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교회가 온다

              송인수 대표 글 논쟁 중

송인수 / 산아래평신도교회, (재)교육의봄 대표 지난 30년간 교사로 봉직해 온 분이고 평신도교회를 주창하는 분이다. 그의 인터뷰가 뉴스엔죠이에 실렸고 이에 대한 찬반논쟁이 한참이다. 올해 출범한 이재명 국민주권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 후보자로도 추천된 바 있으며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에 소개된 손봉호교수 전기 책임 편집자로 책을 출판한 적도 있다.

   
 

송인수 대표 주장

신자는 누구입니까? 신자는 그리스도에게만 의존하는 존재이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스스로 주체로 사는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아침저녁으로 말씀의 샘물을 성경 속에서 직접 끌어올려 마시며 그 말씀으로 자기를 비치며 세상을 바라보며, 그것으로 자녀를 가르치며 문답하는 존재입니다. 멈출 때와 가야 할 때, 외칠 때와 침묵할 때, 울어야 할 때와 웃어야 할 때를 말씀에 기초하여 스스로 분별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진리로 자유를 얻었으니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유롭게 하는 진리에 자신을 복속시키며, 자신을 상대화하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할 존재, 저는 그게 신자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입니까? 신자들의 공동체, 즉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 해석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즉, 신자들이 교회로 모여 제자로서 자신의 삶을 회복시킨 성령의 열매, 그리고 그 열매를 내게 전달해 준 ‘해석의 말씀’을 나누되, 여러 사람이 이에 참여함으로 개인의 해석을 넘는 공동체적 해석의 풍성함까지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해석의 공동체란, 한 사람의 해석만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모든 신자가 해석의 과정에 참여하는 곳이 교회라는 선포입니다.

이런 교회관은 한국교회에서 생소합니다. 그러나 성경 속 1세기 교회에서는 흔한 현상이었습니다. 신자 공동체에서 함께 말씀을 해석할 때, 신자들은 말씀 해석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해석의 주체’요 ‘생산자’로서 서게 됩니다. 자기와 같은 평신도가 말씀을 붙들고 자기 삶을 해석하며 위로와 도전, 자비와 평화를 경험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삶에서도 같은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이런 각성과 해석의 도전, 기쁨이 순환하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신자들은 성숙하고 교회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결론은 분명합니다. 신자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존재입니다(엡 4:11-13). 즉, 신자들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충성하고 진리에만 순종하고 다른 어떤 존재에 자기 판단력과 감정, 나아가 영혼을 의탁하지 않도록 돕는 존재입니다. 그에게 리더십이 있다면, 그 리더십을 행사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고, 그가 성경을 알고 있다면, 성경을 신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신자와의 관계 속에서 볼 때, 떠나기 위해 곁에 있어야 할 존재이며, 그의 독립을 위해 돕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핵심을 ‘목회자의 있고 없음’으로 보고, 말씀을 전하는 강단을 오직 목회자가 점유하며, 성경에 대한 해석의 권한을 배타적으로 통제하고, 설교에 오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신적 선포의 대행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상황에서 신자의 태도는 오직 ‘아멘’ 밖에 없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 판단은 자신 속에서 삐져나오지 않도록 그 싹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 목회자에게 신자들이 오랫동안 길들여질 경우, 신자들은 그에게 의존하고, 자칫 말씀이 부실할 때 불평하기 쉽습니다. 목회자의 주일 설교가 자신의 영혼을 만져주지 못하면 설교가 은혜가 안 된다고 아우성칩니다. 말씀 해석의 대상이요 소비자로서 말씀 붙들기를 게을리하게 되면 모든 것을 목회자에게 맡긴 채, 지성과 감성이 퇴보하기 쉽습니다. 더욱 목회자에게 의존하며, 목회자도 그 부담에 눌려 자칫 소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목회자의 말씀이 시원치 않으면 다른 존재로 교체하려 합니다. 목회자는 그 교체를 두려워해 신자들을 자신에게 의지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다가, 마침내 교회 전체가 목회자에게 복속될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세습은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문제입니다.

평신도 교회는 목회자가 없어도 교회가 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아니, 목회자도 평신도일 뿐이라는 선포요, 평신도 바깥의 누군가가 있어 그를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는 것이 초대교회 정신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또한, 신자들이 좋은 설교를 찾아 교회를 쇼핑하는 것을 멈추고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교회를 이루라는 촉구입니다.

