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규, 김찬국 목사 추모행사

             한국기독교 민주화운동의 선각자들  

   
 

지난 8월 17일(토) 고 박형규목사(1923-2016) 8주기를 맞아 조정하 사모와 함께 계신 하늘나라공원 묘역에서 있었다. 추모식에는 제자 오용식 목사가 “수도권의 영성” 이란 제목으로 설교했고 김성훈 목사 추도사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제일교회 후임이기도 했던 정진우목사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박목사는 94세로 별세하셨는 데 긴 와병에 스스로 연명치료와 곡기를 끊으시고 별세하신 것으로 안다.

박목사는 기장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계 민주인사들에게는 대표적인 분이다.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의 나섰으며 이어 한국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인 원로이자 산증인이었다. 1923년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나 부산대 철학과를 중퇴하고 도쿄신학대학, 유니언신학대학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젊은 시기에는 재조선 미 육군 사령부 군정청서 주한미군 정보장교로도 복무했었다.

   
 

1960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공덕교회·초동교회 부목사를 거쳐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지냈다. 1968년 기독교서회 발행 〈기독교사상〉 주간, 1970년 기독교방송 상무이사를 지냈고 1969년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으로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으며 오늘날 전체 민주화 운동의 대표적 원로 기독교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담임목사로 부임해 20년간 시무했으며 1981년 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교단에 머물지 않고 기사연 이사장과 1982년 KNCC 인권위원장도 지냈다. 저서로는 “해방의 길목에서” 와 “해방을 위한 순례” 가 있다. 가족으로는 조정하 사모와 2남 2녀을 두셨는 데 장남은 기독교장로회 박종열목사다. 시무 당시 제일교회서 권호경목사 안재웅박사 이광일목사 손학규 전 의원등 많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인사들이 나왔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는 통합과 합동이 분열하기 이전 고 김재준목사가 장로교 총회 직영 신학교 교수로 있을 때에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단서 제명하였다. 그러나 그를 지지한 하는 경기노회등 제자와 동역자들이 김정준목사등을 모시고 따로 교단을 만든 것이 기독교장로회다. 독지가인 장로가 수유리의 땅을 기증하여 한신대를 지었으며 이후 종합대학이 되어 수원인근으로 이주를 했다 그러나 신학부는 지금도 수유리 캠퍼스에 있는 데 안병무 김관석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김용옥박사등 세계적인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특히 한국 한국의 인권·민주화·통일 운동에 진력하였고 예언자적인 역할에 앞장섰으며 가히 기장의 한경직이라는 별호를 들을 만한 인물이다.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따르고 음악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젊은 운동권 예술가들의 후견인이 되시기도 하였다. 김민기 작의 “공장의 불빛” 초연도 박목사가 시무하는 서울제일교회에서 열린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마산의 지주가문서 태여났지만 해방되자 모든 가속들에게 신분상 자유를 주고 땅도 팔아 나눠줬다는 일화가 있다.

   
 

​소원(笑園) 김찬국 목사 15주기 추모행사 열려

지난 8월 19일에는 연세대 김찬국(1927-2009) 교수 제 15주기 추모예배와 음악회 출판기념회가 연세대에서 있었다. 설교는 민영진목사(전 성서공회 총무)가 하셨다. 이 행사는 ‘김찬국기념 사업회'(회장 허호익목사)에서 주관했다. 연세대 하면 김동길교수와 함께 가장 잘알려진 분으로 신과대학에서 출신들에게는 가장 유명한 분이다. 말씀은 어눌하지만 온화한 미소에 사랑이 많은 분으로 알려졌으며 연세신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27년 경북 영주에서 출생해 1950년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후 대학원을 거쳐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1980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주 서부초등학교 교사와 부산에서 피난시절 배재 중고교 교사를 시작으로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강사, 부교수, 교수, 대학원장, 교학부총장 등을 거쳐 원주 상지대학교 총장으로 역임하기도 했다.

   
 

평생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으며 신학과 교수 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김 목사는 故 김대중 대통령 부인인 이희호 장로와 편지를 통해 6년여의 옥중생활을 견디기도 했으며, 폭 1cm도 안되는 30cm 고무줄 편지로 부인과 서신을 주고 받았다는 일명 고무줄 편지는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김찬국 목사는 1974년 긴급조치법 4/1호 위반혐의로 구속돼 군사재판에서 징역 5년 자격 정지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듬해인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이후 연세대학교에서 해직되었다가 1984년 복직했는 데 해직기간에는 성공회대학교, 협성대학교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기독교서회와 기독교사상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70년대에는 청계천 평화시장대책위원회 위원장을 하기도 하여 노동자들의 지원활동에도 참여했다.

