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회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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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기원
한국과 장로교회와의 접촉은 1870년대 만주에서 시작되었고 1876년에는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백홍준 등이 세례 받음으로 첫 장로교 신자가 된다. 곧 서상륜과 김청송이 세례를 받음으로 1883년에는 세례 받은 한국인 장로교 신자는 6명으로 증가된다. 이들의 협력으로 만주와 그 변방 지역에 한국인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만주에서의 첫 신앙공동체이자 첫 장로교회였다. 또 일본에서 이수정(李樹廷)은 장로교 선교사를 통해 개종하고 일본의 장로교 목사인 야스까와 토오루(安川亨, ?-1908),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녹스(George Knox)와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와의 접촉을 통해 성경 번역에 기여하게 된다. 이수정은 일본에 유학 온 한국학생들과 교포들에게 전도하여 1882년 말까지 20여명의 신자를 얻었고, 1884년 초에는 도쿄에 최초의 한국인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교파적으로 말하면 이는 장로교회였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장로교회의 조직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다. 1884년 9월 알렌의 입국에 이어 이듬해 언더우가가 입국함으로 한국에서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호주빅토리아장로교(1889), 미국남장로교(1893), 캐나다장로교회(1898)가 선교사를 파송하여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서 사역하였다. 이들은 합의에 따라 선교지를 분담하여 사역하던 중 입교자들이 증가하여 여러 곳에 교회가 설립되었다.3)
한국에서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기까지 몇 가지 과정을 밟아왔는데, 첫 조직은 1889년의 ‘연합공의회’였다. 이 회는 당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미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의체였다. 그러나 호주선교사 데이비스의 죽음으로 곧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미국남장로교가 한국선교에 동참하게 되자 1893년에는 ‘선교사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이것은 미국 남·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부 간의 협의체로서 전국교회를 치리하는 상회(上會) 역할을 했다. 1901년 9월에는 선교사와 한국인 대표가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교공의회’로 개칭되었다. 이때 회원은 선교사 25명, 한국인 장로 3명, 조사 6명이었고, 회장은 북장로교회의 스왈론(William Swallen)이었다. 이 장로교공의회는 영어사용위원회(English session)와 한국어사용위원회(Korean session)를 두었다. 장로교공의회는 1901년 중요한 결정을 했는데, 노회설립 방침 의정위원(議定委員) 및 장로교헌법번역위원을 선정하였고, 평양에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신학교 설립건은 마펫(S. Moffett)을 교장으로 위촉하고 그에게 신학교육을 일임했다.
한국 전역에 교회가 설립되자 호주와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즉각적인 노회 설립을 주장한바 있으나 미국남북장로교회는 한국인 목사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교사들만으로 노회 조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아 반대했다. 그러나 여러 지역에 신자수가 증가하고 다수의 교회가 설립되자 노회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1906년에 소집된 장로교공의회는 노회조직을 결의하여, 1907년 9월 17일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최초의 노회가 조직되었다. 이 노회가 ‘죠션야소교장로회 노회’인데, 이 노회를 보통 ‘독노회’(獨老會)라고 부른다. 회장은 마포삼열(S. H. Moffett, 1864-1939), 부노회장은 방기창(邦基昌, 1851-1911), 서기는 한석진(韓錫晋), 부서기는 송인서, 회개는 이길함(Graham Lee) 목사가 선임되었다. 회원은 한국인 장로 36명, 주한 장로교선교사 33명, 찬성회원 9명 등 도합 78명이었다. 찬성회원이란 당시 대한성서공회, 기독교서회, YMCA 등에 속해 있던 장로교 계통의 목사들을 의미했다. 노회의 조직과 함께 ‘12개 신조’를 신경(信經, Confession of the Faith)으로 채택했는데, 그 내용은 성경무오, 하나님의 주권,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 성례전, 불가항력적 은혜, 부활과 심판 등의 교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신경은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12개 신조’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소신앙문답서’(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도 교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이 노회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목사 7명(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서경조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을 배출했다. 당시 한국장로교회에는 785개 처의 교회, 75,968명의 신자, 18,061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또 목사선교사는 49명, 한국인 장로는 47명에 달했다.
