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청협(회장: 배은미)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 1월 31일(토) 오후 3시 기독교회관 2층에서 열렸다. 암울했던 유신군사 독재정권이 시작되면서 이에 컴퍼스에서 저항하던 학생들이 구속되고 운동의 장도 협소해진다. 이에 기독학생들은 운동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청년성이 있는 교회의 기독청년들의 의식화를 위한 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낸 분은 새문안교회 서경석이었고 이후 선후배들과 함께 독자적인 기독청년운동 조직을 공개한다. 이렇게 시작한 기독청년운동은 당시 NCCK의 인권위 활동과 아울러 진보성을 답보하면서 당대 민주화와 시민운동 학술운동의 프렛홈이 되었다. 이후 여성운동, 농민운동. 기독노동자운동이 모두 여기를 산실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서울지구활동도 그렇고 지방의 EYC가 인권위 구성전에 민주화운동의 중요 단체가 된 점에 대해서는 자료로 남지 않은 점이 아쉽다. 하지만 이 만한 역사 자료를 50년간 손실하지 않고 간직한 것만 해도 귀하고 역대 회원들 중에는 쉬운 말로 이런 수고와 희생을 훈장으로 바뀌어 권력에 편승하고 양지로 나간 분도 없지 않다. 다만 이러한 현실에 대한 미안함은 커녕 억지 역사해석과 괴변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얻어낸 직선제 개헌 이후, 한국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정치적 변화: 노태우 정부(제6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주 정권으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겪었습니다. 사회 운동의 분화: 학생 중심의 운동이 노동자, 농민,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 조직화가 급증했습니다. 통일 논의의 활성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억눌려 왔던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2. 기독교 운동의 주요 흐름
이 시기 기독교계(특히 개신교 진보 진영)는 단순한 ‘민주화’를 넘어 **’통일’**과 **’민중의 삶’**으로 운동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① 통일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 기독교 회 선언(88선언)」**입니다.
남북한의 상호 신뢰와 분단 극복을 공식 천명했으며, 이는 이후 1990년대 초반 민간 통일 운동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문익환 목사 등의 방북 사건(1989년)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통일 논의를 대중화했습니다.
② 민중 교회 및 부문별 운동의 심화
기존의 정치 투쟁에서 벗어나 현장 중심의 활동이 강화되었습니다.
민중교회 운동: 공단 지역이나 빈민가에 교회를 세워 노동자와 빈민의 권익을 대변하는 활동이 정점에 달했습니다.
부문별 기독교 단체: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1987년 말 설립되어 90년대 초반 ‘깨끗한 손, 정직한 마음’을 슬로건으로 도덕성 회복 운동을 전개하며 시민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③ 보수와 진보의 갈등과 분화
진보 진영이 통일과 사회 정의에 집중할 때, 보수 진영은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창립하며 조직화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뚜렷하게 양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해방을 선포해온 50년, 해방을 선포해갈 50년을 향하여 –
주도 하나요, 그리스도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이신 에큐메니칼 신앙고백을 함께해온 우리는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독청년운동의 역사를 되새기기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주는 사명을 분명히 확인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다. 성서가 말하는 희년은 잃었던 것을 되찾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질서를 멈춰 세우며, 공동체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돌이킴과 해방의 시간’이기에 EYC의 희년을 맞은 오늘 우리는 지난 50년을 기억하며, 다가올 50년 또한 그 책임 아래 놓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