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교회 40주년 기념 행사

                                    대화동  빈들교회서

   
 

김규복목사 황선업사모가 40년전 개척한 민중교회가 후임 허연목사를 모신지 6년이다. 그동안 함께한 교우들과 후원자 지역의 동지들을 모시고 40주년 기념 축하 예배와 행사가 오는 9월 22일 11시 교회에서 열린다. 설립자 김규복목사와 후임ㅈ허연 목사 당회원 문성호 황의경장로 이름으로 벗들을 초청했다.

   
 

한편 황선업사모는 이 행사를 준비하며 페이스 북에 8번에 걸쳐 지나온 교회의 역사와 자취를 소개하여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아래는 8회까지 연재한 글을 소개한다. 

   

 

남편 김규복목사와 개척한 빈들교회가 40주년을 맞게 되어 ‘주민선교부 40년’을 정리해 보았고, 페북을 통해 마지막회를 연재합니다.

                            빈들교회 주민선교부 40년
"거칠고 힘들었던 광야 40년이지만 기적의 연속"

섬나의집지역아동센터장 황선업(김규복원로목사 부인)

1. 3대째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나는 어릴적부터 교회생활이 무척 즐거웠고, ‘앞으로 나는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청년기에 독재정권과 맞서는 세월을 보내면서 기독교 청년운동을 했다. 대전노회 장로교청년연합회 임원 활동과 전국장로교청년연합회(장청) 공동대표를 하며 민주화운동을 했다.

결혼 전 김규복목사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연세대학교에서 두 번 제적을 당하고, 수감도 되고, 강제징집도 당하며 고초를 겪었다. 고문으로 힘든 몸을 쉬기 위해 대전에 왔다가 교회에서 만나 4년간 연애를 했다. 남편은 대전신학대학에 편입해서 공부를 하고, 장신대에서 신학공부 마친 후 산업선교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민중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1984년 결혼과 동시에 대전지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을 찾았다. 1970년대에 조성 된 대전 1, 2 산업단지가 있는 대덕구 대화동에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허름한 창고 건물을 임대했다.
대화동 지역의 2/3는 산업단지이고, 1/3은 주거지역인데 1980년대는 인구 2만 명이 넘는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공단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와 건축 노동자들이었다.

빈들교회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1984년 노동자를 위한 야학을 했다.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노동자들에게 교양과 문화를 높이는 생활야학을 기본으로 하고, 진학을 위한 검정고시를 도왔다. 대전노동상담소를 열어 임금체불이나 부당해고, 산업재해 등을 당하는 노동자들을 상담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 노조설립 등 노동자들의 의식을 깨우는 학습을 했다. 노동자들의 권익단체가 없던 시대에 빈들교회를 통해 대전지역의 노조활동이 싹을 틔우고,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2.대화동은 내가 경험하거나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더 열악한 마을이었다. 공동수도와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며 리어카도 지나가기 어려운 좁은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은 닭장 같은 집에서 잠만 자고 일어나 주야로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우선 마을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교회가 주민을 위해 도움이 될 것들이 무엇이지, 주민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많은 분량의 설문지를 만들고 3개월 동안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지역실태조사를 실시했는데 주민들의 욕구 중 첫 번째가 맞벌이 부부가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안심하고 아이들을 맡길 곳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조출, 잔업, 특근, 야근, 철야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고, 아이들을 하루 종일 맡아주는 어린이집도 없었다. 아이들은 위험에 노출되었고,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실태조사 후 가난한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을 위해 1986년 3월에 종일제 탁아소 형태의 ‘섬나선교원’을 개소했다. 결혼 전 선교원을 개척하고 운영한 경험이 있고,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한 경험이 있어서 종일제 탁아소 운영에 큰 부담감 없이 시작하게 되었다.
목수를 하시는 장로님의 도움으로 책상과 의자를 손수 만들었고, 미끄럼틀과 블록을 장만해서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12시간 아이들을 맡아서 돌봤다. 시설은 열악하고 월급도 적은데 여군 출신인 김경숙선생님이 아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교육해서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김경숙선생님은 3년간 재직을 했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40년간 섬나의집 후원자로 우리들 곁에 있다. 

