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K 총회, 중남미 장로교회와 교류
남미의 국가와 교회
가톨릭교회가 대 부분인 것으로 알려진 중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쿠바장로교회와 선교협력을 맺은 바 있는 본 교단의 총회장 정영택 목사와 장신대 김명용 총장과 김도일 교수, 한국일 교수가 쿠바와 멕시코의 장로교단과 신학대학들을 방문했다. 지난 1월 26일-2월 4일까지 양국가를 방문한 총회의 지도자들은 각 총회의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특히 멕시코 장로교단의 총회장과는 처음으로 양 교단이 선교 협정을 맺고 긴밀한 선교협력을 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향후 구체적인 내용은 해당 실무자들이 협의하기로 했다.
정 총회장의 이번 중남미 장로 교단 방문은 그동안 우리 교단이 선교사는 많이 파송하였지만 다소 외면되어왔던 남미국가에 대한 교단의 관심으로 보인다. 특히 남미 장로교회 중 최대교단인 멕시코장로교회와의 교류는 그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이 계기는 아무래도 2013년 멕시코 장신대 교수로 부임한 홍인식 교수와의 인연이 큰 것 같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미국과 카나다 호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동구권 장로교단과도 교류와 협력이 있어지만 이번 남미방문을 통하여 PCK 교단이 세계의 모든 장로교회 형제교단들과 교류하므로 세계 속의 한국장로교회의 위상을 높이고 다양한 장로교회의 경험과 역사를 배우고 신학적 지평을 다변화 하고 선교의 영역도 새롭게 여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번에 멕시코 장로교회와는 현지 장로교회가 없는 중북부 지방에서의 개척선교를 교단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하여 한국 선교사들의 참여를 요청했다고 한다. 멕시코장로교회측은 협정체결이 되면 파송되어 오는 한국 선교사들에 대해 종교비자 수속과 기타 체제에 필요한 제반사항 및 개 교회 형편에 따라서 재정적 협력도 할 수 있음을 피력했다. 또한 파송선교사에 대하여 현지 신학교를 통한 언어 수련과 정착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움을 줄 것을 약속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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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장로교단 지도자들과 함께 한 정영택 총회장 | ||
또 정 총회장과 장신대 김명용 총장은 멕시코신학대학 총장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과 미팅도 가졌는데 2년전 홍인식 교수가 멕시코 장신대 교수로 부임을 하면서 교류에 활력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멕시코 장신대 유일의 한인 교수인 홍인식 목사는 "멕시코 장로교단은 타 지역의 교단과는 달리 어느 정도 재정적 능력과 인적 재원을 갖고 있는 교단으로서 본 교단과의 동등한 입장에서 활발한 선교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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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 부터 홍인식 교수, 정영택 총회장, 김명용 총장, 김도일, 한국일 교수와 현지 지도자들 | ||
정 총회장은 29일에는 쿠바장로교회의 총회에 참석하여 인사했는 데 쿠바장로교회와는 본 교단이 이미 선교협정을 맺은 바 있다. 홍인식 교수는 이전에 쿠바에서 선교활동을 한 바도 있다. 정 총회장은 인사에서 “쿠바 교회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복음을 위해 경주해 온 노력들에 대하여 격려”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쿠바 교회는 한국 교회의 섬김과 사랑에 대하여 감사를 전했다.
특히 정 총회장의 쿠바 방문에 동행을 한 장신대 김명용 총장을 비롯해 한국일 김도일 교수 등은 쿠바 개신교 신학대학(Evangelical Seminary of Theology in Matanzas Cuba)을 방문하고 양 교간 신학교류 등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앞으로 장신대와 쿠바 개신교 신학대학은 학생과 교수, 컨퍼런스, 심포지엄, 세미나와 강의, 공동 연구 및 참여 등을 실행하며 프로그램을 교환하기로 했다. 또한 신학 교육과 연구의 발전에 관련된 공유 자료를 교환하고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 및 학술적인 협력을 위해 필요한 사안들을 조정해 나가기로 약속했다.
정 총회장의 이번 쿠바 방문과 안내는 현재 쿠바 선교사로 사역중인 김명기 선교사가 담당했는 데 최근 "1961년 쿠바 혁명으로 시작되여 지난 53년간 지속되어 온 쿠바와 미국의 적대관계가 청산되고 새로운 역사의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 만큼 이번 총회장님의 쿠바 방문이 더욱 뜻깊었다" 고 평가하고,"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신앙과 신학을 지켜왔던 쿠바 교회의 노력과 헌신이 이번 양교의 협약 체결로 한국의 신학교육에도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바람을 피력했다.
