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운동의 르네상스와 에큐메니칼운동적 의미

                                협동조합운동의 르네상스와 에큐메니칼운동적 의미

 김영철목사(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부원장)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던 신자유주의 체제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으로 인한 1대99의 사회를 만들어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이로 인한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자연환경의 역습을 초래해 더 이상 지속가능한 체제가 아님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식량 에너지 기후변화 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이제 경제민주화와 복지, 협동과 연대, 순환과 공생은 시대적 요구가 되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협동조합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와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경제주체로서 그 효용성을 주목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협동조합들이 경제위기 속에서도 물가상승을 완화하며 안정되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튼튼한 지역경제유지와 복지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은 투자이익보다 편익 제공과 직접적인 고용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전 세계 다국적 기업이 만든 일자리보다 120%나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유럽의 재정위기 속에서도 유럽연합 25만개 협동조합이 540만 개 일자를 만듦으로서 충분히 스스로의 생명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본주의의 취약점과 한계를 보완하고 극복하는 협동조합의 잠재력과 가능성, 새로운 사회경제발전의 추동력으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UN은 2009년 12월 18일 “사회발전에 있어서의 협동조합”이라는 총회결의문을 채택하고 2012년을 ‘세계협동조합의 해’로 선포하여 전 세계 회원국들에게 협동조합 발전을 위한 법 제도 정비 등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우리나라도 협동조합기본법을 제정하여 작년 12월 1일부터 시행함으로써 협동조합을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다양한 분야에서 5인 이상이면 설립이 가능하므로 향후 협동조합설립 붐이 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운동 진영이 특별히 협동조합운동에 관심를 가지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경제적 이유나 시대적인 추세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지난 1995년에 작성한 ‘협동조합 정체성 선언문’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체를 통하여(수단), 조합원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목적),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주체) 자율적 결사체Association (본질)”라고 정의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관한 ICA 성명 중에 ‘정의’가 협동조합의 자기규정이라면, ‘가치Value’는 협동조합이 추구하며 지켜야 할 신조이고, ‘원칙Principle’은 이런 협동조합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지침이다. 협동조합을 어떻게 운영하느냐는 모두 이 원칙 안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협동조합의 이러한 정의나 가치와 원칙이 기독교적 정신과 일치하는 바가 많고 에큐메니칼운동의 지향점과 일치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조’, ‘협동’, ‘상생’,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협동조합의 가치와 ‘사랑’과 ‘정의’의 바탕 위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갖는 교회의 가치 사이에 일치하는 공통분모가 많다. 자치와 상호의존성, 그리고 호혜와 협력으로 비폭력적으로 세상을 개혁하는 길에 대한 신념 등은 기독교와 통하는 협동조합운동의 가치일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일치와 연대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칼운동과 협동조합운동과의 연계성은 더욱 깊다하겠다. 그러기에 에큐메니칼운동의 위기속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의 가치와 원칙을 회복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주체형성 그리고 물적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과제를 해결하는데 협동조합운동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하겠다.

 에큐메니칼운동의 미래를 위한 협동조합운동

  에큐메니칼 교회론과 협동조합

 앞에서 지적했지만 한국교회 에큐메니칼운동의 약화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교회론의 약화와 교회의 토대들을 많이 상실한데 있다. 그러나 현재의 대형교회 위주의 한국교회 구조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자명해 지고 있다. 이른바 대형교회 신화가 사라지고 도리어 대형교회는 교회 생태계를 파괴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 4월16일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 주최로 열린 “대형교회, 그 신화를 넘어서서!”라는 심포지엄에서 발제를 맡은 박영신박사는 대형교회의 성장이 일종의 종교혼합주의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발제자 신광은목사는 메가처지(대형교회)로서는 결코 교회의 본질을 이룰 수 없다고 강조했는데, 왜냐하면 개교회주의가 만연하여 공교회(公敎會)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상실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목사는 새로운 에큐메니컬 교회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메가처치를 대체할 만한 성서적이고 건강한 교회상을 개발해내야 한다. 각 교단들의 이해관계와 그들이 헌신하는 전통이 이러한 교회상의 개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교회상의 개발은 에큐메니컬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컬 교회론의 뿌리는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원형을 찾아가야 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2:44)"라는 구절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과 연대, 협동의 생활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다 함께 있어’는 교회 신자들 간의 연대를,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은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나눔과 협동의 생활을 의미한다. 4장 32절-35절에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형제적 친교’, 즉 ‘코이노니아’가 잘 나타나 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라는 구절은 나눔과 호혜의 생활 모델에 대한 강조의 표현이기도 하다. 결국 초대교회 공동체에서의 ‘친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신자들 간의 신뢰와 강한 연대감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친교와 교인들의 일치와 연대는 협동조합의 원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라 하겠다. 그런면에서 오늘날 에큐메니칼교회론을 정립하는 데 있어 협동조합의 조직원리를 원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지난 4월 11일 청어람에서 열린 “탈성장주의 시대, 교회를 말하다”라는 공동심포지엄에서 정재영 교수는 <탈성장주의 시대에 교회 공동체의 의미>라는 주제로 한국교회의 위기와 공공성 회복, 그리고 ‘작은 교회’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정 교수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단순히 성장이 정체했기 때문이 아닌 교회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는 스스로 공동체임을 표방하지만 그 공동체의 성격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 하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유를 설명했으며, 작은 교회는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데 적합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작은 교회란 “단순히 규모가 작은 교회가 아닌 교회의 공동체성을 중시하는 작은 교회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 의미를 추구하는 교회”임을 분명히 했다.

