 개발 프로젝트”, “우자마 마을 사회기반시설 정비”, “농민 문해 및 성인교육 프로그램” 같은 항목이 반복된다. 스웨덴 연구자들과 관료들은 이것을 “생산성 향상과 민주적 참여를 결합한 농촌 개발”이라고 설명했다.
형식상 이 자금은 학교와 우물을 짓고, 교사를 양성하고, 문맹을 줄이는 데 쓰였다. 실제로 탄자니아의 성인 문맹률이 독립 직후 80퍼센트 안팎에서 1980년대에는 절반 이하로 낮아진 것은, 이런 교육·문해 프로그램의 성과였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들이 어떤 공간 단위를 기준으로 설계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교육·보건·인프라 원조가 행정구역이 아니라 “우자마 마을”을 대상으로 계획되었다. 우자마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성인 문해 교실에서, 농민에게 전달된 것은 글 읽기 능력만이 아니라 우자마 이념과 국가가 설계한 농업·생활 규범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일반 예산 지원(GBS)과 프로그램성 금융이 확대되면서, 스웨덴의 자금은 탄자니아 국가 예산의 핵심 축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농업 생산 체계가 붕괴하고 국영 기업과 농산물 마케팅 보드가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며 경제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및 서유럽의 전폭적인 원조 덕분에 정부는 최소한의 수입 물량과 외환 보유고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곡물 생산 감소와 집단마을화(Villagization)의 실패가 국가 재정 기반을 철저히 잠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 원조가 지속되는 한 탄자니아 엘리트층에게 실패한 우자마 체제를 서둘러 폐기하거나 개혁할 정치적·경제적 유인은 극히 미비했다. 이렇게 보면 스웨덴 원조는 단순한 “도움”이 아니었다. 우자마 마을이라는 공간 단위를 기준으로 설계된 교육·보건·인프라 사업은, 농민의 생활 세계를 우자마 체제 속에 묶어 두는 기능을 했다. 일반 예산 지원과 차관은 집단마을화로 인한 생산성 하락과 재정 적자를 메우며, 정책 실패가 정치적 붕괴로 직결되는 것을 지연시켰다. 스웨덴 자금은 우자마 건물의 외벽에 붙인 장식이 아니라, 골조를 떠받치는 보강재였다.
 
3-4. 팔메·사민당의 국내 정치 – 메이드너 플랜과 “위험한 실험의 수출”
스웨덴 사민당의 국제 도덕주의는 국내 정치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내에서 추진하던 급진적 실험과 제3세계 정책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준다. 이 지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임금노동자 기금, 이른바 메이드너 플랜(Meidner Plan)이다.  1970년대 중반 스웨덴노동조합총연맹(LO)의 경제학자 루돌프 메이드너(Rudolf Meidner, 1914~2005년)는 새로운 소유 구조 개편 방안을 제안했다. 대기업의 이윤 일부를 주식 형태로 강제 출연해 노동조합이 관리하는 기금에 쌓고, 시간이 지나면 이 기금이 점차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게 만드는 장치였다. 
 
목상으로는 “경제 민주화”와 “임금노동자의 발언권 확대”를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사적 자본을 점진적으로 사회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획이었다. 올로프 팔메와 사민당 지도부는 이 구상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기업과 중산층의 거센 반발이 불러올 국내 정치적 파장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럼에도 1982년 총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한 사민당은 일부 수정된 형태의 임금노동자 기금 도입을 강행했다. 이에 맞서 1983년 10월 4일, 스톡홀름 시내에는 8만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기업가, 중산층, 자영업자, 전문직 종사자들이 운집해 기금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케아(IKEA)와 테트라팩(Tetra Pak) 같은 글로벌 대기업 소유주부터 상공인 단체, 보수 정당 지지자들까지 가세해 “사민당이 스웨덴을 사회주의 체제로 몰아넣고 있다”며 강력히 성토했다.
 
