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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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좀더 자세히 들어다 봅시다. 나아만은 시리아의 장군이었는데 무공을 많이 세워 왕의 총애를 받는 군인이었습니다.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해낸 영웅이면서도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병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나병 즉 흔히 말하는 문둥병 또는 한센씨병에 걸렸다고 하는데 그 병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치라아트’는 문둥병이 아니라 악성 피부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구약시대의 고대근동에서는 한센병은 아직 알려진 바 없으며, 주전 4세기 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서 인도에서 옮겨오게 된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이스라엘로 오게 된 배경에는 전쟁포로로 잡혀 온 그래서 자신의 아내의 몸종이 된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에 의해서입니다. 소년는 자기 여주인에게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나아만이 이 말을 듣고 왕의 허락을 얻어 이스라엘로 가게된 것입니다. 시리아왕은 적국 이스라엘로 가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왕에게 편지를 써줍니다. 이렇게 되니 나아만의 이스라엘행은 단순히 개인적 치유여행이 아니라 오늘날로 말하면 국빈 방문하는 외교적 행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스토리는 나아만과 엘리사가 주인공으로 넘어갑니다. 엘리사는 우선 전전긍긍하고 있는 왕에게 안심하도록 사자를 보내어 자신이 이 일을 처리하겠고 도리어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겠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같은 사건을 놓고 왕과 엘리사의 대응은 참으로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과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의 차이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엄청난 선물도 가져 온 나아만에게 엘리사는 문밖에 나가지도 않은 채 사환을 시켜서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전달합니다. 나아만이 이말을 듣고 화가 난 것은 저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나아만의 말처럼 먼 곳에서 온 VIP를 정중히 나와서 맞아들이고 안수라도 하면서 성의있는 치료를 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백 번 옳은 말로 보입니다. 저도 요사이 병원에 다니면서 의사가 성의없이 하는 것 같으면 은근히 기분히 나쁜데 나아만의 입장에서야 백 번 할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 요단 강이 다마스커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에 뭐 대단하다고 거기에서 씻으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제 입가에도 은근히 미소가 돌았습니다.
오늘 아름다운 나아만의 치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신앙의 가장 주된 화두가 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서”는 신앙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엘리사와 나아만이라는 두 주인공의 태도와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타나는 경계를 넘어서는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먼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섭니다.사실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은 늘 대치관계에 놓인 철전지 원수관계였습니다. 열왕기상 20장에는 시리아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 왕 아합 간의 처절한 전쟁을 치루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22장에는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다왕 여호사밧이 연합하여 시리아와 전쟁을 치루는 장면도 나타납니다. 비단 그 때 뿐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서로 인접하여 늘 대립하고 갈등하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 같은 나라입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1967년의 중동전쟁을 통하여 시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시리아영토 골란고원을 차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골란고원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차지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고 또 다른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상수원으로서 중요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협상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집트에는 시나이반도를 다시 돌려 주었지만 시리아의 골란고원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평화의 먹구름을 끼게 하는 가장 큰 사건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과 이에 대한 미국과 서방국가 그리고 이스라엘의 저지노력입니다. 그간 이란의 핵물리학자들이 여러 명이 암살당했는데 이스라엘 비밀정보국 모사드의가 시행한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공군공격을 계속해서 주장하며 계획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이스라엘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가 알려면 이란과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라는 시아파회교도국가이며 가장 이스라엘에 대해 강경하게 대립하는 회교도 세력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갈등은 현재진형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뿌리깊은 대립을 하고 있는 나라, 그것도 적국의 군사령관의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적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현 국가보안법상으로는 거의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중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러한 민족적 편견이나 배타주의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4:27에서 이 나아만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이라는 자의식이 강한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기적이 이제 이방인들에게서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방인 나아만의 치유사건을 한 예로 드신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한 사람 이방인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치유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예수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예수 시대에 유대인이 이러한 행동은 역사 이래로 수많은 나라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오랫동안 주변 국가들에 의해 침략과 피해를 당해왔기에 이러한 민족적배타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 엘리사의 신앙을 새롭게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엘리사는 “부와 권력”의 경계를 넘어선 신앙인입니다.
사실 나아만은 당시로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영웅적 무인입니다. 시리아의 2인자 실력자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왕의 총애를 입고 있으면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국민적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가 엘리사에게 주려고 가져 온 선물을 보면 더욱 놀랄만 합니다. 성경에는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옷 열 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한 달란트가 대략 32kg이고 한 세겔은 대략 30mg인데 그렇게 계산해 보면 은 340kg과 금 90kg이 되고 오늘날 명품 옷이라 할 수 있는 대단한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날 현금으로 치면 수십억원 어치의 선물입니다. 이정도 선물을 가져올 수 있는 나아만의 부가 또한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기술 했듯이 이러한 부와 권력 앞에 조금도 주눅 들거나 유혹받지 않고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너무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권력이나 부의 위력에 대해 이렇게 초연하기가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에 오랜만에 저희 고등학교 반창회를 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사실 저는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동창회에 잘 나가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 날은 연락하던 친구가 자꾸 이번에 보건사회부장관이 된 임채민이 한 번 식사 낸다고 하니 꼭 참석해 달라고 몇 번씩이나 전화를 했습니다. 그 날 마침 장모님 문병으로 강남에 갈 일도 생겨 오랜만에 나가 보았습니다. 30여명 이상이 모였는데 우리반 모임으로는 최고 많이 왔다고 합니다. 그날 채민이가 준 보사부장관 시계도 하나씩 받아 오면서 별것도 아니지만 권력의 작은 선물을 받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위의 경계”를 넘어서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본문이 보여주는 바 작은 자‘가’(혹은 ‘도’) 은밀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강대국 시리아 군사령관의 고질병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고 예언자의 신앙으로 고침을 받고, 그가 야훼만 섬기는 사람으로 개종한 큰 사건은 ‘포로 된 작은 여자 아이’의 확신에 찬 말 한마디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는 작은 자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큰 자를 변화시킨 사건이요, 작은 자가 큰 일을 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기적의 종결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나아만 옆에 있던 그의 부하와 종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전쟁포로 계집종과 시리아의 종들이라는 미약한 자들이 합작하여 큰 일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도구와 대리자는 종교적으로 공식적으로 임명된 자들과 예언자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포로된 작은 자’와 ‘예속된 종’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출발시키고 완성한 것을 보면서 여러 가지 압박 속에서 시달리며 어려움을 겪는 현대의 ‘미약하고 작은 자들도’ 각 자의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큰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성취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작은 자도 큰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작은 자에게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의 큰 일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제 교회위원회에서 항존직 선출직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문득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쁨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 교회에서의 작은 자의 목소리와 외침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때에 가능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경계를 넘어서는 신앙인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민족과 부와 권력, 그리고 지위의 경계를 넘어선 자유와 해방의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기쁨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