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화”(빌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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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이 글은 지난 6월 15일에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혜암신학 연구소(소장 이장식 박사)의가 주관하는 제 3회 공개강연회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큰 주제는 "한반도 분단 70년과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 였다. 일자도 의미깊게 고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이룬 6.15 선언이 선포한 날이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한 조치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발전되는 듯 하다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들어서서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폭격 등으로 5.24 조치로 인하여 중단 되었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준비된 귀한 모임이었다. 다른 발제자로는 김영한 숭실대 교수(선진사회적 자유민주통일론)가 했고 이에 대하여 강경민 목사의 논찬이 있었고 장윤재 교수의 발제는 서보혁 교수(서울대)가 했다. 이 모임의 사회는 서광선 박사가 총평은 이만열 교수가 하셨는데 이 강연회에 젊은 이들이 많이 참석하여 근래에 보기드문 귀한 모습이었다.
2015년은 우리에게 광복 혹은 분단 70주년이다. 상반되는 감정이 교차한다. 광복은 기쁜 것이지만 분단은 슬픈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왔다. 아니 기뻐할 사이도 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그렇게 70년이 흘렀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이제 눈물이 말라간다.
2015년은 또한 세계사적으로 제2차 대전 종전 70주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70년간 지구상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지금도 잔혹한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도대체 인류는 언제까지 이 미친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세계평화를 위한 우리의 기도 촛불은 이제 위태롭게 흔들린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평화에 대해 다시 묻고 평화의 ‘깊이’와 ‘넓이’와 ‘시제’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평화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처방과 상상은 한계를 드러냈고 이제는 진심으로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그리스도의 평화”(요 14:27) 그리고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빌 4:17)를 전심으로 간구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먼저 평화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은 한반도의 평화통일과 관련된 것이다. 기독교 평화운동은 이제 ‘국가건설’(state-building)보다 ‘국민형성’(nation-building)에 더욱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거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 베를린시는 여전히 분단의 도시였다. 통일 후 독일 정부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지만 옛 동독 주민이 체감하는 삶의 질은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 설상가상으로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서독 지역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결국 이와 같은 동독 출신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을 반영하여 한 때 ‘오스탈기’(Ostalgie, 동독 향수 바람) 현상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독일어로 오스탈기는 동쪽을 뜻하는 ‘오스트’(Ost)와 향수를 가리키는 ‘노스탈기’(Nostalgie)의 합성어이다. 동독 시절, 사회주의 독재 치하에서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소박한 정을 나눌 수 있었던 옛 일상생활을 그리워하는 풍조를 가리킨다. 그래서 과거 동독 시절의 옷차림과 기호식품과 노래 등이 다시 유행했었다. 통일은 되었지만 장벽은 극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시’(동독인) 및 ‘베시’(서독인)를 갈라놓은 이질적인 정서와 극심한 빈부차이로 통일된 독일은 분단의 고통을 계속 맛보아야 했다. 오히려 당시 베를린 시민들은 ‘새로운 분단’ 아래서 신음했다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이런 통일을 원치 않는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물리적인 장벽을 허문다고 해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고 통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우리는 독일에서 배웠다. 그래서 ‘국가건설’도 중요하지만 ‘국민형성’ 단계가 더욱 중요하며 우리는 지금부터 이를 성실히 준비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평화통일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평화통일교육이 절실하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평화통일을 교육해야 한다. 그런데 평화통일교육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평화적 통일’(peaceful reunification)에 관한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와 통일’(peace and reunification)에 관한 교육이다. 먼저 ‘평화적 통일’을 위한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자. 평화적 통일이란 통일의 방법이 절대적으로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평화적 통일의 반대는 무력통일이고 흡수통일이다. 작년에 미국을 방문한 류길재 통일부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현 정부의 ‘통일대박론’은 결코 흡수통일론이 아니라고 강조한 바 있다. 사실이기를 바란다. 평화로 가는 다른 길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은 평화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위한 평화통일교육은 통일의 방법이 반드시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나누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최근의 여러 여론조사들에서 대학생들 가운데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빨리 통일을 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 늘어나고 있다는 결과 때문이다. 지친 마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치를 대가는 ‘어떤 대가’ 아니라 ‘모든 것’이 될 것이다. 또 한 번의 한국전쟁은 핵전쟁이 될 것이고 민족의 공멸이 될 것이다. 2차 대전 종전 70년이 되는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반전교육’이 중요하다. 과거 로마제국의 구호는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였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구호는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준비하라”가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의 평화통일교육은 ‘평화와 통일’에 관한 교육이어야 한다. 평화는 통일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통일보다 더 큰 것이다. 통일에 이르는 방법도 평화이지만 통일의 목표도 평화여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동아시아 전체의 항구적인 평화와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의 평화통일교육은 평화교육의 큰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통일교육이어야 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추진하는 평화교육은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그리스도의 평화”(요 14:27) 혹은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빌 4:7)라는 성서의 평화를 가르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 평화는 다름 아닌 샬롬(shalom)의 평화다. 샬롬의 평화는 정의에 기초한 평화다. 마틴 루터 킹 2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진정한 평화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현존이다”(True peace does not mean the absence of conflict but the presence of justice). 평화, 평화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게 아니다. 정의가 강같이 공의가 물같이 흐르게 할 때 찾아오는 게 평화다. 오늘날 폭력은 사람들의 기본적 생존권을 부인하는 정치, 사회, 경제적 구조의 형태로 은폐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다운 노동, 충분한 음식, 기본적인 의료, 제대로 된 주택, 인간의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할 수 있는 교육의 권리 등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이고 바로 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의 요체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다. 그리고 그 정의 위에 세워진 평화가 바로 샬롬의 평화인 것이다.
