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여수 선교사 추모

      루츠 드레셔(Lutz Drescher,도여수) 1주기 

   
 

1년전 별새한 독일인 루츠 드레셔(복음선교연대(EMS) 선교협력동역자의 1주기 추모예식이 지난 3월 20일 오후 4시 기독교회관 2층에서 열렸다. 격동기에 한국선교사로 부임하여 신군부의 광주학살과 반민주화에 저항한 한국교회의 현장에 함께 한 증인이다. 행사는 파송받아 활동한 한국기독교장로회(PROK) 총회가 주관하고 NCCK 화통위와 PCK, 기사연 사)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영등포산업선교회가 협력했다. 

이날 추모식 설교는 노창식목사(전 신명교회)가 했으며 독일인 친 동생 요르그 드헤셔교수가 영상인사를 했으며 기장 총무 이훈삼목사의 인사와 이광일목사의 축도로 1부 예배를 마쳤다. 2부 사회는 오용식목사의 사회로 박종열, 김현수, 김규복,송병구목사,김봉준 화백,노종숙 언님, 정찬영집사(저녁대접),한운석(튜빙겐 펠로우)에 이어 독일서 호프만 리히터목사의 인사와 채수일목사의 기도로 마무리하였다.    

   
                                                    * 설교하는 노창식목사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 

1980~1990년대 한국에서 빈민 선교로 시작하여 민중교회 사역의 현장에서 함께한 도여수 선교사는 은퇴후 72세로 독일에서 별세햇다. 평화 운동에도 함께한 그는 선교사로 은퇴한 후에도 네 차례 북한을 방문하는 등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한 사랑을 이어갔다. 그는 EMS 동아시아협력국장(2001~2016)과 독일동아시아선교회(DOAM) 의장(2017~2020)을 지냈는 데 NCCK와 기장총회는 제100회 총회시 그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그는 외국인 치고는 단신에 항상 웃는 얼굴로 늘 한국어로 인사하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으로 불린다. 1987년 내한해 하계동에서 빈민운동과 인연을 맺은 이래 근 30년 가까이 사회선교 현장에서 함께 했다. 한국에 많은 선교사들이 오고갔지만 이 분만큼 많은 분들의 기억에 남는 분은 일찍이 없었다. KSCF의 부광석(브라언 스타인)도 한 때 기독학생운동을 위하여 복무했지만 도여수 만큼은 오래있지는 못했다.

1989년 동서독이 독일을 할 때 그는 한국에 있었는 데 독일인이었지만 영문을 알 수없었는 데 여기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에서 한반도 통일 역시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 평화통일운동에도 참여하게 되어 2001년 EMS 동아시아협력국장을 맡아 남북교회 교류에 항상 현장에 있었다. 건강 문제로 조기 은퇴를 하면서도 “돈 받고 하는 일은 끝났지만 이제 자유롭게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내가 도울 길을 찾고 싶다”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와 가까이 지낸 분들이 많은 데 작년에 별세 소식을 접하고 남긴 추모 글들을 소개한다.

   
 

유영경목사(독일유학, 전주 신흥대학 교목실)

런 루츠 드레셔 (한국이름 -도여수) 선교사님 별세 소식에 참 마음이 아픕니다. 곧 독일가서 반갑게 만나보려고 얼마나 가슴설레었는데 …루츠 선교사님, 친구같은 사랑하는 형님, 왜 그리 훌쩍 빨리 가셨는지요? 지금 다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이 험난한데.. 한국을 무척 사랑했던 소중한 친구 한 분을 먼저 보내는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제 고 조지송 목사님 (영등포산업선교회 설립 목회자, 노동자들의 벗) 5주기 추모예배와 그 분의 평전 영문판 출간기념회에서 영상 축사 메시지가 루츠 님 생에 마지막 공식 작별인사가 되어,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면서 함께 기리는 시간이 되고 말았군요.

