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노동자연맹 창립 30주년 홈커밍데이
영등포산선에서 5월 1일 열려
지난 5월 1일(금) 세계노동자의 날(May Day) 오후 6시 뜻깊은 모임이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열렸다. "기독노동자연맹(이하 기노련)"은 지금은 활동하고 있지 않지만 30년전 1985년 영등포 산선과 인천 산선 그 외 야학과 민중교회 출신의 기독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노동운동 조직이다. 이어 유동우(기노련 초대의장, ‘어느 돌멩이’ 저자)선배는 인사말을 통해 “노동운동은 대중운동으로 공개 되어야 하지만 80년대 당시에는 공개는 커녕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며 “그러나 기노련이 ‘교회’라는 테두리를 빌려 그 안에서 노동운동이 대중성으로 공개되는데 일조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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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노련 부의장 한명희 씨(전 콘트롤 데이타 노조위원장) | ||
그러나 어려운 시절에 나름대로 노력한 기노련 운동이 기독교사회운동사와 노동운동사에 있어서 저 평가되어 있기에 새롭게 재조명 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내놓았다. 앞으로 기노련의 활동역사와 자료를 수집하여 발간하는 준비를 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이후 그간 기노련의 경과보고와 역사를 담은 영상을 시청했으며, 이 뜻깊은 모임에 초대 의장인 유동수 씨와 조화순 목사(전 인천산선)과 신철영 선생(전 영산 실무자) 기노련 멤버로 활동한 한명희 의원(현 서울시 의원) 신동욱 씨(기노련 지도부) 이민우 선생(전 교사) 김성훈 목사(주민운동가) 진방주 목사(영산 총무)등이 참석했으며 이후 애찬을 나누웠다.
지금은 자연스러운 이름이지만 30년전 합법적인 노동조합과 운동 조차도 어렵던 시절에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노동자들을 모으고 활동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또 전체 운동의 속에서 부분 운동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거나 간과되던 때였다. 즉 왜 기독교인들이 따로 모이는 운동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들이었다. 사실 기노련 운동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독일과 프랑스등에서 이미 기독교을 기반으로 한 노동자 조직과 정당으로 출현한 바 있다.
당시 기노련 지도부가 그런 사례를 염두에 두었는지와는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운동인자를 확대하고 노동운동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게승 발전하지 못한 것은 외부 탄압이나 운동노선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진보 기독교내부에서의 이해 부족과 당시 막 설립되기 시작한 민중교회(노동교회) 기독교 배경의 야학 등에서의 비협조였다는 조심스러운 반성을 해 본다. 그러나 당시 민중교회도 목회도 초창기로 그 생존자체도 어려운 때인지라 그런 폭넓은 사고를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시 일부 기독교 배경을 갖은 기업주들이 현장내에 신우회나 기독실업인회 등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그 기조는 정당한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설립을 차단하려는 왜곡된 신앙주입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당시 국가주도의 노사문화인 “노사관계의 가족주의“ 였다. 이 구호가 얼마나 잘못된것인지는 바로 그 구호에 잘나타나있다. 업주가 돈을 벌기 위하여 기업을 하고 노동자도 돈을 벌기 위하여 취업을 하는 것인데도 이것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공장일을 집일 처럼“ 이라고 허위구호로 노동자들에게 노동자로써의 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친권적 노사관계로 무한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당시 복음서에 나타난 갈릴리 예수가 말하고 가르쳐준 일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것들을 통하여 민중신학적인 가치들을 통한 노동자 예수의 정신으로의 삶과 운동을 주창했다고 하는 데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실제로 기노련의 초대의장이었던 유동우 씨는 당시 모든 노동자들의 삶의 경로인 농촌에서 도시로 상경한 노동자 생활을 통한 자본주의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난관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한 삶을 사회화한 것이다. 이렇게 삶의 여정에서 기독교신앙으로 변화된 자신의 삶을 통하여 동료 노동자들이 신앙의 힘과 의식으로 깨여나서 예수의 삶을 살아가자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선배다. 그는 자신의 자전적 수기인 “어느 돌멩이의 외침” 이라는 책을 통하여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감동을 준바 있다. 영등포 산선의 송효순의 “서울로 가는 길” 과 함께 당시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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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에서 한 유동우 선생 인터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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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우선생님은 필명 ‘유동우’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노동운동에서 그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환경개선과 노동법준수 등을 외치며 전국의 공장지대를 다니며 노동운동을 한 실천가였다. 6,70년대를 배경으로 도시노동자로 살아가면서 겪는 노동의 삶과 노동조합운동의 경험을 담아낸 그의 자전수기<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본격 노동자 문학의 출발을 알리며 당시 운동권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하는 노동운동가로서 유해우 선생님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외침’으로 다가올까 궁금했다. 지난 11월 21일 정오 인권의학연구소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는 자그마한 키에 약간 구부정한 허리, 하얗게 서리 내린 머리카락, 그리고 안경너머 차갑고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중년을 넘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젊은 시절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벼운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갔다.
