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새롭게 하는 여성, 세상을 살리는 여성
정경호 교수(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2000년의 기독교역사를 통해서 볼 때, 우리 남성들은 성차별의 DNA를 지닌 채 여성들을 손에 손을 잡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이웃이요 친구이며, 그리고 동역자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여전히 성차별이란 죄성의 원죄가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내려져 있음을 본다. 어디 우리 사회뿐인가?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성차별은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어 아직도 여성 지도력이 교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특히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여학생들이나 이미 졸업한 여학생들의 진로가 암담할 때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늘 미안하고도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성서에 나타난 여성들의 눈물 이야기
구약성서 창세기에 19장에 길을 가던 두 천사가 롯의 집에 찾아오자 롯은 그들을 정성껏 환대를 하며 대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소돔 남자들이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성관계)하리라”(5절)고 말한다. 이에 롯은 자신의 집에 온 손님, 두 천사를 지키기 위해 성적광란증에 있는 소돔 남자들에게 자신의 딸을 내놓아 결국 성폭행당해 죽게 한다. 롯의 가정의 슬픈 이야기는 아버지라는 남성의 폭력으로 인해 자신의 두 딸을 희생하고 만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사사기 19장에 다시 나타난다.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딸과 손님의 첩 곧 손님의 둘째 부인을 내어놓는다. 그러자 그들이 밤새도록 집단 성폭행을 하다가 새벽 미명에 그녀들을 놓아주었다. 상처투성이의 여인들은 동이 틀 때까지 간신이 집 앞까지 돌아왔으나 기진맥진 상태여서 그만 집 앞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25-26). 결국 밤새 성폭행 당한 여인들이 다 죽은 것이다. 해체주의 철학자 쟈크 데리다는 낯선 손님을 대접하며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 당시의 가부장적인 종교요 문화이며 관습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성서에 나타난 두 사건은 가정의 폭군으로서의 남성, 아버지, 남편이었기에 철저하게 딸과 아내라는 여성의 생명과 인권을 무시하고 말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행여나 우리 남성들이 이러한 가부장적인 폭력을 미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사기 11장에 나타난 입다의 딸의 경우도 그렇다. 성서는 그를 ‘사사’라고 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남성) 지도자로 그리고 임몬이라는 거대한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전쟁 영웅으로 민족의 지도자로 숭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입다라고 하는 어느 어리석은 아버지의 잘못된 서원기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남성) 신앙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물론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는 전쟁터로 나가기 전의 이러한 서원기도를 드리는 그에게 큰 점수를 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의 조건부적인 서원기도가 과연 서원기도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전쟁에서 이길 경우 자신의 생명을 드리지 않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대신 죽여 번제를 드리는 것이 참된 일일까? 헌신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기는 것이지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 정성을 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고도 얄팍한 껍데기 헌신이 아닐까?
결코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는 생명죽임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생명살림의 하나님이기에 그의 서원기도는 서원기도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입다라는 아버지의 성공과 승리를 위해 딸을 희생하고만 부성의 폭력이 배여 있는 성서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린 어리석은 아버지의 서원기도이기에 그 서원기도가 기도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 입다의 딸이 더욱 위대한 것이며 그녀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보이기도 한다. 당시의 야사(野史)를 연구한 트리블이란 여성신학자는 입다가 죽고 난 후에 입다의 몸을 열두토막 내어서 12지파로 보내어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되지 않는다고 보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경숙교수는 입다의 딸과 여자 친구들이 두 달간 함께 산에 올라가 함께 울었던 “통곡”을 “통곡의 연대성”이라고 역설한다. 다른 이의 눈물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함께 동참한 “통곡의 연대”야말로 참 다시는 그러한 어리석은 기도로 인하여 자신의 자녀를 희생시켜서는 되지 않는다는 여성들의 항거요 울부짖음이었다.
성서 속에 나타나는 여성들의 한숨, 눈물, 성차별과 폭력을 대할 때마다 우리 남성들의 무의식 속에 담겨 있는 성차별의 죄성과 폭력성을 지닌 남성성에 대한 참회를 한다. 과거 2000동안 교회와 신학을 이끌어왔던 남성 신학자들의 사팔뜨기의 신학을 한국교회로 하여금 참회하며 교정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남성 신학자들이 이해한 여성
여성신학자인 로즈메리 래드포드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는 남성신학자들이 2000여년 동안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책, 여성-교회(Woman-Church)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2-3세기에 살았던 성자 클레멘트(St. Clement of Alexsandria, 150-220)는 “모든 여성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하며 동시대의 신학자인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은 “여러분 모든 여인이 아담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한 이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여인들은 지옥의 문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려버린 사람이요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간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여인들이여 노예처럼 순종하는 아내가 되시오.”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 비해서 4-5세기의 신학자요 개신교 신학의 초석을 놓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354-430)는 “자녀를 가지고 있는 여인들이여, 당신들은 살인자들과 마찬가지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남겼다.