 – 협동조합운동은 에큐메니칼 물적토대의 마련을 위한 방향정립에 도움을 준다.

 사도행전이 전해 주는 일련의 초대교회 생활을 읽으면서 우리는 초대교회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이 자기 것을 팔아 ‘공동 기금’으로 살아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공동 출자로 조성된 ‘공동 기금’이 기본적인 자원이 된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서로를 돌보며 도와주는 상호부조의 생활을 위해 공동 기금을 만들고 이 기금으로 여러 문제를 겪는 신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것은 일시적 기부나 헌금으로 도와주는 임시적 도움이 아닌 지속적인 나눔과 호혜의 삶을 가능하게 만든 원천이었다. 초대교회의 나눔에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공동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4:32).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영성적 신앙에만 매몰되지 않고 물질적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실천했다.

 초대교회 안에서의 나눔은 물질적인 것을 나누는 행위로 구체화되었다. 그렇다면 영성적 신앙 공동체가 물질적인 것을 나누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다 같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라서 그런 것일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자기 것을 서로 내놓고 공동으로 나누는 생활을 했더니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4:34)"는 사실이다. 가진 것을 내놓아 함께 소유한다는 것은 형제적 사랑과 정의(justice)의 이상(ideal)을 사는 삶인 것이다. 협동조합의 시작은 각자 가진 것을 내놓고 공동의 자산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이러한 협동조합의 원리를 실천적으로 보여 준 역사적 뿌리이기도 하다.

 앞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의 위기를 논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지적한 것 중의 하나는 에큐메니칼운동의 물적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WCC공동선언문 사태 또한 에큐메니칼운동이 물량주의에 포로가 되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 하겠다. 그러기에 ‘에큐메니칼기금’(ecumenical fund)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조성하여 후학들을 키우고 에큐메니칼운동을 진작시켜 나가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기금을 조성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조합원들의 경제적 참여를 통해 기금을 만들어 가는 협동조합적 방식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웃과의 연대와 지역 생명망(web of life)구축을 위한 에큐메니칼선교와 협동조합운동은 상통한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물질적 나눔은 개별 공동체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공동체들 간에도 이루어졌음을 사도행전 11장 27-30절에서 보여 주고 있다. 안디옥공동체는 큰 흉년으로 식량 부족의 문제를 겪는 유대 공동체에 부조를 보내 주기로 결의하였다(11:29). 물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분명한 원칙은 공동체들로 하여금 어떤 신앙을 갖고 있든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갖고 있는 물질을 나누라고 한다는 점이다. 지금의 협동조합 정신의 나눔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는 협동조합간의 협동의 원칙(제6원칙)을 말하는 협동조합의 정신과 일치되고 있다. 협동조합은 지방, 국가 및 지역, 세계 차원에서 서로 협력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협동조합 사례로 알려진 스페인 몬드라곤의 경우에도 1956년 시작될 당시 돈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 신부에 의해 설립됐다. 호세 마리아 신부가 1941년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시골마을에 부임했을 때 당시 이 지역은 독일 히틀러 군대의 공습을 당해 폐허가 되어 있었고, 1만 명의 시민 대부분도 고향을 떠난 상태였다. 호세 마리아 신부는 지역 주민들의 영적인 생활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이들이 현실의 삶 속에서 겪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가난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 끝에 설립된 것이 몬드라곤의 첫 협동조합 ‘울고(ULGOR)’였다. 호세 마리아 신부는 지역민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가난을 극복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해 기술학교를 설립했고, 결국 1956년 기술학교 졸업생 5명과 노동자 23명이 힘을 모아 석유난로 공장을 설립했다. 이 석유난로 공장의 이름이 몬드라곤의 첫 협동조합이 ‘울고(ULGOR)’였다. 현재 몬드라곤 내에는 1백11개의 협동조합, 1백20개 자회사 등 총 2백55개 사업체를 거느린 기업집단으로 성장하며, 세계 최대의 협동조합으로 유명해졌다. 몬드라곤이 이렇게 수십년의 세월동안 큰 기업으로 성장을 한 후에도 설립자 호세 마리아 신부의 설립정신은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에서도 이는 잘 나타나고 있다. 1920~30년대 일제 치하에서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농촌운동을 펼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해나갈 때, 교계에서는 YMCA와 장로교에서 덴마크 협동조합의 영향을 받아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에는 장로교 총회 농촌부에서 공동구매와 공동판매까지 포함된 중앙신용조합을 설립했고, 감리교와 YMCA에서도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본은 협동조합운동을 반일운동으로 여겨 지도급 인사들을 체포해 더 이상 발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8년 충남 홍성에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 이찬갑은 풀무소비자조합을 결성했고, 이후 1960년 부산에서는 수녀들에 의해 성가신용협동조합이 결성됐다. 또한, 우리나라 협동조합 운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원주에서 지학순 주교와의 교감 하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가톨릭 교인 35명과 함께 강원도 최초의 협동조합인 원주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우리 교단에서의 협동조합운동에는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앞장섰다. 1969년 조지송 목사에 의해 ‘영등포산업개발신용협동조합’이 결성됐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지금도 신용협동조합 ‘다람쥐회’와 먹거리협동조합인 ‘서로살림생협’, 의료생활협동조합인 ‘서울의료생활협동조합’을 운영, 활발한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95년에는 영세소농인 농촌교인들에 대한 선교의 일환으로 본교단에서는 예장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 농촌의 생산자 교회와 도시의 소비자 교회를 연결해주기도 했다. 감리교에서도 1999년에 농도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 협동조합 운동을 함께 이끌었다.

