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교회 탐방
경북 영주시 평은면 천상로 259번길 137-31에 위치한 통합 교단 영주노회 영남시찰 소속의 내매교회는 100년이 넘는 이 지역 최초의 교회다. 1906년 강재원이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고 1909년 초가 6칸의 에배당을 짓고 초대 교인으로는 강씨 집성촌 답게 강재원, 강병주, 강병창, 강신유, 강신창, 강석구, 강석복 등이 참여한다.
1910년 4월 5일 내매교회 교인들이 뜻을 모아 기독내명학교(基督內明學校)[평은국민학교 내명분교장, 현재 폐교]를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은 강병주, 교사는 안광호이다. 1913년 ‘사립기독내명학교(私立內明學校)’로 정식 허가를 받았다. 1940년 일제의 교회 말살 정책으로 인해 평안교회 지금의 평은교회 등과 합병되었다가, 광복 후 분리된다.
1953년 목조건물로 중건하였다가 1977년 다시 손을 보았으나 2009년 시작한 영주댐 건설로 수몰 지구에 편입되어 2013년 11월 교회를 영주시 휴천동으로 임시 이전하였다가 2014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에 부지를 매입해 2018년 교회를 신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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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복목사의 그림으로 보는 교회 “민족의 희망 일구려고 힘쓴 교회, 영주 내매교회” 중에서
강신명 목사님은 제가 처음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던 새문안교회의 담임목사이셨고, 저희 부부의 결혼주례를 해주셨는데, 이번에 목사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장통합의 총회장을 지내셨는데, 동생 강신정 목사도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총회장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신정 목사는 1953년 제38회 예장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당시 직영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를 제치고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가결하는 것을 보고, 교단에서 탈퇴하기로 결심하여 형제가 갈라서는 아픔을 겪습니다.
이혜정 교수(영남신학대학교)는 강신명 목사에 대한 기독교계의 다양한 평가를 소개하고 있는 바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목회자, 기독교교육가, 한국교회 연합사업의 선구자”(김동익 목사), “교회연합정신, 교회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실천적 목회활동과 한국교회음악에 대한 공헌”(윤경로 장로), “복음주의적 신앙, 에큐메니칼 신학, 통합교단 기초를 쌓은 인물”(정병준 교수)(앞 자료집 113-114쪽) 강 목사님이 대단한 평가를 얻은 뿌리는 아버지 강병주 목사입니다.
이 교수는 부친 강병주 목사에 대하여 내매교회의 윤재현 목사에 의해 종합적으로 평가되었다고 소개하며 “독립운동가, 농촌계몽, 한글 목사, 교육가, 주일학교 부흥강사”라고 말하며(앞 자료집 115쪽), 강병주 목사의 폭넓은 목회활동,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강신명 목사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매교회는 영주 지역 최초의 기독교인 강재원 장로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는 대구 약령시장을 방문했을 때,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구지역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다니다가, 1906년(고종 43년) 고향 내매마을로 돌아오자마자 유병두의 사랑방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헌신으로 진주 강씨 집성촌인 마을 전체(20가구)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그는 영주와 봉화 지역에 19개 교회가 설립되는 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1909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오월번(Arthur. G. Welbon) 선교사가 지역 최초로 남자 성경공부반을 내매교회에서 열었고, 1910년 강병주 목사가 기독내명학교를 부설로 운영하면서 신앙과 학문 교육이 함께 이뤄졌습니다.
내매교회와 기독내명학교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강병주 목사와 강신명 목사, 계명대학교를 설립한 강인구 목사, 우리나라 전자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강진구 전 삼성반도체 회장 등이 대표적입니다. 기독내명학교는 아쉽게도 1955년 평은초교에 흡수되어 폐교되었습니다. 다행히 2009년 영주댐 건설로 수몰되는 위기에서 지금의 자리에 옛 학교건물(한옥)이 복원되어, 신축한 내매교회 옆에 의연하게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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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지역에 남기로 결정
영주 땜 상류에 위치한 내매교회는 2004년 땜 건설로 인한 수몰을 피하여 현 위치로 이주해 건축하기 까지 총 6번의 크고 작은 건축 역사를 갖고 있다. 내매라는 의미는 옛 마을 모양이 매화 같아 매화낙지라 하였다. 이 마을은 한국의 옛 동네들과 같이 씨족사회의 전통이 남아있던 시절에 진주 강씨 나경공파의 집성촌이다.
