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인권운동과 통일선교

                            한국교회의 인권운동과 통일선교

윤은주 박사(이화여자대학교/북한학)

글 실는 순서 
1. 한국교회의 인권운동
1) 인권과 민주화
2) 반공주의에 대한 성찰

2. 한국교회의 통일선교
1) 통일선교신학
2) 통일선교활동 – 남북교회의 만남, 국제개신교조직의 지원과 해외 통일운동, 미국 크리스천의 책임
3. 한국교회의 북한인권운동
1) 북한인권운동 – 대북지원
2) 통일선교와의 관련성
    북한인권과 민주화

* 참고도서

논 찬 1 황병배 박사(협성대대학교 교수 / 실천신학 / 선교학)
논 찬 2 최현종 박사(서울신학대학교 교수 / 실천신학 / 종교사회학)
논 찬 3 정 재 영 박사(실천 신학대학원 교수/실천신학/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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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교회의 통일선교가 인권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인권운동과 통일선교 * (본 연구에서 ‘통일선교’라는 용어는 진보적 선교관에 입각하여 분단구조의 해소와 남북한 통합을 추구하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실천을 뜻한다. 본 연구에서 ‘선교’는 ‘운동’에 비해 보다 광범위한 지평을 갖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보수적 선교관과 진보적 선교관에 따른 사회적 실천양상 비교는 윤은주, “한국교회의 북한인권운동에 관한연구-선교패러다임과 대북관 분석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pp.17-43 참조.) 의 관련성을 규명하는데 있다. 또한 남쪽의 인권운동으로부터 시작된 통일선교가 북쪽의 인권운동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설명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의 통일선교는 안보담론이 지배적인 가운데 민간차원에서는 통일에 대한 논의조차 수월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며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반공주의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해왔는지 비판적으로 점검하게 되면서 통일에 대한 관심을 키웠던 것이다. 그 바탕에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교신학과 구체적인 실천현장으로부터의 축적된 경험이 있었다. 반공의 보루로 여겨질 만큼 철저한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한국교회가 스스로 이념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 번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통일선교의 의의를 되짚어보기 위함이다. 특히 북한 인권 문제를 놓고 교회 내에서 의견이 분분할 뿐만 아니라 다시금 반공주의를 기준으로 이념대결을 펼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의 역기능을 극복하고 민족화해를 추구하고자 시작되었던 통일선교는 궁극적으로 한반도 전체에서의 인권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통일을 추구하며 이루어지는 인권운동은 한반도 분단구조의 특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인권운동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겠는데 본 연구에서는 남북한 인권운동에 있어서 구조적 제약을 규명함과 동시에 인권과 통일의 상호관련성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II. 펴는 글

1. 한국교회의 인권운동
1) 인권과 민주화
한국교회가 노동자와 도시빈민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국제선교대회를 통해 등장했던 진보적 선교개념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그중 ‘하나님의 선교’, ‘인간화’, 그리고 ‘오늘의 구원’ 등의 선교개념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선교가 보편적 인권실현을 위한 사회적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한편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 정책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이농인구가 도심 주변으로 몰리자 많은 교회들이 포교를 목적으로 인구 집중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도시선교회활동을 하였는데 이 또한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의 인권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이전 교단차원에서는 1957년 4월 13일 예수교장로회(통합)(이하 예장통합) 총회에서 산업전도위원회를 설치한 이후 1961년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이하 기감)와 대한성공회가, 1963년에는 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가, 그리고 1965년에는 구세군 등 각 교단들이 산업전도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초창기의 산업전도는 사용자나 관리자, 노동자 구분 없이 이루어졌는데 공장 내 전도지 배부나 예배, 봉사활동, 상담 등 주로 종교 활동을 지원하는 내용으로 다분히 보수적 선교관에 따른 활동이었다.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의 삶의 문제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인식되면서 동시에 인권운동의 과제로 떠오르게 된 중요한 계기는 전태일의 분신사건이었다(2) 평화시장 노동자로 일하던 전태일은 당시 최하층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으나 노동탄압이 거세지기만 하자 1970년 11월 13일 근로조건개선을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분신자살을 시도하였다. 창현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던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 일반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진보적 선교관을 접하고 있던 교회에도 큰 도전이 되었다. 도시선교위원회에서 벌이던 기존의 활동들은 진보적 선교관에 입각한 본격적인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영등포와 경인지역에서는 도시산업선교회 이름으로 노동조합 조직과 운영에 관한 교육사업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주요 국제개신교 선교대회에서의 선교개념 변화는 * (윤은주, 앞의 논문, <표Ⅱ-1> 참조, p. 42. 진보적 선교개념 중 ‘하나님의 선교’가 국내 선교신학으로 수용된 것은 1978년 9월 발표된 ‘산업선교신학선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선언에서는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한 종교활동, 특히 산업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위한 활동을 하나님의 선교로 설명하고 있다. 이덕주․조이제 엮, 『한국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서울: 한들, 1997), pp. 319-322.)

