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앞세운 이들을 위로하며

            거역할 수 없는 죽음

기독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이를 "장막 집"에서 "영원한 집"으로 이사 가는 것으로 표현한다(고후 5:1).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육체적 고통과 이별에 대한 자연스러운 두려움과 사후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 남겨질 이들에 대한 연민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과거 무지와 무속의 시대의 산물이다.

종교가 개인화되면 주로 개인의 생사화복에 연연하는 기복적으로 고등종교가 되면 공공의 영역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 티벳이나 히말라야 산속의 은둔과 해탈 속세를 떠난 이들의 고행는 사회적 평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은 불교처럼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있듯이 기독교도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사망이 삼켜져 이김에 이르렀느니라"(고전 15:5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우리가 알거니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느니라"(고린도후서 5:1)라고 기록되여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신앙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장례 문화는 불교, 유교, 샤머니즘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장례 문화는 부활의 소망을 갖고 슬픔을 부정하지 않되, 절망이 아닌 신앙 의 성장과 간증을 나누며 하나님의 섭리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의 복종하는 모습을 통해 남은 자들에 대한 귀도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인은 성경적 사후 믿음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인생사에 엃힌 타인에 대한 용서와 화해로 관계의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

정병주 목사 장남
2024년 한해가 저무는 끝에 되돌아보면 감사하고 좋은 일도 없지 않치만 어느 해 보다 3가지 아픈 추억이 있다. 가까운 친구들 자녀 3.40대 자녀벌되는 이들을 앞세운 일이다. 올해 5월 산본의 정병주목사 장남이 갑짝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연락이 잘안되 문상도 못한 체 몇 달을 기다렸다가 만났다. 본인도 경황이 없었고 누구를 만나면 돌아올 수 없는 아픈 추억을 되새겨야 하니 사람도 피하게 되고 힘들었다는 고백이다.

장례로만 끝난 것도 아니고 하던 사업을 정리하느라 안해본 일들 처리로 큰 고생을 하였는 데 앞으로 어린 손자와 자부를 돌보는 일도 남은 과제다. 이제 은퇴도 앞두고 있는 데 주님을 의지하면서 목양을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어디있는 지 기도해보지만 응답이 쉽지 않은 가 보다 그러나 지도자 답게 모든 것을 털고 일상에 복귀한 것에 감사와 격려를 보낸다.

12월 3일(화) 충격적인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국회가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발빠르게 해제결의를 한다. 그리고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국회 부의장 이학영의원이 국회서 농성을 시작하게 된다. 이에 교인이기도 한 이의장을 격려하고 힘을 보태기 위해 국회 심방에 같이했다. 기도해드리고 정목사와는 늦도록 카페에서 회포를 풀며 위로의 시간을 보내니 겨우 마음을 전한 것 같다 훈련하다.  

박진석목사 장남 
그런데 지난 9월엔 박진석 목사 아들이 세상을 떳다. 벌써 한 1년간 투병하면서 부부가 뒷바라지를 했음에도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2남 1녀중 장남으로 전도 유망한 엘리트였다. 국내 굴지의 금융기관의 경영 비서실에서 일했는 데 아마 직업적 소견도 있어 보여 업무로 인한 문제가 아닌 가 한다. 

박진석목사와는 80년 신학생 시절 장청운동을 통해 만났고 장신대서 현신에 예장민교 초기 멤버로 조지송, 인명진목사에게 훈련 받은 첫 세대다. 이후 박목사는 76기로 먼져 졸업하고 안양에 처음으로 노동자교회를 시작했다. 그후 영등포산선 총무와 C3tv 사장을 지내고 지금은 가스펠투데이 언론을 운영하고 있는 데 올해 자신이 세운 청지기교회 목회자로 다시 부임해 목양을 마칠 계획으로 있다.

오랜기간 교류한 인연으로 처와 같이 문상을 하였지만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박목사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도 받아드리고 빨리 극복하고 일상에 복귀한 것은 감사한 일이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과연 나라면 이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 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자녀들이 건강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깨닳게 된다.

용덕순목사와 장녀 

지난 12월 15일(주)은 뚝섬서 어려 같이 자란 용덕순목사(장신대 73기)가 은퇴를 하는 날이었다. 이날 참석은 못했지만 행사가 끝난 밤부터 지난 7개월 전부터 암으로 투병중인 장녀 은하가 위독해져 2일동안 중환자실을 지켰지만 18일(수) 41세로 세상을 뜬 것이다. 딸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지난 세월동안 부모로써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보느라 10키이상 빠진 얼굴은 그야말로 알아보기 힘든 정도였다.

