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연합교회와 ‘한국 선교’
변조은(John Brown) – 호주 연합교회 목사, 전 호주 한인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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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연하는 변조은 목사 | ||
변조은 목사는 호주연합교회가 한국에 파송한 선교자중 한분으로 그의 수고와 헌신의 열매가 교단내 남아 있는 데 특히 그 분의 주선으로 많은 분들이 호주에 초청받고 공부하고 목회도 하였다. 그외에도 본 교단를 통하여 이 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그들를 통하여 해외의 동역교회나 국제기구들로 부터 선택되거나 선발되여 장학금과 생활비을 받고 공부하고 학위를 한 분들이 많다.
그 분들중 한국교회에 공헌하라고 받은 도움을 이용하여 아예 현지에 정착한 분도 있고 귀국하여 교수나 목회를 했던 분들이 있는 데 장학금이나 후원을 받은 분들에게는 호주연합교회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라고 한 것인데 아무런 공적유산을 남기지 않은 분들이 많다.
그들은 외국에서 받은 사랑과 은혜를 값지 않고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만을 위해서 살면서도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며 개인적 연줄를 이용하여 이들로 부터 위탁받은 재산이나 프로잭트를 개 교회화 하거나 사유화 하였고 공적사업으로 지원받은 선교기금을 개인 용도로 쓴 경우도 많다.
우리 교계에 만연된 이런 일은 공소시효도 없고 뭐라는 사람들은 없지만 유용이나 횡령에 해당하는 범죄다. 거대한 사유재산을 연세대학 신학과에 기증한 우리교단의 초대 농촌부 총무를 지낸 분의 유지도 있다. 기장이지만 크리스찬 아카데미 수유동과 수원의 내일의 집을 기증받은 강원용목사는 이를 사유화하였다. 그외에도 외원으로 운영된 기독교 계통의 연구소와 상담소들이 이에 해당된다.
앞으로 시간이 되는 대로 이러한 사례들을 수집하고 정리할 것이다.
이 글은 2012년 2월 26일 호주의 시드니제일교회에서 예장 총회(통합) 창립 100주년 기념 한·호 선교대회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의 일부다.
호주연합교회 탄생과 선교 정책
1977년 6월 22일 호주장로교회는 호주감리교회, 호주회중교회와 연합하여 호주연합교회(Uniting Church in Australia)를 구성했다. 호주장로교회 교인 가운데 약 삼분의 일이 연합교회에 소속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호주장로교회가 운영하던 국제선교 및 원주민 선교 등 모든 선교사업은 연합교회에 소속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위원들이 호주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이어받은 책임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필자가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주한 호주 선교회의 역사를 요약하여 연합교회가 앞으로 담당하게 된 계속되는 책임을 설명해 주었다.
이 보고서에 나는 이렇게 썼다.
“1950년 이전에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협력해 온 3개 선교회 즉, 미국연합장로교회 선교회,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 그리고 호주장로교회 선교회가 그들이 각각 맡은 지방에서 지방노회와 협의해 가면서 선교정책을 결정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예장 총회가 솔선하여 총회 대표들과 3개 선교본부 대표와 각 선교회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선교정책이 점점 단일화되도록 협의했다. 첫 선교정책 단일화 협의회를 1963년에 소집했다. 그때부터 4개 교회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선교정책을 협의했다.
이 정기적 회의 내용에 대하여 예장 총회가 제도를 만들어 주한 3개 해외선교회 활동을 점점 주관하고 단일화하였다. 따라서 이제 총회가 각 선교부에서 파송하는 선교동역자를 한국 어느 지역이든 파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77년에는 호주연합교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선교사들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세계선교협력위원회의 초청에 의해 파견되었다. 이 위원회가 선교사의 활동을 감독하고 해외로부터 받는 모든 선교자금을 할당하였지만 본래의 내용을 별로 수정하지는 않았다.
당시 각 선교본부는 그들의 선교사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교본부 대표로 지명했다. 호주연합교회 선교부의 주한 대표는 이태선 선교사(Rev. Des Neil)였다.
