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K 97회기 총회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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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장 손달익 목사의 주제 설교는 더 많은 이들에게 들려져야
9월 20일(목) 밤 늦게 폐회된 제 97회기 총회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작되여 연금재단의 오랜 근심과 공보의 짊을 덜었지만 새로운 과제를 않았다. 이것은 숙명이다. 그래서 총회장 손달익 목사는 축하만 받기에는 아직 마음이 편치 않다. 전 총회장 박위근 목사와 전 사무총장이 남긴 것들로 인하여 마음이 무겁다. 손 목사는 이미 10여년 전 부터 우리 총회의 최고 우량 기대주로 총회의 핵심부서들인 총회 서기를 거치고 부총회장를 거쳐 총회장 까지 무사히 안착을 한 것은 다행이지만 우리 교단을 향한 그의 꿈과 비젼이 아직도 살아있는 지는 두고 볼일이다.
그러나 전망은 밝다. 우선 이번 총회의 개회설교에서 제시된 총회의 주제 제시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내용은 우리 교단이 세계 장로교회의 수준에 올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제가 형식이기는 하지만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전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각론이 있어 보인다. 문제는 총회의 실무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체화하고 자기부서의 일로 만드냐가 관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식의 논의와 구조로 총회 업무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비판할 의도는 없으나 지금 까지 총회의 일은 총회장이나 총장이 교권인사들의 관심에 따라서 이해관계가 있는 일에 의기투합으로 가니 부서의 총무나 실무자들은 아무런 정보도 협력도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되니 총회의 실무자들은 모두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힘이 있는 사람에게 줄을 대는 일이나 한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총회장의 개회 메시지가 담고 있는 내용과 그 아젠다를 다시 웍샾를 해서라도 온전히 우리 총회의 정책 지침으로 일관되게 한해 동안 밀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에 모두 자부심을 갖고 복무해야 한다. 지금 유일하게 총회의 주제을 설정하고 각론을 정하여 총회의 일을 하는 교단은 사실상 거의 없다. 그져 총회장 취향과 성향따라서 움직이 것이 보통이다.
기독교 장로회에서는 이번 총회의 주제를 WCC 제 10차 한국총회의 주제인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서서" 라는 동일 주제로 정함으로 에큐메니칼운동의 센스와 적자 답게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제는 총회장 사무총장 관심과 성향 따라가는 총회가 아니라 계획따라 움직이는 시스템과 매뉴얼에 의하여 움직이는 교단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총회의 전 직원과 총회 산하 기관들은 다시 한번 총회장의 설교를 학습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분의 설교를 우상화가 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제대로 된 안을 제시했기에 그렇고 최고 수장이 말뿐이 아니라 이 안을 제대로 구조적으로 일하도록 견인하며 규정하는 의미도 있다.
다시 한번 이 설교를 듣지 못하고 접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하여 그 내용을 정리해본다. 면져 우리의 교회역사와 민족의 희망이 되었던 자랑스러운 전통과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런 자만으로는 미래을 낙관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의 현실의 냉엄함 때문이다. 오늘의 세상과 사람들은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문제도 예전의 없던 일들이 속출하는 데 교회는 늘고 신자는 많아졌어도 어둠은 짖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정체성(Identity)은 어느 집단이든지 개인이든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즉 우리가 누군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 를 자문해야 그래야 무엇을 할 수 있다. 주인이냐? 손님이냐? 에 따라서 책임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칼빈의 설교에서 인용한 “나쁜 그리스도인” 이라는 500년전의 지적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상태를 솔직하게 점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나쁜 그리스도인이 아닌 지? 자문해야 한다.
그러면서 마25:40 의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시고….” 레 19:18 의 “원수를 값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 는 여호와니라” 두 본문을 제목으로 하여 “그리스도 작은 이들의 벗” 이라는 총회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부여하고 있다.
1.왜 작은 이들의 벗이여야 하는 가?(빌2:6-8)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앉은뱅이의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관심을 환기 시킨다. 그리고 바울에게도 빌2:6-8 “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작은 사람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에 작은 자 혹은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우리의 정체성으로 볼때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것이다.
2. 누가 작은 이들인가?
그리스도인으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했다면 우리는 그럼 누가 우리의 이웃이며 그 중에 누가 가장 작은 자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사회의 경제적인 번영은 이미 세계적이다. 국력과 능력면에서 이지 세계 10위권의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의 내부를 드려다 보면 과연 그런 자만과 자평을 할수 있는 가? 화려한 21세기의 문명의 뒤안길에는 이미 그늘진 영혼들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작은 자들을 구체적으로 5 계층으로 분류하고 있는 데 1. 경제적 빈곤층으로 부터 시작하여 2. 자라나는 세대들 3. 장애인 4. 다문화 가족 5. 북한의 동포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우리의 작은 자들 우리가 돌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이들을 말하고 있다.
3. 우리의 사명
손목사는 먼져 우리들 스스로가 작은 자임을 인식해야 함을 서두에거 밝히고 있다. 그것은 이런 인식과 판단을 하고 해야 할 일을 찾는 사람들이 먼져 겸손한 자세를 강조하는 의미로 보인다. 왜냐하며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할 것 같은 자만에 있지만 우리도 한때는 작은 자들이였고 도움을 입었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은 큰 교단인 것을 자랑하고 행세하고 업적을 드러내고 자만하고 방심했던 것에서 다시 영적으로 작은 자였던 것을 잊지 말고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이들의 친구가 되려고 하면 그들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낮추고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러면서 지난 1년간 주제였던 “그리스도인, 세상의 빛”에서 자기 소멸과 희생을 통한 역할을 했다면 구체적으로 그의 빛됨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연결짓고 있다. 교단의 창립 100년은 이 땅에 처음 교회가 세워지고 독노회에 이어 총회가 조직되던 해를 기점으로한 것이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의 교세와 량적인 성장의 내용을 보면 실로 놀라운 일이며 세계교회사에 내놓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평가일 뿐이다. 우리의 위상과 축복에 걸 맞는 일을 감당해야 비로써 하나님과 세계교회로 부터 그리고 우리사회로 부터 우리교단은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평가를 두려워 해서가 아니라 작금의 우리 한국교회를 향한 우리 사회의 따가운 눈길과 외면을 제대로 보았다는 것에 희망을 갖는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