제2회 독로회(1908) 당시 한국인 노회원은 59명, 선교사는 30명이었다. 제3회 독로회(1909)에는 한국인 회원 85명, 선교사 회원 33명이었는데, 이 해에는 다시 8명의 목사를 장립하였다. 제5회(1911) 독로회는 대구 남문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 독로회 휘하의 7대리회(代理會)를 노회로 승격시키고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11년 10월 15일 전주성밖교회에서 목사 20, 장로 25명이 모여 전라노회를, 그해 12월 4일 새문안교회에서는 목사 12, 장로 21명이 모여 경충(京忠)노회를 조직했다. 1912년 1월 6일 부산진교회에서는 목사18, 장로 18명이 모여 경상노회를, 1월 28일 평양신학교에서는 목사 28, 장로 96명이 모여 남평안노회를, 2월 15일 선천북교회에서는 목사 26, 장로 15명으로 북평안노회를, 2월 20일 원산 상리교회에서는 목사 14, 장로 16명이 모여 함경노회를 조직함으로서 7개 노회 조직이 완료되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 경창문(京昌門) 안에 있는 여성경학원(女聖經學院)에서는 7노회가 파송한 목사 96명(한국인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모여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였다. 이 총회를 ‘죠선야소교 장로회총회’(朝鮮耶蘇敎長老會總會)라고 불렸다. 이날 총회는 이눌서(W D Reynolds) 목사의 사회로 히브리서 10장을 본문으로 ‘장자회(長子會)’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성찬식을 거행함으로 개회되었다. 이튿날(9월 2일) 회의는 평양 서문밖의 신학교로 옮겨 속개하여 임원을 선출했다. 회장에는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방위량(William Blair), 부회계 김석창 씨가 각각 선임되었다. 이때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한국장로교는 하나의 총회로 남아 있었다.
총회가 조직될 당시 장로교회에는, 7개 노회, 134개처의 조직교회, 1,920개처의 미조직교회가 있었고, 한국인 목사 69명, 외국인(선교사)목사 77명, 장로는 225명에 달했다. 또 세례교인 53,008명, 학습교인 26,400명, 총신자수는 127,228명에 달했다. 치리회 조직에 있어서 장로교는 감리교 보다 훨씬 앞섰다. 감리교는 1930년에야 비로서 ‘조선감리교’란 이름으로 교단조직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3) 한국에서 기독교(장로교)를 받아드렸던 초기 개종자들은 일부의 개화 지향적인 엘리트 계층 외에는 하층민이 다수를 점했다. 한국의 천주교의 경우는 양반중심의 공동체로 출발하였으나 조상제사 금지와 신해박해(1791)를 거치면서 차츰 중인층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조광 교수에 의하면 1784년부터 1791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활동했던 권일신을 비롯한 12명의 지도층 인사 가운데 3분지2에 해당하는 이들이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91년부터 1801년 사이에 활동했던 38명의 지도층 인사들 중 중인계급이 21명으로 55%에 달했으나 양반은 9명으로 24%에 지나지 않았다(조광, “가톨리시즘과 한국문화와의 만남”『사목』107호). 양반중심의 구성이 점차 중인계급으로 이동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경우는 천주교와는 달리 기독교 신앙은 중산층과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점은 선교정책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장로교선교공의회’는 1893년에 모인 첫 회합에서 네비우스 정책에 기초한 10가지 선교정책을 채택했는데, 이 문서는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전수통로(transmission)에 대한 선교사들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은 제1항에서 명시하듯이 "상류층보다 하류층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모든 종교서적은 한글로 출판한다는 점이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도 양반층보다는 전도가 비교적 용이한 중,하층민에 우선권을 두었다[김인수,『한국기독교회의 역사』(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1998), 223]. 이것은 당시의 보편화된 유가적(儒家的) 가치 체계에서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 상류층보다는 중, 하층민이 보다 적극적인 수용자였는 사실은 막스 웨버(Max Weber, 1864-1920)에 의해 연구된 바 있다. 이 점은 한국에서도 동일했다.
2.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1920년대까지의 기간을 ‘초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까지의 한국 신학은 선교사들의 신학이었고, 선교사들이 신학교육과 연구와 집필 등 신학활동을 주도했다. 한국장로교회의 첫 신학교육기관인 평양신학교는 1901년 시작되지만 신학교육은 선교사들이 주도하였다. 첫 한국인 교수인 남궁혁南宮爀, 1882-1950) 박사가 교수로 취임한 때는 1927년이었다. 1928년에 이성휘(李聖輝, 1889-1950)가 교수로 참여했고,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은 1930년부터 교수로 참여하게 된다. 송창근, 김재준이 귀국했을 때는 1933년이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에 의한 구체적인 신학 논구는 1930년대부터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1920년대까지의 신학을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주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말한다.
