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지 영감 묘비 파손

                   영국 ‘스크루지’ 묘비 테러 

11월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중부 슈루즈베리 지역 교회 공동묘지에 스크루지 묘비가 훼손됐다는 전언이다. 이 지역 경찰은 훼손된 이유와 용의자 등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스크루지가 소설 속 인물이기 때문에 실제 묘비가 아니고, 지난 1984년 영화 ‘크리스마스 캐럴’ 촬영 당시 설치된 묘비이다.

당시 이 영화 촬영이 끝난 후 스크루지 묘비 소품은 공동묘지에 남겨졌고, 지역 관광상품이 됐다. 이런 이유로 지역민들에게 스크루지 묘비는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됐었다고 한다. 그런 이 묘비가 훼손된 것이다. 

크리스마스 문화 만든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찰스 디킨스 소설이다.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초판 6천부가 단 하루만에 매진됐을 정도다.  권선징악적 교훈을 주는 작품으로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물결에서 크리스마스 문화가 자리매김되지 못한 상태에서 크리스마스 캐럴 소설이 나오면서 크리스마스 문화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크리스마스는 중세시대까지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던 문화로 비록 기독교신앙 안의 것이지만 로서구 유럽이나 서구사회의 문화였다. 당시 크리스마스 문화는 교회를 중심으로 교인들끼리 모여 아기 예수 탄생을 기리는 문화였으나 이를 통하여 전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지금 처럼 상업적으로도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런 전통이 사라졌는 데 이유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인구가 도시로 몰리게 됐고, 점차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에 나가 아기 예수 탄생을 기릴 수도 있었지만 당시 저임금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15시간 이상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교회로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즉, 교회에 나가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것 자체가 사치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사람들의 뇌리 속에 크리스마스라는 개념이 사라졌을 때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소설이 발표하면서 점차 크리스마스 문화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찰스 디킨스는 소설을 통해 크리스마스를 기리는 것은 많은 부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대중에게 줬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굳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모여서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면 된다는 것이었다. 즉, 크리스마스 캐럴 소설은 크리스마스를 부활시킨 것은 물론 크리스마스 의미를 바꿔 버렸다. 그 이전까지는 종교적 의미가 강하면서 교회 단위로 기념을 했지만 소설이 발표되면서 점차 ‘가족’ 중심의 기념일이 됐다.

특히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것 자체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소설로 인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물론 현대적 의미의 크리스마스 문화를 만드는 것에는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산타크로스는 1930년대 경제대공황을 겪으면서 코카콜라가 겨울철 코카콜라 매출을 늘리기 위해 도입한 캐릭터이고, 루돌프 사슴코는 역시 경제대공황 당시 미국 백화점 광고에 등장한 캐릭터이다. 

   
 

크리스마스를 발명한 남자 ② (otterletter.com) 챨스 디킨스(2024년 소개 글) 

챨스 디킨스는 누구인가?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영국의 소설가로, 그의 작품은 성서와 셰익스피어의 작품 다음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며, ‘가장 크고 다양한 세계를 창조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다. 19세기 영국은 곧 찰스 디킨스라는 이름으로 표현될 정도로 당대 영국 사회상을 충실히 그려 내는 한편, 아동학대, 빈곤, 가정폭력, 노동 및 교육 현실 등 당시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찰스 디킨스는 1812년 2월 7일 영국 포츠머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디킨스는 해군 경리부 하급 관리로 상냥하고 낙천적인 기질의 사람이었는데,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구두쇠 윌킨스 미카버의 모델이라고 한다. 2세 때 아버지의 전근으로 런던으로 옮겨 살았으며, 어린 시절 몸이 약하고 심약한 성격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를 하거나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러 다니며 지냈다. 그리고 유모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독서를 바탕으로 연극적 상황을 만들어 내며 공상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공장에서 나온 뒤 웰링턴 하우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15세 때 졸업한 뒤 변호사 사무실에 사환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일이 잘 맞지 않아 방황하면서 연극을 보러 다니다가 결국 이듬해 사무소를 그만두었다. 이후 속기술을 배워 민법박사회관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20세 때 의회 신문인 〈미러 오브 팔러먼트〉의 기자가 되었다. 이 무렵 배우가 되려고 각종 연극 오디션에 응모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문기자를 하는 틈틈이 습작을 하던 디킨스는 〈트루 선〉 지의 통신원 생활을 하면서 각종 풍속을 산문으로 써서 다양한 잡지에 투고, 발표했다.

