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집회 반대이유

                   진보 진영은 침묵  

1027 광화문집회에 대하여 이를 가장 먼져 제안한 손현보목사가 속한 고신측의 박영돈교수를 비롯하여 목회자들 일부는 고신총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비판이다. 반대 목소리를 처음 낸 것은 기윤실로 복음주의 인사들이 있는 곳이다. 이어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냈는 데 역시 복음주의권인사들이 주축이 된 곳이다. 

그런가운데 한목협 대표회장 성결교단의 지형은목사는 단체에서 내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차 개인차원의 반대의견을 냈으며 이어 고신교단 장로인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나들목교회 김형국목사, 새물결프러스의 합동측 김요한목사까지 자신들의 페이스북을 통하여 반대의사를 표하고 있다. 

한편 우리교단은 총회장 김영걸목사를 비롯하여 영락,소망,새문안등은 참여를 독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명성교회, 주안장로교회는 불참한다고 한다. 그러나 총회장 서신으로 교회별 광고는 하고 참석은 개인들이 알아서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동대표인 여의도 이영훈목사도 불참인 가운데 합동측 분당 이찬수목사는 총회 결의니 광고는 하되 참석은 교인들 자유의사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지방의 교회들은 사정이 다른 것 같다. 교회나 지역별로 대형버스를 대절하였고 개인별 신청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것은 목회자 개인성향도 있겠으나 서울간다는 의미의 관광성 심리도 있기에 지방에서는 상당숫자가 올라올 것으로 보인다. 주최측도 상징적인 교회들이 불참의사를 밝히자 상당히 난감한 해 하는 것으로 알려졌

             카타콤 TV 양희삼목사(합동)

내가 10월 27일 집회에 참석하는 목사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몇 가지다.

1. 동성애가 나라를 망하게 할만큼 지금 상황에서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
대한민국에 각종 참가가 일어났을 때 입 다물고 있던 인간들이 이런 문제로 몇 백만을 모아서 세 과시를 한다고 한다. 복음이 없는 한국 교회니 이런 삽질을 하는게 당연 할 지도 모르겠다만.

거기에 의료 대란, 경제 문제, 인구 소멸과 지방 소멸, 기후 위기, 전쟁의 위협, 무엇보다 정의가
짓밟히는 현실에 대해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던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2. 있지도 않은 유령 법안과 싸우겠다는 행태이다. 22대 국회에서는 아직 발의 되지도 않은 차별금지법 반대를 외치는 집회를 한다고 한다.

21대에서 난리를 칠 때도 그 법을 발의한 정의당 의원실에 직접 확인했다. 교회가 주장 했던 모든 것들은 다 가짜 뉴스였다. 예를 들면 동성애 설교를 하면 잡혀 간다는 것 등.

목사라는 인간들이 진위 여부도 따지지 않고 가짜뉴스를 퍼트리며 개 때처럼 우루루 몰려 가서 성도들을 세 과시에 동원 시키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성도들 또한 무슨 집회인지도 모르고 목사가 가라고 하니까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 무슨 코메디 같은 상황인가? 나 바보요,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이 집회를 시작한 사람 중 하나가 오정현이다. 로잔 대회에서 역할을 해 보려고 가진 발악을 했는데 밀려 나고 말았다. 오정현에게는 당면 과제가 있다. 불법으로 도로 점유를 해서 만든 예배당을 다시 파묻어야 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다. 지금도 불이행으로 나가는 벌금이 어마어마 할 것이다. 혹시 이런 집회를 해서 윤석열, 김건희에게 잘 보여서 그 땅을 도로 파묻지 않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집회 라면?
한 인간에게 이렇게 놀아나도 되는 것인가?

3.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것은 그나마 멀쩡하다는 목사들이 하나같이 집회 참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일에는 눈 감고 귀 감고 있으면서 이런 사안에만 죽어라 반응하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이 정말 그렇게 한가한 세상인가?

엊그제 방송하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 교회 다니면 구원을 못 받는다.” 어째 내 말이 과격한가? 이전에도 “한국 교회에 하나님이 없다”고 했을 때 나한테 과격한 발언이라고 했던 사람들 답 좀 해 보시라.

