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 건국의 아버지 줄리어스 니에레레 연구
박훈 변호사(시인, 고려대, 변호사로 민노총에서 일했으며 지금도 창원에서 거주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변호, 다방면의 연구자로 유명하다. 2012년 “부러진 화살” 영화 주인공, 이 글은 박변호사가 페이스 북에 공개한 것을 허락 받아 공개)

* 영화 석궁의 실제 주인공 교수와 박훈 변호사
제1장. 성자(聖者)는 누가 만드는가


1977년에 채택된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헌법은 좌익혁명당(Chama Cha Mapinduzi/CCM)을 합법적인 유일한 정당으로 하고 행정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며, 대통령은 CCM의 당수를 겸하고 부통령과 국무총리의 보좌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회는 최고입법기관이며, 임명된 의원과 5년마다 대통령과 동시에 선출되는 의원들로 구성된다. 잔지바르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10명으로 되어 있다. 탄자니아 본토는 부족법, 이슬람 법, 영국 보통법 등 3분 관할의 사법제도를 가지고 있다. 잔지바르에는 변호사, 배심원, 고등법원에의 상소 등을 허용하지 않는 인민법원이 있다. 잔지바르 혁명위원회는 법원의 판결을 심의한다.
정부는 병원과 약국으로 구성되는 전국의 의료망을 관장한다. 의료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예방의학이며, 단속법의 시행 결과 국민보건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가장 흔한 풍토병은 말라리아·아프리카수면병·주혈흡충증(住血吸蟲症)·사상충증 등이다. 영양결핍 또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노동입법은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 여자와 미성년자의 고용, 종업원의 보상, 노동분쟁의 해결 등을 다루고 있다. 노동조합들과 그밖의 대규모 단체들은 CCM 중앙위원회의 감독을 받는다. 이곳의 노동조합은 서방세계의 전통적인 노동조합과는 달리 임금과 근로조건에 관한 협상의 기능이 없다. 저소득층을 위해서는 주택건설계획이 시행되고 있다.
교육제도는 초등학교·중등학교·대학교의 3단계로 되어 있으며, 초등교육은 무상·의무로 실시되고 있다. 정부는 중등학교 진학률이 낮기 때문에 실업훈련을 초등교육 과정에 포함시킬 것을 장려하고 있다. 정규교육기관 외에 전문학교·실업학교·종교학교 등도 있다. 여러 일간지들이 스와힐리어와 영어를 병행하여 발간된다. 〈내셔널리스트 Nationalist〉는 당기관지이다. 그밖의 주요신문인 〈스탠더드 Standard〉는 정부가 관리한다. 스와힐리어와 영어로 방송하는 탄자니아 라디오 방송국 역시 정부의 통제를 받으며, 학교와 농민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역사
BC 1000∼1년 카프카스 인종에 속하는 사람들(에티오피아계의 남부 쿠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이 탄자니아 북부에 거주하면서 점차 남부지방으로 퍼져나갔다. AD 1∼1000년 전반의 어느 시기부터 철기를 사용하는 소수집단의 사람들과 반투어를 쓰는 종족들이 서아프리카에서 탄자니아로 이주해와 정착했다. 1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 해안지방 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인도와도 무역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해안의 무역 중심지들은 주로 아랍인 정착지들이었다. 15세기말경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 해안지방에서의 아랍인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었지만, 포르투갈인은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은 18세기초에 루부마 강 이북의 소유지를 상실했는데, 이는 해안지방의 아랍인들과 오만의 지배자가 동맹을 맺은 결과였다.
아라비아의 무역상들은 노예를 찾아 끊임없이 내륙으로 깊이 침투했는데, 그들의 주요 내륙침투로는 니아사 호를 향한 남서쪽 경로였다. 1825년경 아랍 상인들은 토착부족들의 교역로를 따라 노예 못지않게 값이 나가는 상아가 있는 니암웨지로 들어갔다. 1840년대초 아랍인들은 니암웨지로부터 탕가니카 호까지 전진하여 교역소들을 설치했다. 1840년대말 독일인 J.L. 크라프와 J. 레프만이 영국국교회 선교회의 대표로 이 지역에 왔다가 킬리만자로 산을 발견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관심이 커졌다.
