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당하지 않은 나라 태국
글싣는 순서
1. 정복당하지 않은 나라 태국
2. 타 종교에 대한 예의
3. 한국 기독교가 배워야 할 것
오늘날 태국인의 조상으로 서기 600~700년 경 중국 남부에서 남하하여 크메르 왕국의 영향권에 있다가 크메르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1238년에 수코타이 왕조가 세워진다. 한국은 이때 고려 말엽 충숙왕 무렵으로 918년부터 1392년 까지 474년. 수코타이는 1238년부터 1365년으로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면 태국 첫 통일국이었던 수코타이는 고려시대 말기에 생겨나 127년간 존속했던 나라다.
아유타야는 차오프라야강 인근에 세워진 작은 나라였고 3개의 강으로 둘러쌓여 자연스럽게 방어막이 구축됨으로써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춰 급속도로 팽창할 수 있었던 비결이 됨. 그러나 수백년 뒤인 2011년 태국 대홍수 때는 이 3개의 강 때문에 오히려 가장 큰 피해를 겪은 지역이었다. 이들 역사는 410년이나 계속됐는데 오늘날 태국의 많은 기초가 됐음. 국교로 불교가 제정됐던 것도 이 때였고, 전통복장, 또 법제도 등도 아유타야의 것이 19세기 까지 이어졌다.
아유타야 시대(1350-1767년, 410년 33명의 왕) 1511년에 포루투갈인들이 가장 먼저 태국에 왔는데, 이때 아유타야는 유럽에 `킹덤 오브 시암’으로 알려졌음. 동아시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고, 조지 워싱턴대학의 정치학자인 조지 모델스키교수에 의하면 아유타야는 1700년대 아유타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도 말하고 있음. 당시 아유타야는 100만의 인구가 살았으며, 네덜란드 프랑스 중국 일본과도 교역을 했다고 함. 의약의 최전성기 시대였으며 영토는 남쪽으론 말레이반도까지 팽창했고 캄보디아 버마까지, 치앙라이까지 이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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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의 분열, 톤부리, 차크리왕조의 등장
아유타야는 몇 개월간 포위되어 있다가 성이 불탐. 당시 아유타야는 에카타라는 왕이었는데 열흘간 숨어있다가 굶어서 죽었다고 함. 이로써 아유타야왕가는 멸족하였고, 33명의 왕이 들어선 아유타야도 멸망하였음. 이처럼 태국과 버마는 수백년에 걸쳐 전쟁을 하였고, 지금도 태국사람들 버마사람을 무척이나 싫어함. 버마 여자들이 피부가 하얗고 남자들은 골격이 강하고 힘이 세다고 함
1767년 이후 버마의 침공으로 아유타야는 여러나라로 분열. 이때 등장한 사람이 탁신이었음. 톤부리에 국가를 세우고 버마 침공 후 아유타야가 갈라진 2년 후인 1767년 스스로 왕에 올라 재빨리 태국을 통일하고 톤부리 왕조라고 이름을 지었음. 아유타에서 톤부리 왕조로 넘어간다. 400년 넘게 이어진 나라가 분열된 것을 2년만에 통일시키느라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던 탓인지 정신이상을 겪었다고 전해짐. 이때 탁신대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린 사람이 차크리장군이었으며 1782년에 라마1세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탁신대왕은 스님이 되어 숲으로 들어갔다.
1782년 차크리왕은 수도를 차오프라야강 너머 방콕으로 옮김. 이때 한국은 조선 정조 6년이었으며, 과거시험문제로 `운하 대책을 논하라’가 출제되었다고 함.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진 해이기도 함. 그뒤 오늘날의 라마 9세까지 이어져오면서 왕들의 능수능란한 외교력과 정부의 근대화 노력 등으로 19세기 제국주의와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태국은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은 나라로 남음. 반면 태국의 오랜 라이벌인 버마는 182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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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절대왕정에서 입헌 군주제
1932년은 라마 7세의 시기였는데 젊은 장교들과 공무원들이 주축이 되어 왕족들을 인질로 잡고 혁명을 일으킴. 한국은 일제하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해. 이때 왕은 후아힌 여름별궁에 있었음(이보다 20년 전엔 1912년 젊은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키려다 발각돼 실패함). 1932년 이후 태국은 절대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바뀌게 된다. 당시 열살이던 라마 7세의 조카 마히돌에게 왕위를 잇게 했는 데 그가 라마 8세, 현 왕의 부친 푸미폰 국왕의 형이다. ’
1940년 이후 태국은 군부와 관료,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선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등이 등장하면서 혼란을 겪었는데, 라마 8세는 1946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됨. 당시 공식 발표는 총을 손질하다가 오발로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였음. 푸미폰국왕이 스위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1950년 라마 9세로 왕위를 이었지만 태국정치는 거의 군부에 의해 좌지우지됨. 영어로는 라마 9세지만 태국인들은 나이루엉(차에 요즘도 스티커로 많이 부치고 다님, 라오 락 나이루엉) 또는 프라짜오 유후아로 부름.