확신컨대, 이것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한국교회를 약화하는 일이 아니라 체질을 강화하고자 함입니다. 교회를 떠나고자 함이 아니라 더욱더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교회를 품고자 함입니다. 목회자를 부정함이 아니라 목회자의 역할과 기능을 새롭게 재설정하고자 함입니다. 많은 사람의 걱정처럼, "제 소견의 옳은 데로 가고자 하는 사사시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 살아 있는 초대교회를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경 말씀’이 있고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는 한, 신자와 교회는 결코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며, 사사 시대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사 시대는 말씀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성령이 소멸한 시대입니다. 자기 탐욕과 이익을 따라 자기 성을 쌓고 살던 시대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런 삶을 살지 않는지 늘 돌아봐야 하겠지만, 한국의 일반 교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모든 기존 교회들이 이처럼 우리와 같이 목회자가 없는 교회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와 같은 교회 형태는 앞으로 지금보다는 한결 더 역동적으로 확대되어 나갈 것입니다. 지금 곳곳에서 평신도 교회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교회 전체를 생각할 때 부분적인 현상입니다. 평신도 교회가 한국교회 전체 숫자 중 차지하는 비율은 높아야 5~10% 정도에 그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 교회 형태를 이루는 목적은 숫자를 늘리고 한국교회를 평신도 교회로 재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없어도 교회가 가능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목회자 중심 교회를 향해, 교회 본질이 무엇이고 신자는 누구이며 목회자는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은 존재인지, 다시 생각하라고 촉구할 뿐입니다.

평신도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의 새로운 담론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흐름과 존재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목회자가 누구이고 신자가 누구이며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롭고 복된 해석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개신교회가 이 흐름을 접하고 이 현상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며 이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된 것에 기초하여 자신(기존 교회와 목회자의 위치와 의미)을 해석하는 과정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 과정을 거친 후 그러고도 남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진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는 한국교회의 쇄신을 위한 걸음이며 또 그렇게 되고자 합니다. 지금은 목회자들이 경계심을 품고 있겠지만, 언젠가 그들이 이 현상을 온전하게 해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우리 평신도 교회는 어쩌면 여러 차원으로 가해 올 비난의 불구덩이를 통과해야 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시도가 김교신 선생의 무교회주의 운동과 같이 잠시 있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불씨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개의치 않고 주께서 허락하시는 한, 이 사명을 명예롭게 붙들고 끝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체코 선교사 이종실목사의 논평 

이 분의 글에 따르면, 현재 "평신도 교회"가 전체 한국개신교회의 5-10% 정도라고 한다. "평신도 교회"는 필요성과 함께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루터보다 한세기 앞선 보헤미아 종교개혁에서 기성 정통교회에 대한 대안교회로서 "평신도 교회"가 등장하였다. 주로 가정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바로 오늘날 한국의 평신도 교회가 스스로 느끼는 부담감을 보헤미아 종교개혁 당시 평신도 교회의 문제로 파악한 이가 "르제호르시"이다. 그는 평신도 출신의 보헤미아 종교개혁자 "헬치츠키"로 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헬치츠키는 평신도 교회 공동체를 크게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르제호르시는 이들 평신도 교회를 연합해서 세운것이 "형제단"이었다. "단"은 라틴어로 Unitas이다. 연합 또는 일치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체코어 교회 "치르케프" 독일어로 "키르케" 즉 영어 "처치"의 대안 용어로 우니타스 즉 "단"을 사용하였다. 교회사가들이 간략하게 줄여서 "형제단"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이름은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들의 연합"이다. 이것은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중심사상이 "평등"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들 형제단의 신앙고백을 이어가고 있는 체코형제복음교회는 교회내 평신도들이 중심이다.

목회자는 교회와 업무협정을 맺고 일하는 계약직이다. 목회자의 고용주는 총회(장)이다. 즉 총회와 교회 사이의 계약이다. 목회자의 사례비는 총회가 지불한다. 교회는 자신의 목사가 필요하면 총회의 퍼스널 폰드에 기금을 출현해야한다. (2015년 이전까지 목회자 봉급 100% 국가가 지급, 2015년- 2030년까지 국가+총회의 혼합방식, 2030년 부터 총회가 100% 지급) 그리고 오늘날 유럽 교회들에서 국가에 등록하지 않은 기독교 종교단체들을 "프리 처치"라고 부른다. 이들 프리 처치들 대부분이 직업으로서 목사가 없다. 평신도 리더가 이 모임을 이끌어간다. 이들에 대한 명칭을 pastor 라고 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 목사의 명칭이 다양하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의 영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왜 한국에서 평신도 교회인가? 그 출현은 보헤미아 종교개혁시대의 평신도 교회 출현과는 신학적 차이가 있다. 보헤미아 종교개혁 평신도 교회는 기성 교회가 평신도들을 영생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기능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구원"의 문제가 주요 동인이었다. 반면에 한국개신교의 평신도 교회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갈망으로 보인다. 즉 교회론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 개신교 평신도 교회 운동은 그 운동의 확장성이 취약해 보인다. 왜냐하면 목사 중심의 교회 공동체의 특성을 벗어나면 더 이상의 교회개혁의 동력을 응집시킬 요인들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여년전 들불처럼 번지던 작은교회 운동이 확산되지 못한 이유를 파악하면 그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개신교는 실천이 강한 반면, 그 이론인 신학적 토대가 너무 취약하다. 한국개신교회가 지향되어야 할 정답 보다 현재 구조에 대한 탐구가 다양한 신학적 관점에서 필요하다. 이것이 "자신학"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론적 탐구 없이 현상에 대한 실천적 대안은 지속성과 개혁성을 담보하기 쉽지 않다.