한국을, 한반도 우리 민족을 누구보다 사랑하셨던 루츠 선교사님, 오랫동안 한국과 독일에서 또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이 땅에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 민중을 위해 뜨거운 사랑과 열정으로 일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님의 사랑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먼저 가신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의 어려운 자들의 친구였던 *게르하르트 프리츠 목사님과 *파울 슈나이스 목사님과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히 안식하소서. 하늘의 평화 누리소서.

   
 

정종훈교수(연세대 전 교목실장)
루츠 드레셔 선교사님(나에게는 형님 같은 분)께서 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니 마음이 먹먹합니다. 실향민들의 북한에 두고 온 재산포기 관련해서 제안한 나의 논문이 캐나다 연합교회의 총회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고 기뻐하시며, 축하의 글을 보내주신 것이 바로 지난달 12월 초였는데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따뜻했던 루츠 형님의 온기가 지금도 느껴집니다. 독일 교회의 날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국교회의 인사들을 접촉하며 에큐메니칼한 만남과 협력을 주선하신 환대의 여운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나 역시 2005년 1월 형님의 제안과 중재로 독일에 6주간 초청을 받아 독일교회와 독일 통일의 현장을 방문하고, 통일 과정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한반도 평화통일운동 차원에서 실향민들의 재산포기와 그 윤리적 의미를 담은 논문을 한국어와 독일어로 써서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루츠 형님, 나는 형님의 사랑과 관심만 받고, 제대로 보은 한 바가 없어서 죄송하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질병의 고통이 없고, 사랑과 은총만 넘쳐나는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십시오. 형님의 아름다운 인생을 간직하며 기억하겠습니다. 샬롬입니다.

   
                                           * 독일 프라이브르그에 있는 그의 묘비(금주섭박사 방문 제공) 

                                    NCCK 추모사

“복음선교연대(EMS) 선교협력동역자 도여수 루츠 드레셔(Lutz Drescher) 선생을 애도합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복음선교연대(EMS) 선교협력동역자(1987-1994) 전 동아시아 국장(2001-2016), 독일동아시아선교회(DOAM) 명예의장이신(2017-2020) 도여수 루츠 드레셔 선생의 소천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당신과 여정을 함께 해 온 전 세계 에큐메니칼 공동체 동역자들과 더불어 슬픔과 위로를 나눕니다.
우리는 도여수 선생께서 보여주신 한반도 화해와 평화와 민주화를 향한 열정과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살아있는 국제 연대의 표징으로 당신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1987년 군부독재의 서슬퍼런 칼날이 민중의 삶과 정신을 지배하려던 시절, 노원구 하계동 영은교회가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매일 아침 주민들과 하루 이틀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를 함께 마시며 ‘꿈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가난한 삶을 이해하고자 했던 당신의 곱고 순박한 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그는 늘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한반도 평화와 화해의 길이 다가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루츠 선생은 1995년 독일로 돌아간 이후 2001년부터 복음선교연대(EMS) 동아시아 협력국장으로 약 15년 여간 일하며 세계 에큐메니칼 공동체와 함께 네 차례나 되는 방북을 조직해왔고, 2006년 ‘한반도 평화와 통일∙개발협력을 위한 에큐메니칼 포럼’(Ecumenical Forum for Peace and Reunification and Development, 이하 EFK)이 공식 출범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당하고 있는 남과 북 주민들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가며 한반도에 대한 희망과 꿈, 화해와 평화 공존의 국제적 연대의 길을 열고자 헌신해 오셨습니다. EFK 포럼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본 회를 주축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국제 네트워크’로서 현재까지도 전 세계의 주요한 국제 파트너들과 함께 계속해서 맡은 바 사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온 몸으로 고백하며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과의 연대가 곧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는 믿음으로, 또한 억압에 저항하며 자유를 위해 행동하는 곳, 인간의 존엄과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곳에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굳은 믿음으로, 그는 고난당하는 이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지난 40여 년간의 세월을 한국의 친구들과 함께해 오셨습니다. 한반도를 향한 당신의 맑고 고운 마음 그리고 순박한 삶의 여정은 우리 모두에게 오랜 시간 기억될 것입니다.

