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F(태국 아카 미션 파운데이션)
치앙마이에서 북쪽으로 3시간을 올라가면 치앙라이주 태국 소수 민족중 하나인 아카족교회의 중심센타가 있다. 아카족의 기원은 중국으로 오래전 종족전쟁으로 인하여 산을 따라 남하한 부족들이었다. 당시 국경이 뚜렸하지 않은 시절이니 남의 나라인 것도 모르고 산판을 일궈 지급자족한 부족중 하나다. 인도차이나반도(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타일랜드 미얀마)는 이러한 소수민족간의 전쟁 혹은 분쟁을 딛고 이합집산을 하면서 오늘날을 이룬 나라들이다.
그중 아카족은 미얀마와 라오스 국경지대를 거쳐 태국 북부 도이퉁과 카이엡산 인근에 약 150만이 정착하여 그들의 전통인 복식과 음식 풍습등을 유지해온다. 그들은 산족임에도 화려한 예식복과 모자와 장신구를 이어간다. 그러나 1960년 가장 규모가 큰 군사 지도자의 통치를 받는 다. 때는 마침 인도차이나 전쟁인 월남전을 맞이하여 타의반 자의로 소득이 높은 양귀비를 재배하게 된다. 이들은 인근 북부를 장악하고 미군들에게 아편을 팔아 전쟁특수로 양귀비 재배를 하게 되면서 생계유지를 넘어 그 자신들 조차 중독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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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즈음인 1955년 OMF(독일서 시작된 선교단체)소속의 호주 침례교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오게 된다. 인도차이나 다른 나라들도 그렇듯이 인도차이나는 선교 초기 미얀마는 영국과 프랑스가 선교와 지배로 강한 침례교와 천주교가 전례된다. 그외 태국의 방콕에 미션스태이션이 생겨 중국 곤명과 함께 미국인들을 비롯한 선교 황금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모든 국가나 도시에는 이미 문화적으로 강한 불교와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으로 공산주의로 인하여 외세와 내란들이 반복된다.
1955년 피터 나이팅게일 부부선교사가 아카족들이 사는 산속에 전도하여 아페라는 한 여성을 만난다. 당시만 해도 외래 종교인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은 부족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등 어려움이 있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산에서 내려온다, 그렇게 선교사들의 첫 열매가 된 아페는 2남 2녀를 낳아 모두 신실한 신앙인으로 키워냈는 데 그중 하나인 아들 누가는 아카족 최초로 대학교육을 받은(치앙라이 라차판 농학 전공) 64년생으로 아카족 기독교 지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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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현재 인근 16개의 교회를 세우고 연합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교육과 훈련도 하고 기숙사도 운영하는 태국아카기독재단(Thai Akha Ministries Foundation)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한 때 미국 하와이 학가이 바이블스터디에가서 공부하는 등 한국에도 방문한다. 한국방문을 주선한 단체에서는 그의 생애와 아카족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국 청소련들에게 귀감이 된다고 보아 간증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OMF선교사들도 자신들의 미션 첫 열매인 어머니 아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영문판으로 "WITHOUT GATE" 이라는 제목으로 내기도 했다. 문을 닫은 아카족의 풍습을 비유한 셈이다.
이후 아카족의 자립을 위사여 선교사들은 현 소재지에 땅을 매입하여 아카족들이 더 이상 양귀비를 재배하며 중독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하일 랜드 유기농 커피 재배와 우롱차밭 농장과 물고기 양식을 하도록 자립을 도왔다. 아카족의 중심에는 바로 이 센타가 있는 데 200명이 모일 수 있는 강당과 숙박시설 농구장 초중고생들이 거주하는 기숙사를 만들어 운영중이다.
이들은 유서깊은 아카족의 전통과 정신을 유지 발전시키며 그들 나름대로의 신앙과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중요 목표로 하고 있다. 이렇게 아카족의 정신과 육체를 전인적으로 변화시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선교사들의 유산으로 아카 후예들이 자신들 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킬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놓고 호주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이 센타를 이양하고 1992년 모두 본국으로 돌아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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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정신과 신앙의 중심지 아카센타에서 훈련되여 상장한 이들을 계속 교육시키며 지도자들도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성장한다. 이들 조상들이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부족전쟁에 이용당하자 압박에서 피해 산악을 따라 이주하면서 언어는 간직했으나 문자를 잃어버려 현재 글짜가 없이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후 자연부락 가정에서 모이던 예배 공동체가 성장해 다중이 모일 수 있는 건물들을 세우지만 지금은 오래되여 노후해 재 건축들이 필요하다.