디킨스는 1838년 《올리버 트위스트》, 1839년 《니콜라스 니클비》, 1840년 《골동품 상점》, 1841년 《바나비 러지》 등 연달아 장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는 일련의 작품들에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밑바닥 사회의 현실과 노동자들의 애환을 생생히 담고, 영국 사회 제도의 모순과 어두움을 다소 기괴하리만큼의 희극적인 인물과 풍자를 통해 비판했다. 런던 뒷골목을 배경으로 강제 노역을 하는 고아 올리버 트위스트의 일대기를 그린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시 영국 노동자의 비참한 삶과, 특히 1834년 시행된 신빈민구제법을 고발하고 있다.

또한 니콜라스 니클비라는 청년이 학생들을 학대하는 기숙학교에 대항하는 등의 일화를 그린 《니콜라스 니클비》는 요크셔 주의 한 기숙학교에서 학생 학대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고발하고자 집필했다고 한다. 《니콜라스 니클비》가 발표된 직후 기자들이 요크셔의 학교들을 경쟁적으로 취재했고, 실상이 확인되어 학교들이 폐쇄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1842년 디킨스는 약 반 년간 아내와 미국 여행을 하고 돌아와 《미국 기행》을 발표했다. 그는 영국 최초의 유명 인사 작가라 할 만한데, 영국 내에서는 노동자 계급부터 여왕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독자들이 있었고, 미국인들에게도 크게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때문에 《미국 기행》이 발표되었을 때 미국인 독자들은 그 안에 담긴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묘사를 보고 분개하기도 했다고 한다). 1843년에 출간된 《크리스마스 캐럴》은 출판 5일 만에 초판 6천 부가 모두 매진될 정도였다.

1854년에는 영국 서북부의 공업 도시 프레스턴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주제로 하여 《어려운 시대》를 썼다. 디킨스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명성과 그로써 창출된 부를 충분히 누렸다. 이는 대중의 취향에 영합한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이를 잘 알고 글쓰기에 활용하기도 했지만, 사업적 수완 역시 뛰어난 덕분이었다. 그는 매달 분책 형식, 즉 시리즈로 책을 내고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 다음 회에 반영했으며, 이런 노력으로 수십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그의 초기작들은 가정생활의 미덕을 칭송하며, 권선징악의 교훈 및 해피엔드의 결말을 취하는데, 이 역시 대중들이 요구하던 바였다. 19세기 중엽부터 산업화의 폐해는 사회 전반 및 여러 계층에서 등장했으며, 경제적인 갈등과 범죄가 치솟았다. 그런 상황에서 디킨스의 소설이 그려 내는 빅토리아 시대의 윤리성이 대중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나 디킨스 역시 이런 목가적인 자신의 작품에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1858년 아내와 별거하고 가정생활이 파탄 난 이후에는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개인의 좌절과 사회의 어두움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내와의 불화는 아마추어 연극에서 만난 여배우 엘렌 터난과 불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인데, 별거 후 엘렌 터난과 죽을 때까지 관계를 유지했다.

작가로서의 자괴감에 시달리고 가정생활도 끝이 났지만, 그는 정력적으로 글을 쓰고, 공개 낭독회를 열고, 사회사업을 하고, 주간지를 창간하고, 여행을 다녔다. 프랑스 혁명을 무대로 한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우리들의 친구》, 《막다른 골목에서》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1865년 겨울에는 프랑스로 요양을 갈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이듬해 미국으로 가서 공개 낭독회를 열 정도로 그는 바쁘게 살았다. 의사로부터 활동 중지를 권유받았으나 죽던 해까지 추리소설풍의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을 집필했다. 1870년 6월 9일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음을 맞이했고,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디킨스의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교회 내 ‘시인의 구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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