1957년에 군부가 충돌했는데 국왕은 당시 사릿 다나라잣타 장군쪽에서 서고, 사릿장군이 주도권을 쥔 군부독재가 되면서 국왕은 각종 공공행사에 참가하고, 왕실프로젝트 등을 수행하면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하였음. 요즘도 하는 왕실 바지행렬, 볍씨 줍기 행사등 과거 절대왕정시대의 행사들이 살아나기 시작하였음. 사릿은 1963년에 사망했는데, 푸미폰국왕과의 단단한 결속력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고 왕실의 부활을 동시에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음.
1980년까지 쿠데타 등으로 혼란을 거듭하다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쁘렘 장군의 등장과 함께 국왕은 국가원수의 지위를 공공이 이어옴. 현재 쁘렘은 수상보다도 더 높은 지위인 추밀원장. 1992년 수친다 장군의 쿠데타와 잠롱 시민세력 충돌시 푸미폰 국왕의 중재는 대단히 유명하고, 국왕의 조정력이 전세계에 퍼진 대표적인 일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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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 정세
프랑스에 이어 미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하여 사이공이 함락되며 남베트남은 멸망한다. 불안정했던 태국 사회는 갈수록 흔들렸으며 극우 세력들은 좌파 계열의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1976년에는 탐마삿 대학의 학생들이 대거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또 다시 쿠태타가 났고 태국 민주정부가 쫒겨난 자리에는 극우세력이 득세한 정부가 들어서 언론인, 관리, 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극우 정부는 반공을 내세우며 독재를 정당화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탄압하며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같은 해 일어난 또다른 쿠데타로 인하여 그나마 더 온건한 성향의 정부가 들어섰으며, 1978년에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우호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후 난민 문제, 국경 분쟁, 경제 문제들이 연이어 겹치며 악재에 시달리자, 쁘렘 띤나술라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1980년에서 1988년까지 총리로 재임하였다. 쁘렘 총리 시기는 종종 ‘반-민주주의’ 시기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양원제로 구성된 태국의 의회들 중 하원은 모두 민주 선출제로, 상원은 모두 임명제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 국왕이 점차 정사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해 1988년에는 처음으로 태국에서 선거를 통하여 뽑힌 총리가 나오기도 하였다.
1991년의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수찐다 끄라쁘라윤 장군은 자신이 총리직에 관심이 없음을 밝혔으나, 1992년 대선에서 비리를 저지르며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고, 결국 이때도 라마 9세가 또다시 정국에 개입하며 국민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수찐다 총리는 그날로 사직하였다. 정부는 IMF에게 구제 금융을 받았으며, 이는 수많은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북부 치앙라이 출신 포퓰리스트 정치인 탁신 시나와트라가 이끄는 정당이 이에 편승하여 인기몰이를 하였고, 탁신 총리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재임하였고 2007년에는 탁신 전 총리와 연합한 태국 인민의 힘 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인민의 힘 당은 민주당과 연정을 맺어 정부를 구성하였고, 이후 탁신계 인사들이 정부에 줄줄이 재등용되는 것에 반대한 세력들이 시위를 일으켰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2011년 총선에서도 탁신계 정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탁신의 누이인 잉락 시나와트라가 새로운 총리로 당선되었다.
