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의 아버지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스가 10월 22일 96세로 선종하셨다 해방신학에 대해서는 해방신학 전문가 홍인식 목사가 쓴 『홍인식 목사가 쉽게 쓴 해방신학 이야기』(신앙과 지성사, 2016)를 참조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운명이 아니라 조건일 뿐이다, 그것은 불운이 아니라 불의이다”
1970년대 이후 세계 신학계의 화제가 되었던 ‘해방신학’解放神學·‘Teología de la Liberación: Perspectivas, Liberation Theology은 중남미에서 시작되었다. 해방신학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분은 가톨릭의 도미니크회 신부이자 신학자였던 구스타보 구티에레즈(1928년~2024)다. 그 이전에 ‘해방신학’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를 본격적으로, 일관되게 이론적으로 다룬 학자이다.
그의 해방신학 제창 이후‘해방’이라는 말은 서구와 제3세계 신학를 휩쓴 키워드 중 하나였다. 이를 기점으로 흑인신학, 여성신학, 한국의 민중신학도 직전접적으로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일부는 민중신학이 해방신학에서 파생된 신학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모든 신학자들은 그의 출생이나 성장과정 그리고 학문적 여정과 관계가 깊다. 구티에레즈는 1928년 6월 8일 페루 리마의 케추아 족 혼혈로 태어났다. 12세-18세까지 골수염으로 휠체어 신세를 졌는 데 그때 리마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이후 페루에서 의학과 인문학을 공부하고, 한편으로는‘가톨릭행동’Catholic Action 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이런 활동을 통해 처음으로 신학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고, 자기의 조국이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신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는“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더 많이 알고 더 잘 알아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나누어줄 수 없다’는 유명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이었다”고 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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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테에레즈의 학문여정
유럽으로 건너가 벨기에에 있는 루뱅 대학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기타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리용에 있는 가톨릭 대학 사목 종교학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9년 31세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동안 에드워드 쉴레벡스, 칼 라너, 한스 큉 등 1960년대 초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관련된 가톨릭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유르겐 몰트만, 디트리히 본회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등 개신교 신학자들의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구티에레즈는 이런 신학자들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유럽 신학을 모방하는 모조 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보고 라틴아메리카 토양에서 자라나는 토착 신학, 탈식민지 신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유럽 신학은 철학을 기본으로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감안할 때 해방신학은 사회과학적 분석, 특히 비정통적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과학에서 논의하는‘종속이론’을 기본으로 하였다.
유럽에서 돌아온 구티에레즈는 페루에 있는 교황청 소속 가톨릭 대학교 신학 교수, 미국 노트르담 대학교 신학 교수로 있었고, 기타 북미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초빙교수로 가르쳤다. 그의 해방신학 개념은 1964년 브라질의 페트로폴리스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사목 활동에 관한 회의 때 처음 발표되었다. 그는 신도들의 눈을 내세로만 향하게 하는 과거의 구원관을 비판하고 중남미의 참혹한 현실에 알맞은 새로운 신학을 제창했는데, 그것이 바로 해방신학의 태동을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그는 신학이 현실 사회의 문제에서 유리된 공리공론일 수 없다고했다. 성서를 읽고 해석하더라도 사회의 쟁점을 염두에 두고 이런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올바른 교리’orthodoxy가 아니라‘올바른 실천’orthopraxis이 더 중요하다고 이해한 것이다. ‘해방’이 신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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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단 해방신학자 홍인식 목사
처음 그의 사상을 발표했을 때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1972년에 출판된 그의 책 ‘해방신학’ 역사와 정치와 구원』은 신학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1973년에 영어로 번역되었고, 1977년에는 한국어판(성염 옮김)이 나왔다. 우리교단 홍인식목사는 어려서 남미 이민후 아르헨티나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 책방에서 만난 해방신학을 통하여 그의 신앙과 인생의 여정을 결정했다고 간증한 바 있다. 이후 호세 미구에서 보니노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은 목사로써는 유일한 해방신학자다.
해방신학(解放神學/Liberation theology)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와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에서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메데인 회의/1968년) 에서 남미 대륙에서 시작된 진보적인 가톨릭 신학운동이다. 모인 이들은 민중(民衆)이 지주(地主)들과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착취와 억압을 받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신학이론을 펴게 된다. 이 운동은 우리처럼 젊은 목회자들인 민중교회가 아닌 주로 주교들(브라질의 레시페 주교 돔헬더 카메라등)도 동참하는 등 중남미 성직자들의 주류가 참여했다.
이 신학 운동은 신정통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생태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과 더불어 상황신학이다. 또 다른 해방신학자들로는 브라질의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와 혼 소브리노, 세군도등이 있다. 이들은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적 계시와 구조로 경직된 성서 해석보다는 가난한 자들의 경제적 억압을 분석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도구로 신학적 이해를 높혔다.
