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들의 피땀이 서린 익산 소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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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단의 교회가 2015년 통계로 약 8,843개 278만여 명의 교인이 있는 것으로 보고 되었다. 그중에 전북과 전남에는 특히 우리교단 교회들이 많다. 그 많은 교회들은 나름대로 사연들을 갖고 있다. 그중 아주 특이한 사연을 담은 한 교회를 소개한다. 익산시 호남고속도로 전북 쪽의 전형전인 농촌 마을에 몇 개의 큰 교회들이 서 있는 데 인근에는 오늘 주인공인 소생교회로 부터 분립된 합동측 등 몇 개의 교회가 있다.
익산과 전북 삼례 주변의 농촌임에도 지금은 어디서도 보기 어렵게 잘 지어진 교회당들을 보게 된다. 교회를 찾아가면서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디에서 교회에 나올까 많은 궁금함을 가지고 한 교회당으로 들어섰다. 오후 예배를 준비하며 기다리던 교인들은 거의가 노인들이었다. 그리고 몇몇은 한센병흔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건강한 이들이 더 많지만 이 교회의 초기와 전성기에는 한센병을 갖은 교우들의 피땀어린 생의 도전과 하나님 사랑, 교회사랑이 있었다.
현재 전북 익산시 왕궁면 상동길 15-10 에 자리한 소생교회는 보는 누구를 막론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런 곳에 이렇게 크게 잘지어진 교회당이 있다는 것 때문이다. 이 교회는 과거 음성 한센병 환자들의 집촌으로 그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지고 역사를 이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시무중인 염택용 목사는 2016년 3월 15일 부임했다. 엄 목사는 일본 동북대학에서 식품영향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한일장신대에서 교수로 봉직한 바 있다. 그후 한일장신에서 신대원을 마치고 무주 등에서 목회를 하다가 청빙을 받게 된다. 선생님같은 따뜻한 미소와 사랑이 넘치는 목회자로 보였다.
익산지역 자체가 원불교의 메카로 이름이 나 있지만 기독교 복음화율도 높고 농촌마을에 지어진 교회당이라고 하기에는 놀라운 교회들이 줄비하다. 김수진 목사가 시무한바 있는 익산 황등교회나 전 총회장이신 안경운 목사(이리신광교회) 는 시내라고 쳐도 그외 웅포교회(박재용 목사) 와 왕궁교회등이 유명하다. 그런 가운데 매우 특별한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 바로 소생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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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줄에 이 교회 장로들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 ||
동네 이름과는 상관이 없는 이 교회의 이름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영혼들인 나병환자들의 신앙공동체에서 출발했다. 우리나라의 나병환자 국립수용소는 일제시대에 지정된 전남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섬의 모습이 사슴과 닮았다하여 지은 이름)로 당시부터 상당 기간 강제 수용을 하여 왔다. 일본인 원장 하에서의 소록도 건설과 5.16 군사정변 후 군 출신의 원장의 오마도 간척사업이나 이후 신형식 원장 등 소록도에는 많은 전설들이 남아 있다.
소록도에서 거주하는 이들을 양성 환자라고 하였고 건강 진단을 받은 이들이 외지에 나와 정착한 곳을 음성나환자 정착촌이라고 불었다. 1960년 이후 전국에는 이런 애환을 가진 공동체가 많이 늘어났다. 대표적인 곳은 일제 시대부터 있었던 여수의 애양원이고 대구의 애락원, 청주의 청애원, 경주, 양주의 천성농원, 성남시의 헌인농원, 평촌에도 농원이 있었다.