                      ‘밥퍼’로 최일도 목사(다일공동체 대표)도 반대 

"저는 가지 않습니다!"  10.27 대회에 대하여 최목사님 입장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날마다 밥퍼에 오시는 어르신 몇 분께서 지난주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저에게 "목사님은 왜, 안 가십니까? 저 가도 되겠습니까?" 묻는 분도 계셨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들이 제법 많고 혼란에 빠진 분들도 여러 사람 되는 것 같아 저의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 여겨 제 입장을 분명히 밝힙니다.

"저는 가지 않습니다!" "다녀오실 분들은 광화문에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저와 공동체 형제 한사람, 두 사람은 10월 26일 오전 10시 부터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라고 불리우는 이세종 선생님과 그의 제자 이현필 선생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분들이 걸으신 영성의 길을 함께 걷고자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 있는 아주 작은 시골교회를 찾아갑니다.

이 세종, 이 현필 그 두 분의 청빈과 청결과 순명의 삶과 그 숨결을 따라서 화학산 각수바위 초막까지 걷고 걸으며 한국교회와 대한민국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고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주님을 깊이 묵상할 것입니다.

금주 주말이 케노피아 영성학교 첫번째 시간입니다. 캐노피아는 헬라어 케노시스와 토피아가 결합된 말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케노시스는 ‘자기 비움’ 이며 토피아는 ‘장소’라는 뜻이지요.

화순군 도암면은 한국교회가 낳은 성자 이세종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말씀대로 제자도를 철저하게 살았던 장소입니다. 곧 케노피아 (비움의 장소)입니다.  10월 26일(토) 오전 10시부터 ‘이세종의 영성과 문화적 자산’에 대한 세미나가 있고 점심 이후 걷기 묵상을 합니다.

두번째 케노피아 영성학교는 11월 23일(토)에 열리는데 부족한 제가 ‘이현필의 생애와 영성의 길’이란 제목으로 그리고 동광원 벽제분원장이신 심중식 수사님도 강의를 맡아 진행하며, 그날도 침묵 속에서 걷기 묵상을 할 것입니다.

10월 27일에 200만이 모여 한국기독교의 단합된 힘을 보여 준다는 큰집회에 저는 참여 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10월 27일 그날은 동광원의 암자에서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이영길 수사님과 다리가 없는 동광원 언님, 단 두 분과 함께 도암면 동광원 분원인 작은 판잣집에서 주일예배를 올려 드리고 노동기도를 할 것입니다.

군중의 힘과 차별과 혐오가 넘치는 200만명이 모일 것이라는 광화문보다는 두 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서로서로 사랑하기에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도록 서로 권하고 위로하며 예수살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하나되는 소수의 모임을 저는 더욱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지요.

교단과 교리와 교파가 다양한 기독교가 꼭 한 목소리를 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면 존중해 드릴 뿐입니다. 왜? 나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가? 흥분하고 큰소리치며 예수 안에서 한 몸된 형제를 이단으로 몰거나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형교회 중심의 초대형 군중집회를 찬성하여 함께 모이든지? 모임에 가지 않든지?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개인의 결단이요 몫입니다. 집회 찬성파와 반대파가 서로를 비난하거나 제발 악마화 하지 않기를 간구하며 소망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고 심지어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한 사람들은 당시 죄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세리와 성을 매매한 여자가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잘 믿는다고 여기며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다르다는 이유로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한 바리새인들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신 생명의 말씀, 복음의 본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치하며, 살아 운동력이 있어 심혼 골수를 쪼개는 변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요. 그 시작은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입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가 있습니다. 참과 거짓이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것인가는 여러분 각자의 몫이요 선택입니다.

골방으로 갈 것인가?
광장으로 갈 것인가?
변두리로 갈 것인가?
중앙으로 갈 것인가?

저는 골방과 변두리를 선택했고 갈수록 고독하고 힘들더라도 그 길을 끝까지 걷겠습니다. 죽는날까지 이 걸음으로… 

한국기독교 최초의 수도 공동체인 동광원에서 1일 1식을 하면서 평생을 중보기도와 노동기도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바친 제 친구 이영길 수사님 골방에 적힌 글로써 오늘 ‘저의 마음 나누기’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아들아, 오늘이 네가 죽는 날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김동호목사,  "10월 27일 집회에 대한 그냥 내 생각" 페이스 북 글 

1. 10월 27일 광화문에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기 위한 기독인들의 집회가 열린다. 200만 명을 목표로 집회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일을 놓고 교회 안에 찬 반 양론이 일고 있다.