한편 진보적 선교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1974년 7월 로잔에서는 보수적 선교를 재천명하는 1차 로잔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규명한 보수적 선교관점에서 ‘로잔언약’이 채택되었다. 이후 이러하나 흐름은 1989년 마닐라 대회와 2010년 케이프타운 대회로 이어졌다. 본 연구에서는 인권운동과 통일선교와 직접 관련이 있는 진보적 선교개념에 집중하였다. 로잔운동에 대해서는 한국로잔연구교수회편, 『로잔운동과 선교』(서울 : 한국로잔위원회, 2014) 참조.

1969년부터 노동조합 지도자 훈련프로그램을 운영했던 도시산업선교회는 노동운동의 실제와 이론, 조직가의 자질과 조직 기술 등 노조활동을 위한 전문교육을 실시하여 21회에 걸쳐 12,000여명의 교육생을 배출하였다. 영등포사업선교회와 인천산업선교회는 100여개 기업체 노조를 지원했고 교육받은 노동자는 4만여 명에 달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40년사 기획위원회, 『영등포산업선교회 40년사』(서울: 영등포산업선교회, 1998), p. 96. (3)이중 청계피복노조(1970.11.22.), 동일방직 노조(1972.5.10.), 원풍모방노조(1972-1974), 콘트롤데이타노조(1973.4.15.), YH무역지부노조(1975.5.24.) 등이 대표적이다. 도시산업선교회 출신 노동운동가들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당시 도시산업선교회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이원보(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 이미 70년대 전반기에 산업선교회가 조직 증가에 기여하게 되는데 왜 그런가 하면 조직을 하긴 해야 하 는데 독자적으로는 할 수가 없으니까 가까이 산업선교회에 가서 자문도 구하게 되고 해서 조직을 만드는 예가 많았습니다.
이근복(새민족교회 목사) : 아마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 치고 영산회관의 집회에 한번이라도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1985년을 전후하여 영산은 지역노동운동의 메카였습니다. 영등포 구로지역의 노동자들을 다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는 않았지만 영산은 노동운동의 보루였습니다.
김정근(민주노총 쟁의국장) : 당시에는 집회시위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집회는 종교건물에서나 가능했으며, 특히 경인 지역의 주요 집회는 거의 교회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집회 내용은 탄압내용과 투쟁현황 공유, 단결을 강화하는 노래극 또는 연극 등의 문화행사, 노선, 사상 투쟁의 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김재성, “도시산업선교가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 한국신학연구소, 『한국개신교가 한국 근현대의 사회, 문화적 변동에 끼친 영향 연구』(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2005), pp. 525-526.)