섬나선교원은 차량 운행을 하지 않고도 50여명의 아이들을 돌봤으며 훗날 민간 탁아소들의 헌신의 결과로 영유아보육법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대화동에도 정부 지원을 받는 어린이집이 한 두 개씩 늘어났다. 섬나선교원이 아니어도 제도권 안에서 영유아를 돌보는 시설이 있어서 운영을 중지하고,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하기로 결정 했다. 섬나선교원은 14년을 운영하며 어린이집이 없던 시절에 대화동 영유아들을 안전하게 돌봤다.
1986년 10월에 한남대 교수진과 대덕연구단지 연구원을 조직해서 ‘작은자사랑회’를 결성했다. 당시 소년소녀가장, 조손가정 아동 청소년들에게 매월 정기후원과 물품나눔, 상담지원, 한남대 ‘다비다회’ 자원봉사자를 연계한 학습지도, 특별활동, 자조모임. 독거노인 돌봄 등 30여년간 활동을 했다.
법동에 영구임대아파트가 생기면서 대화동에서 법동으로 이사한 가정도 여러 가정이 있었다.

작은자사랑회는 법동으로 이사 한 가정도 정기후원과 가정방문 학습지도를 이어나갔고, 물품 나눔과 매년 여름캠프도 진행하고, 김장 나눔. 독거노인의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작은자사랑회는 2001년부터 재미교포가 설립한 장학재단과 연계해서 대학생들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장학생을 추천하고 관리를 했다.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한 학생들은 훗날 외교관 부인이 되기도 하고, 공무원, 연구원, 사회복지사 등으로 살아가고 있다.

3. 1987년~1990년에는 돈이 없어 병원을 가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충대기독의사회의 도움을 받아 매주 주말진료소와 약국을 열었다.
건강보험공단은 있지만 가난한 주민들이 병원비가 부담이 되어 병을 키우는 것이 안타까워 주말진료를 했는데 충대병원의 의사들은 매주 가정의학과, 치과 진료를 하고, 약사는 한 쪽에서 약을 조제를 해서 주민들의 건강을 살폈다. 이때 자원봉사를 했던 충대병원 의사들은 은퇴 후 아프리카에서 의료선교를 하고 있다. 

1988년~1997년에는 30대의 젊은 엄마들 중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어머니 한글반’도 운영을 하고, 여성들의 사회의식을 고취하는 주부 아카데미 교육도 운영했다. 60평 정도 되는 허름한 창고 건물은 칸막이 공사를 해서 사택, 선교원, 상담소를 운영했고, 주말이면 진료소와 약국으로 사용하고, 주일엔 교회 예배를 드리고, 매일 저녁에는 노동자 야학과 상담을 했다. 일자형 창고 건물은 사택 방을 지나쳐야 주방이어서 그야말로 사생활은 보장이 되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화장실은 100미터쯤 떨어져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어서 많이 불편했다. 교회 건물은 산 밑의 허름한 건물이어서 가끔 실내에 쥐가 드낙 거리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매일 선교원 유아들의 점심과 가난한 청년 노동자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없는 살림에 늘 쌀독을 긁어야 했다. 쌀이 떨어질 때면 시골에서 목회하는 목사님께서 무거운 쌀을 메고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를 갈아타며 갖다 주기도 했다.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곤 했다. 광야에서 하루 먹을 양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것처럼 밥상공동체의 자원은 늘 조마조마 할 정도로 겨우 채워지고, 버스비 조차 없어서 곤란을 겪지만 우리의 청춘은 희망차고 즐거웠으며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개척 초기 3년간은 피아노 렛슨을 해서 생계를 이어갔고, 이후엔 온전히 사역에만 집중을 했다.

