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노회 청년연합회 기념비 제막
지난 29일(토) 오후2시 순천노회관에서는 뜻있는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는 데 지난 1987년 6월항쟁에서 순천노회청년회연합회(이하 순정청)가 순천지역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것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6월 민중항쟁 35주년을 맞이하여 순천노회관에 기념비를 세워 그 뜻을 기리는 기념예배 및 기념비 제막식을 가진 것이다.
순천장청 출신 김영위 목사의 인도로 드린 1부 예배는 최하종 목사(순천노회 부노회장)의 기도와 장세순 피택장로(순장청 동우)의 에스더 9:28~32의 성경봉독, 김상귀 목사(순장청 동우)의 “그날을 기념하라”는 제하의 설교와 최홍춘 목사(순장청 동우)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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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2부는 류호영(순천6월항쟁동지회)씨의 사회로 이어진 기념식에서는 김상집 광주전남6월항쟁 이사장의 기념사, 서동욱 전라남도의회 의장과 한상수 순천노회 노회장, 최미희 순천시의원의 축사, 김영형 목사(순장청 동우)의 회고사에 이어 6월항쟁상을 류춘호(순장청 동우)씨가 수상했으며 기념공연, 제막식, 기념촬영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행사가 의미있는 것은 당시 순천노회 산하 교회 청년들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것이 시민사회단체로 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첫 사례기 때문이다. 당시 순장청의 민주화 운동으로 가장 기억되는 것은 바로 고영근목사를 모신 시국강연회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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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15일, 故고영근 목사를 모시고 회원교회를 순회하며 시국강연회를 하던중 순장청 주관으로 청년주일 연합예배를 마치고 서울로 가기 위해 순천역에서 기다리던 고영근 목사가 경찰이 강제 연행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격분한 순장청 회원 20여명이 순천경찰서를 항의 방문하였고, 경찰이 최루탄으로 진압하며 전원 연행되는 사태가 발생하지만 고영근 목사님의 간곡한 요청으로 연행된 순장청 회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이후 5월 17일, 순장청 회원 80여명이 순천중앙교회에 집결하여 ‘고영근목사 강제연행 규탄대회’를 개최한 후, 현수막을 들고 순천경찰서까지 거리 행진을 하였다. 두 번의 시위과정에서 순천지역에서는 거리에 최루탄이 처음 등장하고 청년 교인들의 거리 행진이 진행되므로 순천시민들에게 민주화의 열망을 북돋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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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고영근 목사 차녀 고성휘박사와 김영위 목사 | ||
6월 9일, 순장청 회원 및 순천대 학생 80여명이 순천노회 회관에서 6.10항쟁 준비를 위한 시국기도회를 개최하여 6.10민중항쟁 준비를 하였고, 6월 25일까지 수천명의 시민학생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으며, 6월 26일에는 순천 6월항쟁 과정에서 가장 많은 약 5만여 명의 시민학생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순천 중심가를 누비며 민주화 의지를 불태웠다.
순장청 회원들은 시위대가 전투경찰에 탄압받을 때는 교회 강당으로 피신시켜 보호하였고, 수만여명의 시민들이 남문다리와 시청까지 거리를 가득 메우며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칠 때 시민항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항쟁 이후 조직된 ‘민주헌법쟁취 순천국민운동본부’ 초대 사무국을 맡으며 민주화운동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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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순천지역에서 정부에 저항한 역사는 역사적으로 그 어떤 지역보다 아픈 추억이 있다. 첫째는 1948년 제주도서 총선을 거부하고 전도민이 저항하자 군으로 제압하다가 여의치 않차 순천의 군대로 하여금 진압명령을 내린다. 소위 여순반란 사건으로 명명된 것이 최근에서야 진실들이 밝혀지고 복원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14연대 지도자들이 우리 국민군대는 국민들을 죽이는 출동을 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항명하자 경찰과 정부군의 진압에 저항하다가 끝내 여수와 순천을 장악하기 까지 한다.
이로써 좌우 대결로 큰 혼란이 일고 반란군으로 지목받은 이들과 가족 지원자들이 무자비한 보복성 학살을 당하게 된다. 한국전쟁 과정에서도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순천 사범학교 재학중 "기독교 성향이다 그럼 미제의 앞잡이일 것이다" 라는 선입관으로 좌익계로 부터 학살당한다. 그로나 손양원목사는 자신의 아들을 학살한 사람을 양자로 들이는 큰 사랑을 보여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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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서의 기독교 역사
전남동부권 교회들을 관할하는 순천노회(노회장:한상수 장로)가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순천노회의 탄생 배경에는 미국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과, 1913년 개설된 순천선교부의 눈부신 활동들이 자리하고 있다. 1900년대 초 전남지역 선교가 본격화할 무렵 순천지역은 광주선교부의 클레멘트 오웬(한국명 오기원) 선교사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오웬 선교사가 1909년 과로로 인한 급성폐렴으로 숨지자, 그 임무를 존 페어맨 프레스톤(한국명 변요한)과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이 대신하며 순천, 광양, 여수, 구례, 곡성, 보성, 고흥 등 각지에 복음을 전파했다.