한편 도시빈민들을 위한 인권운동은 1968년 12월 연세대에 도시문제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연합장로교의 지원으로 출범한 지역운동 성격의 이 운동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도심주변의 슬럼지역에서 주로 주거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71년 9월 1일에는 초교파적 선교기구인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가 조직되어 각 교단 소속 교역자들이 지역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이후 낙산아파트, 연희아파트, 금화아파트 등 안전이 문제시되는 아파트들 중심으로 그리고 창신동, 오장동, 구로동, 사근동과 성동구(4) 1970년 4월 서민들이 모여 살던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서민아파트들에서 주민조직운동이 더욱 고조되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서울: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2), pp. 90-91. 등 주로 도심의 슬럼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지역교회를 통한 활동도 이루어졌는데 1971년 10월에는 청계천 성정동에 활빈교회가 설립되었고 1972년 4월에는 경기도 광주 대단지에 주민교회가 설립되어 지역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밖에 인천의 만석동과 안양 인근에서도 지역문제 해결을 위한 주민조직운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3년 7월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의 주된 활동가였던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전도사가 구속되자 12월에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후 활동 재개를 준비했다. 당시 발표한 신조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처한 고난의 근본 원인이 정치, 경제,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 때문이라고 보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선교자이다.(마태복음 4:23, 고린도후서 6:1) 우리는 이 사회의 소외지역에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절망의 수렁에서 몸부림치는 민중의 신음소리를 듣는다.(출애굽기 3:7) 우리는 오늘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부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도리를 저버린 부유한 자와 특권자 그리고 지식인들의 부정과 부패, 수탈과 억압에 기인한다고 본다.(아모스 5:10~13)․․․우리는 가난한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의 해(누가복음 4:13~18)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그늘 속에서 하나님의 해방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에 주어진 근본적인 선교사명이라고 믿는다.(마태복음 25)  (전민경, “한국 기독교 NGO의 발달과정과 오재식의 생애사적 실천에 대한 연구”, 성공회대학교 NGO 대학원석사학위논문, 2010.)

이렇게 산업선교와 도시빈민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며 신앙고백적 선교활동을 펼쳤지만 활동가들은 정부로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72년 12월 유신헌법 공표와 함께 유신체제가 시작되자 진보적 교회는 1973년 5월 20일 ‘한국그리스도인선언’ 발표를 시작으로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며 인권탄압에 저항하였다. 이 선언문은 익명으로 발표되었지만 정권의 잘못된 통치와 남북관계 운영에 대해 6개 항목을 적시하며 따지고 있는데 인권과 통일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진보적 선교관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 한국의 현 統治勢力은 강한 자가 가난한 자를 수탈하는 오늘의 경제체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 특히 가난한 도시동자들과 농민들은 가혹한 수탈과 사회적 경제적인 부정으로 희생을 당하고 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극단적인 非人間化와 不正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이 부유해지고 눌린자들이 보호를 받고 모든 백성이 평화를 누리게 되는 메시아의 나라가 실현되는 과정을 증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6) 지금 南北의 정권은 통일의 대화를 단지 그들 자신의 집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구실로 삼고 있으며 한국 민족의 國土統一에 대한 열망을 배반하고 있다. 南北은 진정한 和解를 이룩하려는 민족적 자세를 확립하여 우리 민족 전체가 참다운 共同體를 수립할 수 있도록 깊이 모색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人으로서 지난날의 쓰라린 싸움에 대한 경험, 이데올로기와 정치, 경제제도의 차이를 넘어서고 국민을 억압하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통일을 실현할 수 없다. *( 이덕주․조이제, 『한국 그리도인들의 신앙고백』(서울: 한들, 1997), pp. 274-275.)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활동가들과 학생운동 주도자들이 구속된 이후 기도회나 가두시위에서 인권탄압 사례가 속출하자 교회 차원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973년 11월 23일과 24일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신앙과 인권협의회가 열렸고 ‘인권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문서는 개신교 인권운동에 있어서 인권에 대한 존엄성 근거를 제시하고 교회의 가장 큰 과제가 인권 확립에 있다고 밝힌 최초의 문서이다.

