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백석 문학상, 장석남 시인이

덕적도 섬 출신으로 다수의 문학상 수상 

인천 덕적도 출신 장석남(60·사진) 시인이 제27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한다. 백석 문학상 주관인 창비는 13일 심사위원회가 2015년 창비에서 낸 장석남 시인의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 를 제27회 백석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심사위원회는 “깊은 철학적 사유와 섬세한 감수성으로 서정시의 지평을 넓혀온 장석남의 시가 이제 무심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시집”이라며 “유려한 언어감각과 냉철하고도 숙연한 응시로 서정적 아름다움과 윤리적 깊이의 절정을 보여준다”고 수상작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장석남 시인대학 졸업식에서

백석문학상은 시인 백석(1912~1996)의 시적 업적을 기리고자, 그의 연인이었던 자야(子夜) 김영한 여사가 출연한 기금으로 1997년 제정됐다. 상금은 2천만원이며 시상식은 만해문학상·신동엽문학상·창비신인문학상과 함께 11월 말에 할 예정이다. 장 시인은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김수영문학상(1992), 현대문학상(1999), 미당문학상(2010), 김달진문학상(2012), 정지용문학상(2020) 등을 수상했다.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 어디로 가시려는가’ 등을 냈다.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인천 제물포고와 서울예전, 인하대 박사 수료했다.

 

김영한여사(자야)와 길상사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 는 현재 조계종 사찰로 1987년에 김영한 여사가 법정스님의 무소유 청빈 사상에 감동받아 7,000여 평의 대지와 40여 동의 건물을 기증한다. 법정스님은 이곳을 1995년 ‘대법사’로 등록하고, 1997년 12월 14일에 ‘길상사’로 개명하여 창건한다. 당시 이 기증에 대하여 불교계 내부의 이견들이 있었으나 이 제안에 대하여 법정스님은 10여년간 여유를 두고 진정성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찰로 건축된 곳이 아니기에 대웅전도 없고 건물도 일반 절과는 다르다. 그러나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로도 불리우는 이 사찰은 법정스님의 뜻대로 무소유 사상과 길상화 보살의 보시 공덕을 기리며, 맑고 향기로운 도량으로 발전시켰다. 김영한 여사가 운영한 당대 서울 3대 요정중 하나인 대원각이다. 외국사절이나 고위층들이 모이는 최고급 요정(요릿집)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것이다.

김영한은 16살 때 조선권번(기생학교) 출신으로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이후 길상사 터를 사비로 구입해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하다 군사정권 시절 요정이 된다. 제3공화국,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면 큰 기와집에 가야금 소리가 들리고 기생들과 술이 나오는 배경에 대원각도 있다고 한다. 김영한(1916~1999)은 가난으로 조혼하지만 남편과 사별 후 기생이 되어 1950년대부터 운영하며 말년에 월북시인 백석과의 일화로 유명세를 얻게 된다.

김영한은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문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백석 연구가 송준은 “생전의 김영한을 인터뷰했는데, 의구심이 든다.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고, 백석 전문가 이동순 역시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은 실제가 아니며, 조작되고 윤색된 이야기”라고 기고했다. 그러나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그런 연정으로 요정 터 7천여 평과 건물 40여 채를 시주한 것이다.

김영한이 길상사라고 절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과 백석과의 관련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가로도 1천억 원이 넘는 액수라고 하는데, 무소유를 설하던 법정 스님이 이렇게 큰 액수의 시주를 받은 것에 대하여 불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법정이 덥석 받은 것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김영한의 뜻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에 김영한이 사망하자 화장하여 절터에 뿌려졌다. 절터에 골고루 산골했기 때문에 따로 무덤은 없으나,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 안에 있다. 2010년에는 법정 스님도 여기서 사망했다. 극락전에는 김영한의 영정이 있으며,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한다. 이 절안에서는 현대식 조각품인 관세음보살상은 법정 스님이 종교 간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에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의뢰하여 봉안하였다.