1977년 당시 호주연합교회에서 한국 선교를 위해 할당하는 예산(선교사의 생활비 외)은 다음과 같다.
·$5,000 예장 세계선교위원회 결의에 의하여 소규모 프로젝트에 할당하는 금액, ·$20,000 일신기독병원,·$7,000 양지기술학원,·$8,000 영등포 산업선교,·$11,000 해외 신학생 대학원 장학금,
1977년 이후 호주 선교 현황과 선교정책
1977년 당시 호주 선교사 12명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5명이 일신기독병원에서 사역했으며 노승배 목사(Rev. Barry Rowe)와 부인(Mrs. Dorothy Rowe)이 울산노회에 파송되어 파트타임으로 양지기술학원에서 사역했으며, 라병도 선교사(Mr. Stephen Lavender)는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원성희 선교사(Mrs. Dorothy Underwood)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성악을 가르치고, 이태선 목사는 대전에서 평신도 교육과 함께 총회 사무실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나명애 선교사(Miss Dorothy Knight)는 전주에서 공동위생교육에 종사했다.
1980년부터 2000년까지 우리의 주요 관심은 선교사업 4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즉, 일신기독병원, 영등포산업선교, 신체장애인 교육을 위해 경영하는 영지기술학원 그리고 신학교육이었다. 나는 이 4가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당시 선교정책을 세우는데 우리가 중요시 여겼던 상황들을 말하고자 한다.
일신기독병원
일신기독병원은 1952년에 세워졌다. 그때 부산에는 수많은 여성 피난민 군인의 아내와 아이들이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판자집에 살든지 부산역 인근에 살면서 해산을 하고 자녀를 키우고 있었다. 매혜란 선교사는 상당한 자격과 경험이 있는 산부인과 의사이며, 동생인 매혜영 선교사 역시 우수한 자격과 경험이 있는 조산 간호사 교육 선생이었다.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도와 줄 수 있는 의술과 열정이 있었다. 그들은 여성과 그들의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는 병원을 설립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들은 환자들이 치료비를 낼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또 환자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불교를 믿는 사람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차별없이 치료하기로 정책을 세웠다.
두 자매는 병원을 세우는데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 여성해방을 추진하는 분들이었다. 그들이 뛰어난 의술을 갖고 여성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갖게 된 것 같이 그들은 다른 여성들도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능력을 활용하여 남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산부인과 의사와 조산간호사 교육을 시작하기로 했다.
일신기독병원은 거의 60년 동안 이 두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했다. 호주 선교부도 이 두 가지 목적을 계속하여 추진하고 싶어했다.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호주연합교회 선교부는 영등포산업선교회를 계속하여 도와 주고 싶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택인 선교사(Rev. Richard F. Wootton)는 조지송 목사와 함께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일을 했다. 우 목사가 선교부에서 나와 동역자로 인권문제를 담당했다.
한편 내가 장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동안 인명진 목사는 3년간 내가 가르치던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에 공부하던 과목 가운데 히브리 예언자의 신학을 공부했다. 이 공부가 단순히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등의 신학사상과 그들이 주전 8세기에 당면한 상황에 대한 연구로 끝나지 않았다.
도리어 예언자들이 믿던 하나님을 따르려는 우리들이 영등포에서 장시간 동안 저임금으로 열악한 환경가운데 노동하는 근로자, 청계천의 빈민굴에서 사는 난민, 거제도에서 가족을 먹이려고 고생하는 농어민들에게 무엇을 설교하며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 연구하는 자산이 되었다.