   
 

또한 김 목사는 NCC 신학연구위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이사와 NCC 인권위원장도 지냈다. 1961년 감리교 중부연회서 안수받고 영등포감리교회 설교목사와 대치동 목양교회에서 설교목사로 봉사했으며, 1997년 은퇴했다. 저서로는 구약성서개론, 예언과 정치, 성서와 역사의식 등 20여권을 집필했다. 유가족으로는 부인 성윤순 사모를 비롯해 아들 고 김창규(산부인과 원장), 김홍규(연세대 도시공학과 교수), 김은규(성공회대 교수)와 따님이 한분 있다.​

                다음은 민영진 목사의 15주기 설교 전문이다.

   
 

                                         기억과 전승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떨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53:7)

신입생 면접 때 학생들 하나하나 이름으로 불러주시고 우리를 면접 교수님들 앞으로 일일이 안내하신 분, 그는 짧게 스포츠머리를 한 청년 김찬국이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4학년 선배라고 착각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첫 수업은 아마도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인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신과대학에 무시험 입학하던 1959년 2월, 그 무렵 저는 아직 김춘수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를 만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생님을 따라 제가 동문들 이름을 열심히 기억했는데, 친구들의 “이름 불러주기”는 10년 전 저의 70대 중반까지였습니다.

오늘 여기 참석하신 분 중, 명단을 보면 기억나는 이름들이 있는데, 얼굴과 이름을 일치시키는 일은 이제 제게 힘듭니다. 최근에는 세브란스병원 신경과에 다니면서 각종 검사도 받고, 기억력 상실을 늦추는 약도 처방받는 덕분에 아직 몇몇 분의 존함은 기억합니다. 이따가 저 보고 “나 누구냐?”고 묻지 마시길 바랍니다.

1학년 1학기에 고영춘(高永春) 교수의 구약통독(舊約通讀)을 이수한 다음 과정은 2학년 1학기 김찬국(金燦國) 교수의 구약성경개론(舊約聖經槪論)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에 대한 비평적접근(批評的接近)을 소개받는 과목이었습니다. 본문비평(本文批評), 자료비평(資料批評), 양식비평(樣式批評), 정경비평(正經批評), 편집비평(編輯批評), 고대근동문헌(古代近東文獻)과 구약의 비교, 성서고고학(聖書考古學) 등은 근본주의(根本主義) 목사 밑에서 착하게 곱게 자란 시골 목사 아들을 기절(氣絶)시키기에 넉넉했습니다. 김찬국 선생님은 당신의 환자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잘 돌봐주셨습니다. 절대로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학생의 관점에서 학생의 좌절에 공감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가르치면서도 당신 자신도 지금 무척 놀라고 있다고 짐짓 학생의 좌절을 편들어주시곤 했지만, 지나놓고 보니까 제가 성경의 형성 과정에 대해 절망을 넘어서서 평생 성경학도가 된 것에는, 선생님의 동행(同行)과 격려(激勵)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강의에서 매력적이었던 것은, 구약성경 형성과 관련된 기억(記憶)과 전승(傳承)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기억(記憶)과 구전(口傳) 전승(傳承)의 결과로 집대성된 것임을 우리에게 쉽게 설명하려고 애쓰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과 김찬국기념사업회는 선생님을 기억하고,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을 구전하는 구전(口傳)의 운반자(運搬者)들 혹은 구전담지자(口傳擔持者)들입니다.

선생님과 공동번역 성서. 우리나라에서 군사독재시절(軍事獨裁時節)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말기에, 선생님은 엄혹한 유신독재시절(維新獨裁時節) 1975년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으로 해직된 바 있었습니다. 해직 기간 동안에도 선생님은 여러 기회에 여러 곳에서 설교를 통해 예언자의 메시지를 전하셨는데, 이전과 다라진 것은 1977년 이후부터는 <개역한글판>(1956/1961)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번역, 특히 <공동번역성서>(1977)로 성경을 일고 말씀을 전해주시곤 했습니다.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주인도 부려먹는구나.” (1977년 「공동번역」 미가 2:1-2)

이러한 예언서 본문을 소개하면서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또 우리 역사에서 쿠데타의 주역이 암살되자(1979.10.26.), 어느 설교에서 이사야서 14장 4-9절 본문을 읽으면서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곤 하셨습니다.