2. 그 찬 반 양론을 교회 내 분열로 보고 염려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찬 반 양론이 있다는 건 교회가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것을 무조건 분열로 보고 염려하는 건 지나친 염려다. 우리는 일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일치가 언제나 좋고 건강한 것만은 아니다. 일치만이 가치 있고 건강한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건강한 나라가 북한일 것이다. 북한의 일치는 세상에서 가장 유치하고 저급한 정치 행태이지 않는가?

3. 처음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선배들의 조언이 있었다. 당회는 무조건 만장일치이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은혜스러워진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도 나는 속으로 만장일치가 은혜스러운 일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은혜스러운 나라가 북한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다.

3. 찬 반 양론을 분열로 보고 염려하는 까닭은 무조건 자기 생각과의 일치만을 고집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하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집회를 찬성하는 사람은 그것을 홍보하고 설득하여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노력하면 될 것이고 생각이 달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함부로 적대시하거나 매도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분열은 찬 반 양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적대시하고 매도하는데서부터 오기 때문이다.

4. 그리고 내 개인적인 의견인데 10월 27일 집회를 기도회라고 하던데 그냥 집회라고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기독교인들도 얼마든지 자기 의견을 주장할 수 있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집회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굳이 그것을 기도회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기도회라면 주장을 받아주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 될 것이고 집회라면 주장을 받아주어야 할 대상이 정부가 될 터인데 차별금지법은 정부가 만들려고 하는 것이니 집회라고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집회의 힘은 모인 사람의 숫자에 있을 수 있지만 기도의 힘은 사람의 숫자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냥 내 생각이다.

   
   
 

           나들목 김형국목사 “1027 한국교회 2백만 연합예배”를 염려하며

10월 27일에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리는 연합예배가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불러일으킬 파장을 생각해서, 짧게라도 저의 염려를 나눕니다.

모두가 잘 알듯이 광장의 맨 앞에 내걸린 이슈는 ‘성’입니다. 성은 오랜 세월 인류에게 기쁨과 극단적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는 성적 지향, 성정체성 같은 논의를 촉발하며 더욱 복잡해진 주제입니다. 저는 동성애에 분명히 반대하고 동성애자 차별에도 반대하며, 오늘날 성적 지향의 다양성과 간성의 문제, 그에 따른 성정체성 혼란이 우리 사회에 상존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성 정체성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라는 취지로 관련 법을 이미 시행하고 있는 사회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으로 우리나라가 그러한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뗄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도 일정 부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국의 그리스도인을 ‘동원’하여 광장에서 예배를 드리자는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심각한 우려를 표합니다.

1.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를 향해 이러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는 일반 시민사회에 이야기하기조차 부끄러운 다양한 문제로 비난받고 있고, 그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 세습, 교회 권력화와 사유화, 논문 표절, 학력 위조, 성범죄, 성적 타락, 배임과 횡령, 금권 선거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문제가 쌓여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신뢰도는 바닥을 친지 오래되었고, 스스로 자정할 능력을 상실한 지역 교회와 교단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는 둘째로 치더라도, 신뢰도 바닥인 한국 교회가 대규모로 모여서 내는 목소리는 한국 사회가 고려해야 할 이슈로 여겨지기는커녕 이익집단의 정치적 압력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큽니다.

2. 다음은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에 대해 각 지역 교회 내에서 얼마나 최소한도의 논의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전 성도가 제사장(만인제사장)임을 믿는 개신교는 이처럼 중대한 사안이 생기면 성경의 가르침을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지를 놓고 성도들이 함께 충분히 학습하고 토론을 거칩니다. 하지만 그 같은 과정을 생략한 채 일방적으로 동성애‘만’을 죄악시하고, 성도들을 광장으로 동원하는 일은 성경적 교회론에 걸맞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단지 교화와 선도의 대상이며 이런 중요한 이슈는 담임목사와 당회 또는 교단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은연중에라도 믿고 있다면, 개신교 전통과 성경의 가르침에 신실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교회 일부가 독단적으로 결정해 집회 참여를 권하는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떠날 것이며, 반대로 일방적으로 집회 불참을 권하는 교회에서도 떠나는 성도들이 나올 것입니다.