4. 1987년 5월부터 무료공부방인 ‘푸른 공부방’(현 지역아동센터)을 시작했다. 당시 마을에는 주산학원이 몇 개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학원에 다닐 수 없었고, 방과 후에 방임되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허름한 주택을 빌려서 대전에서 처음으로 무료 공부방을 시작했다.
30여명의 자원봉사자를 조직하고 그들을 교육해 사명감을 고취시키고, 아이들과 함께 놀고, 먹고, 학습지도를 했으며 산과 들과 물로 나가는 체험학습 캠프도 자주 진행했다.

섬나 공부방을 시작으로 대전의 빈민지역에서 무료 공부방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1년 5월에는 대전지역공부방연합 운동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그해 12월에는 연합발표회를 하며 연대활동을 했다. 1996년 산만하고 거친 아이들에게 여름방학 특강으로 사물놀이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걸 계기로 ‘씨알문화패’를 창단했다. 3분도 집중하기 힘든 아이들이었는데 점차 집중력이 길어지고 실력도 늘면서 대전지역은 물론이고 서울까지 다니며 공연 활동을 하고, 전국 사물놀이 대회에서 수상을 많이 했다. 씨알문화패 출신 중에는 대학교에서 한국음악 타악을 전공하고 국악인으로 활동하는 선배들도 있다.

자생적으로 시작하여 정부의 지원 없이 운영한 무료공부방은 IMF 외환위기를 맞이했다. 대화동에서는 사흘을 굶어 쓰러진 아이들이 발생했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해체가정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8년 7월 여름방학이 되면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결식아동을 위한 무료급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무료급식을 시작한 1개월은 식판에 아홉 번씩 음식을 채워서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1개월이 지나자 2-3회로 줄었다.
섬나의집에서 시작한 결식아동 무료급식은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고, 민간에서 무료급식을 하는 공부방들의 요구로 2000년 1월부터 정부가 아동급식을 지원하게 되었다. 

1998년 10월부터 대전에서 처음으로 푸드뱅크, 푸드마켓 시스템을 만들어 가게를 얻어서 대화동 아이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먹거리를 지원했다. 라면과 쌀을 후원 받아서 각 가정에 나누고, 식료품을 지원받아 주민들에게 나눴다. 공부방에서 60여명의 아이들을 학습지도, 급식, 프로그램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공부방에 오지 않은 아이들, 조손가정, 장애인 가정 아이들의 먹거리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1999년 1월부터는 매일 100개씩 결식아동, 장애인, 독거노인 가정에 도시락 배달을 했으며 대화중학교 결식아동을 위해 매일 점심 도시락을 배달하기도 했다. 도시락배달 인력은 공공근로를 지원받았다.

5.이 시기에 늦둥이를 출산했는데 결식아동과 대화동 주민들을 먹이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행정처리를 하느라 어린 딸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다.
외환위기로 경기는 침체되고, 해체가정이 늘어나면서 마을에서 돌보던 아이들을 아동보호시설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설(고아원)로 가야 할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우리집과 교회 쉼터에서 아동 청소년들을 수년간 가슴으로 품고 양육했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결혼을 하고,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이후 더 이상 민간 자원만으로 빈곤아동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나를 비롯해 뜻있는 몇 사람이 앞장서서 전국적으로 늘어난 방과 후 무료공부방들의 전국협의회를 만들고, 뜻과 힘을 모아 국회에 입법 발의를 요구한 끝에 2004년 아동복지법이 재개정 되었고, 지역아동센터로 제도화되어 아동복지시설이 되었다.