청년기부터 노동운동에 헌신하셨는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시절 그 엄혹하던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노동운동에 참여하셨는지요. 기억나는 활동은?
“출퇴근시간도 없이 일하고, 밤샘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성과급이라는 것도 없는 그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기계부품 취급당하는 노동현실이 암담해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어요.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도 해결이 안되었는데, 조화순 목사의 도시산업선교회를 알게 되어 노동법을 공부했습니다. 동료 노동자인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목도하고, 약자에 대한 연민이 있었는데, 현실타파를 위해서는 조직적으로 운동을 해서 개선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현실인식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체험을 책으로 내고 난 다음 전국의 노동현장을 다니며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연을 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소위 ‘학림(전국민주 학생. 노동자연맹)’사건에 연루되어 치안본부 대공분실(일명 남영동)에서 고문피해를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통스런 시간 동안 선생님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선생님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는지요.
(그는 무척 떨리고 어눌하고 쉬엄쉬엄 먼산 바라보며 말했다. 그 때의 상황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고문을 재경험 하는 듯 했다.) “사실 고문이야기 여태껏 해본 적이 없어요, 최근에 와서야 김근태 의장이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갔을 때 그 자리에서 나도 여기서 고문당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죠”(고문은 피해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그 주변의 친지. 친구의 관계까지도 앗아가 버린다. 그래서 고문에 의한 조직사건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선뜻 나서서 자신의 고문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해우 선생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 출소이후 가난한 노동자의 형편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적 정신적으로 황폐화 되어갔어요. 흔들리던 이빨 4개는 이내 빠져버렸고, 갈비뼈에 금이 간 것도 석방 뒤 X-ray를 찍어보고 나서야 알았어요. 극도의 공포감과 악몽에 시달렸고, 불면증이 심해졌어요. 90년도에는 자신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건으로 수사관이 집으로 찾아오자, 아파트 4층에서 뒤쪽베란다를 타고 도망치다 떨어져 발가락 3개가 골절상을 입기도 했어요. 자칫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던 무모한 탈출이었어요.”
학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발생한 사건인데, 최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보상 신청을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늦게 신청을 하게 되셨는지, 진행하시면서 생각하고 느끼신 점과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
유해우 선생은 지금 이렇게 담담하게 지난 일을 반추하면서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과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1년 전, 한 지인의 권유로 정신과적 치료와 인권의학연구소의 트라우마 치료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유를 진작에 할 수 있었더라면…. 아니 지금이라도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그 치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유동우 선생은 지난 11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고문방지 및 고문피해자 보상․치유에 관한 법률안 공청회>에 토론자로 나와 고문피해 경험을 말했다. 2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나온 것이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당시의 고문피해사실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가 용기를 낸 것은 고문피해자들의 삶, 특히 고문당한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