3. 주최 측은 연합예배에 정치인이 등장하지 않고 순수하게 예배만 드릴 것이므로 정치적 집회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전면에 내건 이슈가 이미 정치적 주제이며, 전국에서 수백만 명을 동원해 그 주제로 예배를 드리는 일 자체가 정치적 행위입니다. 광장에 나가서 개신교인의 결연한 의지를 사회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이미 정치적 행동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행동은 관련 이슈에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다수 시민에게 강력한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이미 한국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심지어 혐오하는 이들은 이번 연합예배를 계기로 개신교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개신교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향후 입법 과정에도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대규모 연합예배는 이 이슈에 대한 공적 토론과 입법부에서의 설득 과정을 약화시키거나 생략하게 만들어서, 오히려 개신교에 불리한 입법화를 가속화할 수 있습니다.

4. 10월 27일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이날은 사회 개혁이 아니라 교회 개혁을 위해 마르틴 루터가 주교회의에 95개조 반박문을 제출한 날입니다. 루터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심각한 문제를 토론으로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교회 갱신을 대중 운동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이루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 날에 우리 또한 한국 교회의 수많은 죄를 회개하고, 세상의 가치가 교회에 침투해 교회 됨을 훼손하는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토론하고 기도하면서 교회 갱신의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광장에 나가 소리를 높이기보다는 부끄러움을 안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5. 한국 교회는 동성애와 현대 사회의 성적 혼란을 놓고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성경을 문자주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인간의 평등성을 강조하며 무조건 찬성하는 것도 모두 위험합니다. 그리고 토론과 함께, 우리가 믿는 가치를 문화와 법으로 구현할 방법을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시도해야 합니다. 물론 광장에서 정치적 집단행동을 해야 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교회 영역에서,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적절한 모든 노력을 다했으나 문제가 풀리지 않고 더 심각해질 때, 교회는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동성애가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망하게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까? 반성경적 가치를 지향하는 무신론과 유물론, 경쟁과 능력만을 앞세우는 성공 지상주의, 유권무죄를 옹호하는 법률 등 수많은 어려운 과제가 한국 사회 안에 버젓이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를 위해 싸워야 할 영역은 차고도 넘칩니다. 동성애만을 콕 찍어서 수많은 성도를 광장으로 동원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염려됩니다.

                   새물결프러스 출판사 대표 김요한목사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저의 염려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심각한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앞으로 10년이 교회 회복을 위한 ‘골든타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는 그 귀중한 시간을 늘려주기는커녕 더 단축시킬 것 같아서 염려됩니다. 연합집회로 인해 교회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고, 개신교는 시민의 공적이자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는 더 많이 양산될 것이며, 일반 시민들에게 교회는 토론과 대화가 불가능한 이익집단이라는 인식만 더 확실하게 각인될 것입니다. 이 글을 쓴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제가 관여하고 있는 사역에 불편만 끼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위기의 시기에 한국 교회를 지키며 세상에서 빛으로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성도들과 동지들을 위해 제 염려를 간략히 나눕니다. 

개신교 보수 교단과 대형 교회들이 주축이 되어 10월 27일 광화문에 모여 좌파 척결과 동성애 반대 집회(그들 말로는 예배)를 갖는 것에 대해, 시민사회와 의식 있는 종교인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10월 27일은 전 세계 개신교회가 종교개혁 주일로 기념하는 날이어서, 하필 이런 날에 꼭 그런 정치 집회를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머릿 수를 앞세워 정치적 의사 표시를 관철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대회를 주도하는 개인과 세력들이, 단지 10월 27일의 집회뿐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그리고 처신해온 내력을 볼 때, 자칭타칭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얼굴 마담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이야말로 한국 개신교의 병폐가 얼마나 뿌리 깊고 어쩌면 사실상 더 이상 치유 불가능한 상태라고 진단합니다.  보십시오.

