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교회 연대 성명서

                2025년 재일대한기독교회・일본기독교단 평화 메시지 

재일대한기독교회(KCCJ)는 선교적 과제를 함께 지고가고 있는 일본기독교단(UCCJ)과 합의하여 매년 평화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이에 2025년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장 양영우(梁栄友)와 일본기독교단 총회의장 쿠모시카리 도시미(雲然俊美)간의 합의한 내용이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한복음20:19-20)

자신이 속한 국가를 대표(represent)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훼손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을 받은 자로서, 작아지고 깊은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시 재현(re-present)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일본의 어느 문인이 “위기는 단층(単層)이 아니다”고 말한 것처럼, 기독교계도 ‘혼돈’의 상황 속에 살고 있다는 인식 아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는 십자가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 즉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없었던 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이슈를 목록(Catalog)처럼 정리하는 것에서 최대한 벗어나 위기의 여러 양상/여러 층위에 내재된 질문을 함께 짚어보고자 합니다.

●해방 80주년에 대하여
1945년 8월 15일로부터 80년을 맞이하여, 이 날의 명칭이 <패전/종전/광복>으로 다르게 표현되는 것의 의미를, 그리고 그 차이가 도대체 무엇에 의해 초래된 것인지 되새겨 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누구의 아픔을 받아들였는가?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국가를 넘어 제국주의/식민지 지배와 전쟁이라는 폭력을 이끌었던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과 아픔을 겪었던 모든 존재의 고통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깊이 돌아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일조약 60주년에 대하여

60년 전 두 국가 사이에 체결된 조약의 의미를 함께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라는 단어를 기피하고 <경제지원>이라는 명분을 고집했고, 한국은 <경제우선주의>의 필요에 의해 결국 모호한 타협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일본은 역사 수정의 동력을 얻었고, 한국은 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분열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의 의미를, 그리고 ‘보상’이 아닌 ‘경제적 지원’이라는 표현에 집착함으로써 깊은 상처를 입은 개인의 아픔이 묻혀져버리는 길을 만든 것의 의미를 함께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그 근원에는 한반도의 북쪽을 무시하고 <조선적(朝鮮籍)>으로 남겨진 존재에 대해서는 ‘삶아서 먹든 구워서 먹든 자유’라는 국가의 의지가 깔려 있었다는 점, 그리고 ‘韓日’ 양측 모두가 이에 대한 깊은 회개가 부재했다는 점을 함께 기억하고 싶습니다.

●이 땅과 그의 땅에 쌓인 전쟁에 대하여
“편히 잠드소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새겨진 히로시마(広島)의 원폭 위령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일으킨 학살을 사과하기 위해 제주도 성 프란치스코 센터에 세워진 피에타 동상. 자신을 꿰뚫어 보는 이 두 비석이 가리키는 마음의 깊이를 지금 이 순간, 함께 가슴에 새길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한국전쟁(6.25전쟁)을 이 땅의 경제발전의 계기로 <特需 특별한 수요>로 인식해 온 것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량학살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가 상상력을 되찾고 ‘세상에는 나와는 다른 아픔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협오(Hate)에 대하여
在日코리안을 향한 혐오발언(Hate Speech)과 증오범죄(Hate Crimes), 그리고 쿠르드족을 향한 가장 과격한 적대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적대감을 부추기는 국회의원들의 담론이 쏟아져 나오는 위기를 우리 모두 함께 위기라고 분명히 인식했으면 합니다.

합당한 법적 조치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함과 동시에, <함께 사는 것>과 <누군가를 배척하는 것>의 갈림길은 왜 생겼는지, <함께 사는>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어떻게 정돈되어야 하는지, 기도하면서 함께 모색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길은 지금도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고통과 원전 사고에 의한 상처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후쿠시마 사람들의 아픔을 <찢어지는 심정>으로 공감하고 <심히 불쌍히 여기신>(마태복음 9:36)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결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빈곤과 격차, 만연한 불평등 속에서
치솟는 물가, 줄어드는 월급, 취업 빙하기를 살아온 사람들의 억눌린 삶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밝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나도 불쌍한 사람입니다.”고 중얼거리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만연하고 있는 <자기 책임>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어느새 내면화하여 <함께 사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SNS 상에서 펼쳐지는 허울뿐인 기호(記号)와 같은 <말>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적대감으로 불안을 채우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길은 그런 <말>이 가져다주는 불안의 가짜 <해소 解消>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발을 씻기시는 장면(요한복음13장)을 함께 떠올리고 싶습니다.
삶에서 가장 더러운 부위인 발을 씻는다는 것, 그것은 더러운 부위를 지적하고 비난하며 분열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부위를 서로 씻어줌으로써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고 회개를 잊어버리는 몸짓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몸을 정비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韓日>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짊어지고/짊어졌으면서도, 또한 우리가 짊어져야 할 회개의 망각이라는 책임을 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에 합당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새롭게, 함께 엮어 나가고자 합니다.                                   

                                         202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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