반대세력들은 탁신의 친척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시위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잉락 총리는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미루려 들었으나, 헌법재판소가 이를 저지하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2014년에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났고, 쁘라윳 찬오차 장군의 주도하의 국가평화유지위원회가 결성되어 현재까지 태국을 통치해오고 있다. 쁘라윳 총리는 시민권과 정치권을 제한하였으며, 국왕의 권위를 모독하는 행위들을 엄격히 단속하는 탄압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 야당과 반대 세력들은 ‘단속 캠프’로 보내지고 있다는 설도 있어 논란은 여전히 증폭되고 있다. 한편 태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라마 9세가 2016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라마 10세가 왕위에 올랐다. 2019년에는 군부가 3월에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하였고, 쁘라윳 총리는 군부를 지지하는 팔랑쁘라차랏당의 지원을 받아 총리직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편 2020년 들어서는 코로나 19 사태와 함께 내려진 비상 봉쇄령에 반발하며 2020년 태국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탁신이 해외로 추방당한 뒤에도 그를 지지하는 이들로 인하여 그는 여전히 태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인으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2024년 탁신의 딸이 약관 36세로 최연소 총리가 되어 아버지를 사면했는 데 한 가족에서 총리가 3명이 나온 것은 이변이며 태국의 정치를 말해준다.
태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방콕은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이다.
태국은 신흥공업국 중 하나로 2017년 기준으로 PPP로 환산하여 1조 2360만 달러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동남아시아 전체에서도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2번째로 거대한 경제국가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부의 분배도에서는 중간 정도이며, 1인당 GDP로 비교했을 시에서는 싱가포르,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다음으로 약 4위 정도이다.
태국은 인근의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 신흥경제국들의 경제적 받침돌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2014년 3분기의 조사 결과, 태국의 실업률은 약 0.84% 정도로 매우 낮다고 한다. 태국은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약 매년 12.4%라는 기록적인 성장률을 보이며 고도 성장을 이룩해왔다. 그러나 1997년에 태국의 통화인 바트에 대한 압박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1.9% 추락하였고 취약한 금융 부문의 실태가 드러나면서 정부로 하여금 변동환율제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2005년에서 2007년까지는 성장률이 주춤하며 4~5% 정도로 내려갔다. 미국 달러의 약세로 인하여 태국 바트화는 날로 값이 올라갔고, 2008년 3월에는 달러가 거의 33바트까지 내려앉았다. 다만 이 때문에 1인당 GDP는 증가하여 2001년과 2011년 사이에 특히 수도권인 방콕 지대의 1인당 GDP가 이전 7,900달러에서 13,300달러 정도로 치솟았다고 한다.
2010년도 들어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며 태국 경제 성장률은 4에서 5% 사이를 맴돌았으며, 이후에도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며 외국 투자자들이 태국에 투자를 꺼리면서 태국 경제는 제 잠재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있는 상태를 유지했다. IMF는 태국 경제가 2012년에는 5.5%, 2013년에는 7.5%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2014년 5월 22일의 쿠데타 이후, 인플레이션 현상을 감안한 태국의 실제 경제성장률은 3.9% 정도로 추산된다.
세계적인 쌀 수출국, 태국
농업은 태국의 주산업이며 그 중에서도 도작(稻作)은 국민생활의 기초이다. 쌀은 국민의 주식인 동시 제1의 수출품이기도 하다. 태국은 세계 제1위의 쌀 수출국으로서 매년 도정미 650만 톤을 수출한다. 농업은 태국 GDP의 약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의 약 4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쌀은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곡물이다. 태국은 메콩 강 유역의 나라 중 가장 높은 경지율(27.25%)을 보인다.[9] 이 중 55%는 쌀 경작지이다.[10] 주산지는 많은 소작농이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중부 삼각주지역이다. 쌀 다음으로 중요한 산물이 고무와 옥수수인데 역시 수출된다.
수산자원으로는 담수어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천, 운하, 호수에서 잡히는 어류는 국민의 필요 불가결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고 있다. 연안의 해양어업은 별로 발달해 있지 않다. 경공업이 약간 발달했을 정도로 외국 공업제품의 시장이었으나 1980년대부터 외국자본의 도입으로 공업화를 이룩했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자동차 생산량이 많은 국가이고 컴퓨터, 통신기기등 전자산업도 발달했다. 제조업은 주로 외국기업의 기술에 의존한다.
2012년 태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245만 대로 전년 대비 68.3%의 성장률을 보임과 함께,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가에 진입하였다. 태국의 전자산업은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성장을 해온 산업으로 600억 달러의 생산에 달하고 있으며 최근 자동차 산업의 성장 전까지 태국의 제1의 수출산업이었다. 다만, 핵심부품의 생산이나 원천기술 개발 능력은 부족하여 대부분이 OEM이다.
