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진 목사, 장신대서 명예박사 학위 받아

인명진 목사, 장신대서 명예박사 학위 받아

   
                      * 장신대 교수들과 함께한 인명진, 이철신 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개교 114년(1901-2015) 감사예배와 기념행사가 5월 12일(화) 장신대 한경직 기념예배당에서 열렸다. 매년 있는 행사지만 이 개교기념행사에는 특별한 순서들이 많다. 학교를 졸업한지 25년이 되는 동문들의 홈커밍데이도 열렸다. 주인공인 올해의 졸업기수는 83기(1987년 입학)인데 가장 많은 입학생(약 600명)으로도 유명한 기수다. 이들은 입학 당시에 학교 건축을 위한 “기여 입학생” 이라는 웃지 못 할 얘기도 돌았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로 학교 이전이 무산되는 빛과 그림자의 역할을 하여 졸업식도 못하고 졸업을 한 동기들이라고 한다.

이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던 김명용 총장은 환영사에서 83기들을 보니 “뭔 일 낼 것 같은 동문” 들로 보인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그 인사말 답게 이들은 통 크게도 학교에 건축기금으로 2억 원을 기부하였다. 그러나 홈커밍데이 행사가 학교에 돈을 기부하는 행사로 진행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다. 학교에 낼 돈 다 내고 다녔고 장신대가 총회의 직영신학교중 제일 넉넉한 곳으로 동문들도 어려운 분들이 많을 것인데 학생들의 복지나 좀 더 의미 있는 곳에 쓰여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이다. 어차피 학교운영은 이사회나 총장 교직원들이 책임지는 것으로 동문들의 홈커밍데이가 기수별 기부금 경쟁으로 가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개교기념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명예박사 수여식이었다. 장신대의 명예박사 선정을 위한 규정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 동안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와 인물은 알 수 없지만 교계에서 공로가 큰 대형교회의 목회자이거나 외국 신학대학의 총장 등 극히 제한적으로 수여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인명진 목사(갈릴리교회 원로) 와 이철신 목사(영락교회 담임)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준 것이다. 이철신 목사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 영락교회의 목회자로 역사적으로 내용적으로 그만한 위상이 있다고 보여진다. 학위 예식을 진행하는 장신대 대학원장 윤철호 목사는  "이철신 목사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영락교회 담임목사로서 봉사 사역, 통일사역, 기독교학교사역을 훌륭히 했다" 고 추천 사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인명진 목사의 명예박사 학위는 그분의 이력을 아는 분들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의 명예박사 추천서 사유는  "인명진 목사는 본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영등포노회 목사로서 40년간 목양, 반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 헌신하였고, 그의 헌신은 하나님 말씀을 교회와 사회에서 실천한 말씀이어서 그의 예언자적 사회적 공로를 높이 샀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인명진 목사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로 이제 장신대가 그야말로 모든 동문들을 품는 학교가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반갑다는 소식들이다. 그 동안 외형적 목회 성공자, 기부자, 교단과 학교의 경영과 방침에 부합한 사람만 알아준 것 같다는 소외감이 있었는 데 이번에 인명진 목사의 박사학위 수여를 통하여 동문들의 다양한 사역을 폭넓게 인정하는 첫 케이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인명진 목사의 명예박사 수여가 바로 그런 전환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인 목사는 한신대를 졸업하고 1969년에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여 1972년에 65기로 졸업을 하였는데 동기 중 막내였다.

그는 한국신학대학교 학부에 다닐 때 군목시험을 통과하였고, 신대원을 졸업하면 바로 군목으로 입대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통한 박정희 군사정부의 정권연장을 반대하여 동기들과 삭발하고 총회 사무실을 점거농성한다. 또 학창시절 영등포산업선교회가 관여하는 현장의 한 청년이 공장 구사대에 의하여 죽는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영등포 산선과 관계를 맺게 되는 등 시국사범으로 군목입대를 하지 못하게 된다. 그의 동기들로 이름이 익숙한 분들로 김을영, 김화자, 이용식, 이천우, 정영환, 황승용, 임신영, 홍길복, 박노원, 장성규, 정완모, 정병모, 최대준, 허달수, 안수도, 최 승, 최기준, 한철완, 황태주, 이광선 등이 있다.

