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추모 기도회 영주에서

                영주 ‘기독시민연합’ 추모기도회

10.29 이태원 참사 100일(2월 5일) 오전 10시 국회에서는 여야의원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이 함께 하는 최초의 국가차원의 추모예식이 있었다. 그동안 정부는 사고직후 시청앞에 정부 분향소를 개설하기는 했으나 유가족들과는 아무런 상의 없는 일방적 조처로 외면 받았다. 특히 가족들에게는 희생자들에 대한 연락처나 명단도 주지 않는 등 국가가 제2의 가해자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런 가운데 시민단체들과 함께 지난 달 이태원 참사 국민 추모위원회를 조직하고 녹사평 역 인근에 추모관을 개설한 바 있다. 그리고 어느 듯 참사 100일을 맞으면서 2월 4일(토) 성직자들과 유가족 시민들과 함께 영정을 들고 광화문서 추모제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경찰들에 의하여 저지되 시청앞 도서관 앞에 추모관 텐트를 쳤다. 경찰은 서울 시장의 요구라며 철거하려고 했으나 유가족들과 시민들의 저지로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하여 5일 국회에서 열린 추모예식에서 유가족 대표 이지한군의 아빠는 내일 1시 서울시장으로 부터 철거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철거는 하겠지만 국가가 나서 희생자들을 조문할 수 있는 안정된 추모관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만약에 이런 요구가 들여지지 않고 철거하려고 한다면 제2의 불상사를 뜻하는 과격한 발언을 내놓다.

이태원 참사로 인하여 국민들 의견은 둘로 갈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쪽은 세월호에 이어 세계 경제력 10위의 국가의 수도에서 과연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에 대한 비판이다. 또 매년 행사로 당일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을 알면서도 경찰력을 배치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시민들의 위험 신고를 받고도 경찰 용산시 용사소방서등 어느 기관하나 나서서 예방은 커녕 구조하지 못한 것은 인재라는 판단이다.

   
 

대통령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도 국가는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고 조문하지ㅡ않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덕수 총리도 그렇고 이장관도 시민분향소를 유가족들과 사전협의 없이 도둑방문하려다가 거부로 발길을 돌리는 불상사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국회 차원의 조사위가 시간에 쫒겨 맞췄지만 미진한 것이 많고 책임이 큰 행안부 장관이나 경찰청장에 대하여 면책을 주는 조사결과도 그렇고 세월호 사건 처럼 특별법으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구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진실이 무엇이고 책임의 소재를 밝히자는 것이고 재발방지를 위하여 반드시 감당해야할 아픔이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세월호 사태 이후에서 보듯이 시민단체와 연계한 관장사라는 등 보상에 기대여 국가를 볼모로 무한투쟁을 하는 가족들이 너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자신의 자녀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감히 내놀 수 없는 말들이다. 바로 이런 원인은 국가가 자신들의 잘못이 노정된  사고를 지우고 빨리 잊게하려는 행정발상으로 국민을 갈라치기 하기 때문이라는 비판이다. 국민 추모관 옆의 보수단체들의 방해도 극에 달한 것도 그 이유라는 소리다.

   
 

지방에서는 최초로 열린 추모 기도회 

이런 가운데 경상도 그것도 보수적인 북부지역인 영주에서 교단과 교파를 넘어 고통 당하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영주기독시민연합(대표:윤재현)는 지난 1월 29일 내매교회(윤재현 목사 시무)에서 ‘10.29 이태원 참사로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70여 명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한 이날 참석자들은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고 부상자들의 빠른 치유와 회복을 바라며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기도회에서 대표 기도를 한 김태연 집사(영주침례교회)가 ‘고통 당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우리의 굳어버린 마음을 회개’하는 기도를, 신석기 장로(성내교회)는 ‘올바른 진상규명과 대한민국에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박에스더 전도사(사과나무교회)가 ‘가족을 잃고 고통당하는 유가족과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위로’를 간구했다. 이 기도회를 주관한 대표 윤재현 목사는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자리를 통해 힘을 전하고 싶었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날 예배에서 모은 150여 만원의 헌금은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해 시민사회단체에 후원하기로 했다. 기도회 예배는 이기영 전도사(새길교회)의 인도로 ‘10.29 이태원 참사 영상’ 시청, 빛마을청년들의 특송, 이희진 목사(빛마을교회)의 ‘라헬의 통곡소리’ 제하의 말씀선포, 신동필 목사(선한목자교회)의 축도로 마쳤다.

한편 영주기독시민연합은 ‘행동하는 기독시민’ 을 지향하며 지역의 아픔을 보듬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도 영주댐으로 수몰된 내성천 낙동강 등 생태계 회복을 위해 실천운동을 펼쳤왔다. 최근에는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위해 1급 발암물질인 납폐기물처리 제련공장 설치를 반대하는 시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영주기독시민연합 대표 윤재현 목사(내매교회)는 "영주기독시민연합은 지역과 이웃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물론, 기후위기에 대응해 산림생태계를 보호하는데 지역교회와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기독시민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행동하고 실천하는데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영주시의 기독교회 역사 

풍기 성내교회/1907년에 권서 전도인 장치순, 심취명 등의 전도로 풍기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동부자인촌에 거주하던 김기풍, 이시동, 장사문, 이상호 들이 영접하고 교회를 설립했다. 1909년 3월에는 김용휘,김창립씨 등이 중심되어 서부동 초가 15칸을 구입하여 예배당을 설립하면서 ‘풍기교회’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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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교회가 부흥하여 1914년에는 예배당을 증축하였다. 1919년에는 김창립씨 등이 중심되어 영신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새문안교회를 담임했던 강신명 목사의 부친 강병주 목사와 연동교회를 섬겼던 김형태 목사의 김영옥 목사도 시무한 바 있다. 풍기 성내교회의 초기 역사 및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볼 수 있는 자료들을 볼 수 있다. 최갑도목사 은퇴후 현재 000목사사 시무중이다.