유통과 무역
화교의 활약이 없으면 경제가 마비될 정도로 화교가 유통기구를 독점하고 있다. 주요 수출상대국은 미국·네덜란드·싱가포르·홍콩·일본 등이다. 수입도 크게 달라져 소비재수입이 크게 줄고, 공업생산용 원재료·자본재·원유 등이 두드러지게 늘었다. 특히 대일 무역적자가 커져 해마다 무역마찰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무역수지적자는 관광수입과 외국으로부터의 송금과 민간투자·정부차관 등으로 메워진다. 특히 관광수입 증대와 더불어 아랍산유국으로부터 보내져 오는 노동임금이 많다.
태국은 또한 가장 중요한 국제 관광지 중 하나이다, 관광업은 태국 전체 GDP의 약 6% 정도를 차지한다. 2013년에는 동남아 전체에서 가장 관광객들이 많이 찾은 국가였으며, 12조 바트에 달하는 외환을 직접적으로 끌어들이며 가히 엄청난 양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 외에도 관광업으로 인해 생기는 부가적인 이익까지 포함하면 태국 GDP의 20.2%를 차지할 정도로 관광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한다.
아시아계 관광객들은 주로 방콕 일대를 주로 찾고, 아니면 치앙마이 등 역사 유적들을 관람하기 위하여 태국을 찾는 경우가 많다. 서양 관광객들은 방콕 뿐만 아니라 남부에 있는 아름다운 섬들과 해변들을 더 많이 찾는다고 한다. 특히 태국 북부 지역은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으며 숲으로 덮인 풍광들이 많아 인기가 좋다고도 한다. 다만 태국의 치안이 마음놓고 돌아다닐 정도는 아니기에, 태국 정부 측에서는 독립적인 관광경찰들을 창설하여 주요 관광지 지역에 배치해놓는다고 한다.
태국은 전세계에서 5번째로 의료관광이 활성화된 나라로, 2018년에만 250만 명의 사람들이 의료 목적으로 태국을 방문했다. 그 외에도 성전환수술로도 이름이 높으며, 성형수술에도 조예가 깊다고 알려져있다. 2010년과 2012년 사이에 태국을 방문한 의료 관광객들의 90%가 성전환수술을 위해 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태국의 화폐 단위는 밧으로, 1밧은 100사땅(satang)이다. 지폐는 20, 50, 100, 500, 1000 밧이 있으며, 동전은 25, 50 사땅과 1, 2, 5, 10 밧이 있다. 전 권종에 모두 국왕이 그려져 있다. 사땅 동전은 보통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등에서 간혹 사용되며 일반적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편이다. 주요 자연 자원으로는 주석, 천연 고무, 텅스텐, 천연 가스, 탄탈럼, 목재, 납, 물고기, 석고, 갈탄, 형석, 경작지, 쌀, 카사바, 안티몬 등이 있다.
교통에 있어서는 하천과 운하를 이용한 수운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부에서는 운하가 사방팔방으로 발달해서 사람과 물자의 수송에 이용되고 있다. 일찍이 방콕은 운하와 수로가 많아 수운이 발달하여, "동양의 베니스"라고 칭송받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그 대부분이 매립되어 도로가 되어 버렸다.
또한 태국 북부의 국경을 흐르는 메콩강에는 2001년 6월에 타이, 라오스, 미얀마, 중화인민공화국 간에 메콩강 상선통항협정이 체결되어, 유역 각국 간의 통항로로 이용되고 있다. 태국의 철도는 국유회사인 타이국유철도가 4개 노선을 운영하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는 직결된다. 방콕에는 고가철도와 지하철도 개통되었다.
도로교통은 현재 급속한 발달 과정에 있다. 국내 모든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기관으로서, 철도보다도 대량수송공사에 의한 버스 쪽으로 발달하고 있다. 도시 교통도 방콕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소형 트럭을 개조하여 만든 버스(썽태우)가 일반적이다. 수완나품 공항은 아시아의 허브 공항의 하나로서, 전 세계의 항공사들이 드나들고 있으며, 타이항공과 여러 저가 항공사들이 운항 중이다. 대한민국의 인천, 일본의 나리타 등의 도시에는 타이항공, 대한항공, 일본항공 등이 운항하고 있다.