교황 2월 3일 로메로 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공식 인정
프란치스코 교황은 3일 바티칸 시성성 회의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신앙에 대한 증오 때문에 살해됐다고 선언했다. 엘살바도르 군사 정권에 맞서며 가난한 이들을 대변했던 남미 해방신학의 상징적 인물 오스카 로메로(1917~1980) 대주교의 죽음이 순교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 동안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은 그가 살해된 것이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난한 민중을 도우려는 정치적 행동 때문인지를 두고 논쟁을 거듭해 왔는 데 남미 해방신학을 지지한 그를 순교자가 될 경우 해방신학과 마르크시즘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바티칸의 일부 세력이 그의 시복을 꺼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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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 주교 | ||
취임 직후 바티칸의 분위기를 바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에 대한 걸림돌도 제거했다. 교황은 지난해 8월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편에서 "로메로 대주교를 복자(福者)로 선포하는 것을 막던 교리적 문제가 이미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해결됐다"면서 "시복 심의 절차가 교황청 시성성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전통적으로 순교는 죽음으로 가톨릭 신앙을 지킨 경우로 한정됐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목을 하다 죽어도 순교로 인정할 것을 검토하도록 신앙교리성에 요청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엘살바도르에서 농민과 지주 사이에 벌어진 토지분쟁이 정부군과 좌익 반군 간 내전으로 번져 1980~1992년 모두 7만 명이 희생됐다. 당시 우익 군사 정권의 독재와 인권 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했던 로메로 대주교는 1980년 미사 도중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남미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로메로 대주교의 삶은 1993년 할리우드 영화 ‘로메로’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졌다.
쿠바와 멕시코 어떤 나라인가?
사실 쿠바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약간은 생소하지만 최근에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가 해소되는 등 국제사회에서 쿠바의 위상과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그 동안 쿠바와 미국의 적대적 관계는 쿠바의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쿠바의 반정부 지식인들을 대표한 카스트로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하므로 적대적 공존을 가져온 것을 말한다. 이후 쿠바는 북미로 부터 많은 견제를 받자 카스트로의 혁명동지인 체 게바라를 통한 중남미 국가로의 혁명수출을 한다. 이로 인하여 더한 경제제재와 군사적 압력을 받았지만 국제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과 국민통합, 중남미 국가들의 지원을 통하여 유일하게 정복 당하지 않은 채 서서히 자본주의 길로 이행해 온 특수한 역사를 가진 나라로 알려졌다.
쿠바는 완전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등으로도 유명하다. 또 수도 아바나는 세계문화유산이며 라틴 음악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멕시코는 미국 대륙과 붙어있는 유일한 나라이고 중남미 국가를 대표하는 나라 중 하나로 많은 자원을 가진 나라이다. 브라질과 더불어 종교적으로도 개신교가 큰 성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남미 거의가 가톨릭을 종교로 갖고는 있지만 알고 보면 특히 도시의 민중들은 오순절 계통이나 감리교, 장로교회 교인이 많으며 이들 교단들은 작지만 독자적으로 활발한 선교와 활동을 하고 있다.
중남미의 역사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주류 사학의 배타적 민족주의와 유럽중심주의로 인해 그동안 한국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만큼이나 한국사회에서 라틴아메리카는 혁명의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의 상징적 장소로서 한 쪽 면만 부각되어, 왜곡된 편견 또한 동시에 받아왔다. 미화되지도 폄하되지도 않은, 그래서 온전히 그 자체로 숨 쉬는 라틴아메리카를 알기 위해서는 서양제국주의의 침탈 이후 그 어느 대륙보다도 민중들이 치열한 저항을 펼쳐졌던 근대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나라인 멕시코, 쿠바, 칠레의 정치와 역사는 우리나라 만큼이나 역동적인 근현대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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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부터 체 게바라와 피엘 카스트로 | ||
남미에서의 체 게바라
55년 7월,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서 운명적으로 쿠바의 의대생으로 혁명지도자에서 초대 대통령이 된 피델 카스트로 형제와 만나 ‘양키’라는 적에게 착취당하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구해낼 방안을 놓고 밤새 토론을 벌인다. 여명이 밝았을 때 카스트로는 게바라에게 제안한다. “압제자 바티스타로부터 쿠바를 해방시킬 대장정에 동참하자”고. 혁명동지들로부터 ‘체’(기쁨 슬픔 놀람 등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로 불린 게바라는 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서 59년 1월 마침내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 뒤 쿠바 혁명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한 그는 검은 베레모와 낡은 군복 차림으로 남미 각국을 돌며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혁명 활동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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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실천문학사) | ||
하지만, 체 게바라는 정부의 요직을 버리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 자신을 또 다른 사지를 향해 스스로 몰아갔다. 65년 그는 결국 내전 중이던 콩고로 날아갔고 이듬 해엔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혁명을 위한 게릴라전을 감행한다. 그러나 대오를 이탈한 부하의 배신으로 그는 최후의 결전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유언은 짤막했다. “카스트로에게 전해주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은 아니라고.” 인간됨 가운데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 그의 정직성에 있다. 그는 대사로서 외국을 순방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소련의 패권주의도 가차없이 비판했다. 그런 이유로, 소련에 의지하고 있던 카스트로와 소련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 마르크시즘이란 순수함 자체였다.