– 제10차 WCC부산총회를 앞두고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컬운동이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컬운동에 기여할 방안을 협동조합운동 활성화에서 찾아갈 수 있다.

세계 에큐메니컬교회의 축제라 할 WCC총회가 오늘 10월 부산에서 치루어진다. 더구나 이번 총회의 표어는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로 우리를 이끄소서!”로 이 시대의 핵심적 과제인 생명, 정의, 평화를 주제로 모이게 된다. 그러나 이제까지 에큐메니칼 신학과 신앙으로 목회와 선교를 펼쳐오지 않았던 한국교회가 이러한 주제를 바탕으로 의미있는 총회를 열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지난 2월28일 상동감리교회에서 열렸던 “WCC총회준비와 한국교회개혁을 위한 에큐메니컬 공청회”에서 감신대 이정배교수는 WCC총회 개최의 의미가 퇴색되고 본말이 전도되었음을 다음과 지적했다.

 “WCC 대회를 치러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금권과 교권을 지닌 한 사람의 오만과 과시욕을 덮어 버린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잃은 채, 수많은 이들의 헌금과 세금으로 치러지는 WCC 대회가 어떤 의미이며 그 이후는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이웃 종교인들로부터 내심 비웃음을 받고 있는 현실을 알고 있는지도 묻고 싶다. 이처럼 소위 에큐메니칼 진보 그룹의 물타기와 현실안주 그리고 자기과시가 기독교의 미래를 후퇴시켰고 WCC 대회의 본말을 전도한 것을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더구나 한국교회 안에서 이렇게 총회에 관련된 대단히 중요한 논란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WCC 본부에서도 이를 묵과하고 총회를 치루는 데만 관심을 두는 것을 보고 WCC를 비롯한 세계교회 에큐메니칼운동의 위기를 체감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의미있는 총회를 치루며 정의 평화 생명을 향한 에큐메니칼운동이 활성화 될것인가 하는 것에 한국의 에큐메니칼 진영들이 기도하며 지혜를 모아가야 할 때이다.

 이런 면에서 새로운 에큐메니칼운동의 활성화를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관심을 통해 도모해가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본교단은 이번 회기부터 ‘치유와 화해의 생명공동체 운동 10년’을 추진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협동조합의 가치인 ‘자조’, ‘협동’, ‘상생’, ‘평등’이 치유와 화해를 위한 핵심 키워드가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다양한 기회를 통해 본교단 총회와 산하교회의 정책과 사역에 ‘협동조합운동’을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가야 할 것이다.

 지난 3월 22-27일에는 서대문구청과 성공회대에서 ‘2013 협동조합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세계적으로 협동조합운동이 가장 활성화 된 스페인 몬드라곤과 이태리의 볼로냐, 그리고 영국의 멘체스터의 협동조합에 대한 다양한 강의와 토론이 전개되었다. 이는 협동조합의 국제적 연대란 측면에서 뜻깊은 행사이기도 하지만 이런 자리가 바로 생명과 평화의 에큐메니칼연대를 열어가는 또 하나의 자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번 WCC총회를 통해 한국 에큐메니컬진영은 생명과 평화의 국제적 연대가 구체적으로 펼쳐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경제위기와 양극화 된 오늘의 세계에서의 정의의 문제와, 전쟁의 위기에 처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문제, 그리고 생태계와 핵발전소의 위기에서 오는 생명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할 수 있는 총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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