대화동에서 80년대 공장 노동자의 자녀들과 90년대 일용직 노동자, 서비스업이나 식당, 판매업에 종사하는 부모의 자녀들의 보육과 학습지도를 돕는 역할 뿐만 아니라 제도화를 이끌어 내며 아동복지의 선구자적 사명을 감당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해체가정이 증가하면서 며느리가 가출한 어르신들이 어린 손주들을 양육하는 조손가정이 늘었다. 2001년 1월부터 14명의 ‘며느리가 가출한 할머니 모임’을 시작했으며 이후 ‘느티나무 학교’로 명명했다.
40여명의 느티나무학교 어르신들은 ‘노인참여나눔터’로 발전해서 주 1회 모임과 교육, 지역활동, 전국 네트워크 등 노인복지운동을 활발히 했다. 노인참여나눔터는 ’노인의 문제는 노인 스스로 해결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을 했다.

이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어르신들이 점차 늘어나서 25명 정도가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찬송을 부르고, 주기도문도 외우고, 상황중심 성경공부도 하고,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매우 즐거웠다. 대부분 처음 교회를 출석한 분들이어서 어르신들 눈높이에 맞춰서 성경공부를 했다. 이때가 건축중이어서 어르신들께서 교회 청소 봉사를 열심히 하셨다. 세월이 흘러 한 분 한 분 돌아가셔서 현재는 90세가 넘으신 두 분이 남아 계시고, 매주 예배를 드리시는데 매우 감사한 마음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정부에서 공공근로, 사회적일자리 등 일자리창출 사업이 생기면서 사회적일자리 사업으로 2005년 ‘실버레스토랑’을 개소했다.
마을 어르신 10명을 고용해서 누룽지, 쑥 미숫가루, 청국장을 생산해서 판매를 했다. 누룽지는 직접 후라이팬에 굽고, 봄이면 금산에 가서 쑥을 뜯어서 삶고 말려서 미숫가루를 만들었다. 생산한 제품은 대기업과 연구단지 점심시간에 구내식당 입구에 매대를 설치하고 판매를 하기도 하고, 축제나 행사장에서 판매를 하기도 했다. 사회적일자리 우수기관으로 선정되어 인센티브를 받기도 했다.
4년간 어르신들과 재밌게 사업을 해서 사회적기업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내가 관리하기엔 너무 바빠서 4년간 운영을 하고 중단을 했다.

6.  2004년 지역아동센터 씨알문화패 단원들과 함께 중국 문화탐방을 한 계기로 현재까지 중국,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일곱 번의 문화탐방 및 해외공연으로 견문을 넓히고 재능기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대화동은 작은 마을이지만 이주민들도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빈들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선주민과 이주민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노력에도 한 발 앞서서 나갔다. 

특히 남편이 일찍 죽거나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의 학대를 피해 살기 위해 자녀를 데리고 가출한 다문화 한부모가정을 위해 2006년부터 ‘민들레 홀씨 지원사업’으로 법률지원, 경제적인 긴급지원과 심리적 안정을 기할 수 있는 상담, 한국어 교육, 자녀 교육 시스템 구축을 통해 심리와 생활을 안정시킨 후 지역 안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주거마련과 취업 알선을 했다. 다문화 한부모가정을 돕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주여성들이 빈들교회를 찾아와서 법률상담, 긴급지원을 요청 했다, 문제해결이 되어도 떠나지 않고, 빈들교회를 의지하며 대화동에 안착하여 살게 되면서 자연히 이주배경 아동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현재 지역아동센터 아동 49명 중 이주배경아동이 41명이다. 2016년 1월에 이주배경 아동들로 구성 된 ‘레인보우예술단’을 창단해서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 교육을 하고, 공연활동을 하고, 전국동요대회에 참가해서 수상을 많이 했다. 베트남 출신 엄마들로 구성 된 ‘다문화예술단’을 창단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80년대 노동자 자녀들을 가슴에 품고, 1990년대 외환위기 속에서 결식아동, 해체가정의 아이들을 온몸으로 지켜내고, 2000년대는 이주민과 그 자녀들이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고 정착하도록 도우며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섬나의지역아동센터는 우리 사회의 버팀목이 되었다.