10월 27일 집회를 주도하는 개인과 세력들이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를 말입니다. 이들 절대 다수는
1. 박정희-전두환 시대에 불의한 권력에 침묵하거나 협조했던 자들입니다.
2. 이들 중 대다수는 이명박-박근혜를 공개 지지하거나 간접적인 방식으로 찬동했던 자들입니다.
3. 이들은 문재인 정권 당시, 전광훈이 광화문에서 ‘청와대를 접수하자’고 선동할 때, 전광훈을 시대의 예언자로 칭송했던 자들입니다.
4. 이들은 지난 대선에서 무당-이단들과 손을 잡고 윤석열 정권의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자들입니다.
5. 바로 이들이 10월 27일 ‘나라를 살리겠다’며 대규모 군중 집회를 획책하는 자들입니다.
불과 몇 년 전, 전광훈이 자신이 주도하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삭제하겠다’고 협박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목사가 그런 비슷한 협박과 공갈을 일삼는다고 합니다.
아주 신성모독이 가관입니다. 한국의 시민사회가 이런 모습을 보면 무얼 느끼겠습니까? 한국 개신교는 참으로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불과 2년 6개월 전, 한국 개신교 보수 집단이 총단결하여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아놨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어떻습니까? 

나라가 엉망진창입니다. 오죽하면 조중동 같은 극우 신문들마저, 이러다가는 큰일나겠다는 사설을 쏟아내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그릇된 정치적 선택 때문에 국가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당하는 현실에 대해 겸허하게 반성하고 공개 사과하며 자숙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나서서 ‘나라를 구하겠다’며 대규모 무력 시위를 벌이는 꼴이라니, 참으로 후안무치합니다. 한국 보수 개신교는 ‘나라를 구하기’ 이전에, 자신들부터 구할 걱정을 하십시오. 당신들이, 목사 독재를 하면서, 엄청난 액수의 연봉으로 호의호식을 하고, 교회를 자식들에게 세습하는 것이야말로 전도의 문을 막고 있는 첫째 원입니다.

당신들이, 반지성주의로 똘똘 뭉쳐, 맹목과 비합리를 신앙의 이름으로 설파하며 사람들의 뇌를 세탁하는 것이야말로 전도의 문을 막고 있는 둘째 원인입니다.  당신들이, 한국 현대사에서 불의한 권력을 남용한 정치세력에 빌붙어,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어용 종교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전도의 문을 막고 있는 셋째 원인입니다. 당신들의 실체를 안다면, 나라를 구하기 이전에 제발 당신들부터 구원하십시오.