태국의 인구는 타이족이 75%로 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태국 주류에서 벗어난 여러 인종이 태국의 인구를 구성하고 있다. 중국계가 18%, 기타 말레이족, 크메르족, 몽족, 고산족 등 나머지를 차지한다. 그 가운데 타이족은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에도 거주하고 있으며, 태국의 문화적 영향이 강하게 작용함에도 여전히 엄격한 전통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화교 또한 태국 사회, 특히 방콕 주변에서 특징적인 요소이다. 태국 사회로 성공적인 진입을 이룬 화교는 정치나 경제 권력을 가진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태국의 전 수상 탁신 친나왓이다. 그는 2001년부터 정권을 잡았으나 2006년 9월 19일 쿠데타로 축출당했다. 소수 민족으로는 화교 이외에도, 크메르족, 몬족, 말레이족, 산간부족(먀오, 야오, 라와, 리소, 무소, 카렌, 이코)이 있다.[13]
태국은 2019년 기준으로 66,558,935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시골에 거주하며, 특히 중부 지역의 곡창 지대에 밀집되어 있다. 2010년 기준으로 대략 45.7%의 국민들이 도심부에 살고 있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수도인 방콕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지방에 몰려 살고 있다. 태국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하여 정부 주도의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고, 1960년대만 해도 약 3.1%에 달하는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인 데에 반하여 현재는 약 0.4% 정도로 낮아졌다. 1970년대에는 한 가정 당 약 5.7명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2010년의 통계 결과에 의하면 약 3.2명 정도 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태국 인구의 95.9%가 태국 국적의 태국인이며, 나머지 약 2% 정도는 일자리를 위하여 떠나온 미얀마인들, 그리고 나머지 국적인들이 약 1.3% 정도를 차지한다. 2011년 왕실 주도의 차별금지조사에 의하면, 태국에는 현재 약 62개 정도의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태국 내에서 가장 인구 비율이 높은 타이계 제족들은 약 34.1%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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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태국의 공식언어는 태국어이다. 태국어는 인근의 라오어, 하이난과 윈난 산악 지방에서 사용되는 소수 민족들의 언어와도 굉장히 비슷하다. 태국 정부에서는 정부 주도로 태국어를 모든 국민들의 공용어로 정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모든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태국어를 국어로 선택하여 가르치고 있다. 참고로 태국어를 적을 때에는 크메르 문자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태국 문자를 사용하여 표기한다.
태국 정부는 2011년에 약 62개의 언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태국어를 제외하면 태국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언어는 북동부 지방에서 사용되는 라오어이다. 종종 지역 방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주로 옛 란쌍 왕국에 속해있었던 지방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말레이시아와 가까운 남부 지방에서는 케란탄-파타니 말레이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화교들이 워낙 많은 탓에 중국어도 자주 사용된다.
사회문제
태국은 동남아시아 최대의 HIV 감염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동남아지역 중에서도 미얀마와 더불어 손꼽히는 에이즈 감염국이다. 또한 트랜스젠더나 미성년자를 통한 매매춘으로 악명을 떨쳤다. 1990년 10만명이었던 태국의 HIV 감염자는 3년만에 3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는 폭발적인 양상을 보였다. 2004년 기준 에이즈 감염인구가 57만명으로 세계 17위를 차지할 정도다. 현재는 퇴치정책으로 인하여 1%가량 줄이는데 성공하였지만 여전히 에이즈 감염도가 높은 국가다. 심지어는 태국 공무원 2만 명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말도 있다.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 승려들도 에이즈에 걸릴 정도라고 한다.
2016년 3월에는 단기 관광비자로 한국에 입국한 태국 여성이 성매매를 하다가 적발이 됐는데, 해당 여성이 에이즈 의심환자로 알려졌고 2000명의 한국 남성과 성관계를 한 사실이 밝혀져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태국에서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나 날치기 범죄가 주로 발생하며, 방콕의 유흥가 밀집 지역인 팟퐁, 나나 지역에서는 마약이 불법적으로 유통되기도 한다.[14] 태국의 국왕이나 왕실을 비방, 모독하는 불경죄를 범하면 태국 형법 112조에 따라 최저 3년에서 최고 15년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데[15][16] 이는 태국 국왕의 사진이나 초상을 훼손하는 것도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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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교육 제도는 유치원 제도가 이미 기본적으로 정착되어 왔으며, 초 중 고 대학교의 기본 학제가 한국과 같거나 비슷하게 운영된다. 유치원 및 영아 유치원 교육은 교육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라기보다는,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태국에서는 일할 수 있는 여자들의 절반이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 모두 직장을 다니는 맞벌이 부부가 많다. 그래서 부모의 출근 시간대에서부터 퇴근 시간대까지 아이들을 돌봐 주는 탁아소의 역할을 부담하는 요금에 따라서 탄력 있게 감당하고 있다.
