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신앙칼럼

                                   6월에 생각나는 사람

   
 

제70회 현충일을 이틀 앞둔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오후는 고즈넉하다. 병아리 같은 유치원 어린이들의 경쾌한 재잘거림을 삼켜버린 숲으로부터, 오색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와 짝짓기에 몰두하고 있는 까투리와 장끼의 정겨운 푸득거림이 이따금 정적을 가를 뿐이다.

6월 신록의 테르펜 향 그윽한 현충문을 지나 똑바로 걸어가면 장엄하게 우뚝 선 탑 하나를 만난다. ‘현충탑.’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충의와 위훈을 기리고자 세워졌다는 탑은, 외부로 표출되는 장엄함을 압도할 비감함을 기단으로부터 뿜어내고 있다. 

지하 공간에 6·25전쟁 당시 전사한 분 중 시신을 찾지 못한 10만3000여 호국용사들의 위패와, 시신은 찾았으나 신원을 알 수 없는 5880여 무명용사 유해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리라.

현충탑에 분향하고 다시 현충문으로 돌아 나와 왼쪽으로 독립유공자 묘역 쪽으로 가다 보면 공군묘역이 나온다. 그곳엔 내가 강원도 원주 비행장(현 제8전투비행단)에서 복무했던 1977년 봄, 횡성 지구에서 순직한 고(故) 김태수 중위가 잠들어 있다. 내가 이따금 서울현충원을 찾는 이유다. 

   
 

신학대학교 출신으로 공군 학사장교 1기수 선배인 그는, 나 같은 무지렁이와는 차원이 다른 순백의 장교였다. 주초(酒草)는 입에 댄 적도 없고, 그 흔한 여자 친구 한 명 없는 숙맥이었다. 행정장교였던 그는 하사관(현 부사관)과 사병들에게도 한없이 인자한 상사였다. 도대체 권위라곤 부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순직하게 된 원인 역시 거절할 줄 모르는 그의 모질지 못한 성품 때문이었다.

당시 원주 비행장은 성남 제15혼성비행단으로부터 독립 전개하여 육군이 사용하던 항공대를 개조, 확장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당연히 연일 인근의 산간이나 하천 등으로 암석과 골재 등을 채취하는 작업이 줄을 이었고, 그 임무는 고스란히 소속 병력들의 몫이었다.

사고 당일, 채취 차량의 예정 선임탑승자는 기혼에 아이가 둘 달린 대위였다. 그런데 집안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대타를 찾던 중 김 중위가 뇌리에 떠올랐고, 예상대로 그는 차량 선탑자를 자임하게 되었다.

사달은 암석 및 골재 채취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일어났다. 김 중위 몰래 고참 사병 몇이 인근 구멍가게에서 구입한 주류로 음주한 것 까지는 그렇다 치고 정작 말년 병장까지 음주에 가세했고, 채취한 암석‧골재와 함께 병력을 태우고 음주운전을 하던 운전병이 트럭을 교량 밑으로 처박는 바람에 김 중위를 포함한 대부분의 병력이 순직하는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사고가 있기 얼마 전, 나는 김 중위로부터 정말로 황당한 고민을 청취해야 했다. 얼마 전 여친이 생겨 데이트를 하던 중에 얼떨결에 키스를 했는데, 그게 참으로 양심에 걸려 그 뒤론 여친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혈기 방장한 청년 장교라면 여친을 찜하기 위해서라도 입술부터 훔치는 게 상례(?)였던 그 시절, 그걸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그를 “국민학생이냐?” 며 마구 놀려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전역 후엔 목회의 길을 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 아니 매사에 이미 목회자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던 그. 그런데 사역을 위해 귀하게 쓰일 그를 하나님은 뭐가 급해서 그리 빨리 데려가신 걸까? 신앙 내공이라곤 미션 고교를 나온 것 밖에 없던 나였지만, 그땐 “하나님이 그를 너무 사랑해 이 흉악한 세상으로 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일찍 데려간 거” 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선 도저히 그의 황망한 죽음을 해석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소천(召天)한 지도 2년 있으면 꼭 반세기가 된다. 묘소에 꽃다발을 놓고 참배를 끝낸 후 다시 현충문 쪽으로 나오다 보니, 엄마가 끄는 스트롤러 위에서 “까르르” 유아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퍼져 온다. 태수 형도 살아 있었으면 최소 저 정도 되는 손주를 봤을 텐테.

                                       현충원을 나서면서 잠시 사유(思惟)에 빠져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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