결국 임금노동자 기금은 원안보다 대폭 축소된 형태로 도입되었다가, 1991년 중도 우파 연립정부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 과정은 사민당에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국내에서 지나치게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실험을 밀어붙일 경우, 자본의 이탈과 중산층의 집단적 반발, 그리고 선거 패배라는 막대한 정치적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사민당이 재정 긴축, 시장 개방, 부분적 민영화를 수용하며 이른바 ‘우클릭’ 행보를 보인 배경에는 바로 이 처절한 실패의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이 국내 경험을 탄자니아와 나란히 놓아 보면, 구조가 더 또렷해진다. 스웨덴 내부에서 메이드너 플랜을 밀어붙였던 중위계급 지식인·정치 엘리트가, 국경 밖에서는 니에레레의 우자마 실험을 “아프리카식 경제 민주화”로 찬양하며 전폭 지지했다. 스톡홀름에서는 자본과 중산층의 반발에 부딪쳐 후퇴했지만, 탄자니아 농민의 분노와 기아는 스웨덴 선거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국내에서 설익은 실험을 밀어붙이면, 자기 사회의 상위계급·중산층·노동계급이 곧바로 저항한다. 정치적 대가를 직접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제3세계, 특히 탄자니아 농촌에서 벌어지는 실험의 비용은 그 사회의 하위계급이 부담할 뿐, 도덕국 스웨덴의 유권자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 스웨덴 사민당과 중위계급 지식인에게 탄자니아 농민은 유권자가 아니라, 이념과 도덕 서사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대상이다. 
 
이것이 이른바 ‘국제적 진보주의가 지닌 이중 구조’의 실체다. 자국 내에서는 자본가와 중산층, 유권자의 반발을 의식해 정책 실험의 수위를 정교하게 조절하면서도, 국경 밖에서는 동일하거나 훨씬 급진적인 실험을 “연대”와 “도덕”이라는 언어로 포장해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탄자니아의 우자마(Ujamaa) 실험에서 스웨덴은 단순한 원조 공여국을 넘어, 실패로 점철된 농촌 사회주의 실험의 설계자이자 그 체제를 지탱한 후견인 역할을 수행했다. 결론적으로 올로프 팔메의 정치적 이력과 스웨덴 사회민주주의가 지향했던 자기 이미지를 배제하고서는, 니에레레라는 “성자”와 우자마라는 “실험실”이 만들어낸 독특한 정치경제적 결합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제4장. “실험실”의 정치경제 – 누가 설계했고, 누가 죽었는가
4-1. 설계자 – 니에레레·탄자니아 지식인층과 스웨덴 중위계급 지식인
탄자니아 우자마 실험의 설계자는 한 명의 성자가 아니라, 두 층의 중위계급 지식인 블록이었다. 하나는 탄자니아 내부의 당·관료·전문가 집단이다. 에든버러와 런던, 다르에스살람 대학교에서 공부한 이들은 식민교육을 통과한 엘리트였고, 독립 이후 국가·당·대학·교회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독립 이전에는 식민정부의 하급 관리·교사·통역으로 일했고, 독립 이후에는 장관·국영기업 간부·행정관료로 승진했다. 그들은 농민을 “근대화되지 않은” 대상으로 보고, 행정 지도 위에서 새 마을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하나는 스웨덴 사민당과 관련 학자·언론·NGO로 구성된 국제 입진보 집단이다. 이들은 팔메의 외교 노선과 스웨덴 모델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니에레레의 우자마를 “스웨덴식 복지국가의 아프리카 버전” 정도로 상상했다. 스톡홀름의 회의실과 카페에서 이들은 탄자니아의 사회주의 실험을 논하고,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했다. 일부 연구자·관료는 나중에 우자마의 문제점을 인정하지만, 정책이 한창 진행되던 1970년대에는 “너무 서둘러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 두 층위는 서로의 필요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니에레레와 탄자니아 엘리트층은 스웨덴의 자금과 도덕적 지지를 방패 삼아, 내부의 반발과 경제적 실패 속에서도 우자마 정책을 끈질기게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스웨덴의 급진적 지식인들은 탄자니아라는 무대를 통해 자신들의 “제3의 길”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 가능하다는 증거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 설계의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순간, “성자”와 “도덕 국가”라는 위장의 막은 걷히고 그 이면에 숨은 중산층 지식인들의 정치경제적 욕망이 드러난다. 정작 탄자니아 농민들은 이 거대한 설계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으며, 실험이 참혹한 실패로 끝난 뒤에도 그 결과를 평가하거나 책임을 물을 권한조차 갖지 못했다.
 