교회를 통하여 내매 마을에 생긴 것이 내명학교다. 1910년 강석진에 의해 ‘교회 옆 학교’ 인 일종의 교회부설학교(Church-Affiliated School)다. 내매교회 옆에 기숙사 겸 교실로 사용할 교사를 마련하고 강병주를 초대 교장에 안광호를 교사로 세워 내명학교를 영주지역 최초의 신문화 교육의 장으로 출발한다. 1913년 7월 4일 ‘사립기독내명학교’로 공식 개교를 하였는 대 봉건적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반마을에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민족정신을 잃지 않게 한 기독교교육기관이었다.
내매교회에서 나온 인물로는 강병주목사(1882∼1955) 새문안교회 담임목사이자 총회장을 지낸 강신명목사(1909∼1985) 계명학교 설립자 강인구, 강신정 전 기독교장로교 총회장, 강병도 전 창신대 총장과 삼성반도체 초대 사장 강진구장로가 있다. 이는 신앙과 교육을 통해 한 마을을 변화시켜 나간 기독교 이상촌 운동으로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당시 내매 마을에 지침인 향약 6개조로 다음은 그 내용이다.
첫째, 우상숭배와 선조 제사를 금지하고 구습 타파와 미신을 일소(一掃)한다.
둘째, 동민 전체가 주초, 장기, 바둑, 도박, 주막 출입을 금한다.
셋째, 일제의 앞잡이인 경찰관 지원을 엄금한다.
넷째, 신, 불신을 막론하고 빈약한 관혼상에는 자비량하여 협조한다.
다섯째, 소외의 가축 사육을 금지하며 깨끗한 신앙촌을 만든다.
여섯째, 주일은 성수하며 우물 문을 잠그고 전날에 준비한다.
(내매교회 100년사 14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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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와 민족교육의 산실
이처럼 내매 마을은 교회를 통해 마을 구성원들을 복음으로 개종을 하게 하고 ‘교회 옆 학교’에서는 근대 교육을 통해 유교적 전통 마을에서 기독교 신앙촌으로 탈바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6.25동란 등을 거치는 동안 사회 각 분야의 발전에 공헌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특히 교계와 지역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목회자만 하더라도 2020년까지 32명에 이르는 데 이는 단일 교회로는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다고 한다.
또 100년 역사 가운데 순교의 피흘림을 피해가지 않았는데 공산당에 의하여 6명이 순교를 당하고 교회도 불에 탔다. 특히 영주 땜 건설로 교회가 수몰이 되면서 이전 문제로 교인 간의 갈등도 없지 않았다. 다수의 성도들이 살고 있고 중심인 영주시내로 가자는 의견과 현재 위치를 고수하자는 의견의 대립은 결국 세상 법정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한 종을 다시 보내시여 지혜롭게 이 난관을 이겨내게 하셨는 데 현재 영주시 평은면 영주댐 옆에 내매교회를 세웠다. 전도사로 시무한 바 있는 윤재현목사(2014년 재부임) 가 부임항려 이전 건축한 내매교회는 수몰로 오랜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정신적으로나 영적인 안식처가 된다. 윤재현목사는 최근 교회 뒷산을 매입하여 향후 교회와 지역사회와의 공생을 위하여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지를 기도하는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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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재현목사와 필자 | ||
강진구(삼1927-2017) 삼성전자 초대 회장의 일화(나권일 월간중앙 기자)
2023년 10월 강진구 회장 학술제 내메교회서 열려
내매교회(윤재현 목사)서 지난 해 2023년 10월 14일 ‘제5회 내매 사람들 모임’에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선구자 강진구 삼성전자 전 회장(장로) 재조명’ 학술포럼을 열었다. 행사에는 강진구 장로 가족 사모 김경례 권사, 장남 강병창 목사 영남신대 배재욱 손문산 교수등 등과 강병주(독립운동가) 목사 후손들, 영주지역 첫 기독인 강재원 장로 후손들, 박성만·임병하 도의원, 내매 사람들 등 120명이 함께 했다.
포럼에 앞서 윤재현 목사는 “오늘 제5회 내매사람들의 모임 행사와 강진구 장로 재조명 학술 포럼을 본 당에서 열게 됨을 감사드린다”면서 “내매가 고향인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이 모임은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최후의 한 분까지 뜻을 함께할 작정이다.
