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진 목사님에게

                    제주도에서 고희범이 드립니다. 

   
 

제주도 출신이며 CBS기자를 거쳐 한겨레신문 창간에 함께 하고 대표를 지낸 바 있는 고희범기자의 글이다. 외국어 대학을 나와 젊은 기자 시절 함께 하며 존경했던 선배에 대한 기억과 애정으로 공개한 글이다. 인명진목사는 영등포산선 출신으로 87년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을 거쳐 시민운동의 일선에서 당시 야당측 인사들과 가까이 지낸다.

그러나 민자당의 김영삼 대표가 김종필의 국민의 당과 노태우의 민자당과 3당 합당을 하면서 현실 정치에 가까이 하여 김영삼 정권하에서 부방위, KBS이사등을 지낸다. 그리고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거쳐 2017년 박근혜 탄핵과정에서 그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된다.

이렇게 되므로 인명진목사에게 영향을 받고 함께 해온 목회자 후배들과 그를 지지하던 많은 분들의 뜻과는 어긋나게 된다. 이는 명백하게 정의나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해온 그 분의 행보와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이를 안타까워 한 사람중의 한분인 고희범 기자가 정중하고 용감하게 쓴 명문이다. 

고희범기자는 제주 성안교회 출신으로 형님이 장로이고 가족중 일부는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이다. 은퇴후 귀향하여 민주당 후보로 제주도 도지사에 출마를 한 적도 있으나 실패하고 이후 원희룡 도지사 시절 임명직 서귀포시장을 공직을 끝냈다.  

   
 

인명진 목사님!  평화를 빌며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목사님이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하셨다는 소식 듣고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온 국민의 가슴을 찢어놓은 정당이 참회를 거쳐 상식적이고 건강한 보수정당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기여하실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고 여기면서요. 황교안을 대통령 후보로 언급하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인적쇄신은 이미 그 선에서 포기하신 것 같고 이제는 박근혜 사태의 주범을 되살려놓는 일에 매진하고 계신 듯 합니다. 무척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과거의 어떤 사건이 목사님의 철학과 가치를 이렇듯 송두리째 바꿔 놓았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서경석 김문수 같은 이들과 함께 변절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과정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40여년 전 기억이 떠오르면서 궁금증을 넘어 가슴이 아파옵니다.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끄시던 인명진 목사님은 구로공단을 포함한 영등포 일대 공장 노동자들에게 빛이셨고 햇병아리 기자이던 저에게는 그야말로 큰 산이셨습니다. 1970년대 중반, 노동자들의 처우는 열악하기 그지 없었고, 노조 결성은 온갖 탄압으로 불가능했지요. 조용조용 말씀하시는 조지송 목사님과 쩌렁쩌렁 전투적이셨던 인 목사님, 두 분이 이끄시는 도시산업선교회는 ‘도산’ 으로 줄여부르면서 빨갱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였지요.

인 목사님은 어느 날 노동자들의 현실에 관심을 보이는 저에게 인터뷰할 노동자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주) 대협, 남영나일론, 해태제과 등 여러 악덕기업 여성노동자들이었습니다. 화장실을 갈 때는 허락을 받아야 하고 3분을 넘기면 안 됐고, 일을 하다가 졸면 허벅지를 봉제 바늘로 찔린다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사탕을 피탕이라고 했습니다. 셀로판 포장지를 손으로 싸야 하는 노동자들은 평일 12시간, 주말 19시간 노동에 손에서 피가 날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날 눈물겨운 취재를 마쳤을 때 사회부장이 호출을 했습니다. 그는 정두진이라는 분으로 제가 CBS를 떠난 뒤 보도국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취재한 내용을 브리핑하라고 하더군요. 보고를 했더니 “이 내용은 보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해태가 광고주이기 때문이랍니다. 항의하는 저를 향해 “고희범 그거 방송하고 회사 그만 두면 되겠네”라고 비아냥거리는 인간도 있었습니다. 책상을 치며 그러겠노라 했지요. 사회부차장 권영재라는 분이었죠.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목사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노동자들의 눈물은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했습니다. “내 얘기가 보도될 수 있느냐”고 미심쩍어 하면서도 진실을 얘기해준 노동자들의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 목사님께는 부끄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얼마 쯤 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뉴스방송 중에 스튜디오를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조 결성을 방해하는 회사쪽이 깡패들을 동원해 똥물을 끼얹는 만행을 당하고 있는데도 침묵하는 CBS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 시간에 목사님이 기독교회관 7층에 와 계셨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인 목사님 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부끄러웠습니다.

몇 년이 지나 1980년 사북항쟁이 발생했을 때는 제가 정치부 기자 노릇을 할 때였는데 목사님은 사북교회 목사와 연결해줄테니 현장을 취재해달라고 하셨지요. 경찰도 쫓겨나고 계엄령 하에서 아무 것도 보도하지 못하던 기자들도 광산노동자들로부터 불신을 받아 현장에서 쫓겨난 사북은 무법천지라고 알려졌었지요.
사북교회 목사와 통화를 한 뒤 열차를 탔습니다. 안경도 벗고 수첩이나 펜도 지니지 않은 채 사북역에 내렸습니다. 역 광장을 지나 곧장 교회로 가는 길에 광산노동자들의 제지를 받지 않아 사북에 ‘잠입’할 수 있었지요.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현장에 들어가 곳곳을 돌아보고 광산노동자들을 만나 취재를 한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보도통제가 풀린 뒤에야 보도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사북탄광 소유주인 동원탄좌의 불법 비리가 부른 사태였음을 제대로 밝힐 수 있었습니다. 인 목사님 덕분이었습니다.

인명진 목사님. 까마득하게 먼 시절의 기억들입니다.  

조지송 목사님과 함께 인 목사님께서 일구셨던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관은 지금은 교단이 선교사적지로 지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지송 목사님은 4~5년 전 후배들이 80회 생신 축하모임을 열어드렸다지요? 예수의 제자로서 약자의 벗이 되어 온갖 어려움을 딛고 이 땅에 노동운동의 깃발을 세우셨던 인 목사님.
그 사이 목사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도대체 어떤 경험이 목사님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나라를 망친 집단의 수장이 되어 박근혜를 지켜내고 황교안을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어 이 나라를 무슨 꼴로 만드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까?

지금은 할머니들이 되어 있을 그 때 그 어리고 가난한 여공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의 벗이 되어 ‘작은 예수’로 사시던 때를 기억해내보십시오. 이게 당최 어울리는 일입니까? 목사님이 닮으려고 하셨던 예수의 가르침이 이런 거였습니까? 목사님의 친구들이 박근혜를 지키기 위한 구국기도회를 연다는군요. 거기도 가시나요? 목사님이 개척하신 갈릴리교회 신도들에게는 뭐라고 하실 건가요? 

이제는 초라하게 무너져 내린 나의 젊은 시절의 큰 산을 바라보며 너무 답답하고 가슴이 아파 그냥 두서없이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듣기에 불편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녕하십시오. 

                                                             제주에서 고희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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