한국을 사랑한 도여수 선생님!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우리도 늘 깨어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향한 새로운 꿈을 꾸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그립습니다. 우리 남과 북의 한반도 에큐메니칼 식구들 모두 당신을 몹시도 사랑합니다. 참 고맙습니다. 본 회는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전통과 역사 속에서 함께 순례의 길을 걷는 모든 신앙의 벗들과 다시 한 번 도여수 선생의 삶을 깊이 기리며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 5:9)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마 22:39)


              2024년 1월 22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종생 목사

   
 

장장원목사(오산 다솜교회)
1980년대 독일교회(EMS)에서 한국민중교회 바닥 현장 삼양동 기장교회에서 민중들과 함께 살아가며 민중들과 친구가 되었다. 독일민중교회와 한국민중교회의 연대와 일치를 위한 양국 10교회 격년 교환방문사업을 비롯하여 민중교회 목회자 선교훈련지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선지적 활동 등 초기 민중교회 기초를 만드는 일에 함깨하며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였다. 말년에는 한국. 독일. 인도. 아프리카 교회연대,교류사업을 위해 총무역할을 하며 죽기까지 헌신하였다.

오산다솜교회를 방문하여 설교를 하였고 프라사다 라오 남인도 선교사와 오영미 목사 민중교회 여성목회자, 루츠 드레셔 독일선교사가 파트너쉽을 가지고 독일 초청 방문 프로그렘을 진행하였다. 지난해2024년 1월20일 오영미목사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경을 해메일때 그는 소천하여 추모식에 참가 할 수 없었다. 그를 추모하며 영원한 하느님나라로의 부활과 동역자로 빛으로 발하기를 기원한다.

   
 

홍주민박사(독일 하이델베르크 사회봉사학 박사)
루츠 드레셔는 나와 독일에서 디아코니아학을 같이 공부한 동학이다. 한국의 민중교회에서 80년대에 바닥공동체생활을 한바있고 한국의 지난한 역사의 협곡을 지나온 분이다. 독일로 귀환후 나와 하이델버르크대학에서 디아코니아학, 개신교사회실천학과정을 함께 공부하신 루츠 디아콘님은 동아시아선교회의 중요 직무를 맡아 독일개신교의 동아시아 선교에 중추를 담당하였다. 특히 북한과의 긴밀한 소통의 한 축도 담당하였다. 독일의 개신교 교회와 사회실천파트인 <디아코니아>는 평화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 관련된 장문의 기사가 2021년 3월 27일 독일의 일간지인 융에벨트 신문에 나왔다. ` 여기에 그 번역 요약문을 게제한다:

<독일 일간지 융에벨트 기사 번역 요약문-루츠 드레셔 인터뷰>
다음은 1947년부터 간행된 독일의 일간지인 “융에 벨트지”는 진보적 매체이다.(루츠 드레셔는 올해 나이 68세로 서남독선교회의 동아시아 담당자로 직무를 수행하다가 독일 동아시아선교회의 대표로 직무를 수행하다가 건강상 직무에서 물러나 명예대표로 봉사하고 있다)

– 어떻게 해서 종교교육과 사회교육을 전공한 분이 한국을 가게 되었나요?
1981년 교회의 디아콘(독일에는 개신교안의 직제로 목사와 디아콘이 있는데, 디아콘은 이웃사랑실천을 하는 전문 섬김사역자로 디아코니아학과 사회교육학 등 전문 과정을 마친후 실천현장에서 일한다. 약 1만여명의 디아콘들이 독일에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디아코니아대학에서 2년과정을 2017년이래 진행하고 있다)으로 일을 시작하였을 때 한국인 목사님을 통해 한국의 광주민중항쟁 소식을 접하게 되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 1986년 서남독 선교회가 한국에 선교동역자로 갈 의향을 물었고 즉시 그 제안에 응했습니다. 당시 관계하고 있던 한국에 있는 목사들과 실무자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으로 인해 수감되기도 하였습니다.