「내매와 영주를 넘어 세계 전자업계에 공적을 남긴 강진구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선 송호상 교수는 “제가 오늘 여기 온 것은 내매 출신 강신창 목사님의 아들 강석교 장로와 계성고 선후배 인연으로 뜻깊은 자리에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라며 ‘꿈을 키운 내매와 영주’, ‘기독내명학교에서 신교육 경험’, ‘대구사범 심상과 진학과 모교 영주초 교사’, ‘더 큰 꿈을 위해 서울공대 진학’, ‘세계 전자업계 우뚝’, ‘삼성반도체 창시자’ 등에 대해 설명했다.
손산문 교수는 논찬에서 “강진구 장로의 삶이 지역에서 세계로 그 삶의 영역과 영향력이 점층·확장됐다”며 “그는 삶의 기초 형성과정을 그의 고향 내매마을과 내매교회와 기독내명학교에서 신앙적 환경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하나님과 유리된 세속인이 아닌 기독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강진구를 이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강진구 회장 비서실장을 지낸 한명섭 집사는 증언에서 “회장님은 1927년 생이시고, 저는 1957년 생으로 모시기가 어려웠으나 아버지를 모신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모셨다”면서 “신앙인으로 강 회장님은 주일을 잘 지키시면서 항상 솔선수범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셨다. 또 전문경영인으로 강 회장님은 뛰어난 머리와 창의적 발상으로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총애를 받았으며, 를 세계 위에 우뚝 세웠고, 64KD램을 개발한 삼성반도체 창시자로 추앙받아, 삼성명예의 전당에 올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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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에버랜드 내 삼성 명예의 전당에 오른 유일한 사람
경기도 용인의 삼성인력개발원엔 ‘명예의 전당’에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재직 중 2회 수상한 자로 여기에 오르면 퇴직후에도 당시 급여의 70%를 받고, 사망한 후에는 배우자에게 50%가 지급된다. 삼성 샐러리맨에게 최고의 영예로 창립 이래 전문 경영인이 200명이 넘지만 여기 이름을 올린 사람은 단 한 명으로 강진구(姜晉求) 전 삼성전자 회장이다.
강 전 회장은 오너(그룹 총수) 일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삼성전자에서 회장직(1990~98년)에 오른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으로 CEO로 무려 25년 동안 장수했는 데 삼성전자 역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전무후무하다. 그는 내매교회 출신으로 대구사범을 1957년에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가 1948년에 서울공대를 나오고 포병부대 통역장교로 근무하면서 영어에 능통하게 되어 잡지등을 통하여 신문물을 익힌다.
대위 제대후 동양방송에 입사하여 1962년엔 KBS에서 일하기도 한 경험으로 TV 국산화를 선도한다. 이후 삼성전자 재임 시절 석사·박사 학위자도 어려워하는 전자·반도체 관련 서적을 원서로 접하며 기술 개발에 초석을 닦는 다. 이후 LG에 뒤진 TV를 혁신하면서 세러리맨의 신화를 이룬 강진구는 삼성전자 회장을 역임하고 반도체 부분을 세계적인 회사로 만든다.
고 강진구 회장은 1남2녀를 두었다. 맏아들 강병창 박사(서강대 교수)와 맏딸 강선미 박사(서경대 교수)도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친인척들도 강 회장의 영향을 받아 전자공학이나 전기 분야를 전공한 이가 많다. 외종질인 김영동 교수는 “외삼촌은 엄하셨지만 소탈하고 검소하셨다”며 “조밥과 어릴 적 고향 음식인 팥잎국, 조선멸치 이 세 가지만 있으면 행복했던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유족에 따르면 강 회장은 평생 청교도정신을 강조했다. 개신교 신자였던 강진구 장로는 부인 김경예(85) 권사와 함께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한국전쟁 때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신의 존재를 체험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겸손함은 강 전 회장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반도체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기술개발에 매진해줄 좋은 인재들을 만났고, 이를 뒷받침해줄 좋은 기업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자신을 낮췄다. 회고록에서는 한국 전자산업과 삼성전자의 발전은 ‘내 능력보다도 때가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성과’라는 점을 강조했다. “남한테 의존하려 하지 마라. 어떻게든 궁리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며 도전정신과 창의력을 강조했다.
강진구 회장의 ‘전자 인생’ – 1927년 경북 영주 출생.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 졸업, 1963년 동양방송(TBC) 기술부장, 1973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 1975년 삼성전관 사장,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1988년 삼성전자 총괄 대표이사 부회장, 1990년 삼성전자 총괄대표이사 회장, 1995년 ‘삼성 명예의 전당’ 제1호 헌액, 1998년 삼성전기 대표이사 회장. 2000년 삼성그룹 고문. 2017년 8월 별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