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 (1971~1972)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사회선교에 관심을 가진 교계지도자들은 1971년 1월 4일 한국산업문제협의회를 조직하였고,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선교적인 차원에서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이어서, 가톨릭을 포함한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모여 연합모임을 발전시키기로 하여 1971년 9월 28일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The Korea Christian Organization for Urban Industrial Mission: KACO-UIM)가 설립되었다. 이 협의체는 도시산업선교에 관심을 가진 가톨릭 4개단체(대한가톨릭학생총연합회, 카톨릭노동청년회, 안양근로자회관, 가톨릭노동장년회)와 개신교의 7개 단체(크리스찬 아카데미, 기독교도시산업선교위원회,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한국기독학생총연합회, 대한YMCA연맹, 대한 YWCA연합회,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가 함께 참여하였다. 이 후, 이 협의체는 유신헌법 공포 이후 일시적으로 활동을 중단하였으나, 1973년 3월 6일에 에큐메니칼선교협의체(영어 명칭은 KACO-UIM을 유지)로 명칭을 변경하고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와 크리스찬아카데미가 탈퇴하였다. 1975년 2월 8일에는 중복된 활동을 피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선교협의체를 해체하고,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를 출범시켰다. 그 후, 단체 차원의 연합활동에서 오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조직을 해체하였으며 1976년 9월 25일 실무자 중심의 연합활동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를 창설하였다.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의 설립 동기는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적 사명을 절감하고 그 연합전선 형성과 액션을 위해서”였으며, 이들의 지향점과 의의는 다음과 같다.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는 1971년 1월 4일 천주교회와 개신교회가 교회의 사회적 관심과 문제해결을 위한 행동표현의 절실한 요구에 의하여 조직된 선교단체이다. 특히 선교단체는 종래의 한국교회의 보수성에 근거를 둔 사회복지사업이나 봉사 또는 교육, 그룹활동 위주의 선교활동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즉 힘없고 가난하며 압박받는 대중들(노동자와 실업자, 빈민지대의 주민들)의 문제는 단지 개인적이며 또 자신들의 무능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며 사회적이고도 정치적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우리 액션그룹은 단지 교회의 선교활동으로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사회활동으로서 사회개혁을 위한 행동표현에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원주교구와 5.16 장학회가 공동 투자해 설립한 원주문화방송국이 부패한 사실에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부정부패추방운동이 전개되었다. 원주교구의 이 같은 활동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 충격을 주며 부정부패 추방운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1971년 10월 8일,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 회원단체의 대표자 26명이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한 가톨릭 학생회관에서 ‘사회정의 실현 촉진대회’를 개최했다. 대회 참석자들은 미사를 마친 후 “현 정권하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극악무도한 부정과 불의와 부패를 규탄하기 위하여 분연히 궐기한 천주교 원주교구의 성직자와 신도들의 의롭고 거룩한 행동을 적극지지하며 함께 정의의 대열에 참여하고자 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12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후 “부정부패 일소,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슬로건을 담은 띠를 두르고 대회장을 나와서 기독교 회관을 향해 행진하며 침묵시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출동한 경찰대에게 진압되어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 이사장인 박홍신부, 부이사장인 박형규 목사, 그리고 사무총장인 조승혁 목사를 포함한 시위 참여자 26명 전원이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연행된 시위 참여자들은 4시간 동안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났다.
1971년에는 주요 활동내용은 청계천 주변에 위치한 신설동 4번지의 강제철거민 이주, 신진자동차 노사분규사건, 영창산업사 노조간부 부당해고사건 등에 관여하는 등 구체적인 현장 활동을 주도했다. 또한, 1971년 10월부터는 기독교 방송(CBS)을 통해 ‘주간 노동계 동향’을 방송하여 가톨릭 원주교구로부터 시작된 부정부패 일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매주 일요일 오후 7시 40~50분에 조승혁 목사의 기획 아래 진행된 방송 프로그램은 그 주간 발생한 주요 노동계 사건을 다루고, 특히 중요한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해설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특징은 순수하게 노동 관련 내용을 다룬 정규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72년 10월 22일, 계엄 당국으로부터 내용이 자극적이라는 지적받아 1년 만에 중단되었다. 초기에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가 현장 선교활동에 참여했지만, 이는 원칙적으로 각 회원단체의 책임이었다. 따라서 이 협의체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회원단체 간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한 기본적인 활동은 훈련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회원들이 경험을 교환하고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정신적인 일체감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교육내용은 알린스키의 조직이론이나 프레이리의 교육이론과 같은 것이었다.
1972년에도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는 노동 분야 및 도시빈민 교육을 진행했다. 특히 노동부문 활동으로는 황영환씨 부당해고 철회운동지원활동, 한국 모방 퇴직금 문제 지원, 태광산업 부당노동행위 항의운동 등과 같은 대책 활동을 실천했고, 노동조합 조직화, 노동자 의식 확산 훈련, 노동조합 지도자 교육, 한국노총과의 협력, 주간노동계동향 방송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②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 (1973~1975)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계엄선포로 인해 사회 활동이 제약을 받았고, 이로 인해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의 활동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0월 20일 이사회는 이에 대응하여 서면으로 해체를 결의했다. 따라서 강제적으로 중단된 활동을 감수해야 했던 협의체는 1973년 3월 6일에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로 명칭을 변경하고, 조직을 재정비하여 재출발하였다(이사장 박형규목사, 사무총장 조승혁목사). 재편 과정에서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와 크리스챤아카데미가 탈퇴했다. 활동 목표는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개인생활, 직장,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1973년에는 J.O.C.나 산업선교를 통한 노동사회 선교활동이 이어졌고, 서비스업종(요식업, 이·미용업, 여관업, 유흥업 등) 근로자들을 위한 조직 활동도 지속되었다. 특히, 농민사회를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이 협의체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했다. 기존에 가톨릭농민회, 대한YMCA연맹, 기독교 연합봉사회, 농촌개발원 등에서 이루어졌던 농민선교활동이 사회선교에 함께하게 되었다. 비록 1973년에는 교육을 통한 훈련 이외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었지만, 이는 협의 체의 한 단계 발전을 나타냈다.
