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산업선교와 노동교회 설립자
청주 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하시고 대표로 일하시면서 충북지역의 민중운동과 민주화운동 초석을 놓으신 고 정진동목사(1933-2007)의 일대기가 책으로 나왔다. 산업선교라고 해서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농민과 빈민 청소부등 민중들의 삶을 위한 교회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질적인 삶의 개선을 위하여 투쟁하신 분이다.
평전을 쓴 박만순 선생의 한 표현을 빌리면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 억울함을 풀어내기 위해 협력하고 애쓴 사람. 자신의 말씀·원칙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려 힘쓰지 않은 바보.” 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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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진동목사의 이런 사역이나 사후 지금 까지 추모와 기념사업을 하는 데는 함께 사역한 산증인 조순형전도사가 계시다. 지금도 청주 노동교회를 사역하신다. 작년에는 목민 고영근상을 수상하시기도 하였고 매년 정진동목사와 장남 정법영군의 의문사에 대하여 추모하는 일을 앞장서서 하신다.
생전의 정목사님이 남기신 자료와 정목사의 처제로 결혼 후 형부로 젊어서부터 함께하신 연고로 이번 책자를 완성하는 데 귀한 자료와 구술에 큰 도움이 된다. ‘정진동 평전-정진동, 공동체를 꿈꾸다’(도서출판 고두미)의 탄생에는 초고를 쓰시면서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박만순 사단법인 함께사는 우리 대표가 계시다.
조순형 전도사는 독신으로 평생을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로 정목사 사후에는 교회와 정목사가 행한 사역과 유산을 지키며 함께 하신 분이다. 귀한 것은 모든 자료들이나 사진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여 책으로 엮는 데 큰 자료가 된 것으로 안다. 청주 출신 국회의원을 지낸 도종환 시인은 “정 목사는 억울한 사람, 쫓겨난 사람, 두들겨 맞고 빼앗기고, 모욕당하는 사람 곁에 있었다. 그들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보았고, 그들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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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사는 호죽면에서 6대 독자 장남으로 태여나 내성적이었지만 향학열만은 남달라 늦은 나이지만 어렵게 청주로 나가 성경학교를 마치고 서울 대한신학교와 장신대서 공부했다. 신학생으로 옥산면 고향 호죽교회 출신으로 전도사로 강단을 보며 심야 열차를 타고 걸어서 다녔다. 사후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등은 정 목사의 고향이자 호인 ‘호죽’을 따 ‘호죽노동인권센터’를 설립했고, 호죽 정진동 추모사업회도 만들어졌다. 충북지역에선 해마다 ‘민중의 벗 호죽 정진동 노동인권상’을 시상한다.
저자 박만순 대표는 1991~1994년 청주 노동자의 집 근무를 하면서 정목사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추억하기를 “처음 만났을 때 담배 피우는 성직자를 보고 놀랐다. 이후 정 목사의 삶은 알면 알수록 경탄을 자아냈다. 노동자·민중을 만나 그들과 하나된 삶을 살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땀을 좇는 일이 보람 있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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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로부터 김철호,전기호,김옥연,조순형,손은정,000,서덕석,장창원,김달성,오영미목사 | ||
박 대표도 공동체를 꿈꾼 정 목사의 삶과 궤적을 같이 한다. 박 대표는 한국전쟁 앞뒤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생존자의 기억을 좇는 ‘기억전쟁’ 시리즈 등을 집필한 노동자이기도 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정목사와 조전도사도 잘알지만 이번에 책을 엮으신 박만순선생은 첨듣는 이름이지만 이 분의 감각이나 표현이 남다름의 필력과 정성 그리고 정목사에 대한 감성으로 태여 난 것이다. 돈 좀 있는 분들이 자기 업적을 남기고 싶어 지돈 드려 내거나 보통은 잊혀지는 게 기본인데 정 목사에 대하여 청주 분들이 이처럼 기억한다는 것을 보면 그의 민중적이고 실천적 삶은 한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를 넘어선 분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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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에 산선 앞에서 조전도사와 정목사 | ||
특히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존경받으며 기억되시는 것을 보면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신 것이라는 평이다. 특히 영등포산선의 고 조지송목사와는 신학동기로 졸업후 농촌에서 10여년을 목회하다가 조목사가 청주에 강연차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갔다가 감동을 받고 목회를 그만 두고 산업선교 훈련을 받고 청주에 노동교회와 산업선교를 개척한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조목사도 조기 은퇴후 미원 옥화대에 내려가 사시다가 건강이 나빠 판교로 올라오셨다. 정목사는 사후 광주 민주화운동 묘역에 안치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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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날에 조지송목사와 정목사 그리고 조전도사 | ||
포항동부교회 정진동목사 평전 출판에 부쳐
호죽이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 서덕석 (시인, 열린교회 목사)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는
죽은 후에나 가는 피안의 세계가 아닌
우주 만물을 해방시키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세상 가운데로 난 새 길 같은 것,
호죽은 끝까지 그 길 걷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만 안온하게 잘 살면 된다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민중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해방공동체야말로 진정한 교회라는
신앙적 결단에서
호죽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나왔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고
도시빈민들과 농민들을 등쳐서 배 불리는
자본가와 기생 권력들과 싸우면서
‘노동자와 악덕기업주가 함께 천국가게 하는’
도시산업선교를 교회가 실천하기만 하면
노동해방의 새날이 열린다고
호죽은 굳게 믿었다.
기도하려 두 손을 모으지만
노동의 땀방울이 부정당하고
민중들의 인권이 유린되는 것을 보면
함께 분노하고 연대의 손을 맞잡는 것이
참 예수꾼의 모습일 터,
여리고 길에서 강도당한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
호죽은 낮을 밤처럼, 밤을 낮처럼 살았다.
가난한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음을 알았기에
배부른 부자가 되기보다는
이 땅의 민중들처럼 가난해지기 위해
호죽과 청주도시산업선교회는
자기를 비우고 나누어
더는 낮아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갔다.
하나님 나라가 별 것이더냐
지배하는 대신 서로 섬기면 천국이고
혼자 차지하지 않고 나누면
그게 곧 천국 아닌가!
이런 천국에서 한번 살아 보자고
외쳤던 목사가 호죽 정진동이다.
그는 겁 없이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었고
우리는 그때 호죽과 함께
천국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금도 천국은 우리들 가운데에 있다.
* 호죽 : 정진동목사의 고향 ‘호죽면’에서 따 온 정진동의 호
* 여리고 길 : 예루살렘 근교의 험로로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던 곳
복음서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