태국에서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좋은 고등학교를 나와야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상급학교 진학은 시험을 통하여 하기 때문에 원하는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좋은 중학교를, 좋은 중학교를 위해서는 좋은 초등학교를, 좋은 초등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좋은 유치원을 나와야만 한다. 따라서 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집에서 좀 멀고, 힘이 들더라도 좀 더 나은 유치원에 보내려고 애를 쓴다. 비판적으로 보면, 태국에서 교육의 기회는 자녀를 명문학교에 보낼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 소수 부유층들만 가질 수 있고, 거의 대부분의 민중들에게는 처음부터 상당히 닫혀있는 것이다.
주에는 일하면서 야간 수업 또는 주말 수업으로 2년 정도 공부하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을 수 있는 준 정규 과정이 전국적으로 많은 정규학교에 병설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을 내면 졸업할 수 있다.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은 제때에 공부를 시작하지 못하고 2-3년 정도 자기 학년보다 늦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준 정규 과정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업 시간 및 수업 연한을 갖고 중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며 한국과 같이 검정고시 제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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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교육기관
대학으로는 방콕의 쭐라롱껀, 탐마쌋, 씨나카린위롯, 씬라빠껀, 까셋쌋, 마히던 대학교 등이 명문이며 지방의 명문으로는 북부의 치앙마이 대학교, 북동부(이산)의 컨깬대학교, 남부의 송클라나카린대학교가 있다. 한편, 공부는 하고 싶으나 가정형편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방콕에는 물론 지방에도 곳곳에 개방대학이 개설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치앙마이 대학은 지방대학이지만 세계 100위안에 들어간다.
그 중 방콕에 있는 람캄행 대학은 세계에서 학생 수가 가장 많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누구든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학비가 저렴하여 등록금과 교재 구입비를 포함하여 한 학기당 25-30달러 정도 되므로 공부를 하고픈 학생들이 전국에서 몰려든다. 강의는 하나도 안 들어도 되고, 시험 성적으로 학점을 얻는다. 하지만 졸업이 어려워서, 개방대학을 나오면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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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가 되기 전 받는 목욕은 태국의 전통이다.
태국은 불교의 나라이자 사원의 나라이다. 주민의 95% 이상이 불교 신자이며, 거의 대부분이 소승 불교 신자이다. 태국의 승려들은 한국과는 달리 육식과 음주를 허용하지만 정오 이후의 식사는 금지하며, 여성은 승려와 접촉할 수 없다. 또한 태국에는 아름다운 왕궁과 많은 불교 사원들이 있다. 태국은 왕실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대단한 나라이다.
조상에 대한 존경은 태국의 정신적 관습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태국 사람들은 환대하는 마음과 관대한 마음을 가졌으나 강한 사회적 계급 의식도 있다. 태국 문화에서 어른 공경은 중요한 요소이다. 연장자가 항상 가족 대소사를 결정하거나 의례를 주관한다.
태국의 전통 인사법인 "와이"는 두 사람 중 젊은 사람이 먼저 하는데, 이는 손바닥끼리 서로 닿도록 두 손을 모은 다음, 손가락 끝은 위로 향하게 하고 얼굴이 손에 닿도록 머리를 숙여서 하는 인사이다. 이 인사를 할 때는 남자는 "사왓디 크랍", 여자는 "사왓디 카"라는 인사말을 함께 한다. 그러면 연장자가 같은 방법으로 답례한다. 태국의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부모님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이며 "와이"를 행한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와이는 타인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인데 이는 인도 문화권의 나마스테와 비슷하다.
태국의 건축물들은 주로 찌는 듯한 태국의 더위에 최대한 맞춘 형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세계 최대의 불교국가들 중 하나라는 명성에 맞게 불교적 색채과 굉장히 강하다. 또한 옛 동남아의 강국이었던 캄보디아, 미얀마 등의 건축 방식으로도부터 많이 영향을 받아다고 알려져 있다. 1350년부터 1767년부터 태국에는 ‘아유타야 양식’이라고 하는 건축술이 유행했는데, 아유타야 양식은 주로 거대한 규모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장식도 황금빛이 많고 극히 화려한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이 시기가 태국 건축의 황금기로 평가받기도 한다. 아유타야 양식의 사원들은 지붕 끝에서 기다란 장식용 돌기가 위로 뻗어 올라가 있으며, 또한 건물 내부에 채광창이 많아 햇빛이 잘 들어온다고 한다.