졸업 후 영등포 산선에서 조지송 목사의 지도하에 노동훈련을 하고 영등포 산선에서 사역을 시작하여 1972년에서 1984년까지 총무로 있었다. 국가적으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어려운 정치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의 처지와 인권을 위한 그 현장을 지켜왔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노동자 조직인 한국노총은 어용노조들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산선회원들이 있는 현장들을 중심으로 민주노조를 지원하고 바꾸는 일을 노동자들과 함께 하며 기업가들의 체불임금과 노동탄압을 지원하고 막아냈다. 이것은 어디까지가 선교인가 하는 보수 기독교의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막상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인 목사로써는 그것을 따지고 피할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영등포 지역의 방림방적, 대일화학, 남영나이론, 원풍모방, 해태제과, 롯데제과의 노조들의 다수가 산업선교 회원들이었다. 훗날 한국노동운동사에서  그 기간 동안의 역사는 영등포 산선의 자료를 보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민주노조를 지원해가며 산업선교의 직무를 수행하다가 YH사건 및 여러 현장지도와 지원, 강연과 파업에 연류되어 4차례 감옥을 드나들게 된다. 그때 정보부에 잡혀가 고문과 매를 맞아 지금도 그 후유증이 있다. 감옥에서 나온 인 목사에게는 육신과 정신이 극도로 피폐하여 휴식이 필요했다. 또 신군부의 탄압과 민주세력에 대한 용공조작으로 어려운 정국이었다. 또 교회의 보수적인 인사들과 목회자을 앞세워 이념공세를 하였다. 영등포 산선은 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영등포 노회의 산업선교위원회(위원장 이정학 목사)는 마지막까지 영등포 산선과 실무자들을 지켜 주었다.

조지송 목사는 인 목사에게 휴식과 재충전을 위하여 호주 교회의 선교 목사로 파송되는 것을 허락한다. 호주 교회에서는 인목사가 신대원 시절 구약성서를 강의한 바 있는 변조은(죤 브라운) 목사의 전폭적인 배려가 있었다. 호주 교회에서 선교목사로써 공부하고 회복을 한후 귀국한 1987년의 한국은 신군부의 전두환 정권을 끝장내려는 전국민의 열화와 같은 민주화의 격변기였다. 그리고 인 목사는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의 대변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호주에서 공부한 영어가 해외 언론사들을 통하여 빛을 발한다. 그러나 야권은 김대중-김영삼의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였고 각자 대권에 출마하는 분열로 인하여 민정당의 노태우가 승리하게 된다.

   
 

당시 인명진 목사는 영등포 산선을 사임했고 갈릴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본에서 활동했던 동지들이 양김으로 분열되었지만 인 목사의 균형잡힌 정치적인 탁월한 감각은 양측의 핵심 브레인들의 구애 대상이었다. 그것은 재야 세력의 구심에는 진보 기독교가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사정을 답례사에서 언급하기도 했는 데  "현실정치에 입문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끝까지 목사로 남은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고 하였다.  당시 김영삼씨는 길고 긴 자신의 야당생활을 청산하고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과 3당 합당을 한다.

역사는 그것은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 위한 변절이라고 하지만 그렇게만 간단하게 기록할 수 만은 없다. 김영삼은 집권 후 군대내 경상도 사조직 하나회를 해산했고 전두환, 노태우를 국가 내란죄로 감옥에 보내는 등 5공청산을 주도한다. 또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 제의와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김대중의 집권을 위한 정지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결코 할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는 이렇게 그에게 민주화를 위한 여정의 걸림돌들을 제거하게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김영삼씨가 경상도를 기반으로 한 확고한 지지가 있었기에 이후 전라도 사람인 김대중의 집권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경상도를 위시한 보수 수구세력들의 저항과 도전으로 지금과 같은 과거사 규명, 민주화운동명예회복, 군 의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남북관계의 진전등 수많은 민주적 조치들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란 한쪽의 시각으로만 보면 안된다는 교훈이다.  그후 인명진 목사는 김영삼 정부의 추천으로 KBS의 이사와 행정개혁위 위원, 부방위 위원으로 위촉을 받았는 데 그것도 그 개인이 현실문제에 대한 연구와 노력 시대에 뒤지지 않는 기독교적인 시각과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쓰임을 받는 것이지 목사라고 해서 그런 역할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언론에서의 단골 토론자로 서는 것은 그런 이유다.   

또 과거 목회적 사역에 머문 목사의 위상을 정치 사회적으로 넓혔다는 의미에서 그 역할도 재평가 되어야 한다. 그 일로 인하여 다소의 오해를 받았지만, 인 목사는 어디까지나 재야인사로 기독교를 대표하는 양심의 목소리와 역할을 가지고 참여한 것이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그때 부터 인목사가 운동권의 음지에서 양지로 나간 사람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런 애기는 인 목사만이 들을 얘기는 아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친 정부적 친 기업적 형태에 비하면 사실 욕먹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일말의 애정이나 관심이라고 할까?  다만 인목사 자신이 PCK-URM 후배들에게만은 지금 까지도 늘 미안한 마음으로 빚진자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왔다는 것만은 알기를 바란다.   