남미 사회주의 지도자의 맏형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듯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반대하는 중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이끄는 맏형 역할을 하였다. 육군 대령출신으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선거를 통해 혁명을 성공하여 장기 집권을 한후 건강악화로 세상을 떠난 그는 남미에서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였다. 그의 즉흥적인 정책 결정, 방만한 정부 재정 운영, 인권과 언론 탄압 등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국민들과 중남미 국가에 미친 영향력을 실로 막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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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고 차베스 전기, "혁명은 TV로 오지 않는다" | ||
2000년 재선에 성공한 뒤에는 외국 자본이 소유한 석유회사를 국유화시키고 채굴, 정유 산업의 50%를 국영회사로 돌리데 성공하므로서 국내 기반을 탄탄히 함으로써 중남미는 물론 세계 질서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최계 최대의 석유매장량을 기반으로 쿠바를 비롯한 중남미의 가난한 나라들에 값싼 석유를 공급하면서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끊임 없는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가 헌법 개정을 통해 장기 집권을 해온 것은 분명하지만, 미국과 부자들의 돈줄을 죄고 베네수엘라의 많은 사람들을 가난으로부터 구해낸 것도 분명하다
| 우루과이 호세 무이카 대통령 | ||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 대통령
우루과이 46대 대통령 호세 무히카도 유명하다. 그는 중미 혁명인 쿠바혁명 영향으로 60~70년대 우루과이 무장게릴라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70년대에 군사 정권이 들어선 후 14년간 수감되기도 했다. 85년 민정 이양 후 석방되었으며 2005년 ~ 2008년 바스케스 대통령 행정부의 농목축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그후 2010년 3월 건국 이래 최초의 좌파 계열의 대통령이었던 타바레 바스케스에 이어 5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그의 재산은 1987년식 비틀 자동차 한 대뿐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검소한 생활을 하는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는 1분에 군사비 20억달러를 쓴다. 나는 한때 정의로운 전쟁이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돈을 빈곤 퇴치에 써야 한다”고 말했다. 누가 그를 “라틴아메리카의 만델라” 라고 칭하자 그는 “만델라는 메이저리그에 계셨던 분이고, 나와는 노는 물이 달랐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그저 동네 아저씨들 중 한 명이며, 그들이 체포하니 감옥에 간 것일 뿐이다. 그걸 신비화하지는 말자”고 했다고 한다.
니카라과, 칠레의 역사
니카라과의 산디노의 미국을 향한 끊질긴 투쟁이나 볼리비아의 아옌데 정권도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피노체트 장군의 구테타로 실각하여 친미정권을 세운다. 당싱 미국의 자원업자들은 칠레의 구리광산을 탐내고 있었는데 이를 국유화 하려면 민족주의자인 아옌데를 실각시킨 것이다. 중미의 나라들은 자국의 풍부한 자원을 통한 국민복지를 실현하지 못한 것은 이렇게 북미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위성정권을 통하여 민족주의자들은 악압하고 종속적 모델로 그 발전이 더디어 졌다. 그래서 남미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은 일국의 문제가 아닌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고 혁명수출을 위하여 순교적 삶을 산 체 게바라 같은 젊은이들은 지금도 남미의 우상이 된 것이다.
브라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 룰라와 그의 후계자
브라질의 첫 여성 대통령인 지우마 호세프 노동자당(PT) 후보가 2014년 재선에 성공했다. 브라질 국민은 성장률 하락과 물가 상승 등 불안한 경제 상황에서도 12년간 강력한 사회보장 정책을 펼쳐온 노동자당을 또다시 선택했다. 그의 재선 성공으로 노동자당은 2003년 룰라 전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부터 2018년까지 16년간 정권을 유지하게 됐다. 전문가들은 노동자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룰라 전 대통령의 강력한 빈곤층 지원 프로그램과 일자리 창출 노력 덕분에 저소득층에서 탈출한 중산층이 ‘룰라의 후계자’인 호세프를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신(新)중산층은 전체 유권자의 35%에 달한다.
| 브라질의 노동자 출신 전 대통령 룰라와 2014년 재선한 호제프 대통령 | ||
해방신학 왜 나왔나?