                 이만열 교수 젊은날의 ‘주일 성수’ 추억

근 몇 몇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이 앞장을 서고, 6개 교단이 함께 하기로 한 10월 27일 ‘광화문 집회’ 소식을 들었다. 의도적으로 그날을 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은 역사의식을 가진 대부분의 교회가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는 날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집회 날자를 이 날로 잡은 것은 주최측의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는 세계복음주의자들이 큰 행사로 여기는 제 4차 로잔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그 대회에 이어 광화문 집회가 열리게 되는 바람에 이런 저런 구설이 뒤따르고 있다. 심지어는 기독교계의 주도권 운운하면서 이 집회의 의도를 달리 해석하는 소리도 없지 않다. 주최하는 이들이 호리라도 그런 의도에 연루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최측의 순수한 의도가 자칫 교계의 주도권 문제로 파생된 행사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광화문 집회’ 소식을 들으면서, 그런 집회가 주일이 아닌 다른 날에 개최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에게는 아직도 ‘주일 성수’가 신앙 생활의 중요한 핵심이었던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종교개혁 주일에 모이는 ‘광화문 집회’가 계기가 되어 내 신앙생활에서 ‘주일 성수’의 추억을 잠시 더듬는 데에 있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고신파에서 신앙훈련을 받았다. 그 전에는 시골에서 교파나 교단을 모르고 자랐다. 내 고향에는 19세기 말에 호주 선교사의 전도로 세워진 사촌교회와 그 보다 늦게 세워진 군북교회가 있다. 그 무렵 할머니께서 호주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신자가 되었고 그 슬하의 7남매도 교회에 출입하게 되었으며, 1920년대에는 삼촌 한분이 평양신학교를 졸업, 목회자로 활동했다. 뒷날 내 고향이 호주 장로교 선교 지역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장로교인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입학, 마산으로 옮겨 경건하고 신앙의 좋은 모범을 보여주신 숙모 조점시 권사가 나가는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 한국 교회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신사참배 회개 문제와 일제하의 부일(附日)문제, ‘신신학(新神學)’의 문제와 WCC와의 관계 등으로 장로회․감리회 등 교단에 분열이 일어났다. 장로회 중, 신사참배 문제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곳이, 부산 마산 진주와 그 인근지역이었다. ‘고신파’(고려신학교 계통)는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나는 숙모의 권고에 따라 ‘고신파 신마산교회’에 출석하면서 그 때 막 출범한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 S.F.C)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고신파’는 다른 교단과의 차별화를 신사참배 회개와 생활의 순결이라는 데에 두었고, 생활의 순결과 회개를 강조했다. 신앙생활에서는 성경에서 제시한 계명을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했다. 그 중의 하나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주일 성수’였다. ‘주일 성수’의 문제는 일반 신자들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엄격하게 요구했다. 마산에서 중고등시절을 보내던 내게도 ‘SFC’의 주일성수 훈련은 필수적이었다. 이번에 서울 광화문에서 10월 27일 주일날 대형집회를 한다면서 전국에서 모이도록 한 조치를 보면서 그 때 내가 주일을 어떻게 지키려고 했는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구약의 안식일 규정을 주일날의 규정으로 바꾸고 주일 성수를 엄격하게 요구했다. 주일 날에는 학교 공부는 물론 세속적인 독서도 금지했고, 여행하는 것은 물론 버스 등 교통기관을 이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당시 고려신학교의 박윤선 교장은 주일날 해외로 떠나는 손님을 전송하러 부산 부두에 갔다 온 것으로 견책을 받아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주일날 식사를 위해 부엌일을 하는 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라는 이유로 용납되었다.
학생도 주일날 공부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었다. 난감한 것은 월요일에 시험이 있을 때다. 그럴 때는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친구 집에 가서 주일 밤에는 자고 밤 12시가 지나면 깨워달라고 하여 공부하여 시험에 임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구마산에서 살면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아침부터 교회에 가야 했다. 주일날 버스를 탈 수 없기에, 3․4km 정도를 걸어야만 했다. 눈 비가 올 때는 정말 난감했다. 고 2, 3학년 때는 입주 가정교사를 했는데, 주일날 가르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먼저 받았다. 주인집 눈치가 보였지만 주일성수를 양보하지 않았다.
대학에 와서도 주일 성수를 계속했다. 입학시험 전날 수험표를 받는데 주일날에 교부한다고 해서 종형더러 부탁했다. 사학과에 입학하니 학기마다 정기 고적답사와 임시 답사가 있었다. 그러나 주일이 겹친다는 이유로 8학기 동안 한번도 답사에 동행하지 못했다. 함안 출신의 기업가(지금 효성그룹)가 고향 출신 대학생이면 거의 수여하는 장학금 면접일이 주일이어서 가지 않았다.
이처럼 대학생 시절까지 성수주일은 거의 무조건적이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일성수의 그런 정신은 고수하려고 노력한다. 언젠가 신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그런 성수주일의 내 경험을 말하면서 그것이 너무 ‘교조적’이었다고 자아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듣던 학생들 중에는, “교수님의 그런 주일성수의 정신이 오늘날까지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힘이 된 것”이라고 일깨워 주는 이가 있었다.
지금도 ‘교조적’이랄 수도 있는 주일성수를 감행했던, 내 젊은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면서, 내가 지금껏 기독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젊은 시절 주일성수를 묵수(墨守)했던 그 바보같은 신앙생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10월 27일 전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신앙적 동기’로 십자군처럼 서울에 모인다고 하기에 떠오른, 내 젊은 날의 ‘성수 주일’에 힘썼던 경험을 되돌아 본다. 지금 생각하면 ‘바리새적’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겠지만 그래도 당시의 순수한 그 신앙까지 비판하고 싶지 않다.

                             박영돈교수(전 고려신학대학교) 