지금까지 평화의 ‘깊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으로 평화의 ‘넓이’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국 기독교의 평화운동은 세계교회 및 시민사회의 평화운동과 발을 맞추며 넓은 국제적 지평을 가진 것이 되면 좋겠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지난 2013년에 한국의 부산에서 제10차 총회를 열며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에큐메니컬 선언’(An Ecumenical Call to Just Peace)을 발표했다. 여기서 새로운 평화운동을 시작했다. 이 선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개념이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이 에큐메니컬 선언은 평화의 개념을 세분하여 그간 우리에게 익숙한 ‘민족 간의 평화’(Peace among the Peoples)라는 개념 이외에 세 개의 개념을 더하여 ‘공동체 안에서의 평화’(Peace in the Community), ‘시장 안에서의 평화’(Peace in the Marketplace), 그리고 ‘지구와의 평화’(Peace with the Earth)를 추가하였다. 민족 간의 평화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분쟁을 없애고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드는 평화다. 공동체 안에서의 평화는 한 사회 안에서 여성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모든 폭력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 평화다. 시장 안에서의 평화는 경제적 평화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을 축복하며 주신 선물, 즉 우리가 경제학적으로는 집단재 혹은 공공재라 부르는 재화들, 예컨대 물과 공기와 씨앗과 유전자와 같은 것들을 사유화하는 것이 모든 폭력의 근본적 원인임을 직시하고 경제적 정의 통해 이루는 평화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지구와의 평화는 지구의 다른 모든 생명과 누리는 생태적 평화다. WCC가 이렇게 평화의 개념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함으로써 기독교 평화운동의 지평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런 세계사적 변화와 흐름을 참조하면서 한국교회의 평화운동도 그 사유와 행동의 지평이 넓혀지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평화의 ‘시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앞으로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 평화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우리의 평화운동은 거시보다는 미시, 제도보다는 사람, 그리고 특별한 사건보다는 일상을 강조하는 생활 속의 평화운동, 문화 속의 평화운동이 되면 좋겠다. 이화여대 북한학과 브로셔에 이런 좋은 말이 하나 있다. “남북한의 통일은 제도의 통합을 넘어 남쪽과 북쪽의 사람들이 만나서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고, “그런 점에서 남북한의 접촉과 통일 과정은 사람의 만남이라는 과점에서 관찰하고 분석하며 연습하는 기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평화는 결국 사람이 만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더불어 사는 삶을 만들어가는 연습은 통일 이후에도 중요하지만 통일 이전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지난번 어린이집 폭력사건 비디오에서 모두가 보고 충격을 받은 것처럼 지금 우리사회에 폭력의 문화가 너무도 깊이 뿌리를 내려 그것이 일상이 되고 구조가 되고 문화가 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함부로 다루면서, 학교와 군대에서의 폭력을 방치하면서, 그리고 여성과 사회적 약자와 또한 동물을 학대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결코 평화를 말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폭력적인 삶을 살면서 비폭력 평화를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거짓이고 기만이다.
