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친구·순례
요한복음 15:12-17
선물
요즘 봄이 얼마나 아름다운 계절인지 감탄하면서 삽니다. 전에도 봄은 아름다웠겠지만, 그 아름다움이 그저 겉에서만 머물고 깊숙히 스며들진 못했던 모양입니다. 조금은 주제넘는 듯하지만, 봄을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까요? 제가 학생들에게 농담삼아, 산천이 아름답게 보이면 나이든 것이라고, 비로소 철이 든 것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강산이 이토록 아름다워 보이니 이제 나도 나이들고 철이든 것일까요? 봄 가을에 어르신들이 이곳저곳으로 구경다니시는 것들이 예전엔 소란스러워 보이더니 지금은 참 곱게만 보이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입니다.
올 봄, 물을 듬뿍 머금고 활짝 핀 꽃들, 꽃잎이 제 색을 내도록 화사하게 밝혀주는 맑은 햇살, 파릇하게 피어나는 새싹들, 그리고 한없는 고요함으로 부드럽게 내리는 봄비. 이것들을 보면서,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한 것인 양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교회 집사님 권사님들 모인 곳에 가서, “꽃이 피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어떤 분이 “우리보고 하는 말씀인가요?” 해서 한바탕 웃은 일이 있습니다. 그분께 ‘(착각의) 병이 깊다’고 놀렸습니다만, 이런 병이야 아무런 해없는 것이니,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으로 착각하는 병이 깊은들 대수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이 봄날을 장식하는 모든 것들이 진정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확신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이 봄날을 입장료도 안내고 마음껏 누리고 있으니, 그분이 이토록 화려한 봄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봄을 훔친 도둑이겠지요. 하나님은 봄날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차별없는 선물이지요. 햇볓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두루 비치듯, 봄비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골고루 내리듯, 꽃향기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천지로 퍼지듯 하나님은 모두에게 봄을 통째로 선물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도 선물받지 못하는 이 없도록, 그 누구도 지지리 복도 없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봄날에 하나님은 이 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받고나면, 이 봄날이 덤으로 얹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 봄날을 감히 덤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엄청난 선물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부터가 감당할 길 없는 놀라운 선물이지만, 그분은 자신의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사랑을, 소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죽음으로 가득찬 세상에 생명을, 증오로 가득찬 세상에 사랑을, 절망으로 가득찬 세상에 소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친구
주님은 왜 이토록 지극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amicitia Dei)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찌 하찮은 인간이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분명 주님의 친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심으로 우리가 주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 이 엄청난 우정. 이런 주님의 사랑에 비하면, 봄날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은 덤에 불과한 것이지요.
주님은 친구인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부인해도, 우리는 주
님의 친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친구.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요즘 중학생인 딸이 친구들을 사귀어서 부모는 아랑곳않고 그녀석들과 죽고못사는 모습을 보면서, 친구가 저렇게 좋은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도 부모님을 서운케 할 정도로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던 옛일을 떠올렸습니다. 친구. 우리가 주님의 친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주님의 친구라는 사실은 우리가 이제는 주님없이 살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떠올리면서, 주님을 그리워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친구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친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례
그런데 주님의 친구로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엘리어트라는 시인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합니다. 엘리어트는 4월을 왜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요? 4월에는 차가운 봄비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얼어붙은 땅 밑에서 긴 겨울잠을 자는 나무들을 막무가내로 깨워놓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겨울 기운이 여전한데, 깊고깊은 잠에서 억지로 깨어나 채녹지 않은 굳은 땅을 뚫고 여린 새싹을 피워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래서 잔인한 계절이라는 것이지요.
오늘처럼 비오는 날, 아직 차가운 봄비를 맞으면서도 고요히 서 있는 저 나무들, 그리고 온갖 풀들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깨우침의 길을 가는지 생각하십시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않고 가만히 있는 듯 해도 그들은 한순간도 쉼없이 온 힘을 다해서 물을 끌어올려서 가지끝까지 밀어보내고, 있는 힘을 다해서 꽃을 피우고 새싹을 피워내는 고통스러운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무들만의 일은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이 어찌 나무들뿐이겠습니까? 오히려 엘리어트는 우리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4월은 인간들이 정신적인 겨울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라는 것이지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는 멍하게 지내던 상태를 박차고 일어나서 고통스러운 정신적 순례를 떠나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4월은 우리의 멍한 의식 속으로 차가운 봄비를 내려서 우리를 깊은 정신적 겨울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고통스러운 깨우침의 순례를 떠나게 하기 때문에 잔인한 계절입니다.
지금 대지 위에 봄비가 고요히 내립니다. 우리의 멍한 의식에도 차가운 봄비가 내려야 합
니다. 그래서 우리도 나무들처럼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고통스러운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친구인 우리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 학교에 오고 가는 것이 깊은 깨우침을 얻는 순례이기를 기도합니다. 강의실을 옮겨다니면서 수업을 할 때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의식을 일깨우는 순례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우리 모두 봄비를 맞으면서, 깊은 깨우침을 얻는 순례를 떠나도록 합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곳에서 행하는 순례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깊은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주님의 친구인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서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며 사는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 주님께 선물해야 합니다.
주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 봄비 내리는 날, 우리 모두 정신을 일깨워 순례의 길을 떠나봅시다. 예배를 마치고 이곳에서 나가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순례를 또 시작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순례의 길을 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