1973년 ‘남산부활절예배 사건’이 발생하여 이사장인 박형규 목사가 구속되고, 사무총장 조승혁목 사가 연행되어 협의체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와 관련이 깊었는데, 당국이 기독교 운동의 활동을 저지하고 제동을 걸고자 의도적으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고 평가받았다. 이로 인해 교회의 사회선교가 전반적으로 위축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이 적극적인 대응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는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으며, NCC의 지원을 받아 12월 10일부터 16일까지 ‘자유케 하옵소서’를 주제로 전국적으로 교회와 인권 문제에 대한 특별 기도주간을 실시했다. 이 기도주간의 마지막 날인 12월 16일에는 서울 YMCA 강당에서 교회와 인권연합예배를 개최하여 500여 신도들이 일치된 마음가짐으로 기도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또한 성탄절을 맞아 정치, 경제, 사회적 고통 속에서도 양심적 결단을 통해 용감하게 행동한 양심수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이들의 가족 지원, 법정 투쟁 지원, 사건 조사, 여론 형성 등을 위한 인권 옹호 기금 모금 캠페인을 펼쳤다.
1974년은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에 있어 고난의 한 해였다,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신, 구교 노동문제 공동협의회가 한국노총에 대해 부당한 노동 침해행위를 규탄하고 질책하자 한국노총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또한,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해 협의체와 관련된 많은 선교사들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외에도 도시산업선교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오글(George E. Ogle)목사가 당국에 의해 추방되는 등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각 단체들은 자신들의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산업선교단체들은 국가보위법에 대항하는 투쟁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노력을 펼치면서 노사분규 등 구체적인 문제에도 개입하였다. 당시 농민 선교 단체들 또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가톨릭 농민회는 소작농의 상황을 조사하고, 기독교 연합봉사회는 농촌목회자를 대상으로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 같은 활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974년 12월 9일부터 12일까지 협의체가 주최한 농촌선교협의회가 열렸고, 이곳에 참석한 신구교 농민운동가들에 의해 한국농촌선교협의회가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 내에 설립되었다.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 또한, 남산부활절 사건 이후 중요한 관심사로 부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기도 모임을 갖고, 목요일 기도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74년 9월 22일에는 신구교 연합기도회를 개최하여 유신 철폐를 촉구하였으나, 이로 인해 협의체의 실무자들인 이창복, 조승혁, 손학규 등이 중앙정보부에 3일간 연행되어 수사를 받게 되기도 했다.
③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 (1975~1976)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활동을 이어갔던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는 각 단체 간에 일이 중복되는 비효율적인 상황을 배제하고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도시산업선교연합회와 함께 발전적 해체를 결정하고, 1975년 2월 8일에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Korea Christian Action Organization for Urban and Rural Mission: KCAO)를 설립하였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다하려는 교회(천주교와 기독교)가 도시와 산업 및 농민, 학생사회에 있어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개인생활과 그들의 조직 및 지역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해결하여 정의롭고 조화된 사회를 이룩하도록 행동하는 데 그 선교적 사명을 둔다”였다.
영어명칭이 도시산업선교(for Urban Industrial Mission)에서 도시농촌선교(for Urban and Rural Mission)로 변화가 의미하듯이 이후 이 협의체는 농촌선교에 대한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포괄하게 된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는 가톨릭 3개 단체(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노동장년회, 가톨릭농민회), 개신교 4개 단체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도시산업선교실무자협의회, 한국도시산업선교연합회, 대한YWCA연합회)등 주요사회선교단체들을 포괄하면서 기독교 선교활동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다. 하지만 정부와 치안당국이 협의체의 활동과 선교자료들을 문제 삼아 공산당 조직으로 몰아가며 강도 높은 수사를 집중함에 따라 실무자들의 구속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협의체의 기능은 상당히 위축되었고 상황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시기 목요기도회를 위한 장소를 열어주고, 성직자영치금 모금을 지속하였으며, 한국 기독교 농민선교회 조직 활동과 실무자 연구회 모임 등을 실행했다.
④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사선) (1976 이후)
그동안 이사와 회원단체 중심으로 활동해 왔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를 각 현장에 있는 실무자들을 중심으로 개편하여 1976년 10월 1일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를 새롭게 태동시키게 되었다. 지난날 협의체가 해오던 단체중심의 조직활동을 지양하고 실무자중심의 활동으로 조직을 개편한 것이다.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각 회원단체들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조정만 하고 구체적인 일은 각 현장에서 실무자들 중심으로 펼쳐지게 되는데 회장에는 조화순 목사, 총무에는 조지송 목사가 선임되었다. 한편 이사진 대신에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었디. 조직 개편 후 각 사회 현안에 대한 대책활동, 조직활동, 교육・훈련활동, 운동단체와 활동에 대한 후원 및 지원사업 등을 실천했는데 이 같은 활동은 8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