인권은 하나님이 주신 지상의 가치이다.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신(창 1: 27) 하나님은 인간을 모든 측밤[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인권의 침해가 없는 사회를 이루어 나아가고 계신다. 그의 역사하심을 따라 교회는 인권의 확립을 지상의 과제로 믿고(눅 4: 18)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 개인의 생존의 근거이며 사회발전의 기초인 인권확립에 있음을 확신한다. * 이덕주․조이제, 『한국 그리도인들의 신앙고백』(서울: 한들, 1997), p. 310.+

이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hurch Council in Korea: NCCK)는 1974년 4월 11일 인권위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인권운동이 이루어지게 된다.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교회 인권운동 30년사』(서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05), pp. 57-94. )  그러나 1974년 1월부터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가 시행되고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움직임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시국은 더욱 불안정해져갔다. 교단 총회 차원에서 유신체제 하에서 우려되는 인권상황에 대한 시국선언문이 연이어 발표되었는데 1974년 9월 기장 제59회 총회가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예장통합 제59회 총회와 기감 제12회 총회도 이어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기독교의 역사 Ⅲ』(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240.

2) 반공주의에 대한 성찰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와 더불어 인권운동과 노동운동 등을 통해서도 반정부투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들 운동에 대해서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매도하는 이데올로기적 탄압이 지속되었다. * (신헌법 통과와 함께 유신체제가 구축되면서 이에 저항하는 크고 작은 사회운동들이 속출하자 이를 막고자 다시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가 선포되었다. 이는 유신헌법에 대한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부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NCCK를 비롯한 민주화 세력들이 이에 맞서는 가운데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이 유신체제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운동을 계획하는 와중에 당국에 의해 적발되어 253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이례적으로 사형을 비롯한 중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에 개신교인들이 연루되면서 교회 차원에서 기도회가 시작되었고 인권과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앞의 책, pp. 238-243.)

이에 1974년 11월에는 진보적 신학자 66명이 연명한 ‘한국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성명서는 당시 지속적으로 발표되는 시국 선언서들에 대한 신학적 근거들을 뒷받침해주었다. 교회의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선교활동으로서 불가피한 것이라는 주장과 더불어 국가와 종교의 관계, 인권, 교회의 선교 등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특히 “이 같은 선교활동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조하면 할수록 더욱 그 정당성이 드러난다. 교회는 그 본질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민족, 국경, 계급을 넘어선 신앙과 선교의 공동체이며 거룩한 보편적인 한 공동체이다” * 장숙경, “한국 개신교의 산업선교와 정교유착”,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pp. 267-284. 라고 하여 학생들과 교역자들의 인권운동 참여를 이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노동운동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도시산업선교회와 관련이 깊은 동일방직 노조사건(1978년)과 YH사건(1979년)이 발생했다. 이와 더불어 도시산업선교회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는 책자들이 연속적으로 출간되었다.『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 『정치신학의 논리와 형태』, 『이것이 산업선교다』, 『산업선교, 왜 문제시되는가』등이 한국노총을 통해 배포되었는데 이들 책자에는 공산주의단체인 도시산업선교회가 노동운동을 조정하고 있다는 주장이 실려 있었다. 선교 활동이 지속적으로 용공으로 매도될뿐 아니라 책자가 발간되어 널리 퍼지는 상황에서 예장통합, 기감, 기장, NCCK, 사회선교협의회, 기독청년협의회 등 개신교 단체들은 성명을 발표하며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후 1978년 9월 발표된 ‘산업선교신학선언’은 용공논란이 빚어졌던 산업선교활동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 선언문에는 산업선교 현황에 대한 기술과 함께 산업선교에 대한 비평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또한 산업선교 신학에 있어서 선교 개념정리를 통해 교회의 산업선교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 등 진보적 선교관이 수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관념에만 머무르지 않는 사회적 실천신앙이 이데올로기적 위축을 넘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용공주의자들에 의한 불순한운동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통해 반박하고 있는데 그 중 일부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②용공주의자들인가?
산업선교는 산업사회에서 가장 고난당하고 있는 형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이 형제들을 부당하고 억울하게 하는 기업주들의 횡포를 묵인 내지 비호하는 불법을 고발하는 일은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를 천명하고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일이다. 결코 공산주의가 말하는 계급의식에서 조직과 폭동을 정당화하는 일은 아니다.
산업사회에서 착취와 수탈당하는 약한 인간들에게 진정한 인간애를 표시함이요, 기업가의 노동자 학대와 핍박을 깨우쳐 줌으로서 산업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공산주의의 유혹을 가장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운동이 산업선교이니만치 더 구체적인 운동을 하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그러므로 이들을 ‘용공주의자들’ 운운하는 것은 이렇게 비난하는 자신들이 산업전사인 노동자를 억압하고 학대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이윤 추구에만 몰두하는 기업주의 비인간성, 비인도적 처사를 동조하고 또는 고의로 이를 은폐하는 사람들이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그러므로 산업선교자들을 용공주의자 운운하는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산업선교를 일방적으로 곡해 또는 오해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 ( 이덕주, 조이제 편, 앞의 책, p. 317.)