특히 순천선교부가 개설될 무렵 부임한 로버트 코이트(한국명 고라복) 존 크레인(한국명 구례인) 등은 충성스러운 섬김으로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일으켰다. 코이트 선교사의 경우는 두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는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며, 매산학교와 알렉산더병원 등 순천선교부의 사역에 기틀을 놓는데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순천선교부 개설 3년만인 1916년에 이르면 이 지역 세례교인수가 581명에서 1172명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나고, 전체 교인수도 1549명에서 2507명으로 증가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한편으로 한국인 성도들이 보여준 자발적인 열심들도 이 지역 최초의 교회들이 자리 잡고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가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여수 장천교회,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했던 한국인의 전도가 결실을 맺어 설립된 순천 무만동교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세워진 광양 웅동교회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밖에도 순천중앙교회, 광양 신황교회, 고흥 신흥리교회, 광양읍교회, 구례읍교회, 여수 우학리교회 등이 각지에서 일어나 전남 동부권을 복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전남노회로부터 분립할 무렵에는 무려 40여 교회가 세워져있었다. 이런 기반 속에서 순천노회는 1922년 제11회 총회에서 설립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10월 3일 순천남성경학교에서 선교사 2명, 목사 4명, 장로 12명 등 18명이 모여 정식으로 노회를 조직한다. 초대 노회장은 순천중앙교회 곽우영 목사, 부노회장은 변요한 선교사, 서기는 강병담 목사였다.
순천노회는 설립 초창기부터 제주도 선교의 주역으로 나서고, 곡성지역에서 전도사업을 집중 전개하는 등 복음의 지경을 넓히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산하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철저하게 관리하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기도 했다. 주일을 무단히 범하는 자에게는 책벌하고 직분도 거두도록한 제11회 정기회의 결의와, 교인의 가정에서 혼례나 상례를 행할 때 절대 금주하도록 한 제12회 정기회의 결의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순천노회원들은 더욱 복음을 위한 사명에 매진하고, 신앙의 도리와 맞지 않는 일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확립했다. 그렇게 축적한 저력들은 위기의 순간에도 목숨을 내놓고 진리를 사수하는 모습으로 발휘됐다. 일제의 강압 속에서 1938년 제2위해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순천노회원들은 참혹한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비록 순천노회도 공식적으로는 신사참배를 결의했지만, 정작 노회원들은 총회총대로도 참석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1940년 일제의 검속으로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 순천중앙교회 박용희 목사와 황두연 장로 등 무려 17명의 목사장로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특히 구례읍교회를 시무하던 양용근 목사는 옥중에서 숨지고, 평양신학교 1회 출신의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이자 제10대 총회장을 지냈던 이기풍 목사(당시 우학리교회 시무)도 수감 중에 생긴 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렇게 시작된 순천노회원들의 순교 행렬은 해방 후까지 이어진다. 1948년 발발한 여순사태의 와중에 영흥교회 김병준 장로,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 등 여러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 좌익세력들에게 생명을 빼앗긴다. 손양원 목사 역시 2년 후 6·25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의 총격으로 순교하고, 조상학, 김정복, 이선용, 안덕윤, 목사도 같은 길을 걷는다.
당시로서는 순천노회에 엄청난 아픔이자 손실이었지만, 이들이 흘린 피는 순천노회에 신앙의 뿌리를 둔 이들에게는 평생의 긍지이자 자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천노회 산하 교회들, 매산학교와 매산여학교, 순천성서신학원 등에서 배출된 수많은 믿음의 후예들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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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노회를 통한 기독교 확산
현재 순천에는 순천노회와 순천 남노회로 구성되어 있다. 노회의 구성은 1922년 9월 10일 경성 승동교회에서 순천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1922 년 10월 3일 순천성경학교에서 선교사 변요한 고라복 목사, 곽우영 정태인 조의환 강병담 장로, 김억평 오영식 서병준 장기용 이기홍 김일현 장현중 목치숙 박창규 등 제씨가 참여하여 노회를 창립했다.
1980년 9월 25일 총회에서 순천, 여수, 순서노회를 분립하기로 하고 여수노회는 1980년 11월 27일 오전11시 총회장 박치순 목사의 사회로 여수성광교회에서 순서노회는 1980년 12월 2일 벌교제일교회에서 증경총회장 한완석 목사의 사회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역사적인 전남 동부지방 3노회 시대를 열었다.
이후 2017년 1월에 순천노회관 건축 착수하여 5월 8일에 기공하여 11월 27일 순천노회관 건축 완공하고 2022년 올해 노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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