이외에도 해방신학자라고 표방하는 이는 대학에 있지 않치만 번역가로 가장 열정적으로 예수와 관련된 책자를 펴내는 연세대 출신 카토릭 신학자로 쿠텐베르크에서 공부하고 남미에서 해방신학자가 된 제주도의 김근수교수와 남미의 브라질의 감리교 소속 성정모교수가 있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와 비슷한 환경에 처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호응이 컸다. 일부 극단적인 경우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혁명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확대되고, 실제로 쿠바혁명에 참가한 신부나 콜롬비아의 반정부 게릴라전에 참여한 토레스 신부(루팽대학 동기) 까지 생길 정도였다.
구티에레즈는 국제적인 학술지《콘실리움》Concilium의 이사로 있으면서 계속 기고했다. 그 외 많은 저술로 자기의 사상을 발전시켜나갔다. 페루 언어 학술원의 회원이고, 1993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신을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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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가난과 영적 가난
구티에레즈의 핵심 사상은, 위에서도 언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내세의 구원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억압받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그들의 아픔에서 해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 페루의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살았다. 이런 생활을 통해 자기가 보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세계”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해방신학은 일주일 중 엿새를“가난하고 억압받고 비참한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경험에서 생긴 것이다.
“나는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이 가난에 허덕이고, 그 사람들 중 82퍼센트가 극빈 상태인 그런 대륙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며 자기의 신학적 동기와 입장을 천명하였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가난’을 분석하고 성경에서는 가난을 두 가지로 나눈다고 보았다. 첫째는 불공평한 사회구조에서 파생되는 경제적 가난이고 둘째는 하느님을 사모하는 영적 가난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첫째는 빵에 대한 배고픔이고 둘째는 신에 대한 배고픔인 셈이다. 첫째 가난은 하느님도 싫어하는 가난이요, 둘째 가난은 가치 있는 가난이라 보았다. 그러나 구티에레즈는 이 두 가지 가난이 라틴아메리카 그리스도 신도의 경우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병존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빵에 대한 배고픔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배고픔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셈인가? 아무튼 그는 외친다. “하느님에 대한 배고픔은 그대로 남고, 빵에 대한 배고픔은 사라지기를 바란다. 하느님에 대한 배고픔은 Yes! 빵에 대한 배고픔은 No!”
구티에레즈의 분석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에 대한 자존감이 결여되고 스스로가 하느님의 아들딸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이미 초대교회에도 있었던 문제로서, 야고보도 가난한 신도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하고,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빈부 격차에 따른 불공평성을 나무란 적이 있었다. 따라서 구티에레즈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가난한 자들의 존엄성을 저해하거나 스스로그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충고한다.
특히 해방신학이 이런 초대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점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만연된 가난은 직접적으로 불의와 죄악으로 변질된 사회구조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는 점이다. 구티에레즈에 의하면“가난은 운명이 아니라 조건일 뿐이다. 그것은 불운이 아니라 불의이다. 그것은 사회구조와 지적, 문화적 범주의 결과이다. 그것은 사회가 형성되는 방법과 그 방법이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는 것과 직결된”것이다.
구티에레즈는 가난이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고 보았다. “살아가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믿고, 바라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삶을 위해 몸부림치는 방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난이 삶 전체에 관계되며,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경제·정치·사회적 예속에 의한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구티에레즈는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이 처해 있는 가난한 현실은 하느님의 역사적 목표에 역행하는 것으로 사회적 죄악이라 보았다. 하느님은 어디까지나“가난한 자의 편”이라고 했다. 가난한 자들은“가난한 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사회에서 새롭게 된 인간은 연대성과 창의성을 지닌 인간으로, 자본주의 정신에 찌든 인간들과 반대된다.
처음 교황청은 해방신학을 의심의 눈으로 관찰했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교회:카리스마와 권력』이란 책으로 권력화된 교회를 비판하여 1984년 교황청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현재 보프 신부는 신부복을 벗고 평신도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교황청은 1986년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된 그 당시 라칭거 추기경에게 해방신학에 대해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조사 결과「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에서“정의를 추구하고 정의에 관해 말하는 것은 분명 교회의 권한”이라고 지적하는 한편, 조직적 폭력, 계급투쟁 이론, 혁명에 의한 개혁론은 단호히 배격한다고 경고했다.
신학자에 따라서는 이제 해방신학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가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해방신학의 사회과학적 분석이 아직도 유효하고 민중의 의식이 전보다 깨었다는 이유로 해방신학은 적어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불평등과 불의와 억압과 식민지주의에서 초래된 가난에서의 해방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출발점이자 핵심으로 삼은 구티에레즈. 우리는 그에게서 해방의 중요성을 배운다. 물론 해방 중에는 인간의 탐욕과 미움과 어리석음으로부터의 해방, 나의 이기적 자아로부터의 해방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