태국의 사찰들은 ‘왓’이라고도 하는데, 속세와 구분짓는다는 의미로 높은 벽을 둘러치며 태국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화려함이 절정에 달한다. 태국의 왓 건설 방식은 주로 캄보디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현재에는 태국만의 고유한 건축 방식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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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불교/94.50%, 이슬람교/4.29%, 기독교/1.17%, 흰두교/0.03%. 기타/0.01% 태국은 불교의 색채를 가진 나라이자 사원의 나라이다. 주민의 95% 이상이 불교 신자이나 국교가 해제된 지금은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분위기이다.[19]소승불교는 1997년까지 태국의 국교였다. 그러나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 국교를 해제했다. 아직은 달력, 풍습 등에도 불교적인 것이 많다. 실제로, 태국의 불교는 서서히 발전하여 동물숭배나 조상숭배로부터 기원된 지역 종교들을 포섭하였다.
국왕을 비롯하여 남자라면 일생에 적어도 한번은 절에 들어가 삭발하며 3개월 정도의 수도과정을 지내고 오는 것도 의무적이다. 이른 새벽이면 누런 법복을 걸친 탁발 승려들이 사원을 나서 행렬을 시작하고 신도들은 정성스럽게 이들에게 공양을 바친다. 태국의 승려들은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사회적 지위가 높다. 태국에는 아름다운 왕궁과 많은 사원들이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수호사원으로서 에메랄드 사원과 수코타이 중심부에 있는 최대사원인 왓 마하탓, 유서깊은 절 왓 아룬 등 3만여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사원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태국의 최대 종교는 소승불교로, 태국 문화에서 빼놓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핵심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태국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며, 중국 다음으로 최대 규모의 불교도 수를 자랑하고 있기도 한다. 2000년 자료 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략 94.6% 정도의 국민들이 불교도라고 한다. 제 2의 종교는 이슬람교로, 2015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4.29% 정도가 무슬림이라고 한다.
이슬람 인구는 주로 파타니, 얄라, 사툰, 나라티왓 등 남부 지방에 대거 몰려있다. 특히 완전한 이슬람계 국가인 말레이시아의 영향을 받은 남부 말레이 반도 지역에 이슬람교도들이 많으며, 대부분이 수니파 무슬림들이다. 기독교도 수는 약 1.17%이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힌두교나 시크교 등의 종교들을 믿고 이들은 대부분 대도시권에 산다. 또한 유대인들의 민족 종교인 유대교도 17세기 이래부터 태국에 소규모 정착촌을 짓고 살아왔다고 한다.
태국 헌법에는 국교를 명시해놓지 않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심지어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태국 정부 측에서도 종교를 가지고 큰 문제를 삼는 경우가 드물며, 선교의 자유를 허가하며 비허가받은 종교 단체들의 포교도 자유로히 허락하고 있다. 다만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소수 종교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근근히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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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국장로교 선교사는 없습니다〉 오영철 선교사(합동측 태국 선교사)
미국장로교 선교부는 한국교회와 태국교회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선교단체이다. 한국교회의 교인 60%정도인 600만은 장로교인들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서 전세계 장로교인 1800만명의 삼분의 일을 차지한다. 미국장로교 선교부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태국에서 침례교가 가장 많은 교인이지만 1960년대까지는 장로교인이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였었다. 역시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미국 장로교 선교부와 관련된 믿기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태국기독교 총회(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 총무인 사이암목사가 대화 중에 이야기한다. “이제 미국 장로교 선교사는 태국에 없습니다” “미국 장로교회가 태국에 있는 선교사들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한 때 세계 선교를 주도하였던 미국장로교회의 선교부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태국기독교총회에 남아 있었던 마지막 한 명의 미국 장로교 선교사후원이 11월 30일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2020년 12월부터는 미국장로교에서 파송된 공식적인 선교사가 태국에 없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수십 년간 선교사로 살면서 태국에 있었던 선교사들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공식적인 선교사는 아니다.