남미에서의 가난은 자원의 부족과 게으름이 아니라 외세에 의한 억압의 정치와 대외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민중의 수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미에서의 자유란 억압적인 정치체제와 이데올로기로 부터의 해방이다. 그래서 이 해방신학은 우연히 생기거나 연구된 것이 아니다. 또 해방신학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회학자나 신학자들이 시작한 것이 아닌 가난한 빈민 사목의 현장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모든 해방신학자들은 강단학자들이 아니라 사목활동을 한 사제였다. 이들의 교구의 현실이 주교들에게 보고되고 그 바닥으로 부터의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중미 주교회의에서 해방신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남미에서의 메델린 선언이나 푸에블라 선언들이 바로 중남미의 현실에 대하여 해방신학을 공식화 하는 유명한 문서가 되었다.
1) 해방신학이란?
1960년대 중반부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 억압, 착취, 불의 등의 사회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겠다는 깨달음에서 시작하였다. 신정통주의, 종교 사회주의, 생태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 등과 더불어 서구의 자유주의적 현대신학을 넘어 이전의 신학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땅의 문제 제국의 문제에 주목하였다. 가난을 개인과 국가의 차원이 아닌 국제적이며 구조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사회 분석의 틀을 마스철학에서 가져왔다고 해서 좌파신학이라고 매도를 하는 것이다. 해방신학의 대표자격인 구티에레즈는 화란의 루팽대학에 유학하며 유럽의 지적인 분위기와 철학적 담론을 자신의 조국인 페루와 남미의 상황을 신학화 한 것이다. 그는 대표작인 의 주저 해방신학, (성염 번역)은 1971년에 나왔는 데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형태의 비참과 착취와 소외에서 인간을 풀어주는 철두철미한 해방’ 이라고 말하고 있다.
2) 해방신학의 태동
서구식 지배에서 경험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바탕으로 남미의 역사적 배경을 교로 하여 출현된 제3세계 신학이다. 15세기 스페인 제국의 정치적 침략에 편승해서 지배자의 편에서 선교정책을 펴옴으로써 억눌리고 학대받는 민중들과는 소외되고 적대되는 가톨릭문화가 형성되었다. 교회가 제도적 부정의 속에 안주하며, 기득권을 보호하는 수구 세력이 됨에 따라 정치민주화와 경제정의실현의 장애요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세기에 와서는 만성적 인플레, 관료들의 부패, 군사독재와 구테타 연속 등으로 정치적인 불안이 가중되었으며, 사회개혁에 대한 의지조차 말살 되었다. 더 나아가서 서구자본에 의한 경제적 종속 현상이 심화되어 가고 의식구조와 생활양식은 구조적인 부정의 속에서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남미 민중들이 이러한 사회적 부정의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대한 반기를 들고 도전한 것과 해방에 대한 의지를 표한 것"이 해방신학의 출발이라고 대표적 해방신학자요 페루의 수도 리마의 사제로도 사역하고 있는 구띠에레즈는 말하고 있다. 인간존엄성을 회복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해방운동은 이러한 사회, 경제적 현상에 대한 남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교회의 선교적 응답에서 출발되었다. 현실을 무시한 주관적 복음에 대한 역반응으로 나오게 되었다.
3) 정치 사회적 배경
대표적인 신학자로 가톨릭 신부인 구스따보 구띠에레스와 브라질 신부 레오나르도 보프가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이 억압당하고 미국의 식민지적 역할에 고정되어 있자 사회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일부 진보적인 신학자들 이 “하느님은 민중의 편에 서시는 민중의 하느님”이라는 신앙으로 반응한 것이다. 이후 미구엘 보니노와 레오나드 보프, 소브리노등도 교회는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을 위해 혁명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기도 한다. 강경파인 토레스 신부는 크티에레즈와 같이 루팽에서 공부하여 산으로 간 사제이다. 그의 마지막 미사의 강론은 유명한데 "나의 교구의 아들들이 지금 남미의 안데스에서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다. 나는 여기 성당에 앉아서 신도들을 기라릴 수 없다.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 나의 양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성례전을 베풀고 추위와 두려움에 떠는 저들의 위로자 지지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이 끝나면 나도 평범한 사제로 돌아와 사목을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안데스 산맥으로 들어가 민족해방운동을 하는 젊은이 들과 총을 든 사제이다. 정부군과 조우했지만 차마 총을 먼져 쏘지는 못하고 사살을 당하여 죽었다. 그의 죽음은 순교인가? 생각해 볼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