7. 섬나의집지역아동센터 지나온 발자취를 살펴보면 한국의 지역아동센터 태동기부터 성장과 발전하는 과정, 제도권에서 정착하는 과정, 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아동의 다양성까지 알 수 있다. 노동자, 아동, 청소년, 노인, 장애인,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빈들교회는 주저하지 않고, 가장 먼저 그들 곁에서 손잡아 주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지지하며 물질의 일부를 떼어 나눔을 한 후원자님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실무자, 선생님, 조리사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편 김규복목사와 나는 많은 사역을 감당하느라 15년은 명절도 없이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으며 이후에도 쉼 없이 경주마처럼 달려왔다.
1989년 창고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아파트를 짓겠다”며 “나가라”고 하는데 월세가 밀려서 보증금을 받을 게 없었다. 그 당시 교인은 월세 사는 청년들만 있었다. 돈 한 푼 가진 것 없이 1989년부터 시작한 교회 건축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명절이면 양말, 십전대보탕, 꿀 등을 팔기도 하고, 모금도 하지만 은행 대출을 감당할 수 없어서 두 번이나 법원 경매도 있었고, 인부들의 대금 독촉에 피 말리는 시간이 많았다. 

건축을 하면서도 주민들과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 프로그램은 활발히 진행을 했다. 이렇게 교회 사역과 건축에 전념하다 보니 자녀들을 돌보는 것, 자녀들의 감정을 살피고 공감하는 것,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늘 뒷전이었다. 빈들교회가 수많은 아이들, 장애인, 노인, 이주민, 사회적 약자를 도왔던 것은 가진 게 많아서 도운 게 아니라 가난하지만 우리는 늘 바닥을 긁어서 도왔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어서이며 ‘지극히 작은 자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며 작은 자들 곁에 있었다. 그때 그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을수록 하나님의 기적을 수없이 체험할 수 있었다. 

8. 팔년전 남편 김규복목사는 젊은시절 고문을 받아서인지 쉼없이 사역에 전념해서 그런지 몸이 좋지 않아 조기은퇴를 했다.
부르심에 순종하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 평생 빈들교회 건축에 몸과 마음과 물질을 다 바쳐서 일을 하다가 은퇴를 했는데 개인적으로든 교회적으로든 적립한 것이 한 푼도 없었다. 은퇴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부담감을 주기 싫어서 다른 동네에 월세방 계약을 했는데 월세 보증금 조차 없었다. 교인들에게 이사 날짜도 알리지 않고 이사를 했다. 

신혼 초에 ‘가난은 우리의 훈장’이라고 가계부 첫 장에 기록을 하고,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은퇴를 했지만 한 푼 없는 가난의 훈장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다. 남편은 은퇴를 했지만 나는 정년이 남아 지역아동센터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 남편 은퇴 후 출근하는 차 안에서 2개월 정도는 매일 눈물을 줄줄 흘렸던 것 같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숨 가쁘게 지나온 세월,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건축한 교회, 병든 몸, 가난… 

40년 사역을 되돌아보니 최선을 다한 삶이었기에 후회는 없다. 다만 우리 자녀들을 잘 돌보지 못하고, 잘 가르치지 못하고, 가난을 물려주어 한없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자녀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축복하시면 참 좋겠다.
남편 김규복목사와 함께 한 광야 40년은 거칠고 힘들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적을 체험하듯 40년의 사역은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세월이다. 지나온 모든 삶이 은혜와 감사이다. 

* 남편은 교회 목회, 이주민센터, 노동, 환경, 외부연대 사역을 하고, 나는 대화동 주민들을 돌보는 사역을 했다. 페북에 연재한 글은 빈들교회 전체 사역이 아니고, 일부인 주민선교부 사역을 정리했습니다. 

                     * 이것으로 빈들교회 주민선교부 40년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빈들교회 주민선교부 40년 글에 대해 공감하시고, 응원하신 페친분들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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