평양신학교 교지 형식으로 발행되었던 『신학지남』은 1918년 창간되지만, 창간 때부터 1920년까지는 왕길지(Gelson Engel) 선교사가, 1921년부터 1927년까지는 배위량(W M Baird)선교사가 편집인으로 일했다. 한국인 남궁혁이 편집인으로 활동하게 된 때는 1928년이었다. 1930년 이전까지는 선교사들이 주된 집필진이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한국의 신학교육과 신학 논구를 주도하였으므로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이란 바로 선교사들의 신학을 의미했다.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은 ‘한국신학’(Korean theology)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신학’(Theology in Korea)이었을 뿐이다.
당시 평양신학교는 주한 네 장로교 선교부 연합으로 운영되지만 사실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가 신학교육을 주도하였다. 북장로교 선교사 중에서도 1924년 라부열(Stacy L. Robert)이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기 이전까지는 이길함(Graham Lee), 소안론(W L Swallen), 배위량(W B Baird), 곽안련(C A Clark) 등 메코믹신학교 출신들이 신학교육을 주도하였다.4) 해방 전까지 내한한 약 1,500여명의 선교사 가운데 약 70%가 미국 국적의 선교사들이었고,5)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 671명중 76%에 해당하는 513명이 미국 선교사들이었다.6) 이 점만 보더라도 미국장로교회가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에 큰 영향을 끼첬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초기 한국교회를 주도했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어떻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상이한 평가가 있어왔다.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에 대해, ‘보수주의 신학,’ ‘철저한 근본주의,’ ‘정통적 복음주의,’ 혹은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7)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전통은 “유럽의 칼빈주의와 영미의 청교도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신학”이라고 보아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평가했다.😎 비록 한국교회 초기 신학에 대해 근본주의, 정통주의, 경건주의, 청교도주의, 그리고 복음주의 등의 용어를 사용했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신학이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전에 내한하였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적이었고, 전통적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WCF)에 준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의 논평은 이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는 1911년 이전의 주한 선교사들의 신학은 청교도적인 보수주의 신학이었다고 평가했다.9) 이점은 1890년에 내한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1909년 첫 25년간(1884-1909)의 한국선교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10)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1934년 마포삼열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어떤 신 신학자들은 나를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다. … 근래에 신 신학이니, 신 복음이니 하는 말을 하며 다니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러한 인물을 삼가야 한다.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 한국에서 활동했던 특출한 선교사였던 마포삼열의 이 두 가지 진술은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이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적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동시에 193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는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신복윤는 “1885년 미북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내한 이래 1938년까지의 한국교회는 매우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고 평했지만, 당시 선교사들의 신학을 ‘강한 개혁주의적 입장’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1930년대 이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실제로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재학 중에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라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가 재학한 기간이 1930년대였음을 고려해 볼 때 1920년대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에서 ‘칼빈신학’이 처음 논구된 것은 1934년 남궁혁, 이눌서에 의해서였고, ‘칼빈주의’에 관한 논설이 처음 게재된 때는 1937년 함일돈(Froyd Hamilton)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함일돈은 이 글에서 칼빈주의라는 신학체계의 초보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11) 박형룡 박사가 로라인 뵈트너(L. Boethner)의 Reformed View of Predestination을 『칼빈주의 예정론』이란 제목으로 역간한 때는 1937년이었다. 이 책이 칼빈주의 신학에 관한 최초의 번역서였다.12) 비록 박형룡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 말하면서 “웨스트민스터표준에 구현된 영미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13) 이것은 1976년의 진술로서 후대의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을 헤아려 볼 수 있는 단서는 1907년 독노회 조직 때 채택된 교리 표준이다. 독노회는 ‘12개 신조’를 채택했는데, 이 신조는 영국의 장로교회가 작성한 것으로 1904년 인도장로교회가 채택했던 동일한 신조를 단지 서문만 고쳐 그대로 채택했다. 이 신조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유일신 하나님과 그 성품,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 인간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성령의 역사, 선택과 수양, 성례, 신자의 의무, 최후 심판 등 12가지 기본교리가 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제정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동일한 고백을 갖게 함으로서 피선교국의 장로교회 간의 복음주의적 연대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들이 개혁주의나 개혁주의적인 장로교 전통을 세우고자 했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집했을 것이다. 미국장로교회는 불과 4년 전인 1903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 채택했으나 이 고백서를 한국장로교회에 소개하지 않았다. 단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설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이라고 했을 뿐 교회의 공고백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 때에는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서가 한국어로 번역도 되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이 진술마저도 선언적 의미만 지닌다.