평가와 전망 

평신도가 주체가 되는 교회는 기존의 교파형 교회가 보여주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한 가나안교인들에게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어 보인다. 지금과 같은 기업이나 점포 가전 집등이 모두 대형화를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참신한 매력이 될 수도 있다. 그간 신앙생활이 자기성장을 넘어 조직의 존립과 목회자를 위한 객체화가 되는 한 신앙 주체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우선 초대교회도 그렇고 한국선교 초기도 성직자가 충분하지 않아 평신도들과 함께 교회을 세웠다. 전문 성직자들이 원활하게 보급되자 그 역할은 미미해졌지만 그 이전 교회을 세우는 데 큰 지식보다는 열심과 헌신만으로 가능했다. 그후 예전이 정립되고 엄숙함이 교회의 주류가 되고는 평신도들에 의하여 세워지고 운영되는 교회는 쇠퇴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 평신도가 주체가 되는 교회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두는 그가 길들려지고 양육의 대상으로 보았던 평신도들이 사회적 지식이 많아지고 전문인들이 나오면서 각성하게 된 것이다. 교파교회의 한 쭉으로만 머물렀던 역할을 성직자와 대등하게 아니 성직자가 없어도 교회의 지도자로 충분히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 구역공과 인도에서도 그렇고 평신도들이 다른 평신도들을 위해 성경지식인이나 교회 생활을 충분히 지도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

그러나 이 분이 주창하는 것은 그런 교파교회의 직제로써의 한정된 평신도가 아니라 평신도가 주체가 되는 교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신학적으로도 불가하지 않고 하나의 조직으로 얼마든지 확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지금도 목회자가 주도하지만 평신도 중심 교회들이 없지 않은 데 좀더 제도화하면 될일이다.

이미 신실한 가정들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려왔고 지금처럼 시간과 여유가 없는 데도 특정 교회에 소속하여 봉사를 넘어 물질과 시간을 받쳐야 대접받고 대우받는 구도에서 하나님과 직거래하는 구도로 바뀌는 것이다. 이에 따른 문제점도 없지 않을 것이나 규모가 커지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한 가정에서 모일 수 있는 20명 내외의 공동체로 한정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고 연합으로 예배나 행사를 소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네티즌의 평가

의사 없는 병원도 가능할까요? 검판사 없는 재판도 가능할까요? 경찰 없는 사회도 가능할까요? 교사 없는 학교는? 다 가능할 겁니다. 부분적으로, 능력과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의사 없이 치료하고 변호사 없이 재판 받고 경찰 없이 사설로 지키고 교사 없이 끼리끼리 공부하면 됩니다. 물론 한국기독교는 너무 부패했어요 개혁되어야 합니다. 다양한 길을 모색하겠죠. 조직과 시스템은 진리를 담는 그릇일뿐입다. 문제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한국기독교의 신앙언어가 너무 낡고 늙었어요. 농업시대 언어로 가득해요. 언어를 바꾸고 개념을 재해석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릇을 바꿨는데 계속 쓰레기를 담는다면 쓰레기통이 될뿐입니다.

유종성 씨 글

성경은 감독 장로 안수집사 교사 선지자와 같은 교회 직제를 인정하고 있으며, 사도들의 증거를 가지고 성찬 세례를 시행하고 치리와 권징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고로 목회자의 신적 카리스마에 기반한 목회가 필요한 측면이 있다. 성직자를 거부한 평신도 공동체는 단순히 교인모임은 되겠지만 온전한 교회 행태는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개교회 재산을 교단에 귀속시키고, 교단의 권위로 목사와 신도의 방종을 권징하고, 자정시키는 일련의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 목사들 스스로가 교단의 권위, 교회법을 개무시하며 방종하니 온갖 병폐가 낳아지는 것이다. 개신교의 행태는 방종의 끝판왕이다. 개교회주의를 청산하는 것이 방종을 막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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