4-2. 후견자 – 도덕국 스웨덴의 ODA·담론·PC 구조
스웨덴은 자신을 군사력 대신 도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로 규정했다. 팔메의 비엣남전 발언과 남아프리카 인종차별 비판, 제3세계 해방운동에 대한 공개 지지는 이런 자기 이미지를 세계에 각인시켰다. 탄자니아 원조는 이 도덕외교의 한 축이었다. “우리는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난한 나라를 돕는 선한 강대국”이라는 자기 서사가 여기서 완성된다.  원조는 단순히 유입되는 자금이 아니라, 특정한 담론과 결합한 권력이었다. 스웨덴 정부와 스웨덴 국제개발협력청(Sida), 그리고 관련 연구 기관과 언론은 탄자니아의 우자마(Ujamaa)를 “가난하지만 청렴한 나라”, “평등한 공동체를 실험하는 용감한 국가”로 포장했다.
 
이 과정에서 원조의 부작용이나 강제 이주, 생산 기반의 붕괴를 지적하는 목동소리는 “발전 과정에서 겪는 불가피한 진통” 혹은 “아프리카의 특수한 현실을 무시한 성급한 비판”으로 치부되며 철저히 소외되었다.
스웨덴 내부에서도 1980년대에 들어서야 원조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나, 그때는 이미 수백만 명의 농민이 삶의 터전을 잃고 농촌 경제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은 뒤였다.
이렇게 공고해진 정치적 올바름(PC)의 구조 속에서, 탄자니아 농민의 고통을 정면으로 제기하는 것은 곧 서구 진보적 지식인 공동체의 도덕적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니에레레는 청렴한 지도자인데 왜 그토록 가혹하게 비난하는가”, 혹은 “서구가 또다시 제3세계 지도자를 흠집 내려 한다”는 식의 반응이 합리적인 비판의 통로를 봉쇄했다. 
 
그 결과, 탄자니아 농촌 현장에서 터져 나온 소극적 저항과 불만, 그리고 정책의 모순을 직시했던 중간 관료들의 회의감은 국제적인 담론의 장으로 결코 진입하지 못했다. 스웨덴의 막대한 재정 지원은 탄자니아 예산의 구멍을 메우는 연명 장치였다. 우자마 정책 때문에 농업 생산과 세수 기반이 무너졌는데도, 원조가 계속 들어오는 한 정권은 정책을 급격히 접을 이유가 없었다. 이 점에서 스웨덴의 원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기보다, 실패한 실험을 인공호흡으로 연장시키는 장치였다. 후견자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실험의 공범이 된다.
 
4-3. 실험 대상 – 우자마 마을 농민, 계급 위치와 피해 양상
실험 대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농민이었다. 탄자니아 농산어촌 인구의 다수는 독립 전에도 지주·식민 당국·상인에 의해 수탈당했지만, 적어도 마을의 위치와 경작지 선택에서는 어느 정도 자율성이 있었다. 우자마 마을 정책은 이 자율성을 송두리째 가져갔다. 1973~1976년 사이 1,100만~1,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농민이 집단마을로 옮겨지면서, 조상 묘와 전통 경작지는 버려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군과 경찰이 집을 태우고, 가축을 몰아가고, 물길을 끊는 방식으로 이주를 강제했다. 새로운 정착지는 행정 편의상 선정된 곳이라 토양·수자원·기후가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곡물 수확은 줄었고, 영양실조와 말라리아·설사병 등 질병이 번졌다.  
 
정확한 사망자 수를 집계한 공식 통계는 없지만, 여러 연구자들은 강제 이주 과정의 폭력과 그 이후의 기아·질병으로 인해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의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것은 영유아 사망률의 급증이었다. 의료시설이 없는 새 마을에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갔고, 모유 수유·전통 식단·지역 지식이 끊어진 상태에서 외부 원조 곡물에 의존하는 생활로 전환되었다. 통계에 잡히는 숫자보다 더 큰 피해는, 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영양 결핍과 교육·보건 접근의 붕괴였다. 
 
계급 위치로 보면, 이 농민들은 국가와 국제 원조 체계가 만든 정책의 최말단에 놓인 하위계급이었다. 그들은 우자마 설계에도, 스웨덴 원조 정책 결정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스톡홀름과 다르에스살람의 보고서·연설문에서 “성공 사례” 혹은 “일시적인 어려움”으로 요약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우자마 마을이 학교·보건소 접근을 개선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이 글의 초점은 그런 예외적 성과가 아니라 전국적 강제 이주와 생산 붕괴, 기아 위험의 확대에 맞추고자 한다. 실험 대상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상당히 정확한 묘사다.
 