백석(1912-1996) 83세로 북에서 사망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한 백석은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조만식, 홍명희가 교장을 지낸 적이 있고, 김소월은 6년 선배로 시인의 꿈을 키웠다. 1929년 오 졸업한 후,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 그 후원으로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과에서 공부한다.

1934년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로 등단한다.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기도 하며 함흥서 소설가 한설야, 시인 김동명을 만났고,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져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1937년 소설가 최정희, 시인 노천명, 모윤숙 등과 자주 어울렸으며, 「함주시초」, 「바다」 등을 발표하였다. 함흥 교사를 만두고 경성으로 와 「산중음(연작)」, 「석양」, 「고향」, 「절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물닭의 소리(연작)」 등 22편의 시를 발표한다. 1939년 자야와 동거하면서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과 만주의 신경(神京, 지금의 장춘(長春)서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직원도 지내고 창씨개명 압박으로 그만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0월에 조만식을 따라 소설가 최명익, 극작가 오영진 등과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 참석해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되었으나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가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았다.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면서 농촌 체험을 담은 시 「이른 봄」, 「공무여인숙」, 「갓나물」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62년 시 「조국의 바다여」, 「나루터」 등을 마지막으로 발표하였다. 10월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활동을 일절 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사망하였다.

백석은 소월과 만해, 지용이 다져놓은 현대시의 기틀 위에서 새로운 시의 문법을 세움으로써 한국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시인이다.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시켰다. 또한 우리말의 구문이 품고 있는 의미 자질을 적절히 활용하여 경험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하였다. 백석의 시는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정제된 운율이 있는 전통적인 서정시 형식 대신 이야기 구조를 갖춘 서사지향적인 시를 보여준다.

백석은 월북시인이지만 김영삼 정부들어 복권되어 그의 문학이 소개되기 시작한다. 백석문학상(白石文學賞)은 1997년에 시인 백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문학상이다. 故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2억원을 기금으로 1997년 10월 20일에 결성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 위원회(위원장 백낙청, 운영위원 최원식, 이시영, 정형모, 이정재)가 그 첫 사업으로 백석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첫번째 시상은 1999년이며 매년 8월을 기준으로 2년 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시상한다. 출판사 창비에서 운영하고 있다. 1회 수장자는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와 ‘집은 아직 따뜻하다’을 쓴 황지우, 이상국시인이 수상한다. 역대 유명 수상자로 안도현(2009) 백무산(2015) 도종환(2011) 나희덕(2019)가 있다.

    지승룡 글 ‘계급혁명을 향한 독립운동도 안아야 한다’

종교개혁과 동학이 농민혁명으로 이어지듯 항일 운동은 복고왕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를 향한 계급혁명으로 생각하고 운동한 분도 있다. 나 이 부분 우리 민족은 넓게 수용했고 그렇게 외부 간섭이 없었다면 한국 북유럽에 버금가는 국가가 되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박헌영의 어머니는 이학규다. 이학규는 예산군 광산에서 식당과 여관을 했다. 그러다 금광광산 주인 조씨와 결혼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 조봉희란 딸이 있었고 남편 조씨는 폐렴으로 죽었고 이학규는 광산을 직접 경영했다. 후에 미곡상을 하는 박현주를 만나 아들을 낳았는데 박헌영이다.

박헌영과 어머니가 같은 조봉희는 권번(기생이 있는 요리집)을 경영한다. 돈이 많았던 어머니의 지원이 있을 것이다. 신학문을 공부했고 미모와 재능이 있던 조봉희는 어머니를 닮아 경영수완이 좋았다. 조봉희는 전북의 만석꾼 김병순과 결혼해 김제술과 김소산을 낳았다. 조봉희는 김소산에게 외삼촌인 박헌영이 대원각의 주인이라고 하며 외삼촌에게 큰 힘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박헌영에게 대원각은 네 것이니 여기서 기거하라고 하자 박헌영은 계급운동을 하는 자신이 이렇게 큰 집은 분수에 맞지 않고 탄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본 이화여전 출신 김소산은 박헌영을 존경하며 공산주의에 깊이 헌신한다. 그리고 인물이 밝혀지지 않은 큰 독지가가 큰돈을 박헌영에게 주며 항일 운동을 위해 쓰라고 한다(위의 글을 보면 누군지 추축할 수 있다) 박헌영은 이 돈을 김소산에게 주며 대원각을 크게 건축하고 항일과 사회주의를 숨은 인맥의 뜰을 만든다. 대원각에는 김소산이 아끼는 새끼 마담이 있었다. 자야란 호를 가진 백석과 동거한 김영한이다.그런데 1949년에 김소산 간첩사건이 터졌다. 영화도 세상도 김소산을 기생간첩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역사를 흥미로 만든 이야기이고 김소산은 간첩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늘 지향하는 운동가였다.