국가나 지자체는 이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사는 것을 허락했지만 별다른 복지혜택을 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구걸을 하며 연명을 하게 된다. 그후 이들은 양계와 양돈을 하게 되고 자립기반을 다지고 생활 기반을 세운다. 그후 사료사업 한성협동회 등을 조직하여 기업활동을 하는 한편 농장 별로 큰 돈을 벌고 가구공장 등 임대로 큰 소득을 얻게 된다. 이에 이들이 세운 교회들도 성장하여 교회당을 크고 아름답게 짓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소생교회도 크게 부흥을 하고 대지를 넓히고 큰 교회당을 건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천형의 모습들로 인하여 격리되고 심한 자괴감과 소외 가운데,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절망을 안고 산다. 이런 사회적 죽임과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려는 꿈을 꾸는 의미로 ‘소생'(蘇生, 다시 산다)이라고 교회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한센병은 오래된 질병으로, 역사 문헌에도 등장한다. 성서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기원전 400년 경부터 유럽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당시에 페르시아군이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한센병 역시 동반되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2세기에 들어서자, 서부 유럽에서 한센병은 전염병으로 간주될 정도의 수준에 달했다. 특히 1223년에 포르투갈의 알폰소 2세와 1329년에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1세의 목숨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또 유럽의 탐험가들과 이민자들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에도 한센병이 확산되었다.
한센병 박테리아를 최초로 발견한 이는 1874년 노르웨이의 의사 한센(Armauer Gerhard Henrik Hansen, 1841~1912)이다. 때문에 이 병은 ‘한센병’이라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 한센병에 감염된 환자는 전 세계적으로 500만 명에 달한다. 특히 아프리카 및 중남미와 인도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의 풍토병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센균은 온도가 따뜻한 곳에서 발병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추운 지방에서는 한센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환자들은 하와이 옆 몰로카이라는 섬에 격리 수용한 바 있다. 1950년대 중반 이래, 테레사 수녀와 같은 성직자들이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이들을 위한 이주지를 마련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센병은 수천 년 동안 인간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나병을 의미하는 서양 표현들은 "비늘"이라는 뜻의 라틴어 낱말 "레프라"(lepra)를 그 어원으로 삼고 있다. 동양의 ‘나병’의 ‘나(癩)’라는 표현 역시 두꺼비를 ‘나흘마(癩疙痲)’라고도 부른 데서 보듯 이와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인도, 중국, 아프리카등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환자들이 사회 일반에서 격리, 소외되어 살아가는 나환자촌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센병의 전염성이 강력하지 않음이 밝혀지고 나서 이러한 격리현상은 줄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한센병을 문둥병, 한센인을 문둥이(leper)라고 좋지 않게 이르는 일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그러한 표현은 환자의 인격에 대한 침해로 간주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나환자라는 표현도 공격적이라고 생각하고 “한센병 감염자, 나병 감염자(persons affected with leprosy)”라는 표현을 선호하기도 한다. 1954년부터 환자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기 위해 매년 1월 마지막 일요일을 세계 나병의 날로 지정하여 알리고 있다.
이 교회의 시작은 1948년 8월 12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3일전에 한 농촌마을에서 천막으로 시작한 완주군 중인리에서 蘇春(소춘)교회로 초대 교역자는 강인선 전도사였다. 그리고 이 교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역사가 시작되는 데 1949년 여수 애양원교회(음성 나환자 정착촌)에서 이종만 장로가 파견되어 정착하고 교역자로 봉사한다. 그리고 1대 당회장에 당시 전주 서문교회에 시무하던 김세열 목사가 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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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조요섭 목사가 2대 당회장이 된다. 이후 1949년 12월 1일 익산군 왕궁면 구덕리 산 27번지로 이전하고 교회명을 蘇生교회로 개명하고 건평 27평의 예배당을 학교 교사와 겸하여 사용하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잠시 예배는 중단되었으니 그해 가을 전북노회에 가입하고 52년, 53년 여전도회와 청년회를 창립한다.
