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집담회(1970~90년대)
(사) 한국기독교 민주화운동(이사장 안재웅박사)이 주관하는 한국민주화운동에서의 기독교의 참여에 대한 자료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연속 모임이 지난 8월 23일(화) 오후 4시부터 종로 5가 기독교회관 2층에서 열렸다. 모임은 정상시목사(안양 안민 은퇴)의 사회로 정명기목사(광야 은퇴)의 기도로 개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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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측인 민주화운동 이사인 이광일목사(기장 은퇴)의 환영사에 이어 황홍렬교수(부산장신대)가 준비한 "민중교회운동 30년(1970-1990)의 회고와 전망"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자그 마치 150쪽 분량의 원고를 준비했다. 황홍열목사는 예장 출신으로 사당동에 민중교회인 친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뜻한 바 있어 영국머밍햄에서 민중교회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부산장신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데 올해 은퇴다.
이 발제에 대한 논찬은 박종렬목사(송림사랑방 은퇴)가 했는 데 인천지역에서 민중교회를 개척한 바 있다. 다른 발표는 감리교단 소속으로 부평 광야교회를 개척하고 이후 인천산선 총무를 지낸 김정택목사가 감리교 교단에서의 민중교회에 대하여 발표했다. 감청 회장 출신으로 EYC회장 시절에 YWCA위장 결혼식 사건에 사회를 본 경력이 있다.
기독교 장로회는 이춘섭(부안 금암)가 했는 데 성남 주민교회를 거쳐 성수산선 총무를 지냈으며 이후 부안 복지관을 거쳐 농촌 금암교회서 목회중이다. 기장은 이미 한신대 자체가 교수들이 선진의식화가 되여 작지만 가장 문제시 되는 대학이었다. 학교서 쫒겨난 학생들을 모아 선교교육원 과정으로 목회자가 된 분들도 수용하여 신학자나 운동가들이 가장 많이 나왔다.
이에 비하여 장신대 현대신학연구회(초대 회장 이근복목사)가 조직된 1982년 이후 배출된 신학생들이 중심이지만 영등포산선이라는 토양이 아무래도 가장 많은 민중교회 헌신자들을 양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장의 원고는 김영철목사(인천 고백교회 설립자)가 준비했으나 발표는 성수삼일교회 정태효목사 개인사를 중심으로 보완했다.
끝으로 질의와 응답을 거쳐 성남 주님교회 설립자이시고 은퇴하신 이해학목사가 한신대 재학시절 시작된 성명서 낭독으로 출발로 남산 부활절집회, 도시 빈민활동을 거쳐 1970년 후반 성남대단지 사건이후 성남에 정착하여 성남지역의 대표적 민중교회 시민운동의 메카로 자리한 얘기를 간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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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교회운동 태동은 여러갈래다.
한국민중교회의 태동은 개인사와 지역적으로 여러사건들을 통하여 제기되고 설립된다. 교단의 분위기로는 아무래도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기장을 중심으로 하여 주민교회, 동월교회, 구로동 사랑교회등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 단초는 이미 1970년 초 청피 전태일열사의 분신으로 사회참여가 시작된 KSCF(기독학생회)을 통해서다.
또이후 유신헌법으로 인한 긴급조치 발동후 개신교 신학생들의 저항에서 시작된다. 물론 그 이전엔 한일협정 반대등 민족정기와 민주화를 열망하는 선배 목회자들과 지식인들의 참여가 선행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논하는 민중교회운동은 기장과 감리교 예장의 청년회 전국연합회의 성격변화와 이들의 신학교 입학과 학교에서 쫒겨난 운동권 학생들의 존재이전도 한몫한다.
이날 각 교단의 역사와 사정을 정리하여 발표한 원고에는 각 교단에서 세워진 교회들의 설립일자와 목회자 이후 통합과 역사가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외에도 각 교단에서 자발적으로 기성교회식의 안정화와 대형화 교파전도를 거부하고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민중지향적 신앙공동체를 추구하게 된 것인데 그 배경에는 민중신학이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또 당대 지식인 한완상, 이영희교수, 송건호기자, 한승헌변호사등 지식인들의 양심에 대한 탄압으로 해고와 해직으로 동참하게 된다. 또 한신대 안병무 문익환 연대 서남동, 이대 서광선 교수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문동환, 홍성현, 김용복 박사등 미국등 민주주의 선진적에서 공부한 연구자들의 참여도 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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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중교회 연합의 창립
1987년 각 교단의 젊은 목회자들이 공단이나 빈민 도시에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들이 세워지게 된다. 다만 예장의 경우는 영등포산선의 왕성한 활동을 배경으로 계획적으로 더 이상 계승할 수 없는 산업선교 활동을 이어가기 위한 골욕지책으로 노동교회를 착안하는 데 인명진 목사의 아이디어다. 감리교도 조승혁,조화순, 김동완목사와 기장의 김경락,이규상,권호경목사등도 그런 토양을 제공한 분들이다.
예장은 장신대 졸업을 하는 전도사들중 지원자를 뽑아 9개월 노동과 훈련을 하게 하고 지역을 정하여 파송하는 형식으로 상당기간 배출하게 되는 데 약 60여명이나 된다. 이 점은 다른 교단과 비교된다. 기장과 감리교의 경우 학생운동을 하다가 구속경력을 갖은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향린교회등 진보적 지식인들이 소속된 기성교회와 태백의 선린교회(신성식목사 이후 원기준목사)등도 있었다. 이후 민중교회운동에서 다양한 층위의 단체들이 나오는 데 감리교의 "고난함께" 나 교파를 초월한 "예수살기" 예장의 "현신이나 건목협" 등으로 분화되기도 했지만 달라진 시대의 과제를 고민하며 사역을 함께 한 동역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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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에서 가장 먼져 세워진 성수삼일교회(유재무)는 뚝섬에 1983년 가을에 설립된다. 이후 안양 버린돌교회(박진석)와 대전 빈들교회(김규복) 대구 달구벌교회(안기성)가 세워진다. 이후 1987년 소위 노동자 대투쟁으로 밀리던 정부와 기업들은 노동운동을 폭력화로 몰아 탄압하기 위하여 흑색선전을 하는 것을 계기로 민중교회 목회자들이 나선다.