4-4. 근대화된 주체들의 오만과 동원의 근대화 실험
제임스 C. 스콧(James C. Scott, 1936~)은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 1998년) 제7장에서 탄자니아 우자마 Villagization을 하이 모더니즘 국가 이데올로기(high modernism)가 빚어낸 대표적인 설계 참사로 읽는다. 스콧에게서 하이 모더니즘이란 기술과 과학, 계획 능력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결합된 국가의 자기 확신이고, 그는 탄자니아 국가가 농촌 사회를 더 쉽게 통제·징세·동원하기 위해 복잡한 농민 세계를 한눈에 읽히는 단순한 구조로 만들려 했다고 본다.
 
이때 핵심 개념이 가독성(legibility)이다. 국가는 흩어져 살며 여러 필지를 나눠 경작하던 농민들을 행정 지도 위에 그리기 좋은 격자형 도로와 직선적인 필지, “계획 마을”로 몰아넣었고, 학교·보건소·우물 설치 같은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누가 어디에 살고 무엇을 얼마나 심는지 위에서 내려다보기 쉽게 만들려 했다.
제임스 스콧이 분석한 국가의 가독성 집착은, 과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필리페 2세(Felipe II, 1527~1598년)가 1573년에 공포한 인디아스 법(Leyes de Indias)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필리페 2세는 이 법령을 통해 아메리카 식민 도시들을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직선 도로와 격자형 블록이 정렬된 표준화된 형태로 설계하도록 강제했다. 
 
이는 복잡한 자연 지형과 원주민의 자생적 거주 양식을 무시하고, 제국이 통제하기 쉬운 가시적인 질서를 이식하려는 시도였다. 결국 16세기의 제국이나 20세기의 근대국가 모두, 공간을 격자와 숫자로 규격화하여 정리했을 때 비로소 완벽한 통치가 가능하다는 오만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탄자니아의 우자마 마을 역시 이러한 제국주의적 공간 설계의 현대적 변용에 불과했다. 
 
이 과정에서 수세대에 걸쳐 특정 토양과 물길, 기후의 미세한 변화에 맞춰 발전해 온 농민들의 현장 실천 지식은 비과학적 관습으로 치부되며 철저히 파괴되었다. 제임스 스콧이 메티스(metis)라 부르는 이 지식은 오랜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축적된 구체적인 생활·생산의 지혜였으나, 국가의 표준화된 계획 앞에서는 제거 대상일 뿐이었다.  특히 가뭄과 병충해의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서로 다른 지형과 토양에 경작지를 나누어 관리하던 농민들의 고도화된 생존 전략은 전면 금지되었다. 대신 관료와 전문가가 설계한 단일 품목·표준 경작 방식의 집단 농장이 강제되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탄자니아의 농업 생태계를 외부 충격에 극도로 취약한 상태로 몰아넣었다.
 
스콧은 니에레레 정부가 실제 생산성이나 농민의 생존보다, 위에서 내려다보기에 질서 정연한 마을 배치와 통계적 관리가 용이한 구조에 집착했다고 비판한다. 결국 선의를 자처한 권위주의적 설계는 현장의 맥락을 거세한 채 강행되었고, 그 대가는 기아와 수확량 급감, 공동체 붕괴라는 참혹한 재앙으로 돌아왔다.  보통 실패한 원조를 설명할 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탄자니아–스웨덴 사례에서는, 이 표현은 오히려 현실을 순화한다. 밑이 빠진 독이라면, 물을 붓는 사람도 언젠가 허탈해서 멈춘다. 여기서는 독이 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도덕적 자기 이미지 때문에 계속 물을 붓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메커니즘을 정리하면 이렇다. 우자마 실험이 실패해도, 스웨덴은 가난하지만 청렴한 성자의 나라를 포기할 수 없었다. 팔메와 사민당 엘리트에게 탄자니아는 비엣남 반전·제3세계 연대·복지국가의 도덕성을 묶어 보여 주는 상징적인 파트너였다.  원조를 줄이거나 비판적 평가를 내리면,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감이 흔들린다. 반대로 탄자니아 정권에게 스웨덴·북유럽 원조는 우자마 정책의 재정적 기반이었고, 농업 생산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 돈이 끊기면 정권 자체가 위태로웠다.
 