가톨릭 신학의 기초를 닦은 13세기의 신학자인 성자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는 “여성은 단지 남자의 조력자요 보조자이다. 그러므로 매사에 남자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자신의 여성 이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면 16세기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어떨까? “여인들이 너무 나약한 나머지 자녀를 출산하면서 죽게 해서는 안 된다. 여인들로 하여금 더 많은 고통의 짐을 지워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으며 개혁신학의 전통을 20세기에 이어받은 신정통주의 신학의 거장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여인이란 존재론적으로 남성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서 속에 있는 여성을 볼 때, 어리석은 아버지의 서원기도이지만 그 서원이 거짓 서원이 아닌 참 서원기도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입다의 딸, 모압여인 룻은 남편을 일찍 여윈 가난한 여성으로써 역시 남편을 여윈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간 이주 여성이다. 순수혈통을 강조하던 베들레헴에서 이방여인으로써 인종차별을(racism), 남성중심의 가부정적인 사회에서 성차별(sexism)을 그리고 매일의 끼니)이란 온갖 장애물을 뛰어넘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위대한 여성 룻, 슬로보핫의 딸들 곧 마훌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는 아버지 슬로보핫이 죽자 딸들에게는 땅이 돌아가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의 율법이었으나 결국 자신의 권리, 땅을 되찾은 딸들, 히브리 사람들이 고된 노역으로 고통당할 때 지혜를 다해 어린 동생 모세를 살렸던 미리암, 유대 민족 전체가 죽느냐 사느냐라는 중대한 문제 앞에서 죽으면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나선 에스더, 부부가 합심하여 바울사도를 도와 선교사역에 봉사해 나간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 예수를 위해 음식도 준비하지만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이라 고한 마르다와 예수의 말씀을 경청하였던 마리아 같은 여제자 그리고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자신의 몸에서 10개월을 간직하며, 예수의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도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등등 훌륭한 신앙의 여성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이러한 신앙의 여성들을 지옥의 문으로 그리고 독사의 독보다 더 해롭다고 한 남성신학자들은 모두 사팔뜨기의 신학자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가부장적 남성신학에 무장해제당한 채,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섬김의 지도력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우리 남성들은, 그 중에서도 남성 신학자들과 남성 중심의 교권자들은 더더욱 참회하면서 “교회를 새롭게 하는 여성, 세상을 살리는 여성”들로부터 겸허히 배워야 할 것이다.
교회를 새롭게 하는 여성, 세상을 살리는 여성
여성신학자인 셀리 멕페이그(Sallie McFague)는 그의 “풍성한 생명”(Life Abundant)이란 책에서 교회가 오늘의 세상을 향해서 “새로운 비전”(new vision)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어떤 비전 혹은 어떠한 대안을 가지고서 교회를 새롭게 하며 나아가 물신(物神, mammon god)을 섬기고 있는 병든 세상을 향하여 치유의 손길을 펴서 생명평화가 풍성한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첫째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한국의 정신을 가진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교회사 속에 담겨있는 좋은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이해와 함께 한국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신앙, “십자가를 등에 지고, 태극기를 손에 들고”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885 년 한국에 도착한 미국 장로교회의 교사 언더우드가 서울로 돌아와서 세계 선교잡지에 한국교회의 좋은 점 4가지를 실었던 적이 있었다. 한국교회는 첫째 성서 말씀을 무엇보다도 사랑(Bible loving)하였고 성서사경회를 통하여 성서의 지식과 평신도신학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둘째 한국교회는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였음에도 있는 힘 다해서 정성껏 헌금을 한 신앙인(money giving)이었다. 뿐만 아니라 셋째 일주일에 하루를 빼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봉사한 “날 연보”(day offering)도 하였다고 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교회 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가 화재, 가뭄, 자연재해 등으로 어려움에 직면하면 종교에 상관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봉사(social service)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사회와 민족을 이끌어나간 지도력을 갖춘 교회였다.(national leadership) 선교 초기부터 한국교회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묵묵히 섬김의 지도력을 발휘한 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여성 기독인들의 신앙의 흔적들을 마치 땅에 있는 하늘의 보화처럼 발굴하고 찾아내어 오늘에 계승하고 그리고 내일의 주인공이 될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이어가게 해야 한다. 특히 선교초기 한국교회는 당시의 사회를 향해 대안 또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교회였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3.1운동으로 애국부인회운동으로 그리고 마르다 윌슨 성경학교의 교사로 봉사한 한국교회의 어머니 김마리 선생을 비롯하여, 16세에 금주가를 작사‧작곡한 임배세, 농촌에 들어가 농촌계몽과 함께 농촌교회를 일구어낸 여성 목회자, 국채보상운동, 금주금연운동, 절제운동 그리고 물산장려운동 그리고 70년대의 민주화 및 80-90년대의 평화통일 운동의 중심에 서서 교회를 새롭게 하고 민족을 살리려고 한 신앙의 의미를 오늘에 재해석하여 이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선교초기부터 한국교회의 특징은 모든 악습과 구습을 타파해나가는 교회였다. 특히 양반과 종, 남자와 여자, 노인과 청소년 등의 차별을 뛰어넘어 함께 밥을 먹었던 평등의 공동체 곧 밥상공동체였다. 음식이 복음이다는 뜻에서 “음식복음”이란 말을 있듯이 음식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음식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바라보면서 부수어지고 황폐해진 자연생태계를 다시 복원하고 생태정의를 실천해나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따뜻한 환대의 마음으로 지극히 작은자들과 음식을 나눔으로써 하나님이 그리시는 아름다운 세상 곧 생명‧정의‧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 갈 수 있어야 한다.
넷째, 한국교회는 성장지상주의의 깊은 늪에서 헤어 나와 지극히 작은자들의 이웃이 되며 그들에게 생명이 풍성한 삶을 살도록 도와나가는 하나님의 선교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독거노인, 조손가정, 청소년 폭력 및 자살, 북한 이탈주민, 다문화가족, 외국인노동자 나아가서 평화통일을 위한 일에도 여교역자들의 화해와 치유의 손길이 있어야 할 것이며 남북한 모두가 생명평화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섬겨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가난하기 그지없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지구촌세계의 생명정의평화를 세우는 일에도 여교역자의 따뜻한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이다.
* 이글은 전국여교역자연합회로 부터 글을 부탁 받아 쓴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