NCCK에서 항의 농성을 하다가 진원지인 전경련을 항의 방문하는 방향으로 급선화하여 25명이 준비하여 점거농성에 들어가게 된다. 이 일로 조화순,장성룡,이근복,이광호목사가 구속되게 되고 후속 모임을 하다가 민중교회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한국민중교회연합을 조직하여 초대 회장으로 김광훈목사(구로 사랑교회)가 출범한다.
그러나 민중선교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한민연만 그런 목회를 한 것은 아니다. 그외 지역의 기성교회의 성격을 바꾸거나 빈민이나 주민을 대상으로 한 마을목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모임에서 언급되는 이름은 아무래도 당시 조직적인 활동을 한 곳을 대상으로 언급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사업회는 9월엔 기독교 노동운동에 대하여 10월엔 기독교농민운동, 11월에는 기독교 빈민운동에 대하여 계속해서 자료을 모으고 집담화를 진행할 예정이다. 사업회는 이미 목회자운동, 기독교 여성운동등에 대해서 정리한 바 있다. 이런 자료들은 NCCK가 준비하는 100주년 자료집에도 담겨질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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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홍렬 교수의 강의록
1970~1990년대 민중교회운동의 회고와 전망
1970년대 민중교회운동에 참여한 교회는 산업선교, 수도권, 사선 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이 가난한 지역에 세운 교회들로 제한하고, 1980년대와 1990년대 민중교회운동에 참여한 교회는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이하 한민연)에 소속된 교회들을 범위로 한다. 앞으로 성공회 나눔의 집이나 공부방, 탁아소들을 포함한 민중교회운동의 연구가 필요하다.
1970년대 민중교회운동의 배경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운동, 도시산업선교와 도시빈민선교이었다. 주민교회(1973)와 동월교회(1976)는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가 각각 이해학 전도사와 허병섭 전도사를 파송해서 설립되었다. 희망교회(1975)를 설립했던 정명기 전도사, 뒤이어 목회했던 김정택 전도사와 김달성 전도사 산업선교, 수도권, 사선,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70년대 민중교회운동의 의의는 1980년대 민중교회운동이 다양화, 전문화되어가는 것을 주민교회는 자체 역사로, 그리고 허병섭 목사는 자신의 삶으로 그런 변화를 보여줬다. 1970년대 민중교회에서 봉사한 신학생들이 1980년대 민중교회 목회자들이 되었다.
1970년대 민중교회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건이 전태일의 분신이었다면, 1980년대 민중교회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건은 광주민중항쟁이었다. 1980년대~1990년대 민중교회운동은 형성기(1983-1987), 발전기(1988-1992), 변형기(1993-1997)로 시기 구분을 할 수 있다. 한민연에 속한 민중교회의 절반 정도가 형성기에 설립되었다.
형성기 민중교회의 현실(실태조사에 근거)과 민중교회 목회자들의 자기 이해 사이에 괴리가 있었다. 이런 괴리는 당시에는 민중이 민중교회에 참여하리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중교회운동의 발전기는 ‘형식적 발전’과 ‘실질적 정체’의 시기이었다. 한민연의 창립(1988), 지역 민중교회운동연합의 조직, 세 교단 민중교회운동연합의 설립, 한민연의 다양한 활동이 있었다. 이 시기 민중교회 목회자들은 운동의 관점으로부터 신앙공동체의 관점으로 전환했다. 효과가 크지 않은 것은 형성기의 민중교회운동에 대한 자기이해가 ‘잘못된 관성’으로 이 시기에도 영향을 줬기 때문이었다.
변형기에 민중교회운동은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로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상실했고, 문민정부의 ‘개혁’으로 사회학적 근거가 약화되었다. 목회자들은 영성, 민중목회를 강조했다. 교단 민중교회가 명칭을 변경하거나 해제되었고, 한민연도 한국민중교회목회자회(1998)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민중교회들은 노동선교, 지역사회선교, 이주노동자선교, 장애인선교, 환경선교, 청소년선교 등으로 다양화, 전문화 되어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1990년대 민중교회운동의 의의는 성서를 민중의 품으로 돌리고(복음대화), 예전의 개혁, 지역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전, 진보적 청년, 학생들을 수용, 재세례파 전통 수용을 통한 평화선교, 다양화, 전문화된 부문에서 모범사례 창출 등이다.
민중교회운동의 전망으로 첫째, 영성은 노동의 영성,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해방된 영성, 맘몬을 대항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가난한 자의 동맹으로서의 기독교 영성, 기독교적 사랑과 불교적 지혜가 결합된 영성이다.
둘째, 민중은 복음의 담지자(WCC CWME 멜버른 대회, 1980)일 뿐 아니라 문화의 담지자(WCC CWME 살바도로 대회, 1996)로 아시아 민중의 투쟁이 아시아 종교 흐름과 만나지 못하면 민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셋째, 생명선교는 자본주의 산업문명으로부터 생태문명으로 전환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의 맥락에서 이뤄지되 생태신학의 수립, 생명살림의 문화 수립, 생명살림의 경제체제 확립 등을 내용으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