미안한 마음이지만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는 폭력적인 일상의 한 단면을 고발해보고자 한다. 다음에 열거하는 제품들의 공통점을 한번 찾아보라. 살충제, 표백제, 교회 초, 탈모제, 눈 메이크업, 잉크, 선탠오일, 손톱 광택제, 마스카라, 헤어스프레이… 모두 동물을 이용한 독성실험을 거친 것들이다. 믿기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50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물고기를 빼면 매년 25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의 음식이 되기 위해 죽고, 매년 4천 만 마리의 동물이 모피가 되기 위해 죽는다. 먹고 입는 것만이 아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동물에 대한 실험을 더욱 잔인하다. 혹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동물실험은 불가피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시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 다른 동물실험의 제목들을 소개해본다. 모두 다 세계 유명대학과 기관들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이다. 쥐를 33일간 잠재우지 않기(시카고대학), 생후 10일 된 새끼고양이 양 눈을 꿰매 시력상실의 영향에 대해 관찰하기(옥스퍼드대학), 생쥐의 두뇌에 헤르페스 바이러스 주사하기(케임브리지대학), 어미 뱃속에 있는 새끼 돼지 태아의 목을 자르고 그것이 임신한 암퇘지의 인체화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찰하기(미 농무부), 비글이라는 사냥개에 플루토늄 주사하기(하버드대학)… 계속해야 할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다!” 세계적인 동물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말이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0년 11월 23일 안동에서 시작한 구제역 파동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겨울 불과 몇 달 사이에 우리는 도합 600만 마리의 가축들을 산 채로 땅에 묻었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를 연출한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구제역에 걸린 가축의 50-90%가 스스로 치유하고 벌떡 일어서는데, 우리는 갓 태어난 새끼부터 갓 출산한 어미까지 그날 한꺼번에 땅에 묻어버렸다. 그 날 산 채로 땅에 파묻혀 울부짖던 돼지들의 울음소리에서 우리는 그 옛날 아벨의 핏소리를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네 동료 피조물들을 어디다 파묻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도덕적 지평의 확대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도덕적 배려와 책임이 흑인으로, 여성으로, 장애인으로, 가난한 사람으로, 그리고 각종 소수자로 확장되고 있다. 이제 그것은 지구라는 이 행성 위에 우리와 함께 살면서 인간의 폭정과 학대에 시달리는,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물들에게까지도 확장되어야 한다. 동물에 대한 폭력과 학대는 우리 사회에 생명감수성이 지극히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에 대한 폭력과 학대는 여성에 대한, 장애인에 대한, 외국인에 대한, 기타 모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학대와 폭력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 서구에서 가정폭력은 종종 반려동물에 대한 폭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릴 때 심한 동물학대를 저지른 사람을 성장해서 사회적 인간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생명감수성이 크게 떨어졌다. 지금 우리에게는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각 생명의 아름다움에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영성이고 그것이 바로 비폭력 평화사상의 핵심이다.
올해는 광복 혹은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무려 70년간이나 우리는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하에서 살았다. 그 사이 지속적으로 커진 남북한의 간극을 줄여나가는 일은 앞으로 긴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일 것이다. 분단이 70년이라면 진정한 내적 재통일을 의미하는 ‘국민형성’에는 그 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일은 결코 한 세대가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까지 이어가야 할 과제다. 상처가 오래되면 상흔(scar)이 된다. 70년의 분단은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올해 우리는 이러한 민족의 상흔을 치유하는 평화의 사람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peacemakers)이 되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에는 여러 평화통일 프로그램들이 있다. 그런데 최근 여러 기독교 단체와 학교들에서 추진하는 평화통일 프로젝트나 교육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낀 것은 한국 기독교가 남북평화통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기본원칙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평화통일에는 상대가 있다. 제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추진하는 일이라도 통일의 동반자인 북녘의 형제자매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물어야 한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나의 운동과 사업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앞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통일은 평화를 위한 것이고 평화가 통일로 가는 길이라는 원칙이다. ‘통일, 통일’만 이야기하다 통일로 가는 길이 평화라는 점, 그리고 한반도 통일의 목적은 동아시아 전체의 항구적인 평화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남북의 통일은 사반세기 전 이루어진 동서독의 통일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 새로운 문명을 길을 창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통일단체들이 겉으로는 평화통일을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독일식 흡수통일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남북통일은 남한의 삶의 방식과 생활을 그대로 북으로 확장하고 이식하는 것이 아니다. 통일은 둘이 만나 둘 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자랑(?)하는 남한의 체제가 그대로 북으로 확장되고 이식되는 통일을 원치 않는다. 통일은 북도 새로워지고 남도 새로워지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 인류는 동서독 통일 때와는 달리 문명사적이고 지구사적인 위기를 겪고 있다. 남북의 통일은 단순히 독일의 모델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위기에 처한 현재의 인류문명 앞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는 희망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한반도 통일의 세계사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한반도에서 원하시는 통일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통일과는 질적으로 다른 남북의 통일을 우리는 꿈꾸고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생명의 물결과 평화의 바람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
빌립보서 4장 7절에는 하나님의 평화라는 말이 나온다.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번역한다. 공동번역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로 번역한다. 새번역은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로 번역한다. 영어성경들을 보니 “the peace of God, which passes/transcends/surpasses all understanding”으로 번역하고 있다. 모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고, 초월하고, 능가하는 평화가 바로 하나님의 평화라는 뜻이다. 그 평화는 과연 어떤 평화일까? 평화를 향한 인간의 모든 이해와 상상력과 노력이 다 소진되어 가는 이 때,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 ‘하나님의 평화,’ 즉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그 평화를 기도하고 앙망하고 전심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평화를 만드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축복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평화가 바로 하나님의 평화다. 이 평화가 우리 가운데, 동서로 갈라진 남한 가운데, 그리고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 위에, 나아가 폭력과 전쟁으로 쉴 날이 없는 이 세계 위에 항상 함께 하시길 기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