진보적 선교관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선교 활동이야 말로 계급투쟁을 추동하는 공산주의사상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운동이라고 하며 정부와 기업주의 이념공세에 맞서는 모습이다. 이와 같이 1970년대 이루어진 교회의 노동운동, 빈민운동과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이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한 불순한 운동으로 매도되며 이념적 탄압을 받는 일이 반복되자 공산주의에 대해 보수와 진보 구분 없이 전일적으로 반공주의입장을 견지하던 교회입장에서는 오히려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자유와 인권의 보장, 그리고 사회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후 북한에 대해 적대적 대결의식이 압도적인 가운데 논의되었던 멸공통일론이 우리사회 민주화 이슈와 맞물리게 되면서 비로소 반독재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곧바로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정부가 통일논의를 독점할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에 대한 이념적 공격과 함께 통제가 더욱 심해지자 분단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권운동, 민주화 운동의 한계가 더욱 뚜렷해졌다. 장준하와 문익환, 그리고 백기완 같은 민주화 인사들 역시 민주화운동을 통일문제와 밀접하게 연계시키며 상호관련성을 중시하였다. 1976년 3월 1일 발표된 민주구국선언서에는 민주주의와 통일문제에 대한 이러한 입장이 나타나 있다. 유신체제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이 선언서에는 민주주의의 회복과 경제입국논리의 재검토, 그리고 민족통일의 과업 등이 명시되어 있다.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목적을 설명하는 부분에는 남북대결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민주주의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구실로도 민주주의가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북 공산주의 정권과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이 마당에 우리가 길러야할 힘은 민주역량이다. 국방력도 길러야 하지만 민주역량의 뒷받침이 없을 때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 (이덕주․조이제, p. 289. )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민족의 정통성을 세우는 길은 바로 민주주의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는 역량은 민주주의 실현에 있다는 논리이다. 반공주의적 입장을 바탕으로 북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되짚어 볼 내용이다. 안보담론을 내세우는 독재정권이 남북을 상호 적대시하는 가운데 사회통합을 내세우며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과 정반대 논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경쟁력 조건으로 보는 입장과 외부 위협론을 근거로 민주화를 억압하는 입장이 대비되는데, 남쪽의 인권과 민주화를 주장했던 인사들은 분단이 남북 공히 독재의 구실을 제공한다고 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국토분단의 비극은 해방 후 30년 동안 남과 북에 독재의 구실을 마련해주었고, 국가의 번영과 민족의 행복과 창조적 발전을 위해서 동원되어야할 정신적․물질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말았다…그러므로 민족통일은 지금 이 겨레가 짊어질 지상과업이다. 오천만 겨레의 슬기와 힘으로 무너뜨려야 할 절벽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민족통일’을 저희의 전략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다거나 저지한다면 이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민족통일’의 기회는 남과 북의 정치가들의 자세 여하로 다가올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 진정 나라와 겨레를 위한다면 변해가는 국제정세를 유도해가면서 따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말고 과감하게 잡을 수 있는 슬기와 용기를 가져야 한다. * ( 이덕주․조이제, pp. 291-292. )

통일논의가 특정 집단의 전유물처럼 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예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하며 전 민족의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주목할 부분이다.

 

(이 논문은 2015년 2월 13일 20회 한국실천신학회에서 발표된  주목받은 논문이다. 저자의 허락을 얻어서 3회에 걸쳐서 게제한다. 좋은 논문을 발표하신 윤은주 박사와 논평을 해주신 여러 교수님들과 실천신학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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