“4 … 웬일이냐 , 폭군이 죽다니, 그 시퍼런 서슬이 사라지다니. 5 야훼께서 꺾으셨구나. 6 성이 나서 백성들을 치고 또 치더니… 7 이제 온 세상이 한숨돌리고 평온해져 모두들 환성(歡聲)을 올리게 되었구나. 8 삼나무와 레바논의 송백까지도 네가 망한 것을 보고 손뼉치며, 네가 쓰러진 후에는, 아무도 저희를 찍으러 올라오지 않는다고 좋아하는구나. 9 저 땅 밑 저승은 너를 맞기 위하여 들떠 있고,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자들의 망령을 모두 깨우며 모든 민족의 왕들을 그 보좌에서 일어나게 하는구나.(1977 「공동번역」 이사 14:4-9)

새로 번역된 현대어 성경 <공동번역성서>(1977)는 달리 해설이 필요 없을 만큼 번역이 명쾌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 기간에 잠시 복직되었으나 이내 다시 해직되어 10여 년간 해직 교수로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마 우리 선생님이 설교하실 때 성경 본문을, 미가나 이사야 본문을 1956년판 「개역」으로 읽으셨다면, 개화기문체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유신독재주역(惟新獨裁主役)들과 그 하수인(下手人)들은 이 성경 본문 인용을 문제 삼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한성서공회(大韓聖書公會) 도서관 귀중본 서고에는 1977년 부활절에 초판이 나오고, 1980년 1월 15일에 14판으로 발행된 (발행인-김주병), 보진재(保眞齋) 인쇄소(印刷所)에서 나온 『공동번역성서』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속 표제지(標題紙 title page)에 보면 인장(印章) 두 개가 찍혀 있습니다. 하나는 1980년 2월 2일자 서울특별시문화재담당관실에서 접수(接受)를 확인하는 (지름 3cm의) 청색(靑色) 잉크 인장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 2월 2일자 계엄사령부(戒嚴司令部)가 검열을 마친, 검열관의 (지름 4.8cm) 검열필 적색(赤色) 도장입니다. 계엄사령부가 번역 성경을, 검열한 드문 경우입니다. 우리 선생님이 공동번역으로 성경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런 검열은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해직 기간 10여 년간, 해직 기간 내내 가방 속에 책을 넣고 다니며 판매하셨습니다. 판매 대금으로는 옥에 갇힌 제자들 영치금(領置金) 넣고,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그에게서 이사야가 묘사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는 온갖 굴욕(屈辱)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屠殺場)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羊)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羊)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공역 이사 53:7)

하나님의 자비가 선생님의 자녀손 위에, 그가 사랑하시던 제자들 위에, 언제까지나 함께하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은 2023년에 열린 수주 박형규목사의 탄신 100년에 열린 추모행사에서 안재웅목사 설교다.  

   
 

                            활력의 아이콘(마태 5:13-16)

안재웅 목사(한국YMCA전국연맹유지재단 이사장) 

   
 

오늘 우리는 수주 박형규 목사님의 탄신 100주년기념예배와 이어지는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목사님은 1923년 12월 7일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2016년 8월 18일, 93세를 일기로 서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8월, 목사님의 묘소에서 가족들과 서울제일교회 교우들, 그리고 여러 민주인사들이 모여 7주기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한 평생을 세상에 등불을 밝히는 삶을 사셨습니다. 어둡던 군부독재에 맞서 3선 개헌반대 운동과 1973년 남산 부활절 사건, 그리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등 여섯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암흑의 세상에 빛이 되고자 감옥 속으로 고행을 이어 가셨습니다. 목사님은 자기 자신을 불태워 어둠을 밝히는 삶을 사셨습니다.

 Mother Teresa는 “와서 나의 빛이 되어 주소서”(Come Be My Light)”(2007)라는 그의 저서에서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의구심이 생겼다”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Teresa 수녀는 의심이 생길 때 마다 하나님께 “지금 오셔서 나의 빛이 되어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림으로써 의심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는 소회를 남겼습니다.  박형규 목사님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이 빛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14절-16절)라는 말씀대로 빛의 사도답게 사셨습니다.  