이 공동체가 알려진 것은 18년전 허춘중선교사가 CCA에 한 프로그램에온 누가와의 첫 만남에서 시직한다. 외부와 딘절된 체 자기들의 신앙과 공동체성을 긴직한 사연을 듣고 광주 본향교회 채영남목사(100회기 총회자)의 도움으로 호이킬렉 본향교회를 건축하게 된다 또 포항노회 장청 출신 강동노회 목자교회 김동환목사가 탐루앙교회를 또 태안의 한교회가 반마이 사미기교회를 문홍기집사가 타솟교회를 지어준다. 한국식 개척교회가 아닌 아카족이 오래전에 지어 노후된 예배처소를 신축해 주는 것이다. 지금도 비가 세고 낡고 노후한 교회당에서 모이는 신실한 소수민족 크리스찬 후예들은 지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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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들의 현재 처지는 태국국적은 갖고 있지만 교회는 태국기독연합회(CCT)소속이 아닌 독자적인 종교 법인산하로 운영중된다 그러나 또 다른 도시에 있는 아카족 교회 공동체 50개는 CCT 산하 22노회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카족에게 떨어진 복음의 열매가 아름답게 성장중이다. 이번 방문중 인근 아카족교회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하는 주말에 참석할 수 있었는 데 구호로 본 "LOVE TAILRAND 111" 이라는 구호를 모임 시작과 끝에 합창하는 것을 들었다.
이는 태국 전체 인구가 7천만인데 신자는 현재 약 45만으로 아직 1%가 안되는 복음화율을 100만을 목표로 하고 교회가 현재 약 5천개인데 이를 1만개로 하고 성직자 숫자를 1천명 목표로 하자는 태국 전 개신교의 선교 목표라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우리교단이 오래전 실시한 만사운동(만교회 사백만신도 운동)과 비스싸다 곧 성시화운동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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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프라폰 아카교회 주일 예배 참석
9월 1일 인근의 한국명 축복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아고 마여 전도사가 시무하는 곳으로 아카족들이 모이는 마을로 행정명은 치앙라이 맬루우군 퐁프레면 후와이선 이라는 곳이다 재적 180명에 주일 출석은 약 6-70명으로 구성은 아동 40명,청소년 30명으로 주민대부분이 농업과 인근 도시에서 직업들을 갖고 있다. 가난했지만 열심히 살면서 신앙을 간직한 부모들이지만 후세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워 대학을 졸업하고 인근 도시의 전문직으로 배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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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설립 역사는 현재 대표격인 한 집사인 가정에서 2006년에 3가정이 모이기 시작한다. 어디서나 선각자적으로 믿음을 받아드리고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강한 불교 문화를 이겨내고 지금의 교회당을 짓기 까지의 여정은 눈물겹다. 그러나 현대 건물이 노후하고 협소하여 재건축을 위하여 그간 건축헌금을 적립했으며 30평으로 2층으로 지어 예배실과 사무실 다목적 홀로 사용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전체 약 1억여원의 재정중 50%정도는 적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외 이 교회서 성장한 자녀들과 출향중인들의 특별 건축 작정 헌금으로 2-30% 는 자부담할 수 있다고한다. 그러나 약 3천만원 가량이 부족하여 한국의 독자가들의 헌금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일에 관심있는 교회나 단체, 개인은 허춘중선교사께 연락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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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있고 순수한 가정들이 모이는 교회로 한국의 6-70년대 교회를 보는것 같은 느낌이다. 성가대의 열정적 찬양과 농사를 지으며 사역하는 전도사 그리고 헌신적인 집사의 봉사와 헌신이 느껴진다. 태국의 대도시 혹은 안정적 신분을 유지하는 곳 과는 다르게 신분상 어려움이 있음에도 교회공동체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카렌족 교인들의 기도를 한국교회 바 응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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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지도자들과 집사님 댁에서 점심식사 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