딸도 사랑하는 이들의 간병을 받으며 근근히 연명하며 아빠 은퇴시 까지 버티다가 끈을 놓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피워보지도 못한 체 져버린 꽃같은 예쁜 딸을 앞세운 용목사와 은퇴식에 이어 장례까지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신 신길동교회와 후임 목사에게 감사가 저절로 나왔다. 은퇴와 후임 취임을 함께 하였는 데 마침 후임도 같은 노회서 동역하던 부목사 출신에게 이양하여 그나마 마음 편하게 은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일(목) 화장후 평소 딸이 부모님을 모시고 온적이 있던 경기도 마장의 에덴 낙원파크에 미리 자리를 잡아 안치를 하였다. 오후 5시경 봉안을 마치고 함께한 수고한 분들과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나눴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한 후임 목사와 당회원들 교인들 모두 슬프지만 주안에서 소망을 잃치 않고 위로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히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모든 생명은 반드시 소멸한다. 

구약성경에서 사후에 대한 말씀은 그렇게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엔돌의 무당이 죽은 자를 부른 귀절이 있지만 정통 유대인들인 바리세파는 천사와 부활, 내세를 믿지 않는 다. 그리고 한글로 번역된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로 불리우는 단어는 이 세상과는 다른 어떤 하나님의 통치로써의 세계를 의미한다. 신약성서 계시록에는 말하는 "새하늘과 새땅" 이라는 말은 박해의 시대을 견디는 신자들의 소망을 위한 표현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도 그렇고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사후 천국이라는 의미는 기독교적인 신비의 용어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속에서 세상과 대별되게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킹덤은 정치적 의미로 초기 로마의 기독교박해 시대에 카다콤에서 삶과 신앙을 지켜온 이들에게는 죽임으로 끝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염원하는 말이며 여기서 부활사상이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하여 함락되는 마지막 까지 항전한 중간사 시대에 마카비왕조 힐카누스 가문의 최후 항전으로 기록되는 맛사다의 전투에서 전원이 자결로 신앙과 정신의 순수함을 증명한다. 당시 로마군은 안식일에 쉬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에 항전하지 않아 많은 희생을 당한다. 그러면서 의로운 죽음, 신을 위한 항전 혹은 순교의 의미로 더 낳은 세상으로 천국의 의미와 이렇게 끝이 아니라는 의인에 속한 구원받은 자들의 부활사상이 강조된다. 

평가와 결론

이후 중세기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전쟁은 하나님의 땅의 회복으로 치장된 세속정치가들이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고 속여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교도라고 공격하고 시원찮게 믿는 다고 죽이고 마녀사냥과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이들이 정치적 죽임을 당하게 된다. 당시 교회가 사회에 행했던 만행이나 군림은 수많은 기록과 역사를 통하여 증명된다.

따라서 우리가 죽어서 간다고 믿는 천국이란 믿는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믿지만 그 자격과 판단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이다. 또 모든 종교에는 짧은 인생에 대한 아쉬움과 소망으로 불교에서도 지옥과 천당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믿는 다. 또 무슬림이나 흰두교에서는 까르마(업보) 라는 용어로 선을 행한 자는 천국에 그렇치 못한 자는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거나 선한일을 한 자는 다음 생에서 귀한 존재로 나지만 죄인은 그렇치 못하다는 것을 믿는 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람이 죽음에 직면후 제 생을 멋대로 산자하고 종교적 계율이나 어떤 양심과 신실로 산자가 그 끝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후의 세계는 갔다 온 사람이 없지만 대체로  믿음으로 간직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종교 안의 가르침으로 유익하다. 그러나 쉽게 남의 죽엄 앞에 하나님이 천국으로 인도하셨으니 슬퍼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말할 일은 아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 하나님나라가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지마라" 고 말씀하시며 "하나님나라는 너의 마음속에 있다" 고도 했다. 이때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환경이나 통치를 의미한다. 이승의 가정도 지옥이 될 수 있고 천국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서도 " 하나님나라가 임하옵시며" 라는 의미를 보아도 반드시 사후에 가는 것만이 아닌 하나님의 도래를 이 땅에 실현하는 의미를 의미한다. 

우리는 타인의 죽엄과 슬픔 앞에 언제나 이를 나의 문제로 생각하고 받아드리며 옷깃을 여미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적인 슬픔을 금기시 하는 것은 올치 않다. 우리는 연약하고 슬픔을 느낄 줄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슬픔으로 인하여 절망의 나락으로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깨닳고 한번 가면 오지 못하는 인생으로 믿고 책임감과 사명으로 살아내야 할 이유다. 년노한 어른들이 수한을 다하시고 가는 것도 아쉬운데 하물며 자녀를 앞세우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가늠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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