우리는 광화문광장에 모여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또한 “빛이 있는 곳에 사랑이”라는 노래를 힘차게 부르기도 합니다. 마치 옛 소련연방체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성인들의 아이콘을 보며 어둠의 세력을 이겨내고자 했던 그 엄숙한 내공을 연상하면서 말입니다. 점점 퇴행하는 비민주적인 현실을 볼 때 마다 목사님은 세상에 빛을 비추는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목사님은 독재의 횡포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아이콘입니다. 목사님은 민주화운동의 선두그룹으로 고난의 길을 뚜벅뚜벅 걸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님과 함께 이 행렬에 동참하여 이 땅에 민주화를 이루어 냈습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마침내 민주화를 쟁취했습니다. 목사님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한국 민주화운동의 아이콘이 되셨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과 인권센터 이사장으로 오랫동안 일한 경험이 큰 자산이 되었다고 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김관석 총무님을 정점으로 두 분은 한 팀이 되어 험난한 민주화를 이루어 내는데 큰 몫을 한 우리들의 아이콘입니다.  목사님은 맹자(孟子)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셨습니다.“가는 사람은 쫒지 않는다.오는 사람은 거부하지 않는다. 나에게서 떠나는 사람은 떠나는 대로 두고가르침을 받고자오는 사람은 그 사람의 과거에는 구애됨이 없이 맞이한다.“ 목사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사셨기에 서울제일교회에로 많은 젊은 학생 청년들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어찌 떠나는 사람들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목사님은 기왕 떠날 사람은 떠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한 때 서울제일교회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텃밭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청년 학생들의 아이콘입니다.  1960년대 중반 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성서연구 책임자였던 Hans-Ruedi Weber는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처럼 살아야 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구상은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Salty Christian)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 세계에 캠페인을 벌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목사님을 비롯한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 이 캠페인을 주도하였습니다. 특히 학생기독교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Salty Christian 구호를 외치면서 세상에 소금의 역할을 하고자 대대적인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데가 없음으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13절) 목사님은 Salty Christian의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목사님은 특수선교분야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한국의 학생기독교운동과 도시빈민선교는 물론 기독교언론과 에큐메니컬운동의 중심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셨습니다. 1964년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중앙위원회가 아르헨티나에서 열렸을 때 “학문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현존”(Christian Presence in the Academic Communities)이라는 연구 결과물을 전 세계에 보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현존”(Christian Presence)이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한국기독학생회(KSCM) 총무로 재직하는 동안 학문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현존”을 소금과 빛의 역할로 규정하고 현장을 바꾸어 나가는 일에 열정을 쏟으셨습니다.  목사님은 1968년 연세대학교에 도시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해외에서 자금을 확보한 후 연세대학교 노정현 교수로 하여금 소장을 맡게 하고 목사님은 도시선교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지역조직(Community Organization/CO)을 묶어내는 실무자 양성훈련에 전념하셨습니다. 이 자금은 미국장로교의 George E. Todd 목사님이 주선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빈민선교 실무자들의 영원한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목사님은 평생을 성직자로 사시면서 목회와 기독교기관, 시민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셨습니다.

목사님은 ‘한국의 복음화’라는 구호 대신 ‘기독교의 한국화’를 위해 평생 심혈을 기우리셨습니다. 목사님은 서울제일교회를 20년 넘게 목회하시는 동안 6년여를 중부경찰서 앞에서 노상예배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당국의 방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잘 이겨내셨습니다. 목사님은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2010)에서 길 위의 예배를 끝내는 소회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길 위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태어난 아이들이 적지 않아서 그 아기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이로 자라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도 있었다. 6년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고, 또한 많은 기쁨도 맛보았다. 신앙의 힘, 진리의 힘을 체험했을 때의 기쁨이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기쁨이기에 세상의 기쁨과는 다른 것이었다.”(455) 성직자로써의 면모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마도 성경말씀 가운데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 2:20)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회고록을 정리해낸 신홍범 선생은 “나이드신 분들에게는 ‘체험’이었던 것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역사’가 되었다.”라면서 “폭력을 이겨낸 비폭력의 신앙인, 불꽃같은 삶 헛되지 않았다.”라고 끝을 맺었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아이콘 박형규 목사님은 아들 박종렬 목사에게 “나의 시대는 끝났다. 나의 고난도 끝났다. 나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시대의 선한 목자요, 참스승이며, 민주투사요, 정의의 방패였던 박형규 목사님!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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