– 군사독재의 상황과 정치적 격변기에 어떠한 경험을 하였습니까?
1987년 2월 23일, 한국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최류가스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얼마후 대학생 박종철의 의문사를 폭로한 의사의 증언으로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고 시위중 최류탄에 맞아 죽은 이한열 학생의 사건으로 6월 10일 거대한 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987년 7월 9일에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기화로 있었던 160만여명의 군중 모임은 독재를 넘어선 하나의 축제와도 같았습니다. 한국생활 초기의 민주주의 학습과정과 언어학습과정이후 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빈민가에서 한국의 민중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어 과정을 마치고 나는 서울의 북쪽에 있는 하계동에 있는 한 작은 교회에서 직무를 맡아 생활을 하였는데, 그 마을 이름은 “돼지마을”이었습니다. 4천여명의 사람들이 빈민촌을 이루어 살아가던 그 지역에서 다양한 민중경험을 하엿습니다. 그 마을은 나에게 새로운 고향이 되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정말 사람냄새가나는 삶의 경험이었습니다. 이 작은교회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생겨난 민중교회에 속한 교회였습니다. 민중은 소외당하고 배제당하고 정치적으로 배척당하는 사람인데, 이러한 민중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하에 생겨난 독립운동과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 북한에도 여러번 다녀오셨다는데 어떻게 가능했었는지요?
9년간(1987-1995) 저는 남한에서 지내는 동안 북한 방문을 포기해야했습니다. 만약 북한을 방문했다면 남한에서의 직무가 힘들었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1989년 처음으로 북한에서 온 조선그리스도교 연맹 대표단을 만났었습니다. 북한에 그리스도인? 사람들이 묻습니다. 북한에는 두 개의 공식적인 교회 연맹이 있습니다. 그 연맹안에는 13,000여명이 속해있는데, 평양에 두 개의 교회가 있고 500개의 가정교회가 있습니다. 한국역사에서 그리스도인과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축으로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인데, 김일성의 모친쪽은 기독교 가문이라는 점입니다. 그의 모친 강반석(반석은 바위라는 의미)은 칠골교회 명예직 직분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1988년 처음 지어진 봉수교회에 이어 김일성은 1992년에 칠골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교회는 변두리에 숨겨서 지은 것이 아니라 신도시 한복판에 지었습니다. 나는 2001년 서남독선교회의 대표자격으로 북한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하였고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직무를 수행하는 기간동안 4번 방문하였습니다.

– 분단된 남한과 북한의 공동의 경험지평과 38선을 두고 갈라진 차이점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요?
나는 네 번 북한을 방문하면서 독일에사는 남한 사람들과 같이 동반하였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경험을 하였지요. 그런데 우리가 두 개의 분단된 땅을 생각하며 종종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공동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의 본래 종교는 샤머니즘입니다. 그 종교의 현상으로 감정과 엑스타시가 큰 역할을 합니다. 흥미있는 것은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북한에서 김일성 가계가 등장할 때와 남한의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의 현상과 흡사합니다. 다른 하나의 북한 과 남한의 커다란 전통은 유교인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묘지석에 위대한 수령동지 김일성은 우리와 함께 영존한다고 서술되어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조상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공동의 뿌리가 있지만 지난 75년간의 서로 양립된 발전 과정은 3만여명의 븍한의 난민들은 남쪽에서 이질감을 느낄정도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 75년간 분단된 한국이 통일에 대한 노력을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요?
1950-1953의 한국전쟁은 정말로 끔찍한 상흔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는 군사적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아직도 존재하고 과거에 인권침해의 치명적인 결과를 양산했습니다. 냉전의 희생양으로 아직도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이 이주해서 외국에 살고 있습니다. 북한은 한국전쟁으로 미국의 공습으로 초토화된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북한 사람들에게 미국인은 치명적인 상으로 각인되어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도 그러한 영향에서 진행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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