결국 이 구조는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모두의 체면이 무너지는 위험한 게임이 되었다. 스웨덴이 실패를 시인하면 그간 쌓아온 도덕 국가 이미지가 훼손되고, 탄자니아 정권이 실패를 자인하면 성자 지도자의 권위와 일당 독재 체제의 근간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원조는 농민의 고통을 경감하는 본연의 목적이 아니라, 실패한 정책과 부패한 정권의 수명을 연장하는 산소호흡기로 변질되어 작동했다. 이를 중위계급 지식인 혁명 주도 가설의 관점에서 본다면, 스톡홀름과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의 지식인 엘리트들이 서로의 도덕성과 이념적 정당성을 확인하며 연대하는 동안, 그 막대한 비용은 국경 너머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농민과 도시 빈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탄자니아의 우자마(Ujamaa) 실험은 해방과 공동체를 말하는 근대화된 주체들의 오만이, 농민과 도시 빈민을 동원의 객체이자 실험 재료로 삼아 근대화를 강요할 때 어떤 형태의 동원의 근대화가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국가 포획과 농민 희생으로 귀결되는지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무수한 상징적 사례 중 하나다.
 
탄자니아

1977년에 채택된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헌법은 좌익혁명당(Chama Cha Mapinduzi/CCM)을 합법적인 유일한 정당으로 하고 행정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며, 대통령은 CCM의 당수를 겸하고 부통령과 국무총리의 보좌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회는 최고입법기관이며, 임명된 의원과 5년마다 대통령과 동시에 선출되는 의원들로 구성된다. 잔지바르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10명으로 되어 있다. 탄자니아 본토는 부족법, 이슬람 법, 영국 보통법 등 3분 관할의 사법제도를 가지고 있다. 잔지바르에는 변호사, 배심원, 고등법원에의 상소 등을 허용하지 않는 인민법원이 있다. 잔지바르 혁명위원회는 법원의 판결을 심의한다.

정부는 병원과 약국으로 구성되는 전국의 의료망을 관장한다. 의료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예방의학이며, 단속법의 시행 결과 국민보건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가장 흔한 풍토병은 말라리아·아프리카수면병·주혈흡충증(住血吸蟲症)·사상충증 등이다. 영양결핍 또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노동입법은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 여자와 미성년자의 고용, 종업원의 보상, 노동분쟁의 해결 등을 다루고 있다. 노동조합들과 그밖의 대규모 단체들은 CCM 중앙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 이곳의 노동조합은 서방세계의 전통적인 노동조합과는 달리 임금과 근로조건에 관한 협상의 기능이 없다. 저소득층을 위해서는 주택건설계획이 시행되고 있다.

교육제도는 초등학교·중등학교·대학교의 3단계로 되어 있으며, 초등교육은 무상·의무로 실시되고 있다. 정부는 중등학교 진학률이 낮기 때문에 실업훈련을 초등교육 과정에 포함시킬 것을 장려하고 있다. 정규교육기관 외에 전문학교·실업학교·종교학교 등도 있다. 여러 일간지들이 스와힐리어와 영어를 병행하여 발간된다. 〈내셔널리스트 Nationalist〉는 당기관지이다. 그밖의 주요신문인 〈스탠더드 Standard〉는 정부가 관리한다. 스와힐리어와 영어로 방송하는 탄자니아 라디오 방송국 역시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학교와 농민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역사

BC 1000∼1년 카프카스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에티오피아계의 남부 쿠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이 탄자니아 북부에 거주하면서 점차 남부지방으로 퍼져나갔다. AD 1∼1000년 전반의 어느 시기부터 철기를 사용하는 소수집단의 사람들과 반투어를 쓰는 종족들이 서아프리카에서 탄자니아로 이주해와 정착했다. 1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 해안지방 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인도와도 무역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해안의 무역 중심지들은 주로 아랍인 정착지들이었다. 15세기말경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 해안지방에서의 아랍인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었지만, 포르투갈인은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은 18세기초에 루부마 강 이북의 소유지를 상실했는데, 이는 해안지방의 아랍인들과 오만의 지배자가 동맹을 맺은 결과였다.