백낙준은 12개 신조가 “철저한 칼빈주의적 경향(strong calvinistic trend)을 지닌 것”이라고 했다.14) 간하배(Harvie Conn)는 이를 평가 없이 인용하고 있으나,15) 12개 신조는 칼빈주의적 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칼빈주의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12개 신조는 단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12개 신조는 개혁신앙의 특색도 없지 않으나 근본주의와 정통주의, 보수주의와 복음주의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12개 신조가 기본교리를 말하는 단문으로 되어 있어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김영재의 지적처럼 사실은 개혁주의적 내용이 희석화 되어 있다.16) 이 12개 신조에는 칼빈주의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만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던 이중예정에 관한 고백이 없고17) 무엇보다도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문화적 소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12개 신조는 ‘철저한 칼빈주의적’ 고백으로 규정할 수 없고 자유주의가 아닌 한 수용할 수 있는 기본교리를 표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초기 한국교회 신학전통을 ‘개혁주의’로 간주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간하배가 말한 바처럼 한국에 소개된 초기 장로교회의 신학을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기독교”18) 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이점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1905년 교파교회를 고집하지 않고 연합하여 하나의 교회, 곧 ‘조선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하자고 합의했던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즉 장로교 선교사들은 한국장로교가 반드시 엄격한 개혁주의 신학을 견지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초기 선교사들의 보수적인 신학을 보다 극단적으로 수용하여 근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양선에 의하면 길선주(1869-1935)는 선교사들 보다 더 극단적인 보수주의였다고 지적했다.19) 극단적인 보수지향적 신앙이해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데는 철저했으나 개혁주의 전통과는 다른 근본주의나, 경건주의, 혹은 세대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었다. 이런 신학이 성경의 권위, 축자영감설을 지지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그 결과 세상과 문화에 대해 분리주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근본주의적이고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그 이후 시대에도 동일했다.
세대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종말론인데, 한국 장로교회 지도자들은 대체적으로 전천년설을 신봉했다. 일제하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독특한 현실에서 전천년설(前千年說)을 받아드린 것으로 보인다. 이 전천년설은 상당한 정도로 세대주의 신학으로 채색된 것이었다.20)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되어 개혁주의 신학전통에서 다수 의견이었고, 바빙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화란 개혁신학자들도 무천년설을 지지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나 칼빈신학교 교수들 사이에도 무천년설이 지배적이지만, 박형룡이나 박윤선까지도 전천년설을 따랐다.21)
한국장로교회에 스며든 세대주의적 경향성을 지적한 인물은 간하배, 한부선(Bruce F. Hunt), 신복윤, 김영재 등인데, 간하배는 “서구로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온건한 형태의 세대주의가 유입되었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세대주의는 초기형태의 세대주의였다.22)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과 단순한 성경해석법이었다.23) 그 결과 모든 예언적 약속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문자적 성취라는 세대주의적 원리가 개혁주의적 이해가 결여된 초기 한국교회에 쉬 수용될 수 있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은 세대주의 신학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복윤는 한국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세대주의가 곧 역사적 장로교인 것처럼 혼동하고, 세대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24)고 지적했다. 이렇게 볼 때 초기 한국교회의 신학은 개혁주의적인 특징이 있지만 보수주의 신학 혹은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적 신학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3. 1930년대의 상황과 진보적 신학의 대두
1930년대 한국장로교회에는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한국인들에 대한 신학논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감리교의 경우는 이보다 앞서지만 1930년대부터 한국인의 신학 활동이 구체화 되었고, 연구와 집필, 신학교육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주체적 신학연구의 시작이자 선교사 중심의 신학으로부터의 독립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동식은 1930년대(1929-1939)를 ‘한국신학의 정초기’라고 불렀다.25) 한국인에 의한 신학 연구와 저술의 첫 결실은 1929년에 출판된 백낙준의 『한국개신교사』(The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였다. 박형룡의 『기독교 근대 신학난제선평』이 출판된 때는 1935년이었다. 감리교의 경우, 정경옥의 『기독교신학개론』이 출판된 때는 4년 뒤인 1939년이었다. 1930년대 장로교의 남궁혁, 이성휘, 백낙준, 박형룡,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등이 1930년대 신학자로 활동하게 된다.