김소산이 감옥에 갈 때, 자신이 나올 때까지 ‘새끼 기생’ 자야에게 책임지고 관리를 부탁했다. 1950년 전쟁이 나고 복잡한 전쟁의 와중에 수복 후 김영한은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이재학의 첩이 되어 이재학과 모의해 1955년에 이 큰 땅 대원각 등기를 김영한 앞으로 했다. 김영한은 박헌영 아들에게 대원각을 돌려주겠다고 여러 번 이야기를 하며 안심을 시켰고 아들인 원경스님은 대원각을 인수하면 지금 길상사처럼 부자들의 명상 터가 아닌 사회개혁의 깊은 뜻을 담은 교육기관을 세우려고 하였다.

이런 아들의 구상을 위험하게 느껴서인지 1997년 김영한은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에 넘기며 당시 천억 원이 넘는 재산이 백석의 시 한줄 만 못하다는 묘한 칭송을 들었지만 박헌영 아들은 스님이기도 했고 분쟁하면 아버지 박헌영의 삶의 누가 될 것 같아서 법적 분쟁은 하지 않았다. 박헌영이 물질에 욕심이 있던 인물이 분명 아니지만 길상사는 박헌영 것이다. 지금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길상사가 지금보다 한 걸음 더 정진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주다면 박헌영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닐까! 또 길상사 스토리가 김영한과 백석의 러브스토리로 회자되는 것을 넘어서서 근 현대사 치열한 항일 사상가 집안의 사업체이었고 항일 활동가들의 숨음 아지트였다는 것으로 스토리가 채워지길 소망한다.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님의 페이스 북 글

죄송합니다. 백석과 자야, 길상사 내용을 수정하며……
세간에 백석과 자야 여사와의 사랑이 아름다운 전설이 되어 뮤지컬도 나오고 연극도 나옵니다. 길상사는 사랑의 성지(聖地)로 신비화 되어 왔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책에 조금 쓴 까닭은, 백석이 쓴 연시를 모두 백석과 자야의 절대적 사랑으로만 해석하는 글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음 한쪽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통영의 박경련을 사랑했던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소설가 최정희에게 보내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백석 하면 자야와 함께 성북구 길상사가 나오는데, 오랫동안 이해 안 되었던 부분을, 백석 연구에 실질적인 자료와 연구 결과를 써주신 이동순 교수님께서 요정 ‘대원각'(후에 길상사)에 얽힌 과장된 이야기를 지적해주셨습니다(이동순 교수님 글 http://asq.kr/zLCFOdqc ).

이동순 교수님의 검토를 받고 3쇄본에서 백석과 자야 사이의 관계에서 확실한 증거가 없는 내용을 새로운 사실로 대체했습니다. 늘 바른 정보를 주시는 이동순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3쇄를 내면서 <일러두기>에 105면을 새로운 내용으로 바꾸어 넣었다고 써놓았습니다. 1,2쇄본을 구입해주신 분, 그렇다고 105면에 실린 내용이 틀리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내용으로 바꾸었다는 알림입니다. 105면의 내용은 아래 첨부한 사진과 함께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을 내고도 귀찮게 수정하는 저자를 오히려 반갑게 받아주시는 아카넷 편집부에 감사드립니다

예장뉴스

예장뉴스 관리자 계정입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