척곡교회/1907년 5월 17일에 설립되었다. 고종황제 때 탁지부(현 재경부) 주사직을 맡고 있던 김종숙이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이곳으로 낙향해 문촌교회를 출석하다 척곡교회를 설립했다. 1909년 9칸짜리 정방형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한 김종숙 장로와 장복우씨 등은 지역 주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6칸짜리 초가 명동서숙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명동서숙은 한국 초기 교회들이 운영하던 학교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지금은 지붕이 함석으로 돼 있지만 초기에는 기와지붕으로 남녀석이 분리되어 있었고, 출입문도 동서쪽으로 각각 만들었다. 가운데는 광목을 쳐서 남녀를 구분했다. 지금도 예배당 우측 벽에는 성미자루를 걸었던 못들이 교인들의 숫자만큼 남아 있다.

척곡교회는 초창기 교회와 관련된 자료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초대 교적부를 비롯해 초기당회록과 1921년 척곡장로교 면려회 회록, 1927년 봉화전도 척곡지회 회의록, 1930년 척곡교회 기본금 기성회의록 등 대부분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내매교회/ 1906년에 경북 내륙에서 최초로 세워진 전형적인 시골의 작은 교회인데 강재원 장로가 대구에서 선교사 베어드의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향 내매 유병두 씨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처로 시작하여 차츰 교회의 모양을 갖추어 나간다. 그러면서 북부지역 신앙의 중심지가 되어 10여 개 교회가 세워지는 못자리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내매교회는 새문안교회를 섬겼던 강신명 목사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목회자와 장로를 배출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909년 성경사경회를 열고 영주, 봉화지역을 선도하는 교회로 1910년에는 내명학교를 설립하여 1995년에 폐교되기까지 2,189명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하여 1920년경에 ‘향약6개조’를 만들어 농촌운동을 선도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상숭배와 선조제사를 금지하고 구습타파와 미신을 일소한다.​
2. 동민 전체가 주초, 장기, 바둑, 도박, 주막 풀임을 엄금한다.​
3. 일제의 앞잡이인 경찰관 지원을 엄금한다.​
4. 신, 불신을 막론하고 관혼상에는 자비량하여 협조한다.​
5. 소 외의 가축사육을 금지하며 깨끗한 신앙촌을 만든다.​
6. 주일은 성수하며 우물 문을 잠그고 전날에 준비한다.

6.25 전쟁 피해의 아픔과, 영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지역에 대한 아픔이 있는 데 100년 넘은 역사를 가진 교회가 댐 건설로 인해 수몰지역이 되 2013 년 영주시 휴천동으로 임시 이전하였다가  2018 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여 구 교회당과 있던 건물인 내명학교의 기숙사와 교실로 사용되던 건물은 복원했다 .

영주제일교회/1907년 오월번 선교사와 강제원 장로의 전도에 의해 정석주 외 수 명이 주님을 영접하였고, 1908년 성저동 정석주의 집에 1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의하면 영주제일교회는 1909년에 설립된 것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1909년 교인이 30여명에 달하자 초가 세 칸 예배당을 매입하고 경북노회에 가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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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돌 예배당은 1954년에 착공하여 1958년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영주제일교회는 영주지방을 선도하는 교회다. 복음교단 창설의 한 주인공이었던 윤주병 목사도 한때 영주제일교회를 섬기기도 했다. 영주제일교회는 경안중학교(현 영광중학교) 설립에도 힘을 써 젊은이들을 양성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 인물 

퇴계 선생의 14대손인 봉경 이원영 목사는 1919년 3월18일 예안면 3 ·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고 복역 중 이상동 장로(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동생)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했다. 이후 평양 장로회신학교(1930년)를 졸업한 뒤 안동서부교회 등을 개척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걸었고 일제 강점기의 황국신민화 정책(신사참배, 창씨개명, 조선교육령)을 끝까지 거부해 1938년부터 광복까지 무려 4차례나 투옥됐다. 정부는 1990년에 이원영 목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이원영 목사의 생가인 사은구장(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은 안동시 문화유산 제49호이자 한국 기독교사적 제36호로 지정받았다. 봉경 이원영 정신문화계승사업회(임희국 장신대 명예 교수)는 현재 기념관 건립에 장애가 되는 안동댐 상류 침수선 문제가 해결되면 곧바로 기념관 조성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봉경 이원영 목사 기념관이 조성되면 영주의 내매교회, 봉화 척곡교회, 의성의 주기철 목사 수난지 등을 연계한 기독교 성지순례 코스가 마련돼 연간 100만명에 이르는 기독교 성지순례단 유치에 큰 도움을 주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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