아라비아의 무역상들은 노예를 찾아 끊임없이 내륙으로 깊이 침투했는데, 그들의 주요 내륙침투로는 니아사 호를 향한 남서쪽 경로였다. 1825년경 아랍 상인들은 토착부족들의 교역로를 따라 노예 못지않게 값이 나가는 상아가 있는 니암웨지로 들어갔다. 1840년대초 아랍인들은 니암웨지로부터 탕가니카 호까지 전진하여 교역소들을 설치했다. 1840년대말 독일인 J.L. 크라프와 J. 레프만이 영국국교회 선교회의 대표로 이 지역에 왔다가 킬리만자로 산을 발견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관심이 커졌다.

1885년경 마침내 독일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이 지역에 도달했으며, 1907년경 이 지역은 완전히 독일인의 영향권 내에 편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영국이 독일 점유지들을 점령했고, 전쟁이 끝난 후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영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이 지역을 국제연합(UN) 신탁통치령으로 계속 지배했다. 1961년 탕가니카가 독립을 얻어 UN에 가입했다. 1년 후 탕가니카는 줄리어스 니에레레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이 되었지만, 계속 영국연방 내에 잔류했다.

1964년 탕가니카가 잔지바르와 합병하여 탄자니아를 이루었다. 1977년에 이르러 탄자니아는 잔지바르의 자치를 보증하는 신헌법하에 1당제 국가가 되었다. 그후 우간다의 대통령 이디 아민 다다가 1978년말 탄자니아를 공격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1979년 탄자니아 군대가 우간다를 침공했다. 그들은 아민을 축출하고 1981년 철수했다. 1974년 도도마가 이 나라의 수도로 지정되었지만, 1980년대초까지도 이 신도시의 건설이 거의 진척되지 않아 정부청사의 대부분이 다르에스살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80년대 들어 탄자니아는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점점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 킬리만자로 산이 포함된 세렝게티국립공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아 경제적인 자립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초대 대통령인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1985년 퇴임한 이후 대통령 임기가 중임 가능한 5년으로 헌법에 명시됨에 따라 알리 하산 음위니 제2대 대통령이 1995년까지 재임했다. 1992년, 복수 정당이 가능하도록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1995년 총선에는 여러 정당이 경쟁할 수 있게 되었으나 여당인 차마 차 마핀두지당이 압승했다. 벤자민 음카파가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적 혼란이 없지 않았으나 대통령 중임제는 꾸준히 유지되어 2005년에는 제4대 자카야 키웨테 대통령이 선출되어 10년 동안 재임했고, 2015년에는 제5대 존 마구풀리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마구풀리 대통령은 2010년 재선에 성공, 두번째 임기를 시작했으나 2021년 3월 심장합병증으로 사망함에 따라 부통령이었던 사미아 술루후 하산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사미아 술루후 하산 대통령은 탄자니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탄자니아와 한국과의 관계

탄자니아는 한국과 1992년 4월에 국교를 수립했으며, 한국은 1992년 10월에 주 탄자니아 대사관을 개설했으며, 탄자니아는 주 일본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탄자니아는 1998년 12월에 음카파 대통령, 2006년 11월에 키크웨테 대통령, 2011년 10월에 마킨다 국회의장, 2018년 1월에  마히가 외교부장관이 방한했고, 한국은 2006년 5월에 반기문 외교부장관, 2013년 7월에 강창희 국회의장이 방문했으며, 2018년 7월에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대한민국 국무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방문했다.

한편 탄자니아는 북한과 1965년 1월에 수교했으며 북한은 1965년 5월에 주 탄자니아 대사관을 개설했으며 2008년 1월에 철수했다가 2010년 4월에 재개설했다. 탄자니아는 주 중국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탄자니아는 북한과수교한 이래 상호 고위인사의 방문 등으로 긴밀한 협조체계를 유지해왔으며, 북한은 탄자니아에 기계와 곡물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한국은 1989년 이후 매년 탄자니아의 연수생을 받고 있으며, 무상 기자재와 구호금을 지원하고, NGO 사업 지원과 한국국제협력단 봉사단을 파견하고 있다. 다레살람대학에 한국연구센터가 설립되어 한국의 문화·예술 등에 관해 연구하고 있으며, 1993년 1월에 설립된 한인회는 양국의 이해와 친선을 증진하고 있으며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23년 기준 탄자니아에는 605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탄자니아의 경제․행정 수도인 다레살람와 아루샤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23년 기준 462명의 탄자니아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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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뉴스 편집자 계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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