그래서 1977-78년에 인명진 목사와 다른 분들이 구속되었을 때 우리는 영등포산업선교회와 구분된 분들을 도와 줄 수 밖에 없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군사정권 밑에서 신음하는 신도이든 불신자이든 이들을 위해 대변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양지 기술학교
양지기술학원도 많은 장애인들이 울산시에서 빈곤과 절망 속에 숨어서 지낸다는 사실을 우리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시작한 사역이다. 노승배 목사(Rev. Barry Rowe)와 그의 동역자인 신익균 장로가 소규모로 시작하여 장애인 몇 사람에게 자기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들이 돈을 조금씩 벌어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울산시에서 실태조사를 하여 이러한 많은 장애자들이 숨어 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업이 점차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신 장로의 자택에서 시작하였고 그 다음에 부산 동래에서 선교사 주택으로 사용하던 집으로 옮겼다가 부산시 거제동에 학원을 세워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그들이 각각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예수의 귀중한 형제자매로서 자신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전도했다.
이에 양지기술학원이 발전하였다. 졸업생들은 주로 개업을 하던지 기술자로 취직을 했다. 그들은 이제 보잘 것 없는 장애인이 아니라 자긍심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신학 교육
나는 1972년 장신대에서 8년간 교수생활을 하다 호주장로교회 선교부 총무를 맡으려고 귀국할 때 호주교회가 계속하여 한국 신학교육에 기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호주장로교회 선교부가 장신대를 졸업한 유능한 학생이 해외로 나가 계속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마련했다.
예장 총회 장학위원회가 학생들을 선출하고 장학금을 관리했다. 그래서 몇 해 동안 몇 명의 학생들이 스코틀랜드, 독일,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호주에서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신학교육에 기여했다. 호주 선교부가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힘을 썼을까? 나는 몇 가지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첫째, 주한 호주선교부는 그러한 강력한 전통이 있었다. 1909년 진주에 주둔한 처녀 선교사 두 명이 백정들이 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편에서서 온갖 저항을 이기며 백정들의 전국 해방을 시작했다. 그 당시 처녀 선교사 한 명은 매견시 선교사(Rev. James N. Mackenzie)의 부인이 되었다.
매견시 목사는 1910년 부산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29년 동안 그는 상애원 나병환자 수용소 원장으로 봉사했다. 그는 거의 30년 동안 밤낮없이 경남의 가장 가난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다. 매혜란 원장(Dr. Helen Mackenzie)과 매혜영(Miss Catherine Mackenzie) 선교사는 이들 부부의 딸들이었다.
또한 선교부는 일정시대에 버려진 여성들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학원을 세웠다. 그러므로 소외된 사람들을 특별히 돌보아 주는 오랜 전통이 선교부에 항상 있었다.
나 자신이 받은 큰 영향은 첫째, 8년 동안 거제도의 가난한 농어민들을 상대하므로 받은 영향이 컸고, 장신대에서 근로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학생들에게 받은 영향이 컸다. 또 한편으로는 1972년부터 나와 우리 선교부가 땅 소유권을 찾으려고 애쓰는 호주 원주민(Aboriginal)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도우면서 배운 점이 많았다.
그리고 나에게 끼친 영향 한 가지가 더 있다. 나는 1980년부터 1990년까지 WCC 전도부와 산업선교위원회의 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나의 동역자인 우택인 목사가 WCC 국제문제와 인권위원회 한 사람이었다. 또한 1977년까지 호주감리교회 선교부 총무로 있던 하비 퍼킨스 목사가 CCA직원 한 사람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을 위하여 성경공부 자료를 만들어 분배했다. 이 자료가 선교위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 선교부 전체가 인권을 위하여 노력하는 억눌리며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선교와 관련을 맺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전도를 시작하실 때에 사명을 이렇게 말했습니다.”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의 기쁜 소식을 우선적으로 들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호주연합교회 선교부는 일신기독병원과 양지기술학원과 영등포산업선교회를 계속하여 지원하였다. 1977년 이후에 우리는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요청에 대해 청년들을 파송하여 같이 일하게 했다. 이 청년들의 주요 역할은 보고서를 준비하여 노동자들의 사정과 신업선교회의 대책을 아시아 각국의 비슷한 간체나 각 교회 선교부로 보내는 역할이었다. 이 청년들이 영등포에서 일하므로 호주연합교회 성도들이 노동자들의 형편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위하여 계속하여 기도했다.