1840년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시작된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은 태국 교회는 물론이고 태국 사회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태국에 최초로 시작된 인쇄기술, 근대화된 병원과 학교 등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현재 총회 산하 8곳의 병원과 29곳의 학교 그리고 두 곳의 대학교은 대부분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세웠다. 교회를 위한 헌신과 희생은 오늘 선교사들에게 큰 본이 되었다.
미국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헌신에 의해 태국교회의 기초를 놓여졌다. 2차세계대전 일본의 태국점령으로 선교사들의 추방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태국교회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이제 180년이 지난 2020년 12월에 미국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선교사들은 태국에 없게 된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도 있겠지만, 미국 장로교회의 교세 약화가 가장 큰 원인이다. 1965년은 미국장로교회에서 가장 많은 교인들이 있었던 때인데, 425만5천명이었다. 당시 미국장로교 선교부가 태국에 파송한 선교사와 자원봉사자들의 숫자는 16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선교지 태국 한나라를 위하여 엄청난 인적 재정자원을 투입할 수 있었다.
1966년 이후 교인들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1987년에는 297만으로 300만이하가 된다. 내가 선교사로 나오는 1995년에는 266만이었던 교인들이 2000년이 되면서 250만으로 줄어든다. 2010년에는 200만으로 떨어진 이후에는 매년 거의 5%의 교인들이 감소하여 2019년에 130만이 되었다. 프린스턴, 피츠버그, 멕코믹 등과 같은 9개의 총회산하의 유수한 신학교에서 목회자가 배출되지만 교세의 하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이런 교세의 약화는 선교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내가 태국에 도착한 1995년만 해도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은 신학교를 중심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때에도 이미 선교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숫자는 1960년의 160명에 비교하면 많이 줄어들었다. 이후 숫자는 계속 감소하다가 2020년 12월에 한 명도 없게 된 것이다.
1957년 미국장로교회는 선교지의 모든 재산권을 현지교단에 이양한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위치를 ‘선교사(Missionary)’라는 단어 대신에 ‘동역자(Fraternal worker)’라는 단어로 선교사의 위치를 정하였다. 그것은 현지인과 함께 현지교단의 행정과 지도 아래에서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들의 꿈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헌신으로 세워진 태국기독교 총회는 총회나 노회차원의 자립을 하고 있다. 태국의 주류교단으로 태국전체 교인의 반 정도가 속해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미국 장로교회의 상황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여전히 태국은 선교사가 필요한 국가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교단의 선교정책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을지 안개와 같은 상황인 것 같다. 미국 침례교단이 선교사들에게 재정 지원을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개인 선교사에게 재정책임을 돌린 형편과 비슷할 수 있다. 미국선교 역량이 급속하게 감소함을 보여주는 위기의 모습이다.
기독교선교역사에서 더 큰 위기가 있었다. 유일하였던 예루살렘교회가 스데반의 죽음으로 사실상 와해됨으로 기독교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복음의 확장의 기초가 된 것이다. 낙심하여 흩어진 교인들이 자발적인 선교사적 삶을 감당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선교를 주도하였다.
지난 200년여년간 하나님은 강대국을 소중한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제 강대국의 선교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미국장로교 선교부는 강대국 선교의 대표적인 단체였다. 이전 같은 방법은 다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선교가 끝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선교의 시대가 세계 교회 앞에 시작되었다. 놀라운 것은 현재 세계 기독교의 상황은 미국장로교단이 최고점에 있을 때보다 훨씬 풍성하고 다양해지고 역동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선교를 담당하게 될 교회들은 강대국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기독교인들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일부 아시아국가들에 훨씬 많이 존재한다. 그들은 경제, 정치, 사회, 교육 등의 분야에서 대부분 약소국이다. 이것은 새로운 그림이 아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대부분 약자들의 교회였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함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교를 감당하였다.
한국과 태국에 건실한 교회를 세운 미국 장로교회(PCUSA)는 지난 50여년동안 교세가 삼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이제 태국에 더 이상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태국에 있었던 마지막 선교사 샤론은 태국에 계속 있을 것이라고 한다. 심각한 미국의 코로나상황에서 돌아가는 것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코로나 위기가 미국교회의 모습과 오버랩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또한 한국교회에 큰 교훈을 준다. 코로나 사태는 미국장로교단의 모습이 우리에게 생각지 않게 찾아 올 수 있게 때문이다. 우리가 선교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있기 때문임을 다시 생각한다. 선교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과 긍휼하심을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