10. 27일 200만 연합집회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다. 떠든다고 그 집회가 안 열릴 것도 아니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몇몇 신학교 교수가 그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영상을 봤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신학교에서 가르친 이들이니 교회가 이렇게 혼란할 때 바른 가이드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마음이 아프다. 같은 신학자로서 깊은 비애와 자괴감을 느낀다. 어떤 이들은 이 일로 인해 찬반으로 갈려 서로 대립하며 분열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같은 목사와 교인들끼리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지 말자고 한다. 이 문제는 핵심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니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 어느 쪽을 선택해도 무방한 사안이라고 한다. 그러니 참여하든 그러지 않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나도 누구보다 우리 사이에 균열과 분쟁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싶지 않다. 이 집회를 주최하는 목사가 반대하는 이를 마귀, 바퀴벌레, 이완용이라 해도, 내 글에 어떤 이가 동성애 변태라고 해도 나는 그런 식으로 맞대응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도 이 문제가 기독교 신앙과 진리와 무관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사안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런 실랑이를 할 필요도 없고 서로 편할 것 같다. 그러나 성경과 종교개혁 신학에 매인 나의 신앙 양심은 이것은 크게 잘못되었고 교회가 망하는 길로 간다고 소리치며 괴로워하기에 이런 글이나마 쓰지 않을 수 없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어떤 이들은 이 일은 기독교 핵심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집회의 의도와 지향하는 바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와 기도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위해 도구화하는 것은 합당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며 망령되게 부르는 일, 제3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는 장로교단이 표준문서로 채택하여 헌법에 명시된 정치 참여에 대한 지침, “비상시국에 겸허한 청원이나 국가 공직자의 요청을 받아 양심상 행하는 조정 외에는 국가와 관련된 시민적 사안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웨민 31장)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교단이 그 헌법을 어기며 굳게 따른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팽개치는 셈이다.

종교개혁자의 신학은 중세 교회의 승리주의와 영광주의에 대항한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한다.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는 바울의 신앙을 따르는 약함의 영성이었다. 약함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교회는 아무런 정치적인 힘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미약한 교회에 만물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왕, 예수님이 좌정하여 세상을 움직이신다. 교회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이며 통로이다. 교회는 조직과 수의 힘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의 미련하고 약한 것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보다 인간의 힘과 수를 더 의지할 때 처참하게 패배한 비극으로 점철되어있다.

왜 꼭 200만이 광화문으로 집결해야 하는가. 조금이라고 더 모이게 하려고 각 교회마다 독려하고 불참하는 교회들의 백서를 만든다고 압력을 가하기도 한다. 그것은 교세의 위력을 과시하여 세상을 압박해 우리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모여놓고 우리는 세를 과시하지 말자고 하는 것보다 더 이율배반적인 일은 없다. 거기 모여 우리 죄를 회개하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도 있다. 그러나 광장의 연합집회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진정한 회개의 자리가 되기 어렵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회개했듯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금의 교회와 같은 신정국가였다. 그때는 그 회개를 듣는 대상은 하나님뿐이었지만, 지금은 세상 사람들, 매스콤 앞에서 하는 것이니 피상적인 회개의 쇼가 될 수 있다. 혹여라도 진정한 회개집회가 되려면 주최하는 목사들의 숨은 거짓과 비리와 음행을 토해내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과 수치를 감당해야 할텐데 그런 각오가 되어있으면 모를까, 그러나 그럴 리는 만무할 것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각 교회에서 하나님이 은밀히 보시는 가운데 통회자복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한국교회는 진정한 회개와 개혁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고 특별히 그 집회의 선봉에 선 이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다.

지금 한국에는 차별금지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 법이 국회에 두 번 발의되었으나 지금은 폐기되었다. 다시 상정하려는 시도도 없다. 그런데 차별급지법 반대 구호를 내세우니 다시 그 법에 관심을 환기시키는 역효과만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동성애가 합법화되면 그것이 죄라고 설교만 해도 잡혀간다는 등 아주 극단적인 사례를 부풀려 과도한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다. 캐나다 개혁교회 같은 데에서는 동성애가 성경에 반하는 죄라고 설교해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에 뛰어들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악령의 충동이기가 쉽다. 이럴 때일수록 단순 논리와 열심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교회 역사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깊이 사고하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성숙한 신앙의 자세가 절실하다. 악법에 대한 우리의 염려와 두려움도 주께서 해결해주시도록 기도로 맡겨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세상의 성장제일주의 가치관을 따라 수적 성장을 추구해왔다. 그래서 거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런 수적인 성장에 문제가 많지만, 거기에도 주님의 자비와 은혜가 함께 했다고 본다. 그런 수적인 성장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성장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거기에는 크게 실패했다. 그래서 세상에서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운 매력을 잃어버리고 이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이번 집회로 기독교의 이미지는 더 처참하게 짓밟히고 한국교회는 패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

종교개혁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의 부패를 개혁한 운동이었다. 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새로워져야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교회는 세상의 죄와 외부적인 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망한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특정한 죄를 저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온갖 거짓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완고함과 어두움으로 인해 망한다. 종교개혁을 맞아 우리 부패한 목사와 교회지도자들의 죄와 위선을 통렬히 회개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일이다. 그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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