인 목사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 자신의 시대에 치열하게 노동자들을 위한 삶을 살았고, 이후 주어진 공적 영역에서의 자기역할을 한 것이지 정치권을 기웃거린 정치목사는 아니다. 이후 한나라당의 윤리위원장까지 지내며 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이것도 역사가들에 의하여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본 바 그 또한 목회자로서 처음 지평을 여는 그 일을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정당 입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교인들의 동의를 얻어 참여한 했다. 그렇기에 그의 이런 결단은 개인적인 상황이 아니라 시대와 환경이 준 산물로 여겨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분의 역할이 돋보였던 것은 정당이 원하는 방식의 역할에 안주하지 않았고 신앙과 양심의 윤리를 실현하는 제대로 된 윤리위원장(저승사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그 때문에 사실 상 쫓겨났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 한나라당 내에는 그에 대한 반대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김용갑 의원 같은 사람은 좌파가 왔다고 노골적인 공격을 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사회는 이미 유시민 전 의원이 말한대로 “한나라당 집권한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는 정치적 유연론과 이미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무너졌을 때였다. 김문수 같은 사람은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도 했다. 인 목사가 만약 자기 교인이나 후배들에게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자기와 같은 길을 가자고 말을 했다면 비난받을 수 있지만 변명하지 않고 소심있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간 것이기에 책임 있는 한 존재로서의 그의 주체적인 삶을 일방적으로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인 목사가 이번에 장신대에서 명예박사를 수여받은 것은 이런 정치적 여정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한 시대 가장 힘들고 어려운 환경속에서 가장 어려게 살았던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동행과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보여진다. 특히 그가 힘들고 어렵게 사는 노동자들의 삶의 한 복판에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희생적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어준 사역을 평가한 것이다. 인 목사는 이 외에도 산업선교역을 정리한 이후에도 교단의 목회자운동 총무와 예장 인권위원회 를 창립하고 초대 총무로서의 역할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런 인 목사의 행보는 상당기간 교계에서 외면 받는 인사였다. 동기들 심지어 노회에서도 누구하나 말을 붙이는 사람이 없는 기피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왕따를 당한 사람이었다. 영락교회도 산업선교를 시작한 공로가 있지만 당시 5공 정권 하에서는 산업선교를 하지 못하도록 지원을 끊기도 했었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 이 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주변부에서 외롭게 감당해온 것’을 인정받은 것이다.

인 목사에게 명예박사 학위가 수여된 것은 이후 인 목사와 같이 노동선교의 길을 걷는 후배들 또 힘들고 어려운 사역의 자리에서 롱런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큰 희망과 긍지를 주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가 더 빛나고 의미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산업선교를 가장 먼저 시작한 우리 교단이 아직도 노동현장의 문제를 주제로 사역하는 영등포 산선과 비정규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일에 열심을 내라는 의미로 받아 드리고 싶다.

호주에서 귀국후 한 인 목사는 1987년 구로동에 갈릴리교회를 개척하여 새로운 목회의 지평을 연 분이기도 하다. 민주적인 교회 규약과 갱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선교, 종교간 화해와 대화를 위한 교류와 조기 은퇴를 실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퇴직금을 희사하여 지리산에 자신의 호를 딴 도서관을 지어 헌정했다. 그리고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부산의 일신병원 이사장으로도 일하고 있다. 또 정치 시사토론의 단골 초청자로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과 공적 사명에 대하여 강조하는 분이다. 

     
 

이 번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 답사에서 “변두리 인생을 긍휼히 여기셔서 이런 명예를 얻게 되었다” 는 인사와 같이, 한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사역과 목사를 이만큼 예우해 주고 평가해 준 것에 감사를 전했다. 사실 이런 일은 10년 전만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 만큼 장신대 교수들의 의식과 이사회의 질적 성숙에 대하여 동문들은 한 없는 자부심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인 목사의 충남 당진이 고향으로 부친은 당진농고 교감으로 은퇴하시고 충남노회 노회장을 지낸 고 인치희 장로이며 김옥란 사모(한국신학대학 동문)와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다.

2014년 12월 인 목사는 갈릴리교회에서의 30년 목회를 마감하고 은퇴를 하였다. 은퇴를 앞두고 갈릴리 목회 30년를 정리하는 “위대한 부르심”이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인명진 목사는 신학교 졸업 후 영등포 산업선교에서 사역한 이래 호주 연합교회 선교 동역자, 갈릴리교회 창립자, 1987년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을 지냈고 숭실대 노사관계대학원과 샌프란시스코대학원에서 박사(D.Min)학위를 받은 바 있다. 국제적으로는 CCA 임원과 URM 위원장을 지냈다. 한편 갈릴리교회에서는 22일(금) 6시 30분 인 목사의 박사학위를 감사하고 축하하는 예배를 드린다( 1,2호선 신도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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