선교의 역방향 운동
군사정권시절에 한국교회의 복음 증거를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 호주교회 젊은이들이 영등포에서의 사역, 1978년 나병도 선교사(Mr. Stephen Lavender)가 강제추방을 당한 사건, 그리고 인명진 목사, 홍길복 목사, 조성기 목사, 고 김이태 목사가 호주에서 목회하거나 공부하게 되었던 상황이 전체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선교부가 결정하는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으로 이 당시 중요한 운동 한 가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선교의 역방향 운동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안들을 호주로 이민오지 못하게 하던 소위 백호주의정책이 1972년 드디어 폐지되었다. 그때부터 아시안들이 호주로 이민 올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부터 한국에서 이민자들이 몇 명씩 오기 시작했다.
1975년 월남 전쟁이 끝나고 월남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술자 수백 명이 호주로 들어왔다. 그래서 1973년과 1974년에 멜본과 시드니에 선교부와 관계를 가진 한인교회들이 세워졌다. 이후 10년 동안 한인교회들이 여러 곳에 설립되었다. 이때 선교부는 한국에서 유능한 목사 몇 명을 초청하여 한인교회에서 목회하도록 했다.
이외에 감리교, 기장, 합동, 고신 등의 교회들도 세워졌다. 이들 한인교회 가운데서 여러 교회가 호주연합교회에 소속되었지만 한국의 다른 교단에 속한 교회도 많았다. NSW주의 호주연합교회에 소속한 교회는 지난 해(2011년) 세운 한인노회에 대부분 속하여 있다. 기타 다른 주에는 한인교회가 지방노회에 소속한다. 이 교회들이 호주연합교회에 소속하게 된 것은 통합교단과의 긴 선교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자매결연의 열매이다.
호주연합교회의 또 하나의 열매
호주에 한인교회를 설립한 또 하나의 열매는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이 호주연합교회의 목사가 되어 일반 호주인 교회에서 목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다문화적 목회로 되어가는 호주연합교회를 크게 돕고 있다. 이런 목사들 가운데 양명득 목사는 서울에서 예장(통합) 총회에서 협력하고 있다.
1977년 호주연합교회의 설립은 에큐메니칼운동의 한 열매와 표현이었다. 한편으로 예수의 기도인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에 대한 호주교회의 응답이다. 작은 걸음의 하나이다.
그래서 호주연합교회의 영문 이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호주에서 연합하는 교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항상 한국교회를 위해서 “주님,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한국교회 역사를 보면 여러 해외 선교회가 교회 연합에 영향을 끼친 것보다 교회 분열에 대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총무로서 1978년에 미국연합장로교회, 미국남장로교회, 호주연합교회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각 교회 대표들이 몇 년에 한 번씩 모이는 것보다 좀 더 넓은 범위로 한국감리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그리고 그들의 모든 해외 자매교회 대표들이 같이 모이기를 제안했으나 적극적 응답이 없어 무산되었다.
내가 너무 주제없는 발언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 제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분열의 아픔과 예수의 간절한 기도가 언제나 나를 괴롭힌다. 호주연합교회는 북한 라선시에서 시작된 사역에 통합총회가 참여하여 크게 도와 준데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장래에도 우리 두 교단이 이 사역에 지속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란다.
호주장로교회는 1889년 첫 선교사를 한국에 우연히 파견하게 되었다. 헨리 데이비스가 한 성공회 교회에 가서 중국에 주둔하는 성공회 선교사가 부산에 가서 보니 선교를 시작할 만한 곳이라고 보고서를 썼다. 그래서 데이비스는 성공회 선교부에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이 너무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워 데이비스는 장로교회에 요청하여 그들이 그에게 안수를 주고 파송하기로 했다.
우리가 라선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 동기도 마찬가지로 우연히 이루어진 일인 것 같다. 우리는 라선 시장이 미국 그리스도교회 목사에게 발급한 초청장을 그 목사로부터 받았다. 성령께서 뜻밖의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동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분에게 감사를 드리고, 이 사역에 크게 이바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대표인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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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주 시드니 제일교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