두 번째 변화는 이전의 신학과는 다른 새로운 신학운동, 곧 ‘다른 전통’이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보수주의 신학이 한국교회 신학의 주류를 형성하지만 1930년대부터 보수주의 아성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1930년을 전후하여 한국교회에는 어떤 신학적 변화가 있었는가? 이 변화는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째는 진보적 신학의 대두였다. 신비주의 운동과 일본 무교회사상의 유입 또한 이 시대의 신학적 변화였다.
신비주의 운동은 1920년대의 경제적 시련과 일제의 정치적 압제 하에서 현실을 초극하려는 탈 역사적 신앙의 내면화 현상이 빚은 결과였다. 역사 현실이 암담하면 암담할수록 현실 도피적 주관주의나 신비주의가 창궐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1930년대 한국교회에는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신비적 열광주의, 거짓 계시운동(僞經運動)이 일어났다. 신비주의적 종파운동이나 위경운동의 대두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미성숙을 반영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양기독교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주관적 신령주의의 폐해를 성찰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이 부족했다. 이것이 입신, 접신, 예언, 분별없는 방언 등 신령주의적으로 나타났다.
4) 박용규,『한국기독교회사,1』(생명의 말씀사, 2004), 471.
5) 김승태, 박혜진 편, 『내한 선교사 총람』(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참고,
6) Sang Gyoo Lee, To Korea with Lov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Work in Korea, 1889-1941 (Th. D. Dissertation, Australian College of Theology, 1996), 325.
7) 박아론는 한국교회 신학적 전통을 ‘보수주의’(『신학지남』, 1976년 가을호, 권두언),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보수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85, 195)이라고 불렀다. ‘청교도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란 “좌로는 성경영감을 부인하는 인본주의적 자유주의에 치우치지 않고, 우로는 방언, 신유, 묵시, 예언 등을 일삼는 기도원적 은사주의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생활의 경건이라는 두 바퀴를 가지고 성경 66권의 궤도를 굴러가는 신학”이라고 정의했다.
8)신복윤, “한국개혁주의 신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신학정론』 제10권 1호(1992. 3), 115.
9) A. J. Brown, The Mastery of the Far East (Scribners, 1919), 540. 아더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개국 이후 첫 25년간 내한한 선교사는 전형적인 푸리탄형의 선교사였다. 이들은 1세기전 그들의 조상들이 뉴 잉글랜드에서처럼 안식일을 지켰으며 땐스, 술이나 담배, 그리고 카드놀이에 기독교 신자들이 빠져서는 안 될 죄라고 보았다. 신학과 성경 비평에 대해서는 그들은 철저히 보수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전천년설을 아주 중요한 진리로 생각했다.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은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했다. 미국과 대영제국의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에 있어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평화롭게 공존하고 협력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현대적 견해’(the modern view)를 가진 소수의 인사들은 험난한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장로교선교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Harvie M.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29, No. 1 (November, 1966), 26-27에서 중인.
10) Harvie M. Conn, 27.
11) 함일돈, “칼빈주의,” 『신학지남』19권 4집, 5집(1937), 19-23 참고.
12) 이상규, 『한국에서의 칼빈연구』(개혁주의신행협회, 1985), 18.
13) 박형룡,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제4권 3집 (1976, 가을), 11.
14) 백낙준, 『한국개신교사』(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409.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Yonsei University Press, 1980), 389.
15) Harvie M. Conn, 31.
16) 김영재, 『교회와 신앙고백』, 209-211.
17) 김영재, 『한국교회사』(개혁주의신행협회, 1993), 148.
18) Harvie M. Conn, 26, 31. 이 점에 대해서는 김영재, 김명혁도 의견을 같이 한다. 김영재, 142.
19)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 176-177.
20) 김영재, 『한국교회사』, 153.
21) 박형룡, 『박형룡저작전집』, VII, 278. 차영배는 박형룡과 박윤선이 미국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무천년설이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전천년설을 주장한 것은 한국적 단순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맹목적인 추종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차영배,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신학과 한국신학,” 『개혁신학, 한국교회, 한국신학』(도서출판 대학촌, 1991), 75.
22) H. Conn, 51-52.
23) H. Conn, 52.
24) 신복윤, 1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