1885년경 마침내 독일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이 지역에 도달했으며, 1907년경 이 지역은 완전히 독일인의 영향권 내에 편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영국이 독일 점유지들을 점령했고, 전쟁이 끝난 후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영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이 지역을 국제연합(UN) 신탁통치령으로 계속 지배했다. 1961년 탕가니카가 독립을 얻어 UN에 가입했다. 1년 후 탕가니카는 줄리어스 니에레레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이 되었지만, 계속 영국연방 내에 잔류했다.
1964년 탕가니카가 잔지바르와 합병하여 탄자니아를 이루었다. 1977년에 이르러 탄자니아는 잔지바르의 자치를 보증하는 신헌법하에 1당제 국가가 되었다. 그후 우간다의 대통령 이디 아민 다다가 1978년말 탄자니아를 공격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1979년 탄자니아 군대가 우간다를 침공했다. 그들은 아민을 축출하고 1981년 철수했다. 1974년 도도마가 이 나라의 수도로 지정되었지만, 1980년대초까지도 이 신도시의 건설이 거의 진척되지 않아 정부청사의 대부분이 다르에스살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80년대 들어 탄자니아는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점점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 킬리만자로 산이 포함된 세렝게티국립공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아 경제적인 자립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초대 대통령인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1985년 퇴임한 이후 대통령 임기가 중임 가능한 5년으로 헌법에 명시됨에 따라 알리 하산 음위니 제2대 대통령이 1995년까지 재임했다. 1992년, 복수 정당이 가능하도록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1995년 총선에는 여러 정당이 경쟁할 수 있게 되었으나 여당인 차마 차 마핀두지당이 압승했다. 벤자민 음카파가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적 혼란이 없지 않았으나 대통령 중임제는 꾸준히 유지되어 2005년에는 제4대 자카야 키웨테 대통령이 선출되어 10년 동안 재임했고, 2015년에는 제5대 존 마구풀리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마구풀리 대통령은 2010년 재선에 성공, 두번째 임기를 시작했으나 2021년 3월 심장합병증으로 사망함에 따라 부통령이었던 사미아 술루후 하산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사미아 술루후 하산 대통령은 탄자니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탄자니아와 한국과의 관계
탄자니아는 한국과 1992년 4월에 국교를 수립했으며, 한국은 1992년 10월에 주 탄자니아 대사관을 개설했으며, 탄자니아는 주 일본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탄자니아는 1998년 12월에 음카파 대통령, 2006년 11월에 키크웨테 대통령, 2011년 10월에 마킨다 국회의장, 2018년 1월에 마히가 외교부장관이 방한했고, 한국은 2006년 5월에 반기문 외교부장관, 2013년 7월에 강창희 국회의장이 방문했으며, 2018년 7월에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대한민국 국무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방문했다.
한편 탄자니아는 북한과 1965년 1월에 수교했으며 북한은 1965년 5월에 주 탄자니아 대사관을 개설했으며 2008년 1월에 철수했다가 2010년 4월에 재개설했다. 탄자니아는 주 중국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탄자니아는 북한과수교한 이래 상호 고위인사의 방문 등으로 긴밀한 협조체계를 유지해왔으며, 북한은 탄자니아에 기계와 곡물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한국은 1989년 이후 매년 탄자니아의 연수생을 받고 있으며, 무상 기자재와 구호금을 지원하고, NGO 사업 지원과 한국국제협력단 봉사단을 파견하고 있다. 다레살람대학에 한국연구센터가 설립되어 한국의 문화·예술 등에 관해 연구하고 있으며, 1993년 1월에 설립된 한인회는 양국의 이해와 친선을 증진하고 있으며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23년 기준 탄자니아에는 605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탄자니아의 경제․행정 수도인 다레살람와 아루샤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23년 기준 462명의 탄자니아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