그리고1953년 국립나병원 소록도에서 장로 4인과 안수집사 4인 서리집사 1인과 세계교인 4인이 총 26인이 그 가족과 함께 이주를 해온 다(당시 소록도 병원 소요사건으로 인한 교회탄압으로 1차 강송으로 기록되어 있다. 1955년 10월 초대 김영길 장로를 장립한다. 1957년 전북노회에서 군산노회로 이전한다. 그리고 1960년 통합과 합동교단의 분열시 시골교회지만 선견지명을 갖은 소생교회는 어느 편에도 가담치 않기 위하여 노회에 행정보류 선언을 하여 중립을 유지한다.
그리고 1961년 소록도에서 장로 12인 안수집사 3인 서리집사 13인이 총 28명이 가족과 함께 이주한다(5.16 군사혁명으로 교회탄압으로 여겨짐) 1973년 11월 4일 마침내 본 교단 전북노회에 가입을 결의하고 공동의회에서 정인권 목사를 위임청빙한다. 그리고 1974년 목사 1인 장로 2인 안수집사 3인 서리집사 남 22명 여 13명 교인 남 119인 여 140인으로 보고한다. 1974년 교회 대지 1,200평을 헌납 받는다.
1998년 고석금 목사가 부임하여 2016년 2월에 사임한다. 고석금 목사는 12대로 교역자로 역대 교역자 중 가장 오랜 시간인 18년 간 시무한 분이며 사임 직전인 2015년 현 교회당(3층)을 건축한다. 역대 교역자로는 3대 한순창, 김영규, 이춘봉, 이창일, 장명순, 이춘봉, 정인권, 온양원, 류춘환 목사가 시무했다.
한때 500명까지 출석하던 소생교회는 현재 주일 낮 240여 명이 출석을 한다. 구역은 31개로 인근 여러 마을에 산재해 있지만 익산시와 삼례 쪽까지는 전도 구역으로 삼지 않는 것 같다. 현재 교육목사는 이상민, 신경화, 성금란 3인이다. 또 장로는 원로장로 황인선, 은퇴장로 김종선, 장병식, 김재현, 박성기, 오두영이다. 시무장로는 송갑식, 조은기, 정길수, 박삼길, 박정수, 송문식, 최종철, 송순모, 양금선, 박종우, 협동장로, 박형본 등 총 17인이다.
이들은 모두 ‘나병환자’라는 사회적 멸시와 모멸감을 딛고 신앙안에서 승리한 증인들로 보인다. 많은 교회가 있고 나름대로 사연들과 역사들을 갖고 있지만 많지 않은 나병환자 정착촌 교회들 가운데 그리고 전북지역에서는 건강한 이들이 세운 교회 못지 않게 큰 역사를 보여준 교회로 보인다,
한센병은 더 이상 발병하지 않게 되어 지금 환자 출신들은 고령자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당회원이나 항존직분자 그리고 교회의 열심있는 어른들 가운데 여전히 한센병흔을 갖은 분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농촌 마을의 교회지만 소생교회의 성가대는 그야말로 어디서도 들어보기 힘든 힘있는 성가와 열정을 보여준다. 지휘자는 오현희 씨는 염 목사의 사모인데 음악을 전공했는지는 모르나 평범한 농촌교인들을 수준있는 성가대원으로 훈련을 시켰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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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가대를 지휘하는 오현희 사모 | ||
지난 2월 26일 오후 예배에 설교한 허춘중 선교사는 소생교회의 성가대를 태국으로 초청하여 공연을 하게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특히 이 교회 청년회 출신인 정길수 장로는 1985년 본 교단 장로교 청년 연합회 전국회장을 한 것도 역사에 남는 일이다.
이 교회의 요람에 보면 특이한 것을 볼 수 있는 데 장로교회의 원래 역사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제직( 장로, 권사, 집사)의 수칙> 중 10번째 인데 “상회(노회, 총회)를 존중히 여기고 적극 협력한다” 는 대목은 어느 교회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장로교 공교회의 유산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 일부교회들이 장로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인 "상회에 대한 